가슴 네트워크와 경향신문이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을 만든 뮤지션들을 만납니다.
알다시피 신중현은 '한국 록의 대부'다. 하지만 이런 호칭은 90년대 초반 그를 재평가할 때는 유용했지만 지금은 진부하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적절해 보이지도 않는다. 특히 음악사적으로 그를 평가한다면 말이다. 이는 얼마 전 복각된 '에드훠(Add 4) 1집 [빗속의 여인](1964/엘케엘레코드)'을 들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 음반은 지금부터 44년 전인 1964년도에 나왔는데도 '앨범' 개념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5년 뒤인 1969년에 그가 덩키스 1집을 발표하기 전까지도 국내에는 특별하게 앨범 개념으로 나온 음반이 없어 보인다. 적어도 '앨범'을 뮤지션의 '창작 작품집'으로 규정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한국대중음악사에서 보면 60년대에 거의 유일하게 '앨범' 작업을 한 분이 신중현이고, 이런 점을 보더라도 '앨범아티스트로서'는 한국에서 1호인 것 같은데, 여태까지 이런 부분에 대한 평가가 매우 미흡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에게 수식어처럼 따라 붙었던 '한국록의 대부'라는 부차적인 호칭은 이제 그만 쓰이기를 바란다.
최근에 신중현의 음악을 10장, 101곡으로 정리한 [앤솔로지] 박스 셋이 나왔다. 이는 단순하게 그가 발표한 히트곡들 중심으로 101곡을 모았다기보다 '히키신' 앨범부터 시작해서 최근의 [도시학], [안착]까지 '앨범' 단위로 '연도별' 정리를 해서 박스 셋으로 묶어놓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50년대 말, 60년대부터 시작해서 발표한 노래들을 '앨범' 단위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신중현이기에 이러한 작업이 가능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 음악평론가의 비평 대상이 '앨범'과 '앨범을 발표한 뮤지션'임을 상기한다면 신중현은 한국에서 '음악비평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흐트러지지 않은 음악성, 한국 대중 음악의 역사 '신중현'
박준흠 : 최근에 선생의 음악을 10장, 101곡으로 정리한 [앤솔로지] 앨범이 드디어 나왔다. 어떻게 보면 50년대 말, 60년대부터 시작해서 발표한 노래들을 '앨범' 단위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선생이기에 이러한 작업이 가능하지 않나 싶다.
신중현 : 나도 동감한다. 그런 목적으로 음악을 해왔다. 내가 스스로 뭐 유일하다, 그리 말하는 건 좀 그렇지만 1958년도 '히키신'부터 죽 음반을 발표하면서 이건 '하나의 역사'가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했었다. 중간에 활동 금지 기간을 빼고는 계속 지속적으로 음악 생활을 했기 때문에, 외길인생으로 음악을 판 거다. 그게 오늘날의 이런 음반을 만들 수 있게 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 중간에 음악을 관뒀다든가, 활동금지 기간에 다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가졌다든가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오질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공백 기간에도 계속 음악 밖에 생각한 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까 해금된 뒤에도 계속 이어나갔던 저력이 있었던 거고, 그래서 사실 이 음반은 굉장히 의미가 깊다. 여기 보면 1975년도부터 1980년도 이전까지는 곡이 없다. 그 후부터 곡이 나온다. 그것도 우리나라 대중 음악사에서 하나의 기록이고, 역사다. 내가 이런 걸 좀 주장하고 싶다.
박준흠 : 곡 선곡과 리마스터링 작업을 직접 한 것인가?
신중현 : 그렇다. 여기에 수록된 곡들은 일반에 나온 것과는 또 다르다. 예전에는 녹음 당시 내가 항상 음악성을 주장하다 보니까 제작자들하고 부딪히게 되더라. 곡은 좋은데 길고 어렵고 하니까 '대중들이 못 알아듣는다, 조금 대중적으로 만들라'는 주문이었다. 그래서 거의 두 번씩 녹음했다. 수록 곡들을 들어보면, 이건 오리지널이다. 이건 대중들이 별로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내가 음악적으로 추구했던 그런 작품들이라 가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여간 시중에 나온 음반들은 상업성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내가 들어도 좀 싫고 그렇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것만 넣었기 때문에 기분이 더 좋다.
박준흠 : (웃음) 이게 흔히 말해서 영화에서 '감독판 버전'인 셈인가?
신중현 : 그렇다. 내가 맨 처음에 의도했던 것이 결국 나올 때 보면 다르게 나오고. 그런 현상이 우리가 사는 세계 같다. 항상 부딪히고.
박준흠 : 그럼, 신중현과 엽전들 1집 수록곡 같은 경우도 초판곡이 들어간 것인가? 김호식(드럼) 씨가 참여한 버전인가?
신중현 : 그렇다.
박준흠 : 엽전들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얘긴데, 원래 '덩키스' 드러머였던 김호식씨가 참여한 초판이 있었고, 권용남씨가 참여한 재판이 있다. 초판은 거의 시중에 안 풀리고 다시 재판으로 대체되어서, 지금 알려져 있는 노래들은 거의 재판곡이지 않나? 그게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된 것인가?
신중현 : 여기 수록된 엽전들 1집 노래들은 김호식이 친 게 들어있는데, 김호식은 군대 때문에 재판이 나올 때는 못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 권용남이 했는데 그 때는 좀 날렸다. 그렇게 두 가지가 알려지고 있는데, 이건 내가 작품을 쓸 때 생각했던 그런 이미지가 그대로 담겨져 있기 때문에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은 음악성이라고 주장을 한다.
박준흠 : 혹시, 이번 [앤솔로지] 선곡 기준은 정확하게 뭐라고 얘기할 수 있는가?
신중현 : 기준이라면... 내가 여태까지 평생 했던 거니까 나를 알리는, 대표할 수 있는 곡이다. 나에 대한 평가가 거기서 나오지 않겠나? 그 다음에는 시대성이다. 같은 곡도 중복이 된 게 있는데, 편곡이 다르고, 시대적으로 그걸 반영을 하는 거다. 그 시대의 음악성이랄까. 나의 변화, 여러 가지 음악성의 변화, 이런 것까지 포함시켜서 여러 각도에서 나를 알 수 있는 그런 음반이 될 거라 본다.
박준흠 : 예전 연주를 이렇게 정리를 하면서 오리지널 버전으로 다시 들으니 어떤가?
신중현 : 그게 참 중요한 거다. '그때 당시에 과연 저렇게 했었구나', 그런 것도 있고. '사람이 시대적으로 변하는 구나...' 지금 하라고 그러면 똑같이 못하지.(웃음) 그러니깐 가치가 있는 거다. 그러한 사운드를 낼 수 있는 건 그때 밖에 안 된다. 그것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그것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 하나의 가치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이미지나 어떤 감각이나 이런 것들이 순수했던 시절이 나한테도 있었구나', '내가 그때 그런 생각으로 할 수 있는 힘이 있었구나...' 하여간 여러 가지로 이 음반은 굉장히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박준흠 : [앤솔로지] 101곡의 수록곡들을 보니까, 어쨌든 좀 특이한 점이 여자가수가 부른 노래가 거의 50곡 가까이 된다. 선생이 보기에 선생의 노래를 가장 잘 소화했던 여자가수는 누구였던 것 같나?
신중현 : 다 나름의 매력이 있다. 가수란게 그렇잖나. 가수는 노래를 한다 그러면, 모든 게 죽기 아니면 살기다. 내가 강행을 하고 그런 것도 있지만, 잘 불렀던 못 불렀던 굉장히 성의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쁘다. 소리가 예쁘고 노래가 예쁘고... 매끄럽게 불러서 치장을 한 것도 아니고, 가수들이 내 요구를 따르다보니까 매끄러운 건 좀 없는데, 솔직한 면으로 가니까 좀 못하고 틀리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그런지, 그 자체가 듣기 좋더라. 내 특성을 여자가수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 같다.
박준흠 : 특별히 여자가수들에게 곡을 더 많이 주게 된 계기가 있는 건가?
신중현 : 여자 가수들이 많이 찾아왔다. 가수 지망생들이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많았다. 남자도 많이 있었지만 거의 프로들이었고. 그러니까 테크닉이 좋아야 되는 건데, 대부분 소속이 되어 있고. 그룹의 싱어들은 대부분 남자들이 많다보니까 그네들은 감히 들어오려고 마음을 안 먹었다. 여자가수는 지망생이 워낙에 많았고, 순차적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너 끝나면 쟤다', 뭐 이런 걸 스케줄 상으로 만들어 놓고 작업을 하다보니까, 결국엔 여자가수들이랑 많이 작업하게 되었다. 또 TV나 매스컴에서 여자가수들을 많이 픽업했다.
박준흠 : 혹시 선생이 만든 노래들이 여성스럽다고 할까, 그런 측면이 있는 건 아닌지?
신중현 : 멜로디는 여성적인데, 주는 이미지는 남성적이다. 사실 전부 남성의 고독이나 쓰라린 마음을 그렸기 때문에, 가사나 이런 게 남자 노래다. '봄비'라든가 여러 노래들을 보면. 그런데 멜로디 상으로 보면 멜로디 선율이 예쁘면서도 강한 걸 많이 집어넣고 굴곡이 많고 하니까, 전달하는 데도 메시지가 강하다. 대신 여자가 부르면 부드럽게 들릴 수가 있으니까, 남성적인 노랜데 여자가 부르게 되는 경향이 많다. 나는 그런 걸 좋아하고. '잊어야 한다면', '떠나야 할 그 사람', 이런 것들이 전부 남자의 가사다. '미련'이나 '석양'도 그렇고. 그 대신 리메이크가 잘 된다. 여자가 부르든 남자가 부르든 다 되니까.
박준흠 : 선생이 노래를 준 여자가수들 중에서는 김완선 같은 경우가 가장 독특했었는데?
신중현 : 그땐 내가 좀 침체된 상태였다. 80년대 말인가, 밴드도 다 없어지고 해서 혼자의 길을 찾고 있을 무렵에 김완선 쪽에서 곡을 부탁했다. 댄스뮤직이라는 게 내가 모르는 게 아닌데, 워낙 음악성을 추구하다보니까 댄스뮤직도 예술적으로 돼버렸다. 내가 활동을 못할 때에 디스코풍이 불었다. 그 음악(디스코)은 춤을 추기 위한 음악이라 리듬 자체도 바뀌어 버렸다.
록에서는 리듬을 굉장히 중요시 여기고, 드럼 치는 사람이 테크닉을 쓰게끔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없어졌다. 일률적으로 박자만 쳐주는 식으로, 군악대들 행진하는 식으로 발맞추는 음악이 된 거다. 그런 식으로 변화가 오는 바람에 결국은 컴퓨터가 더 잘하게 된 거다. 드럼을 테크닉 면으로 하자면 그건 컴퓨터가 할 수가 없다. 근데 발 맞추는 것은 (일률적으로 맞추는 것은) 컴퓨터가 더 잘하는 거다. 그러다보니까 드러머들이 떨려나는 거고, 앞서 말한 밴드들이 할 일들이 없는 거다. 컴퓨터가 다 해버리니까. 그 바람에 음악계가 전멸이 돼버리고, 음악하는 사람들이 갈 데가 없어진 거다. 거기에는 인간적인 음악이 없어진 거고, 내가 그걸 싫어하는 거다. 그러한 면에서는 우리를, 음악인들을 죽였으니까.
그래서 김완선이 왔을 때, 연구를 많이 했다. 보는 순간에 댄스 뮤직을 라이브로 할 수 있게끔 내가 라이브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만든 게 '리듬속의 그 춤을'이다. 댄스 뮤직이라도 록이 들어가면서 감각적, 예술적인 면이 있어야 한다. 컴퓨터로 아무 정신없이, 감각없이 그냥 맞추는 건 아니다, 그랬는데 별로 탐탁하게 생각을 안 했다. 그냥 디스코 같이 나오는 게 아니라 댄스뮤직인데, 감각적인 게 들어가 있으니까 별로 안 좋아했다. 나는 좋아한 곡인데, '시대가 그런 시대라 안 받아주는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마치 감각적인 세계가 사라져가는 것처럼. 사실 굉장히 슬펐고, 마음이 안 좋았다.
박준흠 : 김완선은 그 노래를 나중에 리메이크해서 8집에 다시 실었다. 더 록킹하게 만들면서 일렉트로닉적인 사운드도 넣고 했다. 그 노래 들으면서 "아, 이게 원곡 자체가 록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신중현 : 내가 자부하는 건 아니지만, 리메이크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런 식의 작곡법을 배웠기 때문에 계속 세대가 변하더라도 거기에 맞게끔 얼마든지 리메이크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
박준흠 : '100대 명반'에도 선정된 1974년에 발표한 신중현과 엽전들 1집은 비평 쪽에서 가장 높게 평가받는 음반 중 하나인데, 그 음반의 음악적인 콘셉은 어떤 거였나?
신중현 : '내가 한국적인 록이다' 이걸 부르짖던 시절이다. 어쨌든 록이라는 자체는 세계 공통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나라마다 특성이 있다. 자기 나름의 국적을 갖고 하는 음악들이기 때문에, 토속적인 가락을 현대화시켜서 록이라는 장르에 올려놓고 공감대를 만드는 건데... 나도 그런 작업을 해야 된다는 생각이 압박이었다. 록이라는 음악 자체가 사실 음악적으로 따지면 코드가 없다. 멜로디 음악이다. 가락 음악이 되는 거다. 가락은 우리 가락이 있고, 장단도 우리 장단이 있기 때문에 그걸 현대화시키겠다, 그런 의도였다. 그래서 6개월 동안 로얄 호텔에다 숙소를 정해놓고 멤버들을 합숙시키면서 작곡하는 즉시 연습하면서 곡을 써나갔다. 포인트는 '한국적인 록'이다. 또한 심플해야 된다. 음악이라는 게 뭐 복잡해야 되고... 그런 건 철학이나 그런 거지, 음악은 어디까지나 쉬워야 되고, 대중과 가깝게 있어야 된다. 대신에 폭이 있어야 되고, 깊이가 있어야 된다는 건데... 그런 거 저런 거 많이 감안하고 연구했다. 잠을 자면서도 생각하고... 지금 하라면 못한다. 그때니까 했지.(웃음)
박준흠 : 엽전들 1집이 나오기 전에는 어떻게 보면 어려운 음악들도 했었다. 비공식적으로 나온 음반들을 보면, '거짓말이야'를 거의 10분씩 넘게 연주하는 버전도 있고... 그런데 한동안 그런 쪽으로 몰입을 했다가 엽전들 만들 당시에 생각이 달라진 건가?
신중현 : 발전을 한거다. 달라진 것이라기보다는 테마를 바꾼 거니까. 버리고 그런 건 아니다. 길게 하는 것도 중요하고, 음악적으로 복잡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고, 또 한 쪽으론 쉬운 쪽으로 가는 것도 중요한 거니까, 하나도 내가 버릴 건 없다고 생각했다.
박준흠 : 엽전들 1집 수록곡 '미인'이 전 국민의 히트가요가 되서 영화도 만들어졌고, 주인공으로 출연도 했다. 멤버들 세 명도 다 출연하고.
신중현 : 대본도 그렇고, 내 맘에 안 들었다. 감독하고 엄청 싸웠다. 그런데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데 뭐라 그러겠나. 그때 상황에서는 그렇게 찍어야 되고, 좀 저질로 만들어야 잘 팔린대나... 아, 그럼 대한민국 사람들 다 저질이냐고 말이야. 또 지방에서는 뭘 또 해야 된다고 하더라. 지방에서 미리 돈을 받는대나. 그래야 또 제작이 된다고. 하여간에, 아휴, 얘기하기도 싫다. 그 영화 진짜 보기도 싫다.
박준흠 : 엽전들 2집에는 다소 건전가요 같은 노래들이 수록이 되어있어 의아했다.
신중현 : 엽전들 1집을 금지시키겠다고 하는 바람에 그럼 뭘 해야 되느냐 했더니, "건전가요를 만들라"고 했다. 그게 박정권의 아주 치명적인 문화 탄압이었다. 그래서 "그럼 내가 그거 못 만드는 사람 아니다" 그러고 만든 거다. 건전가요 록이지... 난 록 뮤지션이니까 건전가요를 록 스타일로 만들겠다, 해가지고 심의 넣었더니 넣자마자 전 곡이 다 금지되었다. 또 방송위원회 갔더니 거기도 전부 금지였다. 그래서 따지러 갔다. 그 때 방송위원회가 광화문에 있었는데... 여기 가사로 봐서 하나도 금지시킬 게 없는데 왜 금지냐 했더니, 자기들도 모른다, 그냥 금지시키라고 해서 금지라고. 그런 나라가 이 나라다. 그리고 얘기할 게 없다. 거기서 무슨 얘길 하겠나. 그냥 나오는 수밖에. 그 땐 정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박준흠 : 선생은 이전 인터뷰에서 "항상 앞서나간다는 평을 받았다"라는 식으로 얘기하곤 했다. 그런 얘기를 서슴없이 하는 것을 보면 음악적인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다.
신중현 : 그렇다. 첫째, 음악이라는 거 자체의 근본은 예술이다. 음악, 미술, 문학 이런 거는 예술성이 없으면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 철칙이다. 그러니까 그만치 우리가 뭘 하더라도, (세대가 아무리 변하고 뭐가 아무리 들어오더라도) 그러한 감각을 잊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문학도 글만 쓴다고 문학이 되겠나. 어떤 예술성이 없다면 그건 오래가질 못하는 거다. 지금 세대는 그런 데에서 너무 멀어지고, 물질만능이고, 빨리 돈도 벌어야 되고, 빨리 이름도 나야 되고 이러다보니까, 대중한테 쉽게 '쇼'적으로 얼버무려서 막 정신을 빼가지고 돈을 받아내겠다는 개념들이 박힌 시대가 된 거다. 그러다보니 진정한 음악이 갖고 있는 예술성이 사라져가는 거다. 결국 듣는 사람도 레벨이 있는 고급문화를 못 느끼고, 그런 감각을 잃어버리는 거다. 그게 오늘날의 음반시장에서부터 모든 게(예술) 침체되는 이유다.
박준흠 : 선생이 좀 전에 얘기한 대중음악의 예술성과 관련해서 몇 년 전 '리얼뮤직'이라는 얘길 했는데, 그게 같은 맥락의 얘기인가?
신중현 : 그렇다. 리얼뮤직, 진정한 음악이 필요하다. 마이크 하나 놓고 녹음하는 그 시절부터 죽 들어가 있는 건데, 거의가 라이브다. 물론 80년대 이후부터는 더빙을 하고 멀티시대가 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서 작품이 나왔지만, 거짓이 없는 음악이 필요한 거다. 진정한 음악, 그것은 동시에 녹음하는 모노 사운드가 정감이 있다. 인간적이고, 또 들어도 싫증이 안 나고. 그런데 원인을 알아보니까, 반주를 넣고 노래를 나중에 더빙을 하게 되면 그 사이에 시간이라는 게 흐르기 때문에 공간이 바뀌는 거다. 시간 타이밍이 바뀌기 때문에 아무리 잘해도 매칭이 안 된다. 그래서 그건 작품이 아니라는 거다. 동시에 녹음해야만이 그 시간 내에서, 그 순간에, 그 분위기를 같이 흡수해서 예술성이 있고 살아있는 음악이 되는 거다. 그런 걸 느끼다보니 오늘날에 와서는 음악다운 음악을 들어볼 수가 없는 것이다. 동시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다시 라이브 시대로 가야 된다. 리얼뮤직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진정한 음악을 해야 된다고 하는 거다. 안 그러면 음악은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박준흠 : 일각에선 '리얼뮤직'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냐면, 라이브콘서트에서 MR에 립씽크 안 하고 생음악으로 연주하는 걸 보통 리얼뮤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선생이 얘기하는 것은 강조점이 다른 것 같다.
신중현 : 어쨌든 그 순간의 공간을 같이 담고 있어야지만 그 작품이 살아있는 거다. 그 시간대에 지구가 돌고 있잖나. 타이밍이 바뀌니까 발란스가 안 맞는 거고, 구성이 안 되는 거다. 그 발란스라는 게 꼭 레프트, 라이트 비중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여러 가지 공기, 시간 뭐 이런 것들이 다 발란스에 포함된다. 사람이라는 건 정신적인 세계가 있고, 감각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예감도 있을 거고... 일이 되고 안 되는 것도 기분으로 느낄 수도 있는 거고. 이런 것이 인간인데, 그런 걸 빼버리고 없애버리면 언발란스가 되기 때문에 완벽하지가 않다. 그러면 아무리 잘해도 대중한테 파고 들어가서 매칭이 되기가 어렵다,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이런 극단적인 얘길 하는 거다. 내가.(웃음)
박준흠 : 그럼 선생은 아무리 음반이라고 하더라도 뮤지션이 있고 그 음반을 구매했던 대중이 있으면 뭔가 같은 공간에서 예술의 일관된 기가 전파되는, 그런 걸 추구하는 건가?
신중현 : 그것이 완벽한 거다. 그걸 떠나서는 아무리 잘해도 리얼뮤직이 될 수 없다. 너무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하는 것 같은데...(웃음)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박준흠 : 항상 '록의 대부'라고 얘기 되다 보니까 작품 얘길 하면 거의가 70년대 발표된 노래들만 갖고 얘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뮤지션으로서의 신중현을 얘기하면, 2002년에 발표한 [Body & Feel] 리메이크 음반(신윤철이 주도적으로 만들었던)이 있고, 2005년에 발표한 [도시학]과 [안착]을 거론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당대의 뮤지션으로 신중현을 얘기한다면 당연히 최근작부터 얘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신중현 : 그게 활동을 안 해서 그럴 수 있다. 사실 80년대 이후부터는 활동다운 활동을 내가 못했다. 할 기회도 없었지만 할 수 있는 여건이 나한테 주어지질 않았다. 그러니깐 결국엔 혼자 하게 되고, 아무리 작품을 만들어도 누가 들어줄 사람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건데... 그런 세월이 2000년도까지 계속 이어진 거다.
박준흠 : [도시학]에 담겨있는 창작곡들은 어떻게 평가하나? 이전에 70년대나 80년대에 만들었던 창작곡하고 지금 현재하고 비교를 하면 어떤가?
신중현 : 이것은 다르다. 가사가 없다. 있긴 있는데 굉장히 짧다. 구질구질한 단어, 말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고 단어 하나만 가지고 하겠다, 그런 거다. 그래서 여기 있는 음반 들어보면 굉장히 심플하다. 음악하고 같이 간다. 노래 위주나 경음악, 밴드 위주가 아니라 같이 가기 때문에 노래를 한 구절 부르면 한참 동안 음악이 나가는 식이다. 그러니까 음악하고, 가사하고, 어느 정도의 공간을 많이 줌으로써 생각하게 하는, 한 마디 뱉고 리듬을 나가는 거다. 그럼 그 동안에 그 단어는 단순하지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거다. 인간은 생각을 할 수 있지 않나? 꼭 단어를 주는 대로 받는 게 아니라, 이 단어 하나를 딱 들으면 자기 생각을 하게끔. 이 단어로 인해 듣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똑같은 단어지만. 하여튼 여러 가지 갈래의 생각이 생기는 게 인간이고, 인간의 감각이다. 그러니까 단어 하나를 던진 다음에 생각할 여유를 좀 준거다. 그래서 여기 들어있는 곡들이 좀 특이하다. 댄싱을 할 수 있으면서도 록이다. 그런 걸 포함시킨 것이다. 나온 적이 없고, 세계에서도 처음이고... 그런데 알아줘야 되는 건데(웃음), 안 알아주니까 그만둔 거지.
박준흠 : 지난번 '마지막 콘서트' 이후에는 새로운 음반은 더 이상 안 만든다고 했는데, 지금 새로운 창작곡에 대한 설명을 듣다보면 다시 창작음반을 내야 되는 것은 아닌가?
신중현 : 다른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기존의 틀 속에서 발전하고, 뭔가를 추구하고, 이런 종류의 음악성인데... 그런 음악성을 이제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가고 싶다. 이건 음반 낼 기회도 없고, 음반 내봐야 상업적인 계기도 없을 거고, 혼자서 인터넷상에다가 올려놓고 듣고 싶은 사람은 들어라, 이런 식으로 가려고 한다. 음반은 누가 살 사람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런 게 없으니까, 나 혼자 좋아서 하는 거니까 그렇게 할 생각이다.
박준흠 : [도시학] 앨범속지를 보면 설명이 나오는데, 사람들이 선생을 '도시학'이라 부른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설명 좀 해달라.
신중현 : 순수하게 사회에 적응하는 것은 어렵다. 즉, 쉽게 말해서 사회라는 것은 약삭빨라야 되고 적응능력이 있어서 굉장히 순발력을 발휘해서 사회에 맞게끔 적응을 해야 되는데, 나 같은 경우는 그냥 옛날방식대로 사회에 적응하려고 한다. 순수한 마음으로. 그게 먹히지 않는 건 뭐냐... 시대는 여러 가지로 변하는데 항상 근본적인 걸 찾으니까 언발란스가 되는 거다. 도시학이 옛날 생각하고 날아왔는데 도시가 되어버려서, 어디 앉긴 앉았는데 먹을 것도 없고 날개 펼 곳도 없고, 그런 걸 상징하는 건데... 그거 얘기 하려면 또 길어지는데.(웃음) 책을 하나 써야지.
박준흠 : 이후 당분간 유지하고 싶으신 이미지가 '도시학' 이미지인가?
신중현 : 그렇다. 나야 뭐 옛날 사람이고, 항상 마음을 찾으려면 때가 묻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 나의 철칙이고 하니까. 이런 데 구석에 박혀있을 수 있는 것도 사실 그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거다. 안 그러면 맨날 나가 돌아다니고 술 마시고... 나도 옛날에 많이 해봤지만 그게 아무 소용이 없더라. 내가 나를 찾는 게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뭐 남이 볼 때는 "아, 저 사람 이제 늙었으니까 저렇게 한다" 하겠지만 사실 본인은 안 그렇다. 막상 그렇게 하려면 수양해야 되고, 도를 닦아야 하니까. 나는 지금 도를 닦고 있는 거다.
박준흠 : 본인이 만든 노래를 간단하게 직접 설명한다면?
신중현 : 내 노래는 굉장히 심플하다. 가사부터 모든 게. 사랑 얘기를 많이 쓰고 있는 건, 그 사랑이란 것이 중요하다는 거다. 그러면서 자기 나름대로 자기 생각을 펼 수 있는 음악이 돼야 된다. 설명이 많아서 이미지가 확정되어버리면 그 범위가 작아지기 때문에 그걸로 끝나지만, 상징적으로 누구나 부를 수 있는 가사가 되어야 된다. 그래서 그 노래 자체를 들으면 뭐 별 거 아니네, 이럴 수 있겠지만. 노래라는 건 감각이 필요하다. 꼭 무슨 단어에서 주는 설명 이런 게 아니라, 상징적으로 들으면서 감각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것이 내 노래의 특성이다. 굉장히 심플한 것 같지만 우리가 우울할 때 듣는 거랑, 기쁠 때 듣는 게 다르게 들린다는 거다. 그것이 대중음악이다. 대중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나는 어려운 단어를 쓰질 않는다. 가장 많이 쓰는 단어, 그러면서 깊이를 좀 느낄 수 있게끔 만드는, 그런 특성이 있다는 걸 혼자서 자랑하는 거다.(웃음) 잘난 척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