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아끼면 X 된다.>/구연식
한 나라 국민의 경제생활 태도는 부존자원의 유무에 따라서 결정되거나, 국가 경제정책 주관에 의해서 경제 의식구조가 굳어지기도 한다. 때로는 선 후진국의 경제 이론에 따라‘ 소비는 미덕이다.’ 또는 ‘저축은 미덕이다.’로 결론이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나라는 부존자원이 적고 대외의존도가 높은 국가이다. 그래서인지 꼰대 세대는 절약과 검소가 몸에 밴 생활경제로 점철되어 왔다.
며칠 전 연말 행사 참여를 위해 평소 캐주얼에서 정장 차림으로 나가게 되었다. 신발도 신사화로 바꾸어 신고 가기로 했다. 평소에 신발장을 열고 가끔은 구두를 꺼내 놓고 먼지를 털고 약칠도 해둔다. 그중에서 큰 딸 결혼 때 구매한 정장과 구두는 애착이 가는 것이기에 아끼고 특별한 날만 입거나 신고 있다. 오늘은 그 구두를 꺼내어 신으니 큰딸 손을 잡고 주악에 맞춰 예식장을 걸어 들어갔던 15여 년 전의 설렘이 되살아난다. 그때 큰딸은 귓속말로 “아빠 긴장하지 말고 천천히 걸어가세요.”가 지금도 귓가에 소곤거린다.
오늘 행사 지역은 전주에서 승용차로 40여 분 떨어진 익산지역이다. 행사장 부근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 문을 열고 첫발을 내디디니 구두 밑창 부근에서 검은 오물 같은 것이 우수수 떨어진다. 순간 승차 전에 오물을 밟았을까? 조금 전이라 행적을 몇 번이고 생각해 봐도 아파트에서 지하 주차장까지는 실내 복도였기에 그럴 이유는 없었다. 운전석 페달 부분을 살펴보니 검은색 스펀지 뭉치가 쌓여있다. 그때 서야 나의 구두 밑창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어, 밖에서 구두를 벗어 터는 대로 검은 뭉치는 떨어지고 발등 가죽만 남은 흉악한 꼴이 되었다. 그 구두는 큰딸 결혼식 참석을 위해 거리 싸구려 노점에서 구입한 것이 아니고, 백화점에서 구입했기에 순간 속은 느낌이 들어서 분했다.
그런데 오늘 행사장에 참여해야 할 시간이 몇 분밖에 안 남았다. 행사장에 무엇을 신고 가야 하나, 아니면 행사 참석을 하지 말아야 하나, 생각이 지그재그로 양쪽을 오고 갔다. 하지만 오늘 행사에 내가 발표할 안건이 지정돼 있어서 무조건 참석해야 한다. 자동차 트렁크를 열어보니 비상용 슬리퍼가 있었다. 슬리퍼를 신고 행사장까지 10여 분 걸어서 갔다. 겉옷은 정장인데 이 엄동설한에 웬 슬리퍼 차림의 얼빠진 사람일까? 행인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행사장에 도착하니 벌써 많은 사람이 앉아있었다. 나는 신발이 보이지 않게 중간 줄로 꾸역꾸역 들어가니 이미 앉아있는 사람들은 널직한 앞줄 놔두고 좁은 곳으로 들어온다는 불편한 눈치였다. 그렇게 신발이 보이지 않도록 앉아서 행사를 마치고 주위 사람들과 인사도 없이 슬쩍 빠져나와 주차장까지 가는데 동지가 가까워서인지 해는 벌써 지고 눈발까지 내려 기온도 급강하여 노면은 얼어붙어 운전자들에게는 곤욕스러운 날씨였다.
이런 날씨에 안전운전의 첫 번째 제동장치인 브레이크 페달 밟기가 가장 신경 쓰이고 민첩성이 요구된다. 평소 한 번도 슬리퍼 차림으로 운전 경험은 전무였는데 엎친 데 덮친다고 날씨마저 괴롭히고 있었다. 혹시 내 구두를 보고 있는 사람은 허우대는 멀쩡하구먼, 돈 몇 푼 아끼려고 싸구려 신발 사더니 꼴좋다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 그렇게 자격지심으로 자책해 보기도 처음이다. 제일 바깥 차선으로 가는데 손에서는 진땀이, 발은 엉성하게 슬리퍼를 걸치고 어설프게 페달을 조절하면서 기어가는 속도로 빙판길을 겨우겨우 전주시내 병목현상이 가장 심한 진입로까지 왔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여 밑창 빠진 구두를 수거용 봉투에 넣어 쓰레기 수집장에 버릴까? 망설이고 있었다. 구두에 얽힌 사연들이 일제히 만류한다. 큰딸 결혼할 때 구매하여 딸 손을 잡고 걸어 들어갔던 신발이다. 추우나 더우나 나의 발을 감싸고 나를 지탱해 준 신발이다. 그렇게 애지중지하여 특별한 날만 신었던 그런 신발을 팽개치는 것은 신발이 너무 불쌍할 것 같다. 남이 알면 나의 허술함을 드러내는 꼴이 되기에 쉬쉬하고 싶어도, 지금까지 몰랐던 오늘 신발의 모든 허탈함을 아내와 공유하고 싶어서 그대로 집으로 들고 왔다.
아내는 속도 모르고 두툼한 검은 봉지를 보더니 먹을 것을 사 들고 온 줄 알고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시간을 끌면 기대가 클 것 같아 “세상에 이 나이 먹을 때까지 이런 꼴은 처음이네” 하면서 비닐봉지 속의 구두를 보였더니 아내는 실망했는지 “당신 큰딸 결혼 때 산 구두라고 아까워서 안 신더니 밑창이 날아갔군요.” 하면서 기성화는 자주 번갈아 신어야지 아깝다고 신지 않으면 자연변화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나보다 나이 어린 아내가 또 다른 세상 경험은 앞선 것에 나이보다 경험이 어른인 것을 일깨워 준다. 오늘 신발 때문에 이 날씨에 얼마나 고생했느냐고 역성을 들어줄 줄 알았는데 위로는커녕 핀잔만 주니 무척 서운했다.
농촌 어려운 살림 속에서 낳고 자란 세대 이어서 절약이 생활화 되어서인지, 지금도 쓸 만한 재활용 물건에는 눈길을 안 돌릴 수 없다. 밑창은 덜렁하고 발등 가죽만 남은 나의 신발이 엄동설한에 어느 쓰레기 집하장에서 떨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그간 좀 더 못 챙긴 나의 불찰을 꼬집어본다. 아끼면 X 되기 전에 아들과 막내딸 결혼 때 장만한 옷과 구두를 이제는 아끼지 않고 실컷 입고 신어서 정을 주고 싶다.(2023.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