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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제1독서 : 코헬 11,9―12,8
복 음 : 루카 9,43ㄴ-45
그때에
43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44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45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플라세보 효과라고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무 효과가 없는데도 사람의 신념에 의해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말기 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의 몸에는 야구공만 한 종양이 자라고 있었지요.
마침 신약이 나왔고, 주치의는 획기적인 신약이 나왔다며
이 약의 효능을 설명하고 환자에게 주사했습니다.
주말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환자의 상태가 좋아졌습니다.
종양도 절반도 줄었고, 10일 후에는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환자는 퇴원한 지 두 달 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신약의 효과로 점점 좋아졌던 환자가 왜 이렇게 안 좋아졌는지를 보니,
자신에게 사용된 신약이 전혀 효과가 없다는 신문 기사를 봤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에 절망한 그는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졌고 이틀 만에 사망했습니다.
대만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스님께서 시한부 판정을 받았습니다.
절망에 빠진 스님은 자기 스승을 찾아가 이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 빨리 가느냐, 좀 늦게 가느냐의 차이뿐이다.
누구나 한번은 죽는 것이니 사는 동안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
이 말에 용기를 얻어 ‘시한부 환자’라는 생각 자체를 내려놓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현재 20년이 지났음에도 열정적으로 살고 계십니다.
어떤 마음으로 가져야 할까요?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저 열심히, 열정적으로 후회 남기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예고를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의 스승이 수난과 죽음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벗어버릴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말씀하셨을까요?
걱정하고 두려움 속에서 힘든 마음으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을 사는 제대로 된 마음이 필요함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영광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욕심보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지금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영광만을 추구하다가는
커다란 실망 속에서,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영광을 바라보며, 지금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간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열정적으로 후회 남기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창조주를, 심판을 기억하라
-나무처럼, 시詩처럼, 한결같은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 금요 강론 대목 중 잊혀지지 않는 대목과 설명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마지막 50절 중
‘주님의 가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란 대목에 대한 설명입니다.
‘한결같음과 머뭄은 정적靜的인 어떤 상태가 아니라,
살아 있는 나무처럼 뿌리를 내리는 것을 뜻한다. 뿌리를 내리면서 나무는 가지들을 뻗는다.
그것은 하느님을 향해 서두르는데 한결같음을 뜻한다. 에우치리우스는
“우리는 부르심과 진보의 자리에 서 있으면서 한결같음과 인내로서 경주에 승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변하는 역동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뿌리를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한결같은 위치로서의 어떤 자리와 함께하는 정체성을 지닌 사람은
내적 안정과 함께 유연하고 온 세상에 열려있다. 나무처럼!’
여기 요셉 수도원의 배경인 한결같은 불암산과 곳곳에 산재한 무수한 나무들은
정주의 표상으로 안정과 평화, 위로와 치유를 줍니다.
세계 2차 대전 중 젊은 나이 32세로 전사한, 평생 32편의 시만 남겼다는
미국 뉴저지주 출신 조이스 킬머(1886-1918)라는 시인의 ‘나무들’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나는 생각한다.
나무들처럼 사랑스런 시詩를
결코 볼 수 없으리라고.
대지의 단물 흐르는 젖가슴에
굶주린 입술을 대고 있는 나무.
온종일 신神을 우러러보며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기도하는 나무.
여름엔 머리칼에다
붉은 방울새의 둥지를 치는 나무.
그 가슴에 눈이 쌓이고
또 비와 함께 다정히 사는 나무.
시詩는 나 같은 바보가 짓지만
나무를 만드는 것은 오직 신神일뿐.”
하느님만을 찾는 정주 수도승의 특징은 나무를 사랑한다는 것이며 나무를 닮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무처럼’, ‘하느님의 시詩처럼’ 살아가는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정주의 수도승들입니다.
문득 25년 전 써놓은 ‘나무’라는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날아오는 새들 모두 안아 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1997.3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결같은 하느님의 나무처럼,
하느님의 시처럼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로서 코헬렛은 끝나지만, 내용이 참 풍요롭고 공감 충만입니다.
‘젊음을 즐겨라’, ‘늙음과 죽음’, ‘맺음말’로 끝나며 아쉽게도 마지막 ‘발문’은 생략되고 있습니다.
일부 대목을 인용합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수시로 후렴처럼 강조되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마디입니다.
창조주와 더불어 우리의 ‘죽음’ 역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어 코헬렛의 맺음말은 처음과 똑같이 인생 허무에 대한 고백입니다.
“허무로다, 허무! 코헬렛이 말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마지막 임종어가 이 말마디라면 얼마나 허전하겠는지요!
우리의 창조주 하느님, 심판, 죽음, 허무에 대한 묵상이 우리 모두 분발하여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중심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 향해 가지들 뻗은 나무들처럼
한결같은 삶을 살게 합니다. 생략된 코헬렛의 마지막 부분도 나누고 싶습니다.
“책을 많이 만들어 내는 일에는 끝이 없고,
공부를 많이 하는 것은 몸을 고달프게 한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들어보자.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켜라.
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 지당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
그러니 결국 허무로 시작해서 하느님 경외로 끝나는 코헬렛이요,
결국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하느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늘 삶의 허무와 죽음, 하느님을 기억할 때
일희일비함이 없는 한결같은 삶, 담담한 내적 열정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이점이 부족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의 변모 체험 후
어떤 아이에게 더러운 영을 내쫓아 내신 주님의 일에 몹시 놀라
한없이 고무된 제자들에게 주님은 두 번째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니
청천벽력 같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직도 스승이신 주님을 모르는 미숙함을, 한결같지 못함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으니,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며,
이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놀라움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제자들의 마음이 몹시 불안해 보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요, 주님의 수난에 이어 부활 체험 후에야,
한결같은 파스카의 삶이 가능할 것입니다.
이때의 주님 제자들과는 달리 우리는 이미 파스카의 삶을 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영원한 삶이 가능합니다.
이에 더하여 삶의 허무, 죽음, 심판에 대한 생각이
더욱 우리를 깨어 한결같이 나무처럼, 시처럼 살게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한결같은 영원한 삶을 살게 합니다.
허무에 대한 결정적 답은 이 거룩한 파스카 잔치 미사뿐임을 깨닫습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코로나가 심각하게 번져나갈 때입니다. 병원마다 중환자가 가득했습니다.
사망자들이 늘어났습니다. 미사도 중단되었고, 식당도 문을 닫았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피해도 컸지만, 우리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는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캄캄한 동굴을 불 없이 걸어가는 것 같은 공포였습니다.
3년이 지난 지금은 그런 두려움과 공포는 많이 사라졌습니다.
백신이 나왔고, 치료제도 개발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의 강론이 생각납니다.
“코로나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감기를 두려워하지 않듯이 이제는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교통사고가 두렵다고 운전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고, 안전 운전하면 자동차는 쉽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널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시 누워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풍랑이 거세어졌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놀랐고, 두려웠습니다.
제자들의 소리에 눈을 뜨신 예수님은 풍랑을 잠재우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요.’ 제자들에게 이렇게도 당부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더러는 박해를 받고, 감옥에 갇힐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함께 있을 겁니다.’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요.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세요.’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여러분에게 평화를 줍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면, 굳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이렇습니다.
‘기도하면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한 사람은 기도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한 사람은 하느님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은 논리와 이성을 넘어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단순히 본능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헛되고 헛된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야 하는지 식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고를 때, 차를 살 때, 집을 살 때
우리는 꼼꼼히 따져보고, 신중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잘못 판단을 하면 커다란 손해를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하느님은 어떤 것을 원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식별’입니다.
처음에는 올바른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합니다.
‘한번 써보고, 살아봐야 안다.’
겉보기와는 다른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식별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식별의 결과입니다.
결과가 좋고, 결실이 있으면 영적식별을 잘 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쁘고, 결실이 없으면 그것은 악의 유혹을 따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위로와 고독’이 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면 결과는 늘 기쁨과 평화입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도 ‘위로와 고독’이 있습니다.
악의 유혹을 따를 때 결과는 늘 불평과 불만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영적 식별을 잘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영적식별을 잘 하는 사람은 3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겸손입니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남의 의견도 충분히 듣습니다.
누군가 영적 식별을 잘했는데, 교만하다면 그것은 악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둘째는 진중함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쉽게 하지 않습니다. 남의 허물과 탓을 이웃에게 전하지 않습니다.
깊은 바다와 같아서 사람들을 품어 줄 수 있습니다.
셋째는 순종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의견이 교회의 가르침과 다를 때, 교회를 비판하고 순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영적 식별이 아닙니다.
비록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할지라도 교회의 가르침에 순명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영광의 길이기도 하지만, 고난과 십자가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이루신 다음, 산에서 내려와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를 고치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루카 9,44)
그러나 제자들은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루카 9,45 참조)
이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믿음의 순명과 사랑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따를 수가 없나 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이 너에게 바라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다.”
성경을 읽다 보면, 때로는 성경 본문이 아무 말씀도 안 할 때도 있고,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불투명한 말이나 난해할 때도 있습니다. 곧 말씀이 뜻을 감추고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의 침묵은 우리의 대화가 단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도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며,
바로 그것을 통하여 성경 본문에 철저히 복종해야 함을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또한 성경을 읽는 동안 그분을 기다리도록 도와주고,
우리 힘만으로는 이해 할 수도 기도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며,
우리를 훨씬 능가하는 분 앞에 서 있다는 의식과 함께 사랑의 자세를 깨우쳐주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채로도
사랑의 마음, 순명과 믿음으로 응답하고 따르도록 인도합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알아듣기 어려운 성경 본문을 접근할 때,
중요한 것은 신앙이라고 이렇게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가 장애라고 여겼던 대목들이
실로 크고 거룩한 유익이 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필로칼리아)
또한 사막의 마카리오는 역시 믿음으로 먼저 실행할 것을 강조합니다.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는 분량에 만족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애쓰시오.
그리하면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던 바가 여러분의 영에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들은 말씀을 비록 알아듣지 못 한다하더라도,
알아듣지 못한 채로 말씀하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곧 신비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인생은 풀어야 하는 숙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성으로 이해하는 바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곧 삶은 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당신께 오라고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말씀, 혹은 삶은 품고 살아야 하는 선물이요,
그것을 통하여 그것을 주신 분을 만나야 하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우리가 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바로 그분과의 만남의 신비를 사는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 한다하더라도
죽음으로서 만나게 되는 신비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셨듯이,
오늘 우리도 형제들의 손에 넘겨져 죽음으로써 되살아나는 부활의 신비의 삶을 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 하였던것이다.”(루카 9,45)
주님!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 이해하지 못해도 신비를 살아가게 하소서.
죽음에 넘겨져 되살아나는 부활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죽어 사라져 되살아나는 사랑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가 있은 다음,
그리고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셔서 감탄하고 있을 때,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하시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44절)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감히 물어볼 생각도 못 하였다.
예수님을 그렇게 따르면서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직은 그들이 스승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하시는 것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것임에도
그것을 완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이전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주님을 따라다니며, 체험한 여러 기적, 그리고 얼마 전에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으며,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주시는 권능의 예수님만 보았기 때문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이기적인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말은 못 하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권능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고,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시고,
한마디 말씀으로 사탄을 내쫓으셨던 분이 살인자들에게 넘어가시다니!
우리가 그분을 잘못 알았던 것인가?”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알 수 있다는 것을 모르게 되면, 신앙은 걸림돌이 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 사도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후
전해준 신앙과 복음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예수께 대한 고백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에 제자들과 같이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의 해결과 나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느님으로,
예수님으로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이기적인 생각과 물질적인 집착에
팔아넘기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뜻과 말씀을 성경 안에서 알아들어야 하겠고 깨달아
올바로 생활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에 앞서 그분이 나에게 어떤 존재이며,
나와 그분과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그분에 대해 올바른 알지 못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분을 알게 해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가지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줄 수 없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알아듣고 또 실천하면서
그분을 구체적으로 우리 삶 속에 강생시키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젊은 날에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 코헬렛 노년에 대한 교리교육
이병근 대건 안드레아 신부
“그렇다, 사람이 많은 햇수를 살게 되어도 그 모든 세월 동안 즐겨야 한다.
그러나 어둠의 날이 많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앞으로 오는 모든 것은 허무일뿐,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은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도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코헬 11,8-9)
젊은이들은 젊은이다운 열정을 가지고 젊음을 즐겨야 합니다.
그러나 젊음은 언제나 늙어감과 허무, 무의미와 무력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슬퍼하며 떠난 젊은이(마태 19,22)를 닮아 갑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해결책으로 무관심으로 살아가고,
심판이 있음을 잊고 살며, 계명과 멀어지고 맙니다.
젊은이들은 더 이상 하느님의 사랑과 약속을 믿지 않습니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불행의 날들이 닥치기 전에.
“이런 시절은 내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네가 말할 때가 오기 전에.
해와 빛,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고
비 온 뒤 구름이 다시 몰려오기 전에 그분을 기억하여라.
그때 집을 지키는 자들은 흐느적거리고
힘센 사내들은 등이 굽는다.
맷돌 가는 여종들은 수가 줄어 손을 놓고
창문으로 내다보던 여인들은 생기를 잃는다.
길로 난 맞미닫이문은 닫히고 맷돌 소리는 줄어든다.
새들이 지저귀는 시간에 일어나지만 노랫소리는 모두 희미해진다.
오르막을 두려워하게 되고 길에서도 무서움이 앞선다.
편도나무는 꽃이 한창이고 메뚜기는 살이 오르며
참양각초는 싹을 터뜨리는데
인간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가야만 하고 거리에는 조객들이 돌아다닌다.
은사슬이 끊어지고 금 그릇이 깨어지며
샘에서 물동이가 부서지고 우물에서 도르래가 깨어지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먼지는 전에 있던 흙으로 되돌아가고
목숨은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 (코헬 12,1-7)
많은 젊은이들은 창조주 하느님이 아니라
믿음 없는 자유와 냉소적인 지식을 선택, 숭배하며,
기존의 질서와 도덕 영역에서의 탈출을 시도합니다.
“모든 것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실질적으로 모든 것을 맡기려하는 현대 문화에 있어서
최고의 지식과 무책임이 결합 된 이 새로운 냉소적 이성의 출현은
매우 거센 반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를 도덕 영역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지식은
처음에는 자유와 에너지의 원천처럼 보이지만, 곧 ‘영혼의 마비상태’로 변합니다.
코헬렛은 이미 의지의 무력함을 낳는
지식의 전능(onnipotenza), 곧 ”전지(onniscienza)의 착각‘이라는
치명적인 유혹을 역설적으로 폭로하고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교 수도승들은 이러한 영혼의 질병을 정확하게 식별했습니다.
그들은 믿음과 도덕이 없는 지식의 허무함, 정의 없는 진리의 환상을 찾아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아치디아(accidia, 나태)라고 불렀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유혹을 받습니다.
노인을 비롯해 모든 사람이 이 유혹을 받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게으름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것입니다.
단순히 무기력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태는 정의와 그에 따른 행동에 대한 어떤 열정도 없는
세상의 지식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은 모든 윤리적 책임과 진정한 선에 대한
모든 애정을 거부하며 의미의 공허함과 힘의 부족을 초래합니다.
비록 악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선을 열망하는 힘을 앗아갈 뿐 아니라
’악의 세력이 공격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줍니다.‘
이는 이념의 과잉으로 인해 냉소적으로 변해버린 광기 어린 이성의 힘입니다.
…용기 내어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우리는 세상에서 아주 큰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다소 구체적이지 않고 현실적이지 않으며 뿌리가 없는
이러한 이상주의에서 피난처를 찾지 말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삶의 주술‘ 안으로 도피해서는 안 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노년에 대한 교리교육-
11. 코헬렛: 삶의 의미와 삶의모든 것의 불확실한 밤 중...
모든 것이 사라져도 말씀은 남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사랑은 승리합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신앙은 영원합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루카 9,45)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싶어서 성경공부를 시작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싶어서 좋은 강의와 강론, 주석서 등을 찾아보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라면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최고의 성서학자들’과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직접 비공개 특강을 들은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용감하게(?) 묻고 따지던 지도자들과 권력자들’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사실 이런 일들은 오늘날에도 벌어집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