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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통신사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고베시립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의 문장가이자 1719년(숙종 45년) 조선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시문과 학문 토론을 담당하던 관리)으로 일본을 다녀온 신유한은 일본에서의 경험을 정리한 '해유록(海遊錄)'에서 "일본인이 싸움에서 무모하게 덤벼드는 것은 자기 몸 하나 편안해지기 위해서일 뿐"이라고 기술했다.
책은 지리, 인습, 풍속, 제도 등에 대해 저자가 일본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기술한 견문록이며 문학성이 뛰어나 당대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행문학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18세기 일본에는 무사, 농민, 공인(工人), 상인 등 네 종류의 백성이 있었다. 무사는 태수에게만 복종하면 돼 가장 편하다. 그 외 승려, 의사, 유학자가 있는데 이 중 유학자의 신분이 가장 낮다. 과거시험을 치러 관직에 나갈 수 없으며 각 주에서 서류를 만드는 일을 하거나 무사에게 의탁해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학문과 예술에 대한 갈증은 높았다. 조선통신사에게는 글이나 그림 청탁이 쇄도했다. 신유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책에서 "날마다 시를 써달라고 조르는 일본인들에게 시달려 우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견딜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요청은 심지어 새벽까지 계속됐다. 그는 답답한 심정을 달래기 위해 일본인 통역관과 호위병을 대동하고 밖을 거닐었다.
저자에게 일본의 음란한 풍속은 충격적이었다. 신유한은 "사창가의 창녀들이 화장해서 용모를 예쁘게 꾸미고 외설스럽게 구는 형태를 알게 되었는데 너무 저질스러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고 개탄했다. 남창(男娼) 풍조에 대해선 아연실색한다.
"열서너 살에서 스물여덟 살까지의 미남자들이 향기로운 기름을 머리에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분을 바르고 알록달록 무늬를 수놓은 옷을 입고 있으면 아름다운 꽃 한 송이 같았다. 왕족과 귀족은 물론 부유한 상인에 이르기까지 이런 남창에게 재물을 쏟아붓지 않는 자가 없어 밤낮으로 반드시 함께하며 남창의 애인을 질투하여 죽이기까지 했다."
신유한은 일본 유곽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지만 외국 풍속을 살펴 취할 것은 취하고 경계할 것은 경계해야 한다며 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여러 편의 시를 지어 함께 실었다. 그중 한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쩌면 이리도 적나라할까. 낭군이 품고 온 그림 펼치니, 부끄럼 모르는 낭군에게 감동해 그림과 비교하며 즐긴답니다."
기술을 숭상하는 문화는 높게 평가했다. 그는 "집과 집을 짓는 재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규격화돼 있으며 집을 지을 때는 복도와 부엌, 욕실 등을 한 지붕에 배치하며 건물 주위는 신기하게 생긴 바위와 대나무와 이름난 꽃들이 에워싸고 있다. 여자들이 짜는 비단은 매우 정밀하고 가벼우며 화초 등도 그냥 두는 법이 없이 온갖 모양으로 다듬는다"고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읍으로 삼았던 오사카를 보고선 천하의 으뜸 도시라고 치켜세웠다. 곧게 난 길이 잘 닦여 있고 길에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다. 다리는 200여 개, 절은 300여 개나 되며 번주나 가신의 좋은 집들은 그 두 배가 됐다. 평민 중에서도 농업, 공업, 상업에 종사해 부자가 된 집이 수천, 수만이나 됐다.
오사카는 또한 책의 도시였다. 신유한은 "천하의 장관이라 할 만하다"고 부러워했다. 우리나라 명현의 문집 가운데 일본 사람들이 가장 아끼는 것은 퇴계집(退溪集)이었다. 집집마다 읽고 외우고 있었다. 사람들은 도산서원이 어느 군에 속해 있는지 물었고 퇴계의 후손이 지금 몇 사람이나 있으며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퇴계가 평소에 좋아한 게 무엇인지 등등 질문이 지나치게 많아 다 기록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책은 밝히고 있다. 학자들은 최치원, 설총으로부터 김장생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문묘에 모셔진 선현의 이름을 순서대로 정확히 외우고 있었으며 우리나라 학자들의 문장과 자취도 막힘이 없었다.
국가 기밀에 속하는 서적도 버젓이 일본에서 유통되고 있었다. 김성일의 해사록, 유성룡의 징비록, 강항의 간양록 등의 책들이다. 통역관들이 밀무역으로 일본에 넘긴 것으로 추측됐다. 신유한은 "우리나라의 기강이 엄하지 못한 때문"이라며 "적을 정탐하여 적에게 일러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탄식했다.
음식도 상세하게 적었다. 대부분의 일본 음식을 맛있다고 서술한다. 하지만 고래회만은 이상했다. 일본인들은 고래회를 가장 귀중하게 여겨 비싼 값으로 사들여 손님을 접대했다. 고래는 버리는 게 없어 큰 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자신은 물론 후손까지 부유해질 수 있었다. 신유한은 "그러나 먹어 보니 부드럽고 미끄러우며 기름지기만 할 뿐 별다른 맛은 없었다"고 시큰둥했다.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은 복식제도에서 유래했다. 길에서 술을 파는 여자이건 곡식을 거두는 사람이건 반드시 두 무릎을 땅에 대고 옷을 여미며 앉는다. 옷이 짧고 바지가 없어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남자든 여자든 은밀한 곳을 가릴 수 없게 된다. 부득이하게 꿇어 앉는 법도가 생겨났고 그것이 습관화되어 버린 것이다.
중세 이후 일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했지만 그 위상은 더욱 낮아져 일본인들은 조선통신사들에게 일왕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조차 극도로 경계했다. 조선 국왕과 일본 왕 사이에 국서 교환이 이뤄져야 하지만 쇼군이 이를 대신했다.
첫째아들을 제외한 일왕의 모든 아들은 승려가 돼 칭호를 법친왕(法親王)이라 했으며 딸도 비구니가 되게 했다. 부마나 공주라는 명칭도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한글에 비상한 관심을 나타냈다. 나고야에서 한글을 보여달라고 말하면서 어느 시대에 누가 창제했는지 물었다. 한글을 써내려가자 그들은 "글자의 생김새가 별이나 초목 같다. 용마의 등에 그려진 그림이나 거북이 등에 쓰인 글의 형상을 취해 만든 것이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신라가 일본 본토를 공격했다는 기록도 책에 등장한다. 한반도에서 일본 히로시마 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시모노세키에는 백마총(白馬塚)이 있었다. 신라왕이 장수를 보내 일본을 공격하자 일본인들이 이에 굴복해 강화를 맺기를 청했다.
신라의 장수는 강화의 표시로 백마를 죽여 무덤을 만들었다. 일본 풍속에는 무덤의 봉분을 만들지 않는데 백마총은 봉분이 있는 것으로 미뤄 신라 사람이 쌓은 게 틀림없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땅이 저절로 부풀어오른 것이라고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수많은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갔는데 한 마을 전체가 일본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교토 인근 요도강(淀江) 기슭에는 진도도(晉州島)라는 마을이 있었으며 이곳에는 진주 출신 포로들이 모여 살았다.
임진왜란이 터진 지 100년도 훨씬 지난 신유한의 방문 당시까지도 진주 출신들이 거주했으며 다른 지역 출신은 한 명도 없었다. 신유한은 "그때의 일을 생각해보니 모골이 송연해진다"고 썼다.
▲ 신유한 일행을 안내했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초상. 조선과의 실무교섭을 담당했던 외교관이다
신유한 일행과 헤어질 때 그들의 안내를 맡았던 아메노모로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라는 일본인이 눈물을 흘렸다. 신유한은 그러나 책 말미에 "겉으로 문인인 체하지만 마음속에 창과 칼을 품고 있어 권력을 잡았다면 반드시 우리나라에 해를 끼칠 인물"이라고 했다.
▶신유한(1681~1752)=경상도 밀양에서 출생했으며 1713년(숙종 39년) 33세의 나이로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김창흡(1653~1722), 정선(1676~1759) 등 당대 명사들과 친분을 쌓았지만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인해 연천 현감, 평해군수 등 지방관직을 전전해야만 했다. 빼어난 시문을 많이 남겼으며 특히 해유록은 일본에 관심을 두거나 통신사로 일본에 간 이들에게는 필독서였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 역사> / 매경프리미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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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