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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마태오 20,1-16)
Am I not free to do
as I wish with my own money?
Are you envious
because I am generous?'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당신께서 직접 참된 목자가 되리라고 하신다. 못된 목자들은 양 떼인 백성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군림하면서 원수들에게 팔아넘겼다. 이에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새로운 목자가 되시어, 흩어진 양 떼를 찾아 구원하러 오실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주인과 일꾼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세상에서 주인과 일꾼이 맺는 계약과는 다르다. 세상의 계약에서는 일한 만큼 품삯을 계산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삯은 하느님 자비의 표현이고, 거저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소외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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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주님께서는 구약 시대 때부터 줄곧 사람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사람과 계약을 맺으신 것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당신께 돌아와 자유롭게 행복을 누리길 바라시는 뜻에서였습니다.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처럼, 주님께서 맺으신 계약은 하느님 자비의 표현이고, 그 삯은 사람에게 거저 주신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단 한 사람도 소외시키지 않고 모두 당신 나라로 불러들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이 자신이 이룬 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쉽지 않으신 하느님을 위하여 우리가 이루어 드려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신 구원은 거저 내리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러한 끝없는 하느님의 자비에 우리는 그저 감사를 드려야 할 따름입니다.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는 저마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그분께 받고 있습니다. 그분 앞에서는 빈부의 차이, 신분의 차이, 학력의 차이, 남녀노소의 차이란 있을 수 없으며, 차별 대우란 더더욱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되게, 오늘도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을 내려 주시는 하느님께 정성을 다하며, 감사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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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입니다. 굽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굽은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면도 많습니다. 세상의 모든 도로가 직선뿐이라면 얼마나 밋밋할는지요? 좋은 일만 생기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무미건조할는지요? 오늘의 고통이 내일의 기쁨으로 바뀐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삶이라도 비관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자신에게는 힘든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보람 있는 일이 남에게는 동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관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실은 틈만 나면 남과 비교하게 만듭니다. 눈치 보기를 피해 갈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생의 참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 삶의 설계도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재산이든 명예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어느 정도의 몫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적게 받았다는 생각은 느낌일 뿐,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뒤에 와서 잠깐 일한 사람이나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주인은 똑같은 품삯을 주었습니다. 양(量)을 따지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믿음의 참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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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 일꾼에게 품삯을 지불하는 포도밭 주인의 처사는 오늘날 경영인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 시대라면 퇴출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매우 친절하고 자상한 주인임에 틀림없습니다. 한 시간만 일한 노동자에게도 그 가족이 먹고사는 데 필요한 하루 품삯을 지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 8시간을 일한 그 노동자에게 포도밭 주인이 불의를 저지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약속한 대로 하루 품삯을 지불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두에게 넘치는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상대적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불행과 아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에서 불행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과 행복에 우리도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포도밭 주인은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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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궁중의 화가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그리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 “개와 말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그리기 쉬운 것은 무엇이냐?” “귀신입니다.” 뜻밖의 대답에 이유를 묻자, 화가가 답했습니다. “개와 말은 사람들이 너무 잘 알기에 그리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귀신의 모습은 잘 모르기에 그리기가 쉽습니다.” ☆☆☆ 라일락 꽃 속에 파묻힌 꿀벌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윽고 원을 그리며 날다가 꿀벌은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역시 꽃 중의 꽃은 라일락이야. 가슴이 떨리도록 향기롭단 말이야.” 이 말을 듣고 있던 나비가 말했습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저 장미꽃을 두고 그런 말을 하다니! 그리고 저 들국화는 어떻고. 꿀벌아, 너는 정말 무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개와 말은 흔한 동물이라 볼 기회가 많습니다. 화가가 아무리 잘 그려도 비슷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쉽게 시비를 겁니다. 하지만 귀신은 직접 볼 수 없기에 화가가 대충 그려도 사람들은 시비를 걸지 못합니다.
포도밭 일꾼들은 주인에게 불평합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불평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을 약속한 주인을 기준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기준으로 보면 많은 것이 못마땅합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객관화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자신을 주관화하면, 언제나 ‘나만 고생하고’ ‘나만 억울한 것’ 같습니다. 살면서 너무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우리의 삶’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아니야. 라일락이 최고란 말이야.” 꿀벌은 결코 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라일락이 무어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는 거야. 차라리 채송화가 더 낫겠다.” 나비의 이 말에 꿀벌은 속이 상해 입을 다물었습니다. 기고만장해진 나비가 꿀벌을 재촉하였습니다. “왜 아무 말도 못하니?”
“그렇게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는데 무슨 말을 더 하겠니?” 꿀벌이 말을 이었습니다. “나비야, 꽃은 겉모양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돼. 라일락은 그윽한 향기를 만들어 내지만 잎을 씹어 보면 얼마나 쓴지 몰라. 쓴맛은 자신에게 남기고 향기는 남에게 주는 아름다운 꽃이 라일락이야.”
이 라일락의 우화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를 되새기게 합니다. 거름을 잘 준 화초가 꽃도 건강하고 열매도 많이 맺는 법입니다. 신앙생활의 거름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끊임없는 기도와 선행입니다. 이는 또한 얼마나 많이 했는지가 아니라, 정성과 열정을 얼마나 기울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선하심 - 안소근 수녀 -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된다.”는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킬 때는 감사한 마음으로 기쁘게 듣습니다. 그러나 꼴찌라고 생각했던 다른 사람이 첫째가 될 때는 어떻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하느님 모습은 인간적인 논리를 넘어섭니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올바로 살지 않을 때, 우리는 흔히 그가 언젠가는 그 갚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대로 할까요? -윤원진 신부- 예비신자 교리를 하다보면 입교식을 마치고도 한참 후에 교리반에 들어오려는
정진 -전삼용신부- 어제 청년들을 만났는데 한 자매가 “저는 사람들을 죽이고 평생 못된 짓만 하다가 죽기 전에 회개해서 구원받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요. 생각으로는 이해 가지만 정말 내 가족에게 그런 짓을 한 사람이라면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한 사형수를 기억합니다. 제 대자 중 한 명의 형님이었는데 청부 살인을 하고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물론 사형 선고를 받고 하느님을 알게 되어 믿는 마음으로 누구보다도 영웅적으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도 이해가 가는 것이 평생 그리스도의 규범 안에서 착하게만 살다가 힘겹게 구원을 받는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여 극적인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있어서는 오래 된 신자건 얼마 안 된 신자건 같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한 자매는 그러나 현재 냉담중입니다. 제가 있을 때는 주일학교 교감까지 하면서 매일 성당에서 살다시피 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새 냉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구원은 과거에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나의 모습이 구원받을 상태에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산부인과 의사를 하시며 평생 낙태와 성감별 등을 하시며 살아오신 70이 훨씬 넘어 회개하신 한 할머니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황혼에 세례를 받았지만 세례 받은 지 1년 반 만에 신구약 필사를 하였고 매일 기도로 회개의 삶을 살고 계십니다. 비록 질문을 했던 그 자매가 성당에서 봉사도 훨씬 많이 하였지만 지금 당장의 모습으로는 구원받기에 더 합당한 사람은 그 할머니나 제가 알던 사형수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선 예수님께서 이렇게 벌어질 상황에 대해 미리 아시고 비유를 통해서 먼저 하느님을 알게 된 이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될 수 있고 꼴찌가 첫째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은 포도원 주인에게 오히려 꾸지람까지 듣고 한 시간 일한 사람은 제일 먼저 합당한 임금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즐길 것 다 즐기다가 늦게 세례를 받고 마지막에 불타는 마음으로 잠깐 살다가 죽는 것이 더 좋은 일일까요?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사람들은 한 시간 일한 사람들을 질투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너무나 고생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고생일까요? 세상눈으론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매일 미사하고 기도하고 쉽게 넘겨버릴 잘못도 양심상 하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힘들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더 힘든 사람들은 하느님을 모르고 죄를 지으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행복하라고 불러주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행복이었다면 오히려 늦게 하느님을 알게 된 이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을 모르고 온갖 고생을 하다가 늦게나마 참 행복을 알게 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남들은 일하고 있는데 일을 시켜주는 사람이 없어서 포도원 밖에서 하루 종일 빈둥대는 것이 쉬운 일일까요? 이들은 일용직이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돈을 벌어오지 않으면 내일 아이들이 굶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걱정 속에서 일을 못하고 포도원 밖에서 안절부절 못하며 하루를 보내는 것이 더 쉬울까요, 아니면 포도원 안에서 비록 고생은 하지만 내일에 대한 걱정 없이 일하는 것이 더 행복할까요? 그러나 오늘 포도원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마음이 악하여 행복으로 불러주셨음에도 그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고생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불러주셨더라도 그분의 참 뜻을 깨닫고 주님 안에서 자신의 행복과 감사를 늘려가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우리도 이런 똑같은 사람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일랜드에서 영어 학원을 다닐 때 제가 있던 반에서 그래도 제가 다른 한국 사람들보다 영어를 잘 하는 편이었습니다. 특별히 외국 말을 오래 한 저로서는 다른 한국 사람들보다는 영어단어도 더 많이 알고 말도 더 잘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뻐기고 있을 때 한 한국 자매가 들어왔습니다. 영어를 완벽하게 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한국에서 영어 교사를 하는데 잠깐 발음을 배우러 온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먼저 불러주신 것은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먼저 불러주었으니 빨리 정진하라는 뜻입니다. 늦게 불러주신 사람들은 그들이 덜 완전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하느님 나름대로 그들을 훈련시키고 계셨던 것입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는 일이 없도록 믿고 구원받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완전해 질 수 있도록 오늘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정진’합시다.
하느님의 자비는
-임문철 신부- 예전에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이런 저런
투덜대는 마음이었는데
-한명수 시인- 일을 하다 보면 서로가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 더군다나 구성원 개개인의 능력 차에서 오는 소외감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회의를 하면서 제안하는 여러 일 중에는 구성원들이 해결할 수 없는 일들도 많다. 하지만 제안자는 쉽게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다. 할 수 없는 일을 자꾸만 요구하니 난감할 수밖에 없다.
일당 40만원 -양승국신부- 처음에는 별것도 아니려니 생각하고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합병증세로 병세가 위중해져서 돌아가신 분이 계셨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단 하루 전날, 한 교우가 방문해서 대세를 드렸습니다. 병세가 워낙 급진전되었고, 또 워낙 위급했기에 아주 간단하게 대세를 드렸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교리만을 설명해드렸고, 물로 세례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대세를 드린 교우는 교육받은 대로 본당 사무실로 달려갔습니다. 이름, 세례명, 대세 장소, 시간, 대세 준 사람… 간단히 적어서 사무실에 보고했습니다. 사무실에서는 본당 연령회장님께 연락을 취하였고, 연령회장님은 주임신부님께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런 죽음 앞에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유가족들에게 본당공동체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관대하게도 유가족들에게 본당 영안실 사용 및 본당 장례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연령회장님을 비롯한 회원들께서는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듯이 장례절차 일체를 책임지셨습니다. 연도가 생겼다는 공지에 많은 신자들이 영안실을 찾아와 열심히 연도를 드렸습니다. 단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는 많은 신자들이 장례미사에 참석해서 기도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장지까지 따라오셨습니다. 이런 본당공동체의 모습 앞에 비신자였던 유가족들은 진한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고두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삼우미사가 끝나자마자 유가족 전원이 예비자 교리 반에 등록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당황해하고 있을 때, 즉시 소매를 걷어붙이고 내일처럼 달려드는 연령회원들의 봉사활동,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너무나 큰 몫을 해내고 계십니다. 한평생 비신자로 지내다가 단 하루 전에 대세를 받고 돌아가신 분이 본당 공동체 안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은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떤 분들은 은근히 심기가 상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친정아버님께서는 유아세례를 받으시고 한 평생 천주교 신자로 살아오셨는데, 70평생 단 한 번도 주일미사 궐한 적 없으며, 노년에 접어들면서는 단 하루도 매일미사를 거르신 적이 없으셨는데, 본당 내 봉사활동이란 봉사활동은 혼자 다 하셨는데… 이런 친정아버님의 장례와 단 하루 전에 대세받고 돌아가신 분의 장례가 별반 차이가 없다니…‘이럴 수가!’ 하고 속상해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와도 일맥상통합니다. 포도밭 주인의 임금 지급 방법은 참으로 이해가 안가는 일이었습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장장 8시간이나 열심히 일한 사람이나, 실컷 늦잠자다가 한낮이 다되어 일어나서는 어슬렁거리다가 오후 5시부터 단 1시간만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일당 5만원을 지급했습니다. 단 1시간만 일한 사람들부터 일당이 지급되었는데, 놀랍게도 5만원이었습니다. 일당은 받은 일꾼들은 입이 ‘짝’ 벌어졌습니다. ‘이게 왠 떡이냐?’며 싱글벙글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아침 일찍부터 일한-은 속으로 이런 기대를 했겠지요. “단 1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5만원을 주네. 그렇다면 나는 8시간을 일했으니, 가만있어보자 ‘오팔이 40’ 그럼 40만원이네. 야, 이거 오늘 운수대통이네!” 그러나 정작 주인이 건네준 일당을 받아보니, 왠걸, 1시간만 일한 사람과 똑같은 액수인 5만원이었습니다. 잔뜩 기대했다가, 기대가 물거품이 되자 일꾼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따집니다. “막판에 와서 1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일꾼들이 따지는 것이 당연해보이나, 보다 엄밀히 따져보면 그들이 화낼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주인과 일꾼들은 처음부터 이후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분명히 정했습니다. 주인은 그들과의 계약을 정확하게 이행했기에 근로기준법에 어긋남이 조금도 없습니다. 고용주는 아무런 결격사유도 약점도 없습니다. 정의롭게 처신했습니다. 따라서 일꾼들은 더 이상 요구할 권리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은근히 화가 나지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그리고 마침내 주인은 자신의 계획을 밝힙니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오늘 복음을 통해서 하느님의 계산법과 인간의 계산법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로우신분이기에 정의롭게 우리와 맺으신 계약을 그대로 이행하십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은 자비로우신분이기에 약자와 죄인들, 실수한 사람들, 게으름뱅이들에게도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한평생 의롭게 살아온 의인들, 일찌감치 입교하여 한 평생 성실하게 신자생활을 해 오신 부지런하고 근면하신 분들, 혹시라도 은근히 속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느님의 자비는 세상 구석구석,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널리 미친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한 평생 악인으로 살다가 세상 떠나기 단 몇 분 전에 회개한 우도에게도 천국을 허락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함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신다는 것, 그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곧 구원을 주고자 하신다는 것은 쉽게 잊고 맙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라는 구절을, 200주년 성경에서는 “내가 선하다고 해서 당신의 눈길이 사나워집니까?”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고자 하시는데, 선하지 못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눈길이 악해진다는 것입니다. 복음 곳곳에서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받아주고 인내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과 너그러우심을 받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꼴찌였던 사람에게 선하신 하느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면, 그는 첫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첫째였던 사람이 이런 하느님의 선하심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그의 눈길이 악해진다면, 그는 꼴찌가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따랐던 세리와 창녀들을 무시했던 바리사이들과 똑같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예리한 칼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실제 삶을 돌아보면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우리의 삶과 타협시키고 예수님의 말씀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삶입니다
잠시 후 이 신사는 다시 돌아와 은행 직원에게 주차권 도장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도장이 없으면 주차료를 물어야만 되니까요. 그런데 직원은 단호하게 그리고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기서 저축을 하거나 인출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행 방침에 따라서 도장을 찍어줄 수 없습니다.”
청바지 신사는 “담당자가 없어서 한 시간 씩이나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도장을 찍어주십시오.”라고 강력하게 말했지요. 그러나 직원은 역시 단호하게 “안 됩니다.”만을 외칠 뿐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무척 기분이 상한 상태에서 은행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 날 이른 아침, 그 은행에 예금해 놓았던 수백만 달러를 모조리 찾아서 다른 은행으로 가져가버렸다고 하네요.
이 사람은 IBM 회장이었던 존 에이커스였습니다.
은행 직원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최선의 행동이 자기 은행의 최고 고객을 잃어버리는 최악의 행동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판단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자기의 판단의 굴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틀리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에게 일당을 주는 포도밭 주인의 모습이 나오지요. 그런데 약간 특이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홉시부터 일한 사람이나, 열두 시, 세 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 시부터 일한 사람이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공평한 주인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일한 시간이 다르다면 차등을 두고서 일당을 줘야 공평한 것이지, 어떻게 모두 똑같이 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판단입니다. 하느님의 판단은 차별 없이 똑같이 나누어주는 사랑이거든요. 그래서 인간적인 기준을 뛰어넘는 그 사랑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의 기준에서만 판단합니다. 만약 내가 다섯 시부터 일한 일꾼이었다면 이와 같은 처사를 체험하면서 공평하고 사랑가득한 분이라고 말했겠지요. 반대로 내가 아홉 시부터 일했다면 그분의 사랑을 보려 하지 않고 아마 악덕 기업주로 몰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판단이 아닌, 주님의 판단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즉, 사랑이 가득한 주님의 판단을 따르는 주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하면서 이 세상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성당은 1년 동안 교리를 하는데, 세례식을 2-3개월
앞두고 교리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면 어떻게 결정할지 참으로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법대로 따져서 안 된다고 거절할까, 내년에도 기회가 있을 것이니
기다렸다가 신청하라고 할까, 일찍 교리를 배우기 시작한 다른 예비신자와의
형평성을 따져서 당신들에게만 혜택을 줄 수 없다고 말해줄까 …. 그러나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도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그분의 ‘불쌍히
여기는 정신’은 어떠한 법보다도 앞선 모양입니다. 형평성과 공정함 앞에서
복음은 모호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럴 때에 법과 복음은 서로 다른 듯이
보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모든 사람을 한 가지
기준으로만 판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배려함’, 곧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저마다 각기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이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도 나에게 ‘법대로’ 하시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몹시 두려워집니다. 다만 나에게도 “한 데나리온”이 주어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죄를 짓고 죽기 전에 세례를 받아 구원받은 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요즘은 이런 표현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여전히 구원에도 등급이 있어서 순교자들처럼 영광스런 구원이 있고, 간신히 구원받는 사람들은 당연히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는 경향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가족 중에 망인 혼자만 세례를 못 받고 죽었는데, 그 유족들이
성당묘지에 묻기를 원할 때 허락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가 사제회의에서 논의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묘지이기에 교회에 속하지 않은 비신자는
교회묘지에 묻힐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가능성에 관한 신학적 이론일뿐 정작 현실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
같아서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비상세례(대세)도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믿음도 없이 교회묘지에 묻히려고 비상세례를
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부끄러운 구원일 수 있다
하더라도, 세상을 떠난 이나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하느님 자비의 승리요
영광스런 구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주 오래전,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며 회의를 할 때였다. 그때 주위 사람들은 내가 아이디어가 많고 주일학교 경험도 있으니 일을 잘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기대감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듯이 매번 회의 때마다 기발한 제안을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 일은 한명수 선생님이 하시면 딱 제격인데요.”라고 했다. 제안만 하면 좋은 생각이라고 하면서도 아무도 맡지 않으려고 해 역정을 내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른 뒤 다시 모였다. 며칠 전과 비슷한 상황에서 교사 회장이 “앞으로 무슨 일을 결정할 때 약한 자의 편에서 생각하고 결정을 하면 어떻겠습니까?”라는 제안을 하였다. 순간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그들에게 언제나 어려움을 안겨주었고, 새벽부터 일을 하고도 한 데나리온밖에 받지 못했다며 투덜대는 사람과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따뜻한 배려를 제안했던 그 교사 회장은 주위의 기대감을 살 만큼의 아이디어는 없었지만,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지녔던 것이다. 지금도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김광태 신부- 포도원 주인은 마치 돈이 너무 많아 주체를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김보경 수녀- ◆어머니는 피난 내려와 행상으로 여섯 식구의 생계를 도맡으셨다. 어느날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 끝에 “휴우, 너희 4명이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쪼르르 학교 다닐 때엔 밤에 ‘내일은 또 어떻게 애들을 먹일 수 있으려나!’ 싶어 가슴이 활랑활랑하여 잠 못 이룬 적이 많았지” 하셨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살이의 면모가 눈앞에 확연히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아르바이트 한번 하지 않고 4년제 사립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사랑하는 님을 따라간다며 수녀원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고생해서 대학공부까지 시켰으니 벌어서 갚고 들어가라 하시기는커녕 “하느님의 뜻이라면 순명해야지” 하시며 허락하셨다.
목자(牧者)의 영성 -이수철신부- 얼마나 잘 잊고 지내는 지요? ‘목자’라는 말은 거의 잊고 지내는 느낌입니다. 말 뜻 그대로라면 귀신 아버지가 아닙니까? 이보다는 개신교의 목사(牧師)라는 말이 훨씬 성서적입니다.” 사목(司牧)은 본의 아니게 방목(放牧)이 되어 목자 따로 양떼 따로 놀 수 있겠습니다. 비단 사제뿐만이 아니라 모든 교회 지도자 및 평신도들이 지녀야 할 보편적 영성이니, 우리의 선한 목자 예수님 친히 보여주신 삶의 영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양떼를 전혀 돌보지 않고 제 이익만 챙기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질책합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 선한 목자 의 영성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일률적으로 똑같은 한 데나리온의 임금을 지불한다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공평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일찍부터 일한 자의 불평은 당연합니다.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하는 군요.” 이 겉 똑똑한 일꾼은 주인의 깊은 심중을 몰랐습니다. 하느님 판단의 잣대는 합리성이 아니라 자비임을 몰랐고, 사람은 업적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은총으로 구원 받는 진리를 몰랐습니다.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와 은총을 인간 상식이나 합리의 잣대로 재려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제 분수를 지키는 게 겸손입니다. 선한 목자 영성을 지니는 지름길입니다. 상대방 하나하나에 대한 깊고 자상한 배려의 사랑입니다.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유순하게 대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책벌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권고해 주어야 한다. 또 각자의 성질과 지능에 따라 모든 이에게 순응하고 알맞게 해 줌으로써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손해가 없도록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착한 양들의 수효가 늘어나는 것을 기뻐해야 할 것이다.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들의 구원 문제를 소홀히 하거나 가벼이 보아 넘기지 말아야 하며, 자기가 영혼들을 다스리도록 책임 맡았으므로 그들에 대해 헴 바침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베규2,31-34).” 목자인 아빠스가 모든 형제들에게 맞춰야 하며, 아빠스는 물질적인 것들로 인해 자기에게 맡겨진 영혼들의 구원을 소홀히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비와 지혜의 영성으로 교회와 수도회의 모든 장상들과 부모들은 물론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시며 선한 목자 주님의 겸손과 온유를 배우는 시간입니다. 아멘.
이왕 쓰는 김에 하루 종일 고생한 사람들에게 몇 푼 더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후한 주인이 자기를 위해 수고한 이들에게는 오히려인색한 것 같아 약간 아쉽기도 합니다. 비유 내용을 아무리 읽어 봐도, 주인은 농사에 관심이 있어서 일꾼은 찾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그 일꾼들이 아침부터 서 있는 것을 보았단 얘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는 일꾼의 대답은 옳습니다. 오후 5시까지 일꾼을 찾아야 할 정도로 손이 모자랐다면 일찌감치 그 일꾼들을 데려다 썼을 것입니다. 결국 일을 시키는 이유도 꼭 일손이 모자라서가 아니었고,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주는 이유도 수고를 보상하려는 이유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부족함 없이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아무런 수고 없이 공짜로 은총을 받아 누리는 사람은 물론 감사해야 하지만, 많은 수고를 한 사람 역시 감사할 이유는 충분합니다.
일찌감치 품삯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편안한 마음으로 일하는 행복을 누렸지 않습니까? 못하겠다고 손사래 치지 않고, 봉사를 부탁할 때 기쁘게 응답하는 이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른 아침에 선택되어 일터로 간 행운의 일꾼들은 오후 5시가 되도록 아무도 자신을 일꾼으로 뽑아가지 않아 ‘내 자식들을 어떻게 먹일꼬!’ 하며 애간장을 태우던 이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다. 전자는 뙤약볕 아래서 일을 하되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받을 확실한 희망을 갖고 있었으나 후자는 가진 것도, 체력도, 재주도 없어 뽑히지 못해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불안과 두려움과 걱정에 싸여 희망 없이 지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 곧 하느님 아버지는 그 점을 너무도 잘 아셨기에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20,13) 정의를 세우셨다.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일꾼도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한 일꾼처럼 가족과 함께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하고 추위를 가릴 옷과 집이 필요하다. 먼저 온 일꾼들은 주인의 후한 처사를 시기함으로써 스스로 꼴찌의 자리에 선 것은 아니었을까?
예전 아빠스님의 말씀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장상은 형제들을 섬기고 돌보는 목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평범한 말이지만 새롭게 와 닿은 ‘목자’라는 말,
‘신부’나 ‘사제’라는 말은 자주 사용하지만,
예전 신학교 교수님의 비판적인 따끔한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신부(神父)가 뭡니까?
목자와 양떼의 관계를 망각하고 의식 없이 살아간다면,
목자의 영성,
오늘 1독서 에제케엘 예언자를 통해
마침내 속이 탄, 하느님의 선언입니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참 목자는 주님 한 분 뿐이십니다.
화답송 후렴대로,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습니다.
주님은 닮을수록 선한 목자의 영성을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하느님을 상징하는
상식으로 볼 때, 오전 9시, 낮12시, 오후 3시, 오후 5시부터 시작한 자들에게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지극히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불평입니다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가지고 가시오.
하느님의 영역을 존중하여 월권(越權)하지 말고
오히려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배워 따르는 것이
베네딕도 성인 역시 아빠스의 우선적 자질로 선한 목자의 자세를 꼽습니다.
길다 싶지만 내용이 좋아 인용합니다.
“아빠스는 영혼들을 다스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질을 맞추는 일이
무엇보다도 지나가고 사라질 지상 사물에 대해 지나치게 마음을 쓰느라고,
형제들이 아빠스에게 맞춰야 하는 게 아니라
이런 목자의 영성,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영성입니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강영구신부-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느님의 이상한 계산법 -상지종신부-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또 다른 하늘 나라의 비유를 듣습니다. 오늘의 비유를 묵상하면 사람의 이기적인 마음과 하느님의 자비, 인간의 정의와 하느님의 정의가 서로 부딪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 아침 9시,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에 일꾼을 부릅니다. 날이 저물어 하루 일한 품삯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대충 이 시간을 오후 6시 정도라고 생각해봅시다. 오후 5시에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일한 시간을 따져보면 오후 3시에 온 사람은 세 데나리온을 받아야 하고, 아침 9시 온 사람은 아홉 데나리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 대충 오전 8시 쯤이라고 하면, 이 시간에 온 사람은 열 데나리온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사람들의 공정한 계산 방식이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경제) 정의입니다. 사람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인간들의 물질적인 경제 정의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이러한 정의가 항상 지켜진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열악한 노동 조건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가 정당한 임금을 받고 일을 하는 노동자보다 훨씬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일꾼들은 자신의 정당한 주장, 적어도 인간의 정의로는 타당한 주장을 포도원 주인에게 합니다. 이들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포도원 주인의 자비로운 마음에서 보면, 이들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포도원 주인은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일한 사람에게는 한 데나리온을 주고,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일한 시간만큼만 계산하면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살펴 본 계산을 역으로 하면 되죠. 아침 아홉시에 온 사람에게는 10분의 9 데나리온을, 오후 3시에 온 사람에게는 10분의 3데나리온을, 그리고 오후 5시에 온 사람에게는 10분의 1 데나리온을 주면 되었습니다. 아마 이렇게 주었다면 일찍부터 나와 하루 종일 일한 사람으로부터 항의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포도원 주인은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자신과 가정을 꾸려가야 할 일꾼들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하루종일 초조한 마음을 졸이며 막막한 생계를 걱정했을 오후 5시에 온 일꾼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고 싶었던 것이 포도원 주인의 마음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계산 방식이고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일보다 사람을 먼저 봄으로써만 가능한 생명력있는 삶의 경제 정의이지요. 사람들은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상황을 이것 저것 조목조목 따져 거기에 맞는 대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도 오늘 포도원 일꾼들이 일한 시간을 따져서 거기에 맞게 품삯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들과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은 바로 온전한 한 사람 자체이고, 이 사람의 삶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일꾼들이 일한 시간을 따지지 않고 하루 생활할 수 있는 품삯, 즉 한 데나리온을 모두에게 나누어 준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오후 5시에 불려온 일꾼이라면 주인에게 항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인의 자비로움에 감사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른 아침에 불려온 일꾼이라면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어 주인의 처사가 못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의 처사가 몰상식한 것이라고 불평하겠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일을 돕기 위한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우리의 삶은 곧 하느님의 일꾼이 되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먼저 불릴 수도 있고, 나중에 불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 언제부터 언제까지 한 것이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의 품삯을 치러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그리고 주님께서 치러주실 삶의 열매를,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여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일꾼으로 불러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품삯을 치러주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까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그대에게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과 형제들이 잘 되는 꼴을 보아주지 못하는 심술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도 배가 아픕니다.
공평과 정의의 잣대를 고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마저 불평하게 됩니다.
아침 일찍 포도원에 나와서 일한 사람은 해거름에 나와서 일한 동료가 주인으로부터 자기와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감사하며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혼자서 많이 차지하고 누리는 곳에는 하늘나라가 없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가 16,19-31)를 잘 아시지요.
부자가 한 방울의 물이 아쉬운 지옥(地獄)에 떨어진 것은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거나 사람을 죽이거나 악한 일을 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비단으로 몸을 감싸고 호의호식하며 자기 삶을 즐길 줄만 알았지,
대문간에 누워있는 거지 라자로의 불행과 고통을 철저히 외면했습니다.
거기에 지옥(地獄)이 있었고 지옥을 살았던 부자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하늘나라(天國)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하늘나라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주권(主權)을 행사하시어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대자비(大慈悲)를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하늘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정의가 꽃피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꽃피는 나라입니다.(一明)
-이재희신부-
1년 전 쯤에 제가 타던 차를 판 적이 있습니다.
근데 그때 누가 저에게 말해주기를 차에 세차도하고 광도내고 타이어엔 약품을 뿌려서
더 새것처럼, 때깔좋게해서 팔아야 돈도 많이 받고 잘 팔린다고 했습니다.
중고상에도 차 팔 때 다 그렇게 겉만 보기 좋게 해서 돈 많이 받고 판다고 했습니다.
차를 사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차의 성능보단 겉모습으로 값을 매기는 것입니다.
물건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도 높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눈에 보이는 외부의 형태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사물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똑같은 상품을 자꾸 대형화시키고 자꾸 비싼 값으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값도 싸고 소비자에게 유익한 물건은 이윤이 적다는 이유로 더 이상 만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선택의 압력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 본래의 모습은 중요하게 생각지 않고 화장하고 겉만 치장하려 합니다.
겉을 바꾸기 보다는 삶을 바꾸고 내면을 변화시키려는 풍토가 사라지는 것이 아쉽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시작해서 맨 처음에 온 사람 순으로 임금을 주었습니다.
처음에 온 사람들은 자기들이 더 많이 받겠지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모든 일꾼들은 똑같은 임금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아침에 일찍 온 사람에게나 오후 늦게 온 사람에게나
임금을 똑같이 주는 것은 불공평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일을 많이 한사람, 시간적으로 오래 한사람이 보상을 많이 받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하고 그렇지 않고, 또 내가 본당에서 직책은 무엇을 맡고 있고,
영세를 일찍 받고 늦게 받고 그것이 은총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할 때 더 귀한 일이 있고, 덜 귀한 일이 있고
더 중요한 일이 있고 덜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날 일의 실적이나 단순히 쓰여진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이 주어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내가 이제까지 열심히 살았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이제까지 너무 못살았다는 실망과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것도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이 순간 이후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느냐,
그렇다면 지금 내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다면 현재의 변화된 모습과 일하고 있는 그것만으로
하느님의 은총은 풍성하게 내려질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한 나라이며,
하느님께서 활짝 열어 놓으셨기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오후 늦게 와서 일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품삯을 주는 주인의 모습에서 우리는
돌아온 탕자를 따뜻이 맞아들이는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과
십자가 옆에서 회개하는 죄인을 받아들이시는 주님의 인자하신 모습을 떠올립니다.
신앙인의 삶에서 변화가 지금 시작되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시작된 변화만으로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뒤늦게 후회하고 회개한 사람이 구원된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언제나 후하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한편, 겉으로는 일을 잘하고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잔꾀를 부린다거나
심성이 악한 사람에게 은총이 풍성히 내려진다면 그것도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현대에는 포도원에 일하러 오라고 부르는 포도원 주인의 음성을 들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할 일이 많은데도, 본당에서 일을 맡기고자 하는데도
봉사에 적극적이지 못한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선택과 판단
-이철희 신부-
우리는 세상을 온전히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야 자유이지만, 그 말을 할 때 갖는 생각은 세상의 것이라면 내가 무슨 일이든지 해도 좋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보통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말로는 가능해도 실제로는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복음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이야기에, 예수님은 우리더러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검가나 희게 만들지 못하면서 맹세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세상일에 대한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세상 모든 일을 한 가지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자신감은 하느님을 두렵지 않게 생각하는데서 나옵니다. 신앙의 표현으로는 하느님을 두렵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인 오만함에서 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하는 자연스러운 이야기로 한다면 ‘나보다 더 힘이 강한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일에 자신감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정말 필요할 때는 두려움을 갖기 마련입니다.
신앙인으로 생각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가리켜 ‘두려워 함’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특히 견진성사를 이야기할 때에 그런 표현을 씁니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하느님을 공경하는데서 나오는 존경심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귀신들을 두려워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올바로 돌아보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태어나는 일도 내 맘대로 못했고, 세상을 다 마치는 순간이 언제인지도 모르면서 그 둘 사이의 인생의 시간을 우리는 함부로 생각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요?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백성들의 목자를 향하여 징벌의 소리를 선언하십니다.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소리를 하면서도 정말로 필요한 순간에는 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 소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의 삶을 더 낫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야 각자의 마음이기는 해도 그것이 올바른 일인지는 따로 생각해야 합니다.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한 주인의 처사에 항의하던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던 포도원 주인의 말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일에 대한 하느님의 선택과 판단에 대하여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드러낼 수 있는 올바른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양(量)과 질(質)의 차이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단독으로 전해주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이다.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비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하늘나라에 관한 것이다. 오늘 복음의 포도원 일꾼의 비유가 지난 월, 화요일의 복음이었던 ‘부자청년의 추종거부 이야기’(19,16-22)와 ‘부자의 구원불가능에 대한 단언’(19,23-26)과 ‘예수추종의 보상에 관한 대담’(19,27-30)에 이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것은 마태오가 앞서간 예수님의 가르침을 요약하는 뜻으로 오늘의 비유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19,30)는 역설적인 말을 오늘 마태오가 단독으로 전하는 비유의 끝(20,16)에 되풀이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종말에 이르러 하느님나라가 완성되면 삶의 모든 부분에서 약간의 서열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변화, 즉 처음과 끝이 뒤바뀌는 그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은 초기 교회 안에 상당히 짙게 깔려있던 생각이었다. 이는 마치 유행어와도 같은 것이었다.(마르 9,35; 10,31; 마태 19,30; 20,16; 루가 13,30) 그러나 이러한 처음과 끝의 뒤바뀜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이다. 예수께서 친히 이 말씀을 발설(發說)하셨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생각은 사람들의 것과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비교적 사회의 피지배계층과 소외계층이 예수를 추종하였기에 그 추종의 대가로 이런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 생각의 참뜻은 오늘 비유에 담겨있다.
오늘 비유는 하늘나라에 관한 은유법(隱喩法)이기는 하지만 비유 자체로도 그 뜻이 충분히 전달된다. 포도원은 하늘나라요, 장터로 일꾼을 찾아나가시는 분은 포도원의 주인인 하느님이시다. 포도원에서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약속 받고 일하는 일꾼들은 하느님의 백성들이다. 마태오가 포도원 주인이 장터에 나가 일꾼들을 불러 일을 시키는 시간을 아침 6시,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로 구분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마태오가 제시하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구분이다. 각 시간대(時間帶)의 순서는 곧 구약의 선택받은 백성들, 즉 백성의 원로들과 지도자들, 대사제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일반 서민들, 그리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들, 즉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 소외 받은 사람들,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와 창녀들의 순서로 볼 수 있다. 이같이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하느님나라에 초대받았다는 것이다.
비유 속에서 보듯이 포도원 주인의 후한 처사에 대하여 처음부터 일하던 일꾼들의 불평은 당연하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품삯이 한 데나리온으로 약속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중에 온 일꾼이 일찍 온 자기와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배 아프다 못해 신경질 나는 일이다. 사람의 계산법은 그렇다. 적게 일하고도 많이 일한 사람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적게 일한 사람 측에서 볼 때는 재수나 횡재 같이 보이고, 많이 일한 사람 측에서 볼 때는 억울하고 불공평하며, 때로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산법은 다르다. 하느님의 계산법이 다르다고 해서 인간의 상식(常識) 완전히 벗어난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오산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비유자체의 내용에 머물지 말고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중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비유는 두 가지 교훈을 담고 있다. 첫째는 하느님 나라에 세상의 모든 사람이 초대를 받았으며, 초대받은 사람은 모두가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다. 꼴찌로 초대받은 세리와 창녀들에 대한 하느님의 후한 처사에 먼저 초대받은 사람들의 심기(心氣)가 불편한 것은 당연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산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대접이라고 해서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그곳에 두 번째 교훈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엔 같은 대접이지만 그 내용은 다르다. 품삯의 양(量)은 같지만 그 질(質)은 다르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의 한 데나리온 속에는 하루 종일 흘린 땀과 정성이 베어있다는 것이다. 늦게 왔는데도 같이 주어진 품삯의 가치는 처음 것과 다르다는 말이다. 많은 수고 없이 주어진 품삯은 같은 액수라 할지라도 그만큼 가치가 떨어진다. 이는 양만 많으면 좋아하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큰 경종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같은 양이라 할지라도 받는 사람에 따라 그 내적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마태 20, 1-16)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찾아보자.
첫째 우리는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예수님께 채용된 일꾼들이라는 것이다.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포도는 기쁨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복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모두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채용된 예수님의 일꾼들이다. 따라서 모든 크리스챤의 첫째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바로 그곳에서 나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유치원에서 일을 하던지, 가정에서 가정 주부로서 일을 하던지, 직장에서 일을 하던지, 또는 병원에서 일을 하던지, 크리스챤의 첫째 의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성직자 수도자들이 운영하는 병원, 학교, 유치원, 사회복지, 양로원 등을 가보면 운영자체에 역점을 두고 있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성을 두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만일 우리가 복음 전하는 일에 중요성을 두지 않고 사업체의 운영에 또는 일에 중요성을 두고 있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먼저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해야 한다.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모든 사업체는 복음전파의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가정의 가장들이나 주부들도 어떻게 하면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직장에 가면 직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으로 채용된 주님의 일꾼들이기 때문이다.
저의 매일 복음 묵상이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이 내용만이라도 가족들과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는 것도 아주 훌륭한 복음 전파에 동참하는 것이다.
두 번째, 포도밭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포도밭은 하느님의 백성을 말한다. 이사야서에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 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서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 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 말인가? ..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이사 5, 1-7)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어 에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구해주시고 그들을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복지의 땅으로 인도하시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 보살펴준 백성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도 않았고 야훼의 계명도 지키지 않았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말인가?"라고 한탄할 정도로 야훼의 말씀을 듣지 않은 백성이었다. 이제 옛 계약을 폐기하시고 새로운 계약을 맺으시어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한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포도밭으로서 포도송이를 맺어야 할 하느님의 백성들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야훼께서 새로 만든 포도밭이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포도밭을 가꾸어 포도가 송이송이 맺게 해야 한다. 포도송이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일하는 곳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내가 포도송이를 맺어야 할 포도밭은(장소는) 바로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정, 직장 등은 포도송이를 맺어야할 포도밭이다. 포도송이를 맺으려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그 사랑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그곳이 집안이든 아니면 직장이든 그곳은 나의 포도밭이 아니라 주님의 포도밭이다.
따라서 우리는 채용된 일꾼답게 성실하게 일해서 많은 포도송이를 맺게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 빈둥 노는 사람, 자기가 관리해야할 포도밭은 팽개쳐 놓고 다른 사람의 포도밭에 가서 그 사람도 일을 하지 못하도록 훼방노는 사람 등은 자기 몫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나에게 맡겨진 포도밭에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세 번째 우리는 주님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를 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은 내가 잘나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당신의 일꾼으로 불러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나 같은 이를 당신의 일꾼으로 불러 주시어 당신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불러 주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드리며 기쁘게 일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루 일한 대가를 바라보고 일을 한다면 그것은 노동자로서 노동을 하는 것이요 일종의 노예로서 일을 하는 것이지 사도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일한 대가에 목적을 두고 일을 한다면 즉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기쁨을 맛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창조적인 복음 전파를 할 수 없고 다만 마지못해서 시키는 일이니까 억지로 하는 복음전파가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어떤 대가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도록 불러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노예로 일하도록 불러 주신 것이 아니다. 일할 것이 없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김으로서 일하는 데에서 오는 기쁨을 누리도록 하신다. 따라서 포도밭에서 일하는 이는 일 자체에서 즉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아야 한다. 한 데나리온이라는 돈은 보너스로 받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하루 품삯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약속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내가 얼마를 더 받을까 다른 사람들은 얼마를 받을까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말고 오직 나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앙생활을 10년 한 사람이나 5년 한 사람이나, 이제 갓 영세한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복음을 전하라고 불리움을 받은 주님의 일꾼들이다.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하도록 불리움을 받았고 그 일을 얼마나 충실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얼마를 받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한 데나리온이란 하루 일한 노동의 대가의 비용이다. 즉 우리가 하루 생활할 수 있는 돈이다. 그러나 우리가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어떤 노동의 대가 때문에 일하는 것은 아니다. 즉 한 데나리온 때문에 일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노동의 대가를 바라보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는 사람"에게 일할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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