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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사망 직후 가졌던 북한정권 붕괴의 꿈은 김대중 당선과 박근혜 탄핵에 의하여 물거품이 된 정도가 아니라 한국이 오히려 불리한 처지에 서도록 만들었다.
韓民族 역사상 가장 많은 同族을 살육한 반역자 김일성이 죽은 지 30년이 되는 날이다. 1994년 7월8일에 사망한 사실이 9일에 발표되었을 때 곧 북한정권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이들이 많았지만 지금 손자 김정은은 당시보다 훨씬 강화된 입장에서 한국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김일성은 88 서울올림픽을 막기 위하여 아웅산 테러와 대한항공 폭파 사건을 일으켜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그는 별로 알아주지도 않는 세계청년 축전이란 것을 1989년 평양에서 개최하여 구긴 체면을 살리려 했으나 여기에 50억 달러를 낭비, 90년대의 대기근 사태를 예약했다. 1997년 황장엽 비서가 한국으로 탈출했을 때 그는 북한의 비참한 떼죽음 실상을 전하면서 조금만 더 밀면 김정일 체제가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이때 황장엽은 "1980년대 후반부터 북한은 김일성-김정일 공동정권이었고 점차 김정일 정권으로 변질되었다"고 했다. 북한정권의 본질에 대한 남한 당국자의 시각(視角) 조정을 요청한 말이었고 왜 김정일 정권이 붕괴되지 않는지에 대한 해답이기도 했다. 당시 북한은 소련의 해체와 중국의 개방으로 배후가 약해지고 대기근으로 내부가 흔들리는 가운데 핵개발에 매달리고 있었지만 초기단계였다. 김영삼 정부가 미국과 협조하여 핵시설을 폭격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대이기도 했다.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30여만 표 차이로 이회창 후보를 누른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이 된 것이 김정일에게 탈출구가 되었다. 김대중은 현대그룹을 앞세워 김정일에게 5억 달러(현물 5000만 달러어치)를 주고 사실상 평양 회담(2000년 6월)을 매수,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이 돈은 핵무기 개발에 들어갔다. 敵將에게 돈을 주고 약점 잡힌 바 된 김대중은 6·15 선언을 매개로 하여 건국 이후 유지되어 온 對北정책의 기조를 親北으로 바꿔치기하고 미국의 부시 정부와는 껄끄러운 관계가 되었으며 종북세력의 발호를 응원했다. 햇볕정책의 본질은 핵개발중인 정권에 자금을 지원, 핵폭탄을 완성시키는 것을 도운 반역행위였다. 햇볕을 쬐어 핵폭탄을 만들게 했으니 노벨 평화상이 아니라 노벨 화학상을 받았어야 했다.
김대중이 김정일을 살린 것이다. 그는 자신의 對北정책에 반대하던 조중동을 수사했고, 군 수뇌부는 그런 대통령을 의식하여 안이한 자세를 취하다가 2002년 6월29일 연평도에서 한국해군이 기습을 당하도록 방조했다. 6·15 선언으로 강화된 좌파세력은 2002년 대선 때는 미군 장갑차 사고를 촛불시위로 악용했고, 노무현 후보는 50여만 표 차로 이회창 후보를 눌렀다. 선거를 앞두고 검찰 내 호남인맥은 김대업 사기 폭로 수사를 농단, 이회창 낙선에 힘을 보탰다.
노무현 정부 때 국민행동본부 등 보수세력은 처음으로 거리와 광장으로 뛰쳐나와 투쟁세력화했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의 對北정책을 계승했으나 여론의 지지를 잃어갔다.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서도 노무현은 별다른 제재를 걸지 않았으며 퇴임을 다섯 달 남겨놓고 2007년 10월 평양에 가서 김정일을 만나 10·4 선언에 합의한 것은 정권이 보수로 넘어가더라도 對北정책을 바꾸지 못하게 하려는 일종의 대못질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등장 직후 있었던 북한군의 금강산 관광객 사살 사건으로 남북관계는 경색되었고 우파의 입장은 강화되었다. 2009년 5월 노무현이 수사중 투신자살한 사건은 코너로 몰린 좌파에 再起의 계기가 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때 조문을 거절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김정일의 사망에 즈음하여 쓴 사설에서 "그가 자연사하도록 한 것은 인류의 수치다"고 했다. 김일성 3父子가 죽음으로 몰고 간 韓民族이 300만 명이 넘는다는 점에서 세 악당의 존재 자체가 히틀러를 自力으로 제거하지 못했던 독일인처럼 한민족의 수치이기도 하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핵실험에 대응하여 개성공단을 폐쇄하는 등 강력대응했으나 외교에선 친중반일 노선으로 기울었다. 중국 인민해방군 창건일 행사에 자유세계 지도자로선 유일하게 참석했던 박근혜 대통령은 성주 사드 배치를 결단하는 순간 중국의 보복을 불렀고 새누리당의 분열로 인한 탄핵으로 물러나 문재인 정권의 등장을 허용하고 말았다. 문재인은 김정은과 내통하고,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허영심을 이용, 한반도 평화사기극을 연출했다. 2018년 9월엔 평양에서 연설하면서 자신을 남쪽 대통령으로 격하시키고 아들뻘 되는 김정은을 국방위원장 및 민족의 지도자급으로 칭송했다. 한국이 항복도 하지 않았는데 9·19 군사합의로 수도권 상공에 自國 공군의 비행금지를 명령했다.
2019년 2월 트럼프-김정은 하노이 회담의 결렬로 문재인의 꿈도 사라지고 그 뒤로는 북한정권의 조롱대상이 되어 여론이 악화된 것은 윤석열 정부 등장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윤석열 정부는 한일갈등을 해소, 한미일 동맹관계를 복원했으나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권 15년간 성장한 종북세력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결속, 김정은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한 한미일 군사훈련까지 공개적으로 반대할 정도로 노골화되었다.
김일성 사망 직후 가졌던 북한정권 붕괴의 꿈은 김대중 당선과 박근혜 탄핵에 의하여 물거품이 된 정도가 아니라 한국이 오히려 불리한 처지에 서도록 만들었다. 김정은은 핵미사일 종합 세트를 확보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와의 동맹관계도 복원했다. 오늘밤이라도 김정은이 핵미사일 발사 단추를 누르려 할 때 北에는 말릴 사람이 없고 南에는 막을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집권여당은 총선 때 북핵문제나 핵무장을 거론하지 않았고, 한반도의 김일성 세력이 갈망해온 수도서울 포기를 공약했다(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공약한 국회의 세종시 이전과 정치수도 건설). 자주국방 의지가 없는 국가 지도부는 30년 전보다 더 취약한 안보상황을 만들었다. 김일성은 30년 전에 죽었지만 그의 유령이 아직 한반도를 배회하고 있다. 한국인의 운명은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다. 지난 30년 우리는 무엇을 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