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달은 딸기빛이었고 구름은 없었어요 달 주위로 파르스름한 달무리가 졌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어요 하지만 황구인지 백구인지는 모르죠 젖은 풀밭엔 여치가 울고 있었고요 그는 파란 벨벳조끼에 장식 없는 가죽신을 신고 있었는데요 벨벳조끼엔 세 개의 주머니가 있었죠 한 개의 주머니엔 회중시계가 들어 있었고 다른 한 개의 주머니엔 동그란 보안경이 꽂혀 있었고 나머지 주머니엔 담배가 들어 있었죠 소지품들은 각각 제자리에 언제나 들어 있는 것처럼 그는 익숙한 동작으로 시계를 보고 안경을 꺼내어 쓰고 담배를 물었어요 그 일련의 움직임들은 백 년쯤 반복된 습관처럼 바라보는 나조차 하나의 박물관 붙박이 신발장처럼 만들어버렸어요 그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라고 처음 말을 떼었을 때 나는 할 말이 없었어요 그는 시계를 꺼내어 내게 보여주었는데 9시 53분이었어요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해하자 그는 그의 안경을 나에게 씌워주고 다시 한 번 시계를 보여주었죠 그러자 그의 시계는 9시 50분을 향해 가고 있었지요 아직 돌아오지 않은 시간의 안부를 묻는 그와 박하향의 담배를 나누어 피우곤 우린 곧 헤어졌어요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나의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지나갈 때 내 발엔 여치가 밟혀 죽어가고 있었어요 죽은 여치는 더 이상 울지 않았고 달무리 진 보름달이 밤하늘에 총구처럼 놓여 있었죠
*문학과 사회
피터래빗은 1902년 영국의 작가 비아트릭스 포터(Beatrix Potter;1866~1934)가 한 소년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만든 동화 속의 주인공이다. 새삼스럽게 100년이 지난 지금 예전의 구닥다리 피터래빗이 90년대 들어 다시 유행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그 전까지만 해도 천덕꾸러기로만 대접받던 만화가 영상시대가 도래하면서부터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게 되고 완구업계, 팬시업계 등 여러 분야에서 높은 상품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조끼를 입고 모자를 쓰고 회중시계를 차고 다른 동물들과 어울리는 피터래빗의 모습은 영락없는 사람과 같다. 동화 속에서 피터래빗은 영국의 순박한 농부였다가, 아니면 점잖은 신사였다가, 또는 귀여운 장난꾸러기로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이쯤 알고 나면 이 착하고 순진한 토끼를 저격한 이유가 뭘까에 대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피터래빗 저격사건의 전모를 살펴보자. 첫 번째 시는 목격자에 관한 것이다. 첫 시에서의 시적 화자는 저격이 일어난 그 날 밤의 정황을 자세하게 증언해주는 목격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저격수의 모습까지도 생생하게 눈 안에 담아둔 사건의 결정적인 증인이다. 그날 밤 달은 붉은 물이 뚝뚝 묻어날 듯한 딸기빛으로 사건의 발생을 암시한다. 경고처럼, 개짖는 소리가 들렸고 그 아래에서 여치는 젖은 목소리로 곡을 하고 있었다.
저격자로 보이는 "그"는 파란 벨벳 조끼에 장식없는 가죽신을 신고 있다. 그 조끼엔 세 개의 주머니가 달려 있는데 하나는 회중시계, 하나는 보안경, 하나는 담배가 들어 있다. 우선 여기에서 그의 정체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그는 보통의 저격수가 아니다. 그는 "벨벳조끼"를 입고 "회중시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영국 출신의 작가 루이스 캐롤이 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에게 빚지고 있다. 이상한 나라 속의 토끼는 늘 시간에 쫓겨 허둥대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늘 회중시계를 보면서 시간을 체크하고는 바삐 뛰어다닌다. 시인은 이 토끼의 특이한 습성에 주목하여 캐롤이 그려낸 토끼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시간과 관련된 이미지만을 차용한다. 곧, 토끼는 시간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이와 함께 연상되는 피터래빗 또한 시간의 의인화에 다름아니다. 곧 저격자 역시 피터래빗이다. 그의 한 쪽 주머니에 든 회중시계는 시간의 증표이며, 담배는 시간을 흘려 보내기 위한 촉매제의 역할을 한다.
어쨌든 "내"가 기억하는 건 내 시선을 박물관 붙박이장처럼 못박아버린 그의 기다림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는 것. 마치 시간에 잠겨 있는 것처럼 조급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느긋함으로. 그의 시계는 여느 시계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안경을 끼고 보면 시간은 과거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저격할 대상은 현재나 미래 속에 있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저격 대상은 반드시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맞닥뜨리게 되어 있다. 결국 그가 돌아오지 않았냐고 묻는 것은 과거의 피터래빗과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될 어떤 시각이다. 시간인 그가, 저격하고자 하는 대상 역시 시간인 것이다. 현재의 피터래빗이 과거의 피터래빗을 저격하려는 사건, 즉 현재가 과거를 죽이려는 것이 이 사건의 전말이다. 시간이 시간을 죽인다? 왜 현재는 과거를 살해하려고 할까? 그것은 과거를 죽이고 그것을 흐름 속에 영영 파묻어버려야만 비로소 현재가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현재는 과거를 딛고 존재한다. 다시 말하자면 현재는 과거의 희생 아래에서 탄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모든 총구는 과거를 겨누고 있다. 달무리 속에서 형형한 빛을 감춘 채 놓아둔 보름달처럼.
이 사건에서의 핵심인물은 목격자인 "나"이다. 나의 진술에 의해 저격수와 그날 밤 상황이 묘사되는데, 문득 관찰의 대상인 그가 내게 친근하게 말을 걸고 나 역시 그와 박하향이 나는 담배(humming time)를 나누어 피게 된다. 그리고 그의 이상한 시간을 엿보면서 그와 은밀한 교감을 나누게 된 이후부터 나는 방관자의 입장에서 방조자의 입장으로 전환되고 실수로(혹은 고의로) 위험을 알리는 제보자이자 또 하나의 목격자일 지도 모를 여치를 죽여버리고 난 이후부터는 목격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살해자가 되어버린다. 목격자로서의 객관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목격자와, 저격수와 살해자의 구분이 분명치 않은 이 의문의 사건은 다음 시 "저격수"로 계속 이어진다.
첫댓글 딸기빛 달... 이 첫마디에 푹 빠져들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