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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27일 화요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제1독서 : 욥기 3,1-3.11-17.20-23
복 음 : 루카 9,51-56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11호에 타고 있던 닐 암스트롱이 처음으로 달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러면서 달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전까지는 달은 그저 신비로운 장소일 뿐이었지요.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는 옥토끼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나라에서 달이 가장 큰 보름에 맞춰 농경 사회에
의미 있는 행사(정월대보름, 백중, 추석)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달에 직접 갈 수는 없고, 눈에 보이기만 하니 그냥 신비로운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달 착륙 후 신비로움에서 벗어나 구체적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나의 이웃과 함께해야 구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혼자만 살면 그만이라면서 함께하는 자리를 피한다면
사람의 기억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의 마음에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자기의 마음을 활짝 열 수 있어야 합니다.
함께해야지만 구체적으로 서로에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신적 존재가 아니기에 절대로 사람들과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던 예수님께서는
심부름꾼을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보내서 숙박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이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실 그 전에 이미 사마리아 지역에서 환영받아 머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환영하지 않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다인들이 과월절을 지내는 곳은 시온산, 즉 예루살렘입니다.
그에 반해 사마리아 사람들은 과월절은 그리짐산에서 지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가는 예수님 일행을 환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전례적인 이유로 거부했던 것이지요.
여기서 제자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말합니다.
상당히 격분해 못 참겠다는 표현입니다.
그만큼 자기 스승께 대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홀대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은 누가 내릴 수 있는 것일까요?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으면 어떤 불도 내릴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함께하는 마음 자체가 없으니,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폭력적으로 이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든 함께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 누구도 구원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이웃들과 함께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신비의 차원이 아닌, 구체적으로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승리의 삶
-우리는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 저녁성무일도시 평범한 응송과 마리아의 노래 첫 구절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내 영혼을 고쳐 주소서, 당신께 죄를 지었나이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참으로 육신에 앞서 우선적으로 건강해야 할 영혼입니다.
영혼이 육신을 끌고 가야지 영혼이 육신의 욕망에 끌려가선 안 됩니다.
죄로 인해 영혼이 상처 입었을 때
즉각적인 회개를 통한 주님의 용서가 영혼 건강에 필수입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입니다.
영혼 건강을 위해 평소 하느님 찬송, 찬미, 찬양을 위한
자발적 항구한 노력과 실천이 제일입니다.
거짓이 난무하는 혼란한 시대, 많은 영혼들이 죄로 인해 병든 시대입니다.
요즘 정치권에는 지록위마謂鹿爲馬 고사가 회자 되고 있습니다.
뜻인즉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으로
얼토당토않은 것을 우겨서 남을 속이려 할 때 쓰는 말이며,
윗사람을 속이고 권세를 휘두르는 자들을 비판할 때 쓰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진실의 승리가 아닌 거짓이, 목소리 큰 사람들이 이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진실의 승리입니다.
지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카차흐스탄 사도적 방문 후 귀국 중
기내에서의 인터뷰 중 다음 정치에 관한 대목에 공감했습니다.
“정치를 할 수 있는 능력은 예술입니다. 정치는 고귀한 직업입니다.
저는 교황 비오 12세인지 성 바오로 6세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정치는 사랑의 가장 높은 형태의 하나’라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정치인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낮은 수준의 정치가 아닌,
높은 수준의 정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정치는 국가를 무너뜨리고 궁핍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참으로 각 계 각 층, 영적으로 뛰어난 진리의 사람들이 많이 출현했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야말로 진리의 사도, 빛나는 영적 승리의 상징입니다.
87세 고령에도 날마다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에서
주님의 전사로서의 영적 승리의 삶을 배웁니다.
“성가정이 너희에게 영감을 불어 넣도록 하라”,
여자 카푸친회 수녀님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샬롬(평화) 공동체의 젊은이들이여, 계속 창조적이 되십시오.”
로마 베드로 광장에 모인 샬롬(평화) 공동체 형제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세상 뉴스에 식상하다가도 교황님 홈페이지의 뉴스에서 신선한 활력을 얻습니다.
오랜 시간 말씀 묵상하던 중 떠오른 강론 주제는
“영적 승리의 삶-우리는 주님의 전사들입니다-”였습니다.
가까이 두고 한참 찾다 발견한 느낌에 참 반가웠습니다.
삶은 반복입니다. 그러나 영적 삶의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단조롭고 따분한 반복이 아니라 늘 새로운 반복, 놀라운 반복, 거룩한 반복입니다.
영적 승리의 삶을 생각하면 수 차례 인용했던 24년 전 자작시 담쟁이가 생각납니다.
24년 후 오늘 강론에 인용하리라곤 당시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습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정주의 제자리 삶에도
지칠 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 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지금도 거기 그 자리에는 해마다 하늘 향해 담벼락 타오르는 담쟁이들은 여전합니다.
우리의 하루하루 영적 전쟁의 삶도 이러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 진리의 전사, 지혜의 전사 등 끝이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제1독서의 욥의 영적전쟁 중 자기와의 싸움이 참 치열합니다.
어제 욥의 첫째 시련에 이어 설상가상 새로운 시련의 연속입니다.
오늘 말씀 전에 나오는 욥의 아내와 욥과의 대화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흠 없는 마음을 굳게 지키려 하나요?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려요.”
“당신은 미련한 여자들처럼 말하는구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제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욥2,9-10).-
욥을 방문한 세친구들 역시 이레 동안 밤낮으로 그와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으니 그의 고통이 너무도 큰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욥의 넋두리를 통해 그의 고통이 어떠했는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정말 실감 나는 욥의 독백의 탄식이요 기도처럼 들립니다.
생일을 저주하는 욥이요, 차라리 죽기를 소망하는 욥이요,
왜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주시는가 토로하는 욥입니다.
“이제 탄식이 내 음식이 되고, 신음이 물처럼 쏟아지는구나.”
고백에서 보다시피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정말 자기 불행과의 처절하고 치열한 영적 전투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끝까지 마지막 선은 넘지 않았으니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34년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욥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하느님께 대한 원망, 절망, 실망의 삼망은 전혀 없었음에 감사합니다.
다만 답답하고 막막할 때는 하느님을 바라보듯
늘 거기 그 자리의 하늘과 불암산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마 요셉 수도원에서 저처럼 불암산과 그 배경의 하늘을 많이 바라본 수도형제도 없을 것입니다.
34년 하루하루 날마다 수없이 하늘과 불암산을 바라보며
종신불퇴終身不退의 정신을 새로이 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다음 복음의 장면에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의 씩씩하고 용감하고 지혜로운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파스카의 구원이 이뤄질 궁극의 목적지 예루살렘을 향하기 전
영적 전의를 새로이 하는 주님입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이러한 원대한, 확실한 목표가 그대로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본말전도의 우를 범하지 않습니다.
성급한 다혈질의 야고보와 요한 제자는 길을 막는 사마리아인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시냐고 주님께 물었고, 주님의 즉각적인 반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지도자의 신속한 분별의 지혜가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습니다.
불필요하고 어리석은 충돌을 야기하지 않고
지혜롭게 피해 가는 주님의 평화의 전사, 예수님입니다.
성인들보다 더 좋은 하느님에 대한 증거는,
파스카 예수님에 대한 증거는 없습니다.
똑같은 하느님은, 파스카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성인들을 통하여, 오늘 우리를 통하여 살아 활동하십니다.
주님은 날마다 새벽부터 제게 넘치는 은총을 베푸시어 강론을 쓰게 하십니다.
오늘은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입니다.
16-17세기에 걸쳐 79세 천수를 누리며, 참으로 치열한 영적 승리의 삶으로
주님께 월계관을 받은 프랑스 출신의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 성 빈첸시오입니다.
성인의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위대합니다.
성인은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와 ‘선교사제회’를 창설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주님’이라는 말을 그대로 온몸으로 실천했습니다.
성인의 영성은 ‘활동 안에서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길’로 요약되며,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강조합니다.
성인은 어린이, 가난한 자. 병든 자, 갇힌 자 등 가난한 이들을 방문하면서
그들 모습으로 육화한 그리스도를 발견했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그리스도를 섬겼습니다.
1660년에 선종한 성인은 1737년 교황 클레멘스 12세에 의해 시성 되었고,
1885년 교황 레오 13세에의 의해 모든 자선단체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우리나라에도 성인의 영성을 이어받은
사랑의 딸회, 사랑의 시튼 수녀회,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와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가 서로 연대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결론과 같은 물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답은 하나, 주님의 전사, 즉 평화의 전사,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욥이, 성 빈첸시오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날마다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형제들과 함께 영적승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닌 영적 전우들과 더불어, 죽어야 끝나는 영원한 현역으로서의 영적전쟁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적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어린 아이에게 ‘엄마가 좋으니? 아빠가 좋으니?’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엄마가 좋다고 하면 아빠가 마음에 걸립니다. 아빠가 좋다고 하면 엄마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둘 다 좋아!’라고 대답하곤 합니다.
사제 모임에서 강사 신부님이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용서와 화해 중에 어느 것이 더 쉽습니까?”
신부님 한 분이 손을 들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용서와 화해가 둘 다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상대방의 처지와 상관없이 내가 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용서함으로써 내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처지와 상관없이 내 마음에 먹구름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평화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혼자서도 할 수 있고, 용서함으로써 내가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해는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민족이 70년이 넘게 분단된 상태도 있는 것은 용서의 차원이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가 진정으로 화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입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말다툼 끝에 싸우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저의 목을 잡고 있었고, 저는 친구의 급소를 잡고 있었습니다.
저는 숨이 막혀서 울었고, 친구는 기가 막혀서 울었습니다.
이렇게 울던 우리는 서로 잡고 있던 손을 놓았습니다.
저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고, 친구도 기가 풀려서 편하게 지냈습니다.
화해는 이렇게 서로가 잡았던 것을 놓아야 시작됩니다.
어제 욥 성인은 자신에게 닥쳐온 시련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용서함으로써 마음에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에서 본 것처럼 화해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욥은 시련을 주시는 하느님과 진정으로 화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사필귀정, 인과응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고, 옳은 일을 한 사람은 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연의 이치일지 모릅니다.
그래야 사회가 질서가 잡히고, 제대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와 화해입니다.
분노와 심판은 잠시 평화를 줄 수는 있겠지만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기 위하여,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시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배를 저어가는 선원입니다.
직책이 다를 수 있고, 하는 일이 다를 수 있지만,
모두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배가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권위와 교만’은 배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욕심과 분노’는 배를 침몰시키기도 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배가 방향을 잃게 만듭니다.
무엇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순탄하게 노를 젓게 할까요?
‘겸손과 사랑’입니다. ‘친절과 온유’입니다. ‘용서와 화해’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삶이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9,51절)에서부터 시작되는 '예루살렘 상경기'는 19장 27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시각이 가까워진 것을 감지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작정하시고 출발하십니다.
그렇게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그것은 그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의 길이요, 하늘로 올라가는 완성의 길임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올라간다'(αναλημψεωσ)는 말씀은 승천을 암시하고,
'때가 차자'라는 말은 완성(συμπληροω)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곧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요 영광임을 암시해줍니다.
또한 이는 이미 ‘첫 번째 수난 예고’에서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마리아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서로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의해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할 당시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인들을 쫓아내고 이방인들을 살게 하였는데,
훗날에 쫓겨난 이스라엘인들이 돌아와 그들과 같이 살게 되어 혼종이 생기게 되었고,
이에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고
이방인으로 멸시하게 되면서 서로 적대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열왕 17,24-41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유일한 중앙 성소로 여기고 있는(신명 12,4-14 참조)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여 가시는데,
사마리아인들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 했던
그리짐산의 중앙 성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천둥의 아들’(마르 3,9)이라 불린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마음을 봅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7)라고 하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대적하여 보복하고 응징하려 한 것입니다.
혹 우리도 오늘 자신을 맞아들여 주지 않는 이들에게 보복하고
응징하고 단죄하는 못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걷는 길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할 일입니다.
또한 몸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소서.
응징이 아니라 끌어안게 하시고, 보복이 아니라 감싸 안게 하소서.
파괴가 아니라 건설을 도모하게 하시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선을 더하여 갚게 하소서.
주님, 제 마음이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을 향한 길을 가시며,
제자들을 사마리아 마을로 보내신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시키신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제자들을 배척하였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의 경멸과 조소를 견디어야 하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온갖 폭력과 고통을 받아들이셔야 할 몸이었다.
이러한 고통 앞에 이 사마리아인들의 냉대를 예행연습의 도구로 삼으셨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위해 그들을 꾸짖으셨고,
그들을 벌주고 싶어 하는 제자들의 분한 마음을 풀어주셨다.
이것은 앞으로 제자들이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기르도록 제자들을 단련시키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제자들을 위하여서 하신 일이었다.
제자들은 이제 온 백성을 가르칠 사람들로서
방방곡곡을 다니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야 한다.
그 사명을 행하는 과정에서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무리도 만나게 된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분개했던 제자들을
오히려 꾸중하신 것은 그들을 위해서였다.
복음의 전달자로서 앙갚음하려는 마음보다는
온유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진노와 앙갚음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주님께 받은 능력을 잘못 사용하려 했던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주님의 뜻에 맞도록 사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또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나의 기준에 맞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뜻과는 거리가 있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의 선입견이나 부족한 판단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우리가 거절하는 예도 많다.
그리고 또 내가 사랑을 베풀려고 하였을 때, 거절당하거나 무시당하는 때도 있다.
이 두 가지 상황을 통하여 내가 보였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생각하여야 한다.
이제 주님의 모범을 본받아 이웃에게 더욱 관용을 베풀며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과 도움을 청하여야 하겠다.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일을 저주 하였다.
이병근 대건 안드레아 신부
“어찌하여 그분께서는 고생하는 이에게 빛을 주시고
영혼이 쓰라린 이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그들은 죽음을 기다리건만,
숨겨진 보물보다 더 찾아 헤매건만 오지 않는구나.
그들이 무덤을 얻으면 환호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련만,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는 사내에게
하느님께서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욥 3,20-23)
욥은 고통 속에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모든 것을 잃은 뒤에도 주님을 찬미하던 그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고통 앞에서 무너집니다.
말하자면 욥은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고통을 대변해서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통 앞에서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연구하기도 하고,
고통을 피해 도망 다니기도 하고,
고통의 대상을 없애버리거나,
신에게 모든 탓을 돌리며 증오 속에 살아가기도 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고통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고통이 빨리 지나가고, 고통이 어떻게든 사라지기만을 바랍니다.
고통 중이라면 반드시 임해야 할 치열한 영적 투쟁을 멈춰버립니다.
어떤 신앙인이 평소에 죄와 싸우지 않았거나,
영적으로 악마에게 승리한 경험이 없으면,
대부분의 경우 고통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자기 연민과 상처의 늪에 빠져 악마가 의도한 대로 길을 잃고 맙니다.
신앙이 아무런 소용이 없고 자기 최면에 불과한 거짓 환상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삶의 위기 속에서 기도하며 마귀에게 승리하기보다는
하느님께 질문하고 신앙에 의문을 던지며 악마가 파놓은 구덩이에 빠집니다.
바로 그 순간이 말씀과 기도의 힘을 체험하고,
신앙의 신비를 살아내며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순간임에도
쉽게 세상의 위로와 눈에 보이는 해결책을 찾아 신앙을 떠나버립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며 계명의 길에서 벗어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루카 9,53)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신앙인들은
대부분 스스로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성당에 나오지만, 사실은 복음의 근본정신에 반대하고,
회개할 생각 없이 죄의 상태에서 위안을 찾으며,
자신의 필요에 의한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결코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상종하기 싫은 이들과의 화해가 있고,
꼴 보기 싫은 원수에 대한 용서가 있으며,
늘 손해 보고, 쓸데없이 고통받고,
무력하게 종롱 당하는 현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신앙인이 보기에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사랑이 있고, 영광이 있고, 승리가 있고, 행복이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루카 9,54)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이 아니라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무관심한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나선 당신의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꾸짖음을 받지 못한 이들은 불행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경로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으로서 예수님의 전교 활동은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된다.
루카는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실 날이 가까워진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결심한 시점을 근거로
갈릴래아 활동기(루카 4,14-9,50)의 막을 내리고,
예루살렘 상경기(루카9,51-19,28)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예루살렘을 향한 새로운 여정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9,44) 직후에 시작된 것은
사람의 아들은 다른 어떤 곳이 아닌 예루살렘에서 필히 죽어야 하며,
이곳에서 필히 부활해야 함을 암시한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에 이르기 전까지 펼쳐질
예수님의 새로운 선교여행을 예고하는 것으로서,
분량으로 볼 때 루카 복음의 1/3을 차지한다.
여행의 목적지는 분명 예루살렘이지만,
이 여행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가 지도를 놓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경로를 설정한다면,
당연히 갈릴래아 호수에서부터 가장 가까운 직선 경로
즉 갈릴래아→티베리아→사마리아→세겜(그리짐산 근처)
→베델→라마→예루살렘의 경로를 택할 덧이다.
예수님의 일행도 같은 노선을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선발대를 먼저 사마리아 지방으로 보내어 묵을 곳을 찾게 하신다.(52절)
그런데 의외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의 일행을 노골적으로 거부한다.(53절)
사마리아 지방이 어떤 곳인가?
솔로몬의 통치 말기, 기원전 933년경에 히브리의 단일민족국가는
북쪽의 이스라엘왕국(수도: 사마리아)과 남쪽의 유다왕국(수도: 예루살렘)으로 쪼개진다.(1열왕 12,19)
이스라엘왕국은 기원전 721년 앗시리아의 침입으로 패망한 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히브리족의 정통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는 곧 야훼신앙의 변질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혼혈족이 되어버린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짐 산에 새 성전을 세워 혼합종교를 신봉하였다.
따라서 정통성을 고수하는 유다인과 변질 된 사마리아인 사이가 좋을 리 없다.
서로 냉대하고 적대시 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예수의 일행을 거부한 처사는 당연한 귀결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했던가?
예수님의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그들의 냉대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하늘에 청을 드려 불을 내리게 하여 저들을 불살라 버리자는 것이다.(54절)
이 대목은 구약의 엘리야가 북쪽 이스라엘 이방인의 신을 섬긴 것 때문에
오십인 대장과 오십인 부대를 두 번씩이나 불살라 죽인 사건을 떠올려 준다.(2열왕 1,10-12)
제베대오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그들에게 붙여진
“보아네르게스(천둥 또는 폭풍의 아들들)”라는 별명답게 다혈질적이고
강한 질투심과 명예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성격답게 이왕 가는 길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결판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머릿속에는 이미 두 차례의 수난과 죽음 예고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성공적인 상경과 예루살렘에서의 영광과 왕관이 번득이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이 두 제자의 야박한 마음과 잘못된 생각을 꾸짖으신다.(55절)
이 꾸짖음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 경로의 수정을 의미하는 것이다.(56절)
실제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지방을 바로 관통하지 않고,
당시 데카폴리스 지방과 사마리아 일부 지방, 베레아 지방을 두루 지나(7,11)
예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어떤 경로를 택하느냐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 길을 가느냐는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