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qktkMryeL4U
이도(李祹) 세종대왕(1397.5.15.~1418.9.19.)
Sejong the Great
세종대왕 동상 - 서울 광화문광장
인류 최고의 고전
성경(Bible)
길가메시 서사시(Gilgamesh Epoth,
The Epic of Gilgamesh)
그리스 로마 신화
(Greek & Roman Mythology)
훈민정음 해례본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인류 최고의 고전은 무엇일까?
당연히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한 줄 세우기식의 '최고'라는 말이 부담스럽지만,
훈민정음 학자로서
자신 있게 인류 최고의 고전은
훈민정음해례본
출처: 위 유네스코와 유산 홈피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하 해례본).
해례본은 1997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책으로서
1446년, 곧 지금으로부터 577년 전에
간행된 책이다.
세종대왕은 1443년에
한글을 단독으로 창제를 마무리한 뒤
대략 3년 뒤에 이 책을 간행했다.
이 책이 세계 최고 고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책이 갖고 있는 인류 보편적 가치 때문이다.
인류 문명은 지식의 진보를 통해 이룩한 것이므로
그렇다면 바로 지식 실용화와 대중화가
문명 발전의 바탕이 된다.
그러한 문명 발전의 바탕이 되는 지식은
평등하고 공평한 민주주의적 가치와 결합이 될 때
지식은 지혜가 되고 문명은 진정한 가치를 갖게 된다.
그런데 15세기에
세종대왕은 그런 지식과 지혜로
쉽게 전환되는 문자 곧 훈민정음,
한글을 창제 반포했다.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을 자세하게 해설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가치를 최고의 학문과 사상으로
풀어낸 책이다.
해례본은 수학과 과학, 철학, 음악 등
다양한 학문과 사상이 융합되어 있다.
더욱이 이 책은 15세기에
문자로부터 소외받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인문주의적 가치와 철저히 결합되었다.
그래서 문명 발전에서 말하듯이
누구나 쉽게 글을 쓰는
언문일치가 매우 중요한데,
아예 언문일치의 기능과 가치를 갖고
태어난 문자가 훈민정음이고
그것을 해설한 책이 해례본이니
이런 책이 고전이 아니면
무엇이 고전이 되겠는가?
이 책은 아주 빠른 시기에
희귀본이 되어 갔다.
종이책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문자(한자) 권력을 독점하고자 했던
양반 지식 계층의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40년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용준 선생에 의해
기적처럼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책을
그 당시 서울(경성)의 비싼 기와집
열 채 값이라는 거액을 주고 사들여서
목숨처럼 지켜낸 이가 바로
간송 전형필 선생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간송 전형필 선생이
인류 최고의 고전을 소장하고
지키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이 발견되기 2년 전인
1938년에
간송은 '보화각'이라는 최근대식,
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완공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세계적인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터를 미리 잡아 놓은 것이다.
27세 때인 1932년에는
종로구 관훈동 17번지에
백두용이 1905년에 세운
고서점 '한남서림'을 인수하여
이순황에게 운영을 맡겼다.
해례본 소장을 위한 신의 한 수였다.
왜냐하면 '한남서림'은
해례본을 구입하는
핵심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간송도 해례본 원본이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짐작을 했고
그 진품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간송 전형필(1906~1962)은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기울어가던
1906년에 태어나
해례본이 국보 70호 지정되던 해인
1962년에 순국하였다.
올해가 탄신 117주년,
서거 61주년이다.
국보 70호 지정은
12월 20일에 지정되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해 1월에 운명하였다.
전형필은 조선어연구회가 조직된
휘문고등보통학교를
21세 때인 1926년에 졸업했다.
이 학교에서 조직된 것은
임경재 교장이
조선어연구회 임원이었기 때문이다.
전형필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21세였던 1926년에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24세 때인 1929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다.
재학 시절에 당시 종로의 거부였던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았다.
1930년에 귀국하여
독립운동가였던 오세창의 영향으로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일에 나섰다.
20대 중반에 거부가 되었지만,
상속받은 거의 모든 재산을
문화재 지키는 일에
쏟아붓는 길을 걷게 되었으니
이때는 해례본 소장 10년 전이었다.
간송의 해례본 관련 주요 업적은
해례본 소장 이후
일제강점기에 대응한
가장 효율적인 보존 전략을 쓴 점이다.
당시는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였고
일제가 1938년 우리말글 사용과
교육을 금지하던 때라
소리 소문없이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1939년에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라고 명령했는데,
실제 바꾸게 한 기간은
1940년 2월 11일부터
6개월간이었으니
바로 이 무렵에 소장하게 된 것이다.
최고의 문화재를 소장하게 되었다고
호들갑을 떤다면
우리말글 탄압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일제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던 시기였다.
소장한 뒤 당시 서지학자인 송석하에게
모사본을 만들게 했고,
일부 전문가들에게만
기본 연구를 하게 했다.
당시 모사본을 얻어본 홍기문과 방종현은
해례 부분을 번역하여
조선일보에 1940년 7월 30일부터
5회에 걸쳐 연재하였는데,
연재가 끝난 지 열흘 뒤에
조선일보는 동아일보와 함께 폐간되었다.
그해 10월에는 『정음』이라는 잡지에
해례본 전문이 실리고
12월에는 정인승 선생이
한글지에 이 책을 자세히 소개하였고,
1942년에는 해례본이
전형필 소장임을 밝히고
진본임을 자세히 입증한
최현배의 『한글갈』이 나왔다.
『한글갈』이 나온 지 얼마 안 돼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져
최현배를 비롯하여
조선어학회 학자들 33인이
옥에 갇히는 암흑기가 해방까지 이어진다.
전형필의 행적은
태산처럼 무거웠고 진중했고
그 덕에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해례본을 지켜낼 수 있었다.
간송이 두 가지 해례본 영인본을
적절한 시기에 펴내
해례본의 내용과 가치를
제대로 알린 것도 큰 공적이다.
첫 번째 영인본은
광복 후 1946년
조선어학회(1949년부터 한글학회)에서
한글날인 10월 9일에
보진재에서 간행되었다.
간송은 너무나 소중한 물건을
누구에게 맡길 수 없어
직접 인쇄소에 나와
영인본 만드는 일을 거들었다.
간송의 헌신적이 도움 덕에
단행본 방식의 영인본이 출판 되었다.
이 영인본은 조선어학회
김윤경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만 부를 발행했다고 한다.
최초 영인본 해제는
1940년에 최초 번역을
홍기문 선생과 함께 한
방종현 선생이 했다.
방종현은 해제에서
"누구나 다 가져야 할 것이니
가지되 소중히 지니어야 할 것이요
누구나 다 읽어야 할 것이니,
읽되 정밀히 깨달아야 할 것이어늘
원체가 희귀함에야 어찌하리오?"라고
이 책 가치의 정곡을 찔렀다.
1957년에는
통문관 이겸노 사장의 부탁으로
김민수, 이상백의 훈민정음 해설 책
부록 방식으로
또 다른 영인본이 나왔다.
조선어학회 영인본이
판심과 지저분한 옛책 흔적을 지운
다듬본 방식의 영인본이라면
통문관 영인본은
있는 그대로 사진을 찍은
사진본 방식의 영인본이었다.
이때도 간송은 직접 인쇄소에 나가
한 장 한 장 영인하는 일을
정성스럽게 도왔다.
이렇게 6.25 전쟁이 끝난 후
영인본 가능했던 것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간송이 잘 지켜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 한 전형필은
비밀리에 몸을 피한 모처에
이 책만을 가져가 품에 품고 잘 정도로
이 책을 지켰고
1.4 후퇴 때 남으로 피난갈 때도
마찬가지였고
이런 노력 끝에
3년간의 전란 속에서도
해례본을 지켜냈다.
마침내 이런 노력 끝에
전형필이 운명한 해인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에는
세계기록유산으로
세계가 인정한 인류의 문화재가 되었다.
바로 이 해에 한글학회는
1946년에 펴낸
영인본의 문제를 바로잡고
더욱 정밀하게 다듬은 영인본을
허웅 해제로 펴내
해례본 연구와 확산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렇게 많은 영인본이 나와도
원본을 직접 보고자 하는 전문가나
일반인들의 열망은 식지 않아
한글날 특별 전시가 되면
이 책을 보려고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렇다고 전시회를 자주 열 수는 없었다.
전시를 하려면 보험을 들어야 하는데
2016년 40일간 특별 전시 때
하루 보험료가 1억이었다.
보험료는 국제 경매 가격을
기준으로 정하는데
최소 1조로 잡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간송미술문화재단은
이 책을 그대로 알리고 싶어
교보문고와 손잡고
2015년에 최초의 복간본을
필자의 해제로 간행했다.
교보문고는 복간본과 해설서 한 묶음으로
25만원에 판매했지만
1년 안에 다 팔려 절판될 정도로
온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이러한 복간본조차 구하기 힘들어
2022년에는 헌책방에서
400만 원까지 치솟아 올랐다.
결국 2023년에는
가온누리 출판사에서
더 정밀하게 만든 2차 복간본이
언해본과 더불어 간행되었다.
언해본은 해례본 간행 후에
세종이 직접 펴낸
언해본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
필자는 운좋게도
2014년 12월 17일
대형 자물쇠 몇 개를 열고 들어가는
특별 수장고에서
해례본 원본을 직접 보고
해설하는 영예를 얻었다.
진본을 직접 보았을 때
살아돌아온 세종대왕과 간송을
친견하는 기분이었다.
최초 언해본 복간본까지
책임을 다하게 되니
훈민정음 학자로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게 되었다.
훈민정음언해본
석보상절 권 6(출처 - 문화재청)
월인천강지곡 철판 인쇄본
(출처 - 문화체육관광부 한국 정책 방송원)
재경구구회 SJKang 강석정 동문이
단톡방에 올린 동영상과
옮겨온 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