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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때 영의정을 역임한 이산해.
선조는 정치에 무능한 왕이었지만 인재를 알아보는 눈은 탁월해 그의 시대에 이름난 학자들이 넘쳤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병자호란을 초래한 인조는 역사상 최악의 임금으로 꼽히지만 주변 단속은 엄격했다. 흔히 임금의 후궁 등 측근들이 권력을 남용하는 사례가 무수하지만 인조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인조의 총애를 받던 조 귀인이 전라 감영에 하인을 보내 청탁을 했지만 당시 전라 감사였던 허적(許積)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하인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영감이 견디겠느냐"고 경고했다. 성격이 난폭한 허적은 그 자리에서 하인을 죽여버리고 시체를 길가에 버렸다. 조 귀인은 이 사실을 듣고 주위의 입을 단속하면서 "주상께서 이 사실을 안다면 문책이 반드시 내게까지 미칠 것이니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며 두려워했다.
선조 역시 무능한 임금으로 낙인찍혀 있지만 이황, 이이, 기대승 등 그의 시대만큼 인재가 많았던 때도 드물다. 선조의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은 남달랐다. 명나라에서 동방문사(東方文士)라는 칭호를 받았던 차천로가 젊은 시절 과거시험 감독으로 참여해 자신의 고향 사람에게 답안을 써줬다가 들통이 났다.
차천로의 답안을 베껴 쓴 사람은 장원으로 뽑혔다. 임금이 크게 노해 함경도 변방으로 쫓아냈다. 뒤에 임금은 북병사에게 "차천로의 죄가 무겁지만 재주가 아까우니 잘 대우하라"고 명했다. 북병사는 날마다 연회를 베풀면서 융숭하게 대접했다.
차천로가 이상하게 여겨 사양하자 "정승, 판서의 부탁도 감히 어기지 못하는데 이것이 어떤 명령인가"라며 그 까닭을 이야기했다. 차천로는 듣고 목놓아 통곡했다.
정조와 순조 시대 학자이자 문인인 심노숭이 1830년 완성한 '자저실기(自著實紀)'는 오늘날 조선반도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은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는 선조와 인조의 전혀 다른 면모를 엿보게 한다. 책은 지배계층인 사대부들의 다양한 관심사를 인물 중심으로 전개하고 있는데 이 저작에만 보이는 이야기가 적지 않다.
정치적 상대의 추악함을 폭로하는 것을 넘어서 저자가 한평생 목도한 양반사회의 이면을 폭로하는 데 적잖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정치를 비판한 저술로 유생들의 반발을 사 저자는 유배를 떠나기도 했다.
노론 벽파가 세손 정조를 해치려는 음모를 막아 정조 초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홍국영(1748~1781
)에 대한 인물 묘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는 키가 작았지만 몸집은 비대했다. 저자가 기해년(1779)에 둘째 외삼촌 집을 방문했을 때 마침 홍국영이 이곳을 찾았는데 저자는 창문 틈으로 홍국영의 인상을 볼 수 있었다.
인상은 전체적으로 날카로웠다. 얼굴이 모나고 뺨은 좁았으며 얼굴이 항상 불그레했다.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났으며 가까이 있으면 쏘는 듯한 기운이 있어 잠깐 동안이라도 남들이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홍국영의 권세는 실로 막강했다. 홍국영은 도승지와 숙위대장을 겸직하면서 늘 궁중에 거처했는데 그의 처소는 임금의 침전과 불과 열 걸음도 안됐으며 임금의 수라를 준비하는 사옹원에서는 홍국영이 먹을 음식까지 만들어 바쳤다.
방 안에는 높은 평상을 놓고 그위에 눕거나 앉아 지냈는데 집안 어른들이나 조정 대신들까지 모두 그 평상 아래에서 접견해야 했다. 인사가 있을 때마다 이조참의는 홍국영에게 먼저 묻고 상의했다. 책은 홍국영의 최후도 상세히 서술한다. 권력을 남용하다가 정조의 눈 밖에 나 쫓겨난 뒤 온 집안을 거느리고 강릉으로 이사 갔다.
서울에서 갖고 온 종이, 부채, 환약, 향을 물고기와 술로 바꿔 먹었으며 시골 무지렁이와 들사람을 만나 왕의 총애를 받던 일을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쫓겨난 지 1년 만에 34세의 나이로 감기에 걸려 죽었고 그의 시신은 소달구지에 실려 고향에 돌아왔다.
병자호란 때 국가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주화론을 이끌었던 최명길(1586~1647)은 문장에는 뛰어났지만 글씨가 악필이어서 마음고생이 심했다. 젊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주서(注書·승정원일기의 기록을 담당하던 정7품 관직)를 맡았다.
그의 기록을 본 선조는 불같이 화를 내며 "글은 꼭 쥐똥 같고 글씨는 꼭 새 발자국 같구나. 이따위 주서를 어디에서 데려왔느냐" 하고는 내쫓아버렸다. 선조는 글씨를 잘 써 명필로 유명한 왕이다. 최명길은 이후 글씨 연습에 매진했지만 글씨는 나아지지 않았다. 노년에 접어들어 "글씨 잘 쓰는 일이 문장을 잘 짓는 일보다 어렵다"고 한탄했다.
▲ 암행어사의 대명사 박문수는 젊잖은 외모와는 달리 장난끼가 심했다. 일본 덴리대 소장
암행어사의 대명사인 박문수는 초상화의 점잖은 외모와 달리 괴짜에다 짓궂었다. 박문수가 어영대장으로 있을 때 참의(육조에 소속된 정3품 당상관직) 이흡이 일당을 모아놓고 자신을 탄핵할 것을 모의한다는 말을 전해듣고 어영청에서 물품을 장만해 그 자리에 들이닥쳤다.
모두가 놀라자 박문수는 "이렇게 많이들 모였으니 함께 술이니 마시며 취하는 게 어떠냐"고 뒤통수를 쳤다. 판서 이익보는 잘 생긴 용모에 성격이 오만해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렸다. 어느 날 승정원에 여럿이 모여 있는데 박문수가 이익보를 발견하고 손짓으로 불렀다.
이익보가 마지못해 다가오자 박문수는 다짜고짜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면서 "잘생겼다, 이 교리(정5품 문관벼슬)"라고 크게 웃었다. 눈 깜짝할 새 봉변을 당한 이익보는 화도 내지 못한 채 어안이 벙벙해했다.
책은 정묘호란 때 포로의 후손이면서 청나라 옹정제의 스승이 된 김상명(金季亮)을 언급한다. 김상명은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예부상서(예조판서)에 올랐으며 김씨 집안은 중국에서도 명문대가로 성장했다. 그는 조선인임을 잊지 않고 조선인이 쓴 병풍을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려고 조선에 병풍 제작을 요청했다.
그런데 아무도 병풍의 글씨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글씨로 이름난 윤순이 거절했고 이어 판서 이만성(李晩成)의 종이었지만 뛰어난 글씨 솜씨를 지닌 이태해(李泰海)마저 거부했다. 이태해는 "차마 붓을 잡고서 오랑캐 병풍을 쓰지 못하겠네"라며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결국 사자관(寫字官·궁중의 문서를 정서하는 하급 관료)에게 쓰도록 했다.
대궐에서 금지옥엽으로 키워졌던 임금의 딸들이 결혼해 시집가서 살게 되면 어떤 대접을 받을까. 숙정공주는 효종의 넷째딸로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에게 시집갔다. 그녀의 시아버지 정태화(鄭太和)는 숙정공주를 일반 며느리와 똑같이 대했다. 마루에 누운 정태화 곁에 공주가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릿니를 잡아주었다.
나인이 입궐해 일러바치자 임금이 노해 "너무 심하다, 너무 심해"라고 하더니 조금 지나서는 "이미 남의 며느리가 되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고 했다. 영조의 차녀인 화순옹주는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과 결혼했다.
화순옹주가 혼사를 치르고 시댁 사당에 예를 올리는데 시녀가 겨드랑이를 부축하자 시아버지 김흥경(金興慶)이 예절에 맞지 않는다며 이를 금지시켰다. 시녀가 "나이가 어리고 귀하신 몸이라 혼자 하지 못한다"고 했지만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옹주는 결국 혼자 힘으로 절을 해야만 했다.
책에서는 정치, 사회 실상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과거는 널리 인재를 뽑는 제도이지만 광해군 이후에는 순기능이 사라졌다. 과거제는 집권세력이 자신의 당파와 친족을 등용시키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훈신들과 척신은 물론 사림들조차 자신들의 무리라면 시골의 변변치 않은 이들까지도 두레박으로 물을 퍼내듯, 갈고리로 당기듯 과거를 통해 정치에 참여시켰다.
종국에는 그 집안의 재앙으로 집안과 나라가 함께 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저자는 개탄했다. 조선시대 서리(아전)의 폐해는 막심했다. 지방감영이나 관아에서는 범이나 이리 같은 존재이고 서울에서는 쥐새끼나 좀과 같은 존재였다.
젊은 시절 뚫어놓은 농간질을 노년에까지 부리며 재정을 담당하는 서리들은 자손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자가 절반이다. 저자는 지방감영과 관아에서는 정원을 줄이고 서울에서는 임기를 정해야 서리들의 농간과 폐단을 막을 수 있다고 썼다.
▶심노승(1762~1837)=명문가 집안 출신으로 1790년 진사시에 급제했지만 문과에 오르지는 못했다. 1797년 정조의 배려로 영희전참봉에 임명됐으나 정조가 사망하고 벽파정권이 성립되면서 1801년 기장으로 유배됐다. 유배에서 풀린 후 친구인 김조순의 배려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됐고 뒤이어 형조정랑, 논산현감, 천안군수, 임천군수 등을 지냈다. 노론 시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부친을 계승해 강경한 정치관을 가졌다. 자신이 체험한 일과 당대 정치 실태 등을 담은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 매일경제 프레미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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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조가 그나마 잘한일도 잇군요
인재 보는눈을 가졌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