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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하나는 잘 뽑았다. 슈틸리케 감독의 선수를 보는 안목과 전술적 시야 그리고 팀의 발전을 위한 전체적 청사진까지 매우 훌륭하다. 상대는 우리가 이기는 게 당연한, 턱없이 약한 라오스였지만, 슈틸리케 감독은 이번 경기를 허투루 흘리지 않았다. 승리 자체에만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약팀을 상대로도 전술적인 실험을 하면서 남은 월드컵 예선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번 경기는 결과 뿐 아니라 과정도 예술이다.
(△ 완벽한 승리를 거둔 대한민국 대표팀 출처:KFA 홈페이지)
1. 밀집수비를 부수다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매번 뚫고 월드컵에 진출한 대한민국이지만, 아시아 팀과의 경기가 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오만 쇼크, 베트남 쇼크로 불리는 2004년 아시안컵 예선에서의 졸전을 비롯해 2006년 독일 월드컵 지역 예선에선 몰디브와 0:0으로 비긴 적도 있었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아 신승을 거두는 경우도 많았는데, 밀집 수비를 뚫는 데 애를 먹은 것이 그 이유이다. 사실 ‘라이벌’(이라고 쓰지만 불러주긴 싫다.) 이란을 상대로 늘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도 이란의 밀집 수비를 뚫지 못하기 때문이다. 밀집수비를 공략하는 것은 우리 대표팀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1-1 측면 수비수의 공격 가담
이번 경기에서 특이할만한 점은 바로 홍철의 움직임이다. 우측면 장현수가 안정적으로 밸런스를 잡았다면 홍철은 공격적 역할을 부여받았다. 밀집 수비를 깨려면 먼저 상대의 수비 형태를 흩트리고, 여기에 침투하는 것이 중요하다. 홍철은 좌측면 날개 공격수로 나선 손흥민이 공을 받으러 내려오거나 중앙으로 좁혔을 때, 적극적인 오버래핑을 통해 손흥민이 빠져나온 공간을 이용했다. 또 손흥민이 측면으로 넓게 벌려섰을 때는 중앙으로 치고들어오면서 상대 수비를 혼란스럽게 했다. 라오스의 우측면 수비는 개인 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듯 드리블 돌파도 여러 번 허용하면서 실점의 빌미를 제공했다.
측면 수비수의 공격 가담을 통해 공격 활로를 여는 전술은 펩 시절의 FC바르셀로나에서도 유효했던 전술이다. 점유율에서 언제나 압도적이었던 FC바르셀로나는 밀집 수비를 만나는 경우가 잦았다. 공격수와 미드필더 조합만으론 밀집 수비를 뚫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는데, 이럴 때마다 조르디 알바와 다니 알베스라는 공격적인 수비수들은 날개 공격수들이 빠져나간 공간을 이용하면서 공격을 이끌곤 했다.
측면 수비수의 공격 가담이 무서운 것은, 높은 위치에 자리하는 측면 공격수의 경우 공간이 좁아 스피드를 전부 발휘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반면, 측면 수비수의 경우 후방에서부터 공격을 가담하기 때문에 전력으로 질주해서 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밀집수비 자체가 공간을 잘 지키고 ‘서있는’ 전술이기에 순간적으로 높은 속도에는 대처하긴 어렵다. 좌우 측면수비수를 이용한 밀집수비 공략은 매우 훌륭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홍철이 기록한 어시스트 세 개 중 특히 두 번째 골이 이러한 전술적 움직임을 잘 드러낸 예라고 할 수 있다.
(△ 오늘 가장 완벽했던 골. 손흥민이 나오는 배후 공간을 이용하는 동시에 속도를 완벽하게 붙인 홍철의 공격가담. 이어지는 석현준의 쇄도는 컷백에 적합한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1-2 중앙 침투
전반전 압박 수비로 나선 라오스를 상대로 석현준은 괜찮은 전술적 움직임을 보였다. 직접 공을 잡거나 마무리하는 장면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수비가 골대 앞을 지키고 선 와중에 직접 공을 잡아서 해결할 수 있는 선수는 많지 않다. 석현준이 보여준 움직임은 나쁘지 않았다. 공을 받으러 나와주고 배후 공간으로 침투하려는 움직임을 시도했다. 이것이 의미를 갖는 것은 석현준의 움직임으로 다른 공간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석현준이 공을 받으러 내려올 경우엔 그를 따라 라오스의 수비가 전진하는데, 이 때 공격적 역할을 맡은 기성용 등 동료들이 그 배후 공간을 노려 침투했다. 비록 골과 직접 연결되진 않았지만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반대로 석현준 스스로가 배후 공간을 노려 침투하면 라오스 수비들을 끌고 가고, 라오스 수비와 미드필더 사이 공간을 노릴 수가 있었다.
공격수의 움직임에 따라 공간은 순간적으로 발생한다. 이렇게 생겨난 공간은 제 때 노리지 못하면 곧 수비들이 위치를 정비하면서 사라진다. 오늘 경기에서는 이 공간을 측면 공격수와 미드필더들이 적절하게 이용했다. 특히 공격적인 위치로 전진 배치된 기성용은 석현준의 움직임에 따라 생겨나는 공간들을 적절히 이용하며 라오스 수비를 교란시켰다. 물론 석현준만의 공헌은 아니고 전체적으로 선수들이 서로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생겨날 공간으로 영리하게 움직인 것이 주효했다. 물론 라오스의 수비 조직이 허술했던 것도 맞다.
(△ 석현준의 쇄도와 그에 따라 생기는 공간을 이용하려는 이청용)
(△ 석현준의 쇄도와 다른 방향에서 쇄도하는 '축구도사' 기성용. 이제 공격형 미드필더도 잘 어울린다.)
1-3 밀집 수비를 박살내면서 얻은 것
대등한 팀을 상대로는 평소처럼 안정적인 경기 운영을 펼쳐야겠지만, 우리보다 객관적 전력이 약세인 아시아 팀들 상대로는 공격을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어야 한다. 이번 경기에서 공격 가담을 통한 밀집수비를 허물면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아시아 예선에서 우리를 상대로 비기려고 하는 팀들을 상대할 무기를 하나 얻었다.
경기 초반에 골을 기록하면서 우리 대표팀은 편안하게 경기를 이끌 수 있었다. 세트피스도 날카로움이 있었지만, 오픈플레이 상황에서 골을 잡아낸 것은 특히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경기 후반에는 라오스가 먼저 밀집수비를 풀어버렸다. 라오스가 공격적으로 나선 것은 이미 패배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초반부터 득점을 하지 못했으면 계속 답답한 경기가 이어질 수 있었다.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는 우리 역시 정상적인 경기를 해야하지만, 아시아 무대에선 우리보다 열세에 있는 팀을 철저히 무너뜨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라오스 전은 우리가 공세로 나설 때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경기였다. 아시아의 호랑이라면 일본, 이란, 호주 정도를 상대할 때를 제외하곤 이 정도 공격력을 뽐낼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
2. 주전 경쟁 점화
2골을 기록한 권창훈, 1골을 기록한 이재성, 3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한 홍철, 우측면에 나서 안정적으로 경기를 이끈 장현수, 기성용의 대체자가 아닌 파트너로서 가치를 입증한 정우영, 분데스리가에서의 활약을 토대로 재발탁된 홍정호, 이정협이 부상으로 낙마하면서 무주공산이 된 중앙공격수를 노리는 석현준과 황의조. 거의 전 포지션에서 주전 경쟁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2-1 중앙 공격수
경기가 끝난 후 황의조가 석현준에 비해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었단 평가가 많다. 하지만 고려해야할 것은 석현준과 황의조가 만난 수비 형태가 현저히 달랐다는 것이다. 그걸 감안해도 두 선수 모두 각자가 가진 장점을 확실히 어필한 경기이긴 했다.
석현준의 경우 언급한대로 상대가 수비 진영으로 내린 상황에서 괜찮은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본디 슈틸리케 감독의 전술 자체가 중앙공격수에게 골을 의존하는 형태는 아니다. 중앙공격수는 부지런한 움직임으로 공격력이 좋은 측면 공격수와 미드필더들에게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을 중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반에 석현준의 움직임은 준수했다. 다음 레바논과의 경기에서도 전반이든 후반이든 투입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밀집수비가 아닐 때엔 어떤 공격 형태를 보여줄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교체 직전 우측면에서 순간적인 움직임으로 공을 흘리며 수비를 제쳐낸 모습은 그가 단순한 타깃형 스트라이커는 아니란 걸 보여줬다.
황의조는 폭넓은 움직임과 중앙에서 영리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손흥민에게 2:1을 내주는 척하면서 터닝슈팅을 때린 것은 그의 전매특허 움직임이었다. 상대의 수비가 느슨해진 덕을 보긴 했지만, 많이 뛰면서 수비적으로도 도움을 주고 측면으로 돌아나가는 움직임이나 적절한 쇄도는 돋보였다. 활동량, 연계 플레이, 수비에 대한 기여 등에서 볼 때 이정협과 비슷한 유형으로 보이는데, 슛에 강점이 있고 쇄도 역시 날카로워 이정협보다 공격적이었다. 당연히 최전방 공격수이기 때문에 이정협에 비해 강점이 될 수 있다. 역시 레바논 전에서의 활약 역시 유심히 지켜봐야겠지만, 전방 공격수 자리를 두고도 드디어 중앙 공격수들 사이에서도 주전 경쟁에 불이 붙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2-2 미드필더
일단 기성용은 붙박이다. 대체 불가능한 선수이다. 하지만 다른 유럽파의 입지는 불안할지도 모르겠다. 우선 이재성의 등장은 구자철과 이청용 모두에게 긴장될만한 일이다. 교체로 들어와서 양발 드리블로 수비를 뒤흔들며 창의적인 패스와 2:1 패스, 마무리 슈팅까지 그 재능을 맘껏 뽐냈다. 그리고 오늘 권창훈의 활약은 구자철의 부재를 잊게 할 정도로 훌륭했다. 수비 가담도 좋았고 공격적인 기여는 두 골이나 뽑아내면서 말할 필요가 없었다. K리그를 호령하는 그의 왼발은 또다른 공격 옵션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2선에서 침투에 능한 ‘라인브레이커’ 김승대가 벤치에 앉아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2선 미드필더 혹은 2선 공격수의 주전 경쟁은 우리를 즐겁게 해줄 것으로 보인다.
기성용은 이제 공격형 미드필더까지 훌륭히 소화하면서 ‘축구도사’가 된 듯하다. 그래서 기성용의 파트너 자리도 두고 볼 여지가 생겼다. 기존엔 안정적으로 기성용을 보좌할 박주호 혹은 한국영이 앞서있던 것으로 보이나 정우영이 새롭게 슈틸리케 감독의 눈도장을 받은 듯하다. 정우영이 가진 장점은 확실하다. 기성용이 한 명 더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정우영은 기성용처럼 짧고 긴 좌우 공격전개가 모두 훌륭하고 당당한 신체조건을 갖춰 공중볼 다툼은 물론 몸싸움에도 강점이 있어 수비적으로도 괜찮은 선택이다. 이런 정우영이 수비 앞을 지키는 미드필더로 나서면서 기성용은 최근 소속팀 스완지시티에서처럼 전진한 위치에서 공격을 이끄는 것이 가능했다. 상대 팀에 따라 조합을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2-3 수비와 골키퍼
솔직히 크게 할 말이 없다. 오늘 크게 어려운 상황이 없었다. 권순태의 킥 미스 2번이 기억에 남는다. 활약할 기회가 없기도 했지만 안정감이 중요한 골키퍼 포지션이었기에,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 경기엔 김승규를 보게 될 지도 모르겠다. 중앙 수비 역시 홍정호가 안정적인 활약을 펼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상대의 공격이 약했다. 또 다른 중앙 수비 자원인 곽태휘, 김기희 포함해서 중앙 수비수의 최적 조합을 찾으면서 예선을 치를 것으로 보인다. 다만, 김영권이 한 발 앞선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 영리한, 너무도 영리한 이재성. 수비라인을 깰 것을 의도한 움직임과 기성용의 완벽한 패스.)
3. 잊지 말아야 할 것
오늘의 8:0 승리는 국가대표팀이 정말 오랜만에 거둔 대승이다. 가슴이 뻥 뚫린 듯 시원하다. 하지만 오늘의 승리에 마냥 도취될 것은 아니다. 축구에서 전술적인 대결이 가능하려면 일단 개인 기량에서 크게 차이가 나면 안 된다. 1:1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면 경기를 쉽게 푸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이 바로 그런 경기였다. 일례로 오늘 홍철은 1:1 상황에서 2번이나 상대를 완벽히 허물면서 골 찬스를 만들었다. 앞으로 만날 레바논이나 쿠웨이트는 분명 라오스보다 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므로 오늘 같은 돌파는 훨씬 드문 일이 될 것이다. 말인즉슨 앞으로 오늘처럼 마냥 쉬운 경기가 이뤄질 것이란 생각을 해선 곤란하다.
밀집 수비를 뚫은 것에 좋은 평가를 내렸고, 오늘 활약한 선수들이 주전 경쟁에 뛰어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좀 더 강한 전력의 팀을 상대로 어떤 경기를 보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더 나은 개인기량, 더 강한 압박, 더 높은 수준의 전술을 들고 나오는 팀을 상대로 어떤 경기를 펼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일이다. 다음 레바논 전을 지켜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그렇지만 오늘과 같은 경기력이라면 8:0 스코어의 재연은 어려울지라도 좋은 경기로 승점 3점을 따올 것으로 보인다.
(△ Made in K-League. 또 한 명의 왼발 스페셜리스트 권창훈 출처:KFA 홈페이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굳이 적어놓긴 했지만 기분 좋은 승리이다. 라오스가 개인기량이 떨어지긴 했지만 밀집 수비로 나선 전반에만 3골을 성공시킨 것은 고무적이다. 게다가 전방에서 서로의 움직임을 예측하여 공간을 적절히 이용하고, 잦은 위치변화를 통해 상대방을 흔든 것은 너무나 훌륭했다. 결과와 과정 모두를 잡은 경기였다. 레바논은 분명 라오스보다 강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오늘의 기세를 잘 이어간다면 또 좋은 경기를 이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동아시안컵을 거치면서 유럽파가 ‘없으면 안 되는’ 대표팀이 아니라, 유럽파의 가세로 ‘특별함을 더하는’ 대표팀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특히 훌륭하다. 정말 이번에 감독은 기가 막힌 분으로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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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