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일암에 빈다 (願向日庵)
海岸名勝佛加被(해안명승불가피)-동서남 해안명승 해수관음의 가피(加被)가
六月蓮花香裝載(륙월연화향장재)-6월에 퍼지는 연꽃의 맑은 향기에 실어
衆生可憐慈悲心(중생가련자비심)-중생을 불쌍히 생각하는 자비심으로
王冠苦痛願脫離(왕관고통원탈리)-코로나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南無阿彌陀佛觀世音菩薩(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농월(弄月)
향일암(向日庵) 해수관음(海水觀音)앞에 간절한 기원 !
친구가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금오산(金鼇山) 기암절벽(奇巖絶壁)에 위치한
향일암(向日庵)을 관광하면서 사진을 보내 왔다.
약 45년전 필자가 찾은 향일암(向日庵)에 대한 희미한 기억은
“거북산(금오산(金鰲山)”밑으로 출렁이던 아름다운 바다경치뿐이다.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
금오산(金鰲山)을, 오(鰲)-자라오 거북오, 한자(漢字) 이므로 거북산이라 한다.
금오산(金鰲山) 향일암(向日庵)은 일반 사찰과 다른 의미를 생각하는 절이다.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사찰(寺刹)중에 3대 해수관음도량(海水觀音道場)이 있다.
강원도 낙산사 홍련암(紅蓮庵)
경남 남해 금산 보리암(菩提庵)
강화군 삼산면 보문사(普門寺)다.
그리고
전남 여수 금오산(金鰲山) 향일암(向日庵)을 더하면 4대 해수관음도량(海水觀音道場)이다.
이 사찰들 특징은 모두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
바닷가 사찰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셔 놓고
“해수관음성지(海水觀音聖地)”라 말하고 있다.
모두 바다에 가까이 있는 빼어난 절경의 사찰이다.
“해수관음(海水觀音)”은 무슨 뜻일까?
먼저 불교신앙인들은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南無阿彌陀佛觀世音菩薩)”을 입에 달고 산다.
불교인이 아니라도 의미를 알고 모르고를 불문하고 좋고 나쁜 일이 생길 때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을 중얼거린다.
마치 기독교 신앙인들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마가복음 9장 23절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소리냐 믿는 자에게는 능(能)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와 같은 함축(含蓄)된 말이다.
불교사전이나 경전(經典)설명에는 “나무(南無)”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무(南無)-“귀명(歸命)”이라 번역 설명되어 있다.
나무(南無)는 부처나 보살의 이름(名號) 앞의 관사(冠詞)로서 귀명(歸命)이란
글자대로 부처님께 몸과 마음(身命)을 던져 돌아가서 의지(依支)함을 뜻한다.
사찰에서 아침저녁으로 행하는 예불의식(禮佛儀式)인 오분향례(五分香禮)에서
至心歸命禮 三界導師 四生慈父 是我本師 釋迦牟尼佛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과 선지식(善知識)에 귀의(歸依)한다는 뜻)
“나무(南無) 즉 귀명(歸命)”은 첫줄에 나올 만큼 불교에서 제일 중요하다.
△여기에 한자로 “남무(南無)”를 써놓고 읽을 때는 왜 “나무”라 읽을까?
불교 용어 중에는 이와 같은 것이 여럿 있다
보제(菩提)→보리(菩提. 파라밀(波羅蜜)→바라밀(波羅蜜). 포시(布施)→보시(布施)
도장(道場)→도량(道場).마가(摩訶)→마하(摩訶) 사성체(四聖諦)→사성제(四聖諦)등등~~
이런 불교의 용어들은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온 뒤에 인도의 범어(梵語산스크리트어)를 당시 중국의 불경번역 역경승(譯經僧)들이 인도 불경의 범어를 그대로 음역(音譯)하였다.
이유는 당시 인도 범어에 딱 맞는 중국어가 없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왜 한자어를 원음(原音)대로 읽지 않고 다르게 읽는가?
그것은 발음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라 하였다.
남무(南無)보다는→나무(南無)가. 보제(菩提)보다는→보리(菩提)가
파라밀(波羅蜜)보다는→바라밀(波羅蜜).포시(布施)보다는→보시(布施)
도장(道場)보다는→도량(道場).마가(摩訶)보다는→마하(摩訶).
십방(十方)을→시방(十方)시방으로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아미타불(阿彌陀佛)-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西方淨土) 극락세계(極樂世界)에
있는 부처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불교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중생(衆生)의 바라는
소원에 따라 알맞은 모습으로 나타나 큰 자비심(大慈悲心)을
베푼다는 부처다.
여기서 “관세음(觀世音)”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불교사전에는 관세음(觀世音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 있다.
산스크리트어(梵語.인도 고전어)에서는 관세음(觀世音)을 관자재(觀自在).
광세음(光世音). 관세자재(觀世自在). 관음(觀音)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관세음(觀世音)을 글자대로 해석하면 세상(世上) 중생의 음성(音聲)을 “본다(觀)”는 뜻이다.
중생(衆生)이 괴로울 때 그 이름(觀世音)을 정성을 다하여 일심(一心)으로 부르면
즉 본다는 뜻의 한자(漢字)인 “관(觀)”은 중생의 소리를 듣는다는
“관세음(觀世音)”으로 변하여 다 들어 준다는 뜻이다.
즉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중생들의 소원하는 소리를 잘 보고 들어 주는 부처님이다.
“해수관음(海水觀音)”은 무슨 뜻일까?
필자가 약 20년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전시회를
본적이 있다.
필자가 미술에 지식이 없지만 하늘하늘한 의상(衣裳)에 감싸여 있는 신비로운
색상의 국보(國寶)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는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때 큐레이터 설명한 내용을 간단히 메모하여 두었는데
【수월관음(水月觀音)이라는 명칭 자체는 불교 경전에 나오는 관음(觀音)의 특수한
화신(化身)이 아니며 관음(觀音)의 자태를 문학적(文學的)으로 비유 표현한 것이다.
관음(觀音)의 등 뒤로 달처럼 둥근 광배(光背)가 있고, 관음(觀音)은 발아래 물과
선재동자(善財童子)를 굽어보는 형상(形相)이기 때문에 마치 물에 비친 달을 보는듯하다는 의미이다.
인도에는 수월관음의 이름과 도상(圖上)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수월관음(水月觀音)은 중국에서 창안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볼 수 있다】
는 설명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의 감동은 오래도록 남아있다.
고려불화의 채색은 화려하다.
그중에서도 여러 수월관음도는 모두 보관(寶冠) 위로부터 전신에 투명한
사라의(紗羅衣)를 드리운 것이 눈을 황홀케 하였다.
화려한 비단 옷이 그 아래로 은은히 비친다.
수월관음도를 보다가 문득 “중용” 33장에 나오는
“비단옷을 입고 엷은 홑옷을 덧입는다(衣錦尙絅)”는 말이 떠올랐다.
비단옷 위에 홑겹의 경의(絅衣)를 덧입는 것은 화려한 문채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가려주기 위해서다.
화려한 옷을 드러내지 않고 왜 가리는가?
그 대답은 이렇다.
“그런 까닭에 군자(君子)의 도(道)는 은은해도 날로 빛나고, 소인(小人)의 도(道)는
선명(鮮明)하나 나날이 시들해진다.”
가려줘야 싫증나지 않고, 덮어줄 때 더 드러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안으로부터 비쳐 나온다.
한눈에 어지러운 화려함은 잠시 눈을 끌 수는 있어도 오래가지는 못한다.
사라의(紗羅衣)로 살짝 가려준 수월관음도 !
삶의 가장 절정의 순간도 어쩌면 이런 인내와 환희,
그리고 절제 속에 빛나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요즘에는 안에 것을 모두 들어내는 세상이니 그 속에 볼 것이 별로 없다.
호주머니 속 송곳은 감추어도 들어난다
“해수관음(海水觀音)”이 무슨 의미인지 불교사전에는 찾을 수 없다.
(필자가 찾지 못해서 인지 모르지만--)
또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觀音祈禱) 도량(道場)은 왜 모두 바닷가에 있을까?
불교신문에서 “해수관음(海水觀音)”에 대하여 읽은 적이 있다.
【해수관음(海水觀音)이라 하는 이유는 인도(天竺國)의 보타락가(寶陀落迦)에
낙가산(洛伽山)이 있다.
이산 동쪽 바닷가에 바닷물이 거세게 출렁거리는 동굴(洞窟)이 하나 있는데,
이 굴은 “대관음보살(大觀音菩薩)”인 흰옷을 입은 백의관음보살(白衣觀音菩薩)이
거처하던 성지(聖地)라고 한다.
이곳은 항시 파도가 심하여 일찍 아무도 들어가 본 사람이 없는 신비로운 곳이기에
불교의 성지로 널리 알려졌다.】
여기서 연유해서 우리나라에서도 “해수관음(海水觀音)”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예부터 우리민족의 신앙(信仰)에 관한 정서(情緖)는 몇백년된 나무, 이상하게
생긴 바위, 높은 산, 심청이가 아버지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몸을 던졌다는 바다(인당수),
용(龍)이 승천했다는 못(龍淵)등에서 신앙심(信仰心)을 느낀다.
이처럼 어떤 종류의 동물이나 식물을 신성시하여 자신과 관련을 짓고
초자연적인 존재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과정에서
샤머니즘(shamanism)이나 토테미즘(totemism)의 신앙이 형성되었다.
기독교나 불교는 이런 민속신앙을 “사이비 종교 샤머니즘 토테미즘”이라
비하(卑下) 하지만 성경과 불경을 읽어보고 스님 목사의 강론을 자세히 들어보면
어떤 민족의 민속신앙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위의 일주문 "금오산 향일암(金鰲山 向日庵)" 글씨는 호남 서예가 강암 송성용이 썼다
“소리를 보고 듣는다(觀)”는 의미의 “관음(觀音)”은
바닷가의 파도 소리, 즉 해조음(海潮音)을 듣기 위해서 바닷가에 자리 잡은 것이다.
한국불교 근본경전 중의 하나인 “능엄경(楞嚴經)”에서는
사람이 잠을 자면서도 바닷소리에 집중을 하고 있으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귀로 소리를 들어서 깨달음을 얻는 경지를 “이근원통(耳根圓通)”이라 한다.
바닷소리에 깨달음을 얻은 보살이 관음보살(觀音菩薩)이다.
정신의학자들은 말하기를
바닷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알파파(alph(α)wave波)가 나와서 명상(冥想)과
정신 내부의 고요함 또는 평화로움과 많은 연관이 있다고 하였다.
향일암(向日庵)의 향일(向日)은 “해를 향하여 본다”는 뜻이다.
눈을 감고 향일암을 생각하면 넓은 남해 바다위에 햇살이 비쳐서 반짝반짝
반사되는 빛을 연상한다.
지금 향일암(向日庵) 앞 잔잔한 바다에서 반사되는 빛은 코로나로 찢어지고
할퀴어진 인간의 상처에 발라주는 연고와 같다.
이것이 해수관음(海水觀音)의 자비(慈悲)가 아닐까
친구가 마주 잡은 양손에 해수관음보살의 가피(加被)를 입어
온 인류가 코로나로부터 해방되어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불안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