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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s://cafe.daum.net/etymo 조피디
논문을 내면서
저자의 본 논문은 2018년 10월 20일(금) 한국의 학회 등재지의 하나인 단군학회로부터 게재 불가의 판정을 받은 아픈 시련을 겪은 논문으로 약간의 수정(그림 6 첨가)을 거쳐 사비로 출판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한반도에 단군조선, 진한, 마한, 변한,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고구려, 백제, 신라, 갈석산, 패수, 압록수 등이 있었다고 믿고 있는 한국의 기존 역사학계의 통설이 완전히 뒤집히게 될 획기적인 역사적 진실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와 조국과 민족을 배신한 제도권사학계의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총체적 고정관념 그리고 식민반도사학이란 불치의 ‘식민암종양’ 때문에 본 논문 게재를 거절당하였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단군학회에서 이 논문을 발표하던 그날 한 인사는 학자로서 한치의 부끄러움 없이 “논문은 재탕하는 거예요”, “재탕하지 않으면 안돼요”라고 서슴없이 말하여 저자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그래도 이 인사는 매우 양심적이라 생각한다. 저자에게 제도권의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는 불굴의 의지를 은유적으로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연원을 따져보자면 한반도에 지리지명이 옮겨지게 된 최초의 원인은 조선 후기 청나라를 견문한 ‘실학자들’ 이었다. 당시 이들 실학자들은 역사를 논할 때 필수적인 1차사료나 문헌자료와는 전혀 근거없는 자신 개개인의 의견이나 헛소문에 입각하여 동이배달한민족 상고사에 기술된 모든 지리지명들을 한반도나 요녕성 요하쪽에 추정하는 중대한 잘못을 범하였다. 이들 실학자들의 망국된 역사인식으로 인하여 우리의 역사가 길게는 단군조선으로부터 약 4,350년 짧게는 고구려의 패망으로부터 1,352년 동안 일사분란하게 왜곡, 날조, 축소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900년간 아시아 대륙을 지배했던 고구려를 비롯하여 자랑스런 동이배달한민족사의 진실을 누군가가 반드시 밝혀야한다는 사명감에서 제1집으로 이 논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본고에서 저자가 제시한 1차사료와 문헌자료들을 세심하게 검토하여 공평한 논문심사를 해주시기 바라며 왜곡으로 점철된 민족사를 정립하는데 함께 동참해주실 것을 간절히 호소하는 바이다. 순차적으로 저자의 논문인 「高句麗의 鴨綠水 位置 硏究」, 「浿水의 位置 硏究」. 「碣石山의 位置 硏究」, 「奉天通志의 冀州와 1次史料와의 比較 考察」, 「高句麗의 遼東 位置 硏究」, 「孤竹國 位置 硏究」, 「高句麗의 建國年代 比定 硏究」, 「幽州와 營州 位置 硏究」, 「實學者 朴趾源의 熱河日記에 기록된 歷史內容의 問題點 考察」, 「實學者 丁若鏞의 歷史認識 批判」 등을 출판할 예정이다.
2019년 9월 30일
역사학자 김태영
高句麗의 遼東 遼西 位置에 대한 小考
金泰瑛(江原大)
< 목차 >
I. 머리말
II. 遼西는 河東지방
1. 河東은 山西省
2. 산서성에 있는 伯夷叔弟墓
3. 백이숙제묘가 있는 곳이
孤竹國
4. 고죽국은 高句麗의 영토
III. 고구려의 遼水
1. 遼水가 遼東과 遼西를 나눔
2. 遼水의 發源地 遼山은 山西省
3. 요서에 쌓은 12성
4. 요서는 山西省 남서부
IV. 遼西郡이 속하는 幽州와 鴨綠水에 대한 견해차
1. 요서군이 속하는 유주의 차이
2. 압록수(요수, 마자수)의 차이
V. 맺음말
[국문초록]
경도 110도를 따라 위치한 황하강을 기준하여 동쪽인 산서성을 하동(河東)이라 하고 서쪽인 섬서성 일대를 하서(河西: 서하)라고 불렀던 것처럼, 하동인 산서성에 있던 요수(遼水: 압록수)로 인하여 고구려의 요서와 요동이 나누어진 것을 밝히려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따라서 고구려 시기(232BC-668AD)歐陽修等,新唐書 卷 199, 「高[句]麗」:“侍御史 賈言忠計事還 帝問軍中云何 對曰必克 昔先帝問罪所以不得志者 虜末有邅也 諺曰 軍無媒 中道廻 今男生兄弟鬩很 爲我嚮導 虜之情僞 我盡知之 將忠士力 臣故曰必克 且高句麗秘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年八十矣.”;三國史記 卷 22 [高句麗本紀] 第10:“侍御史 賈言忠奉使 自遼東還 帝問 軍中云何 對曰 必克 昔先帝問罪 所以不得志者 虜末有釁也 諺曰 軍無媒 中道廻 今男生兄弟鬩狠 爲我嚮導 虜之情僞 我盡知之 將忠士力 臣故曰必克 且高句麗秘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年八十矣.”
에 기록되고 그 시대를 반영하는 사료들을 조사, 검토, 비교, 분석하였다. 이들 사료들은 수경주, 중국고대지명대사전, 한서 「지리지」,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중국역사지명대사전, 대청광여도, 각종 지도책, 그리고 25사의 「지리지」등을 포함한다.
이들 사료들에서 백이숙제의 나라였던 고죽국과 백이숙제의 묘가 하동이자 요서인 산서성 남서부에 있으며, 고죽국이 고구려 영토였다는 사실을 밝혔다. 백이숙제의 나라 고죽성이 있었던 지금의 영제시를 포함한 산서성 남서부, 하남성 서북부, 섬서성 동북부를 모두 아울러 요서라 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요서는 오늘날의 산서성 남서부, 하남성 서북부, 그리고 섬서성 동북부이며 요서 지역을 제외한 산서성 일대를 요동이라 하였음을 밝힌다.
주제어: 황하, 하동, 하서, 요수(압록수), 백이·숙제, 고죽국, 노룡, 영제시, 요서, 요동, 수양산, 유수
I. 머리말
이름은 있으나 그 실체가 없는 것이 바로 요동(遼東)과 요서(遼西)의 위치이다. 한반도 압록강의 서쪽이 요서가 되기도 하고, 산동성과 그 남쪽 해안을 따라 요서가 되기도 하며, 거란족이 세운 요(遼: 916-1125)나라로 인하여 만들어진 요(遼) 臧勵龢等,『中國古今地名大辭典』(臺灣: 尙務印書館, 1982), 제 2단, p.1245, “[遼]: 朝代名, 姓耶律氏, 初名契丹, 後改爲遼, 後梁時 阿保機稱帝, 都臨潢, 在今熱河巴林東北一百四十里.”
라는 지명 때문에 요나라 태종 회동원년(會同元年: 938)에 최초로 언급된 요하(遼河) 脫脫, 遼史卷4 「本紀」第4 太宗下, “...會同元年... 戊戌幸遼河東.”
의 동쪽이 요동이 되고 요하의 서쪽이 요서가 되는 등, 요서와 요동의 위치비정은 그 동안 역사학계의 가장 큰 쟁점의 하나가 되어왔다. 이러한 현상은 설득력이 결여된 지리지명 비정으로 보인다. 사료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왕조의 흥망과 시대의 변천에 따라 강산과 고대지명들이 많이 옮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한나라 때 요동군의 요동과 명나라 때 요동의 위치는 전혀 다를 수 있다.” 남의현, 「중국의 중조변계사를 통해 본 한중 국경문제」 - 중조변계사에 대한 비판과 14세기 이전 ‘鴨綠水[鴨淥江]’ 위치 재고, 인문과학연구 57, 강원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8, p.32.
고 남의현은 그의 논문에서 잘 지적해 주고 있다.
옛부터 황하(黃河)를 기준으로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하여 하동(河東)과 하서(河西) 臧勵龢等,『中國古今地名大辭典』(臺灣: 尙務印書館, 1982), 제2단, p.514, “[河西]: 泛指黃河西之地. 如今陝西.甘肅.及蒙古之鄂爾多斯.阿拉善.額濟納皆是. [爾雅釋地]「河西曰雝州.」是也. 亦曰河右.”
로 나눈 것처럼 전국시대(403-221BC) 역시 경도 110도로 나뉘는 섬서성(陝西省)과 산서성(山西省)을 경계로 하여, 산서성에 있는 요수(遼水: 압록수)라는 하천 때문에 요동과 요서로 지역이 설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명(明)나라 때에는 요동과 요서가 경도 120도로 옮겨져 지금의 하북성(河北省)과 요녕성(遼寧省)이 경계가 되어 있음을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明이전의 요서인 지금의 산서성 남서부에 있던 노룡, 난하, 갈석산, 창려, 수양산 등 여러 지명들이 하북성으로 지명이동이 되어있다는 사실이다. 경도 120도 山海關을 기점으로 좌측인 河北省에 盧龍, 灤河, 碣石山, 昌黎, 首陽山 등이 옮겨져 있음을 대륙지도에서 볼 수 있으며 후대에 편찬된 여러 사료에서 옛 지명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되어 있음을 찾아 볼 수 있음.
특히 명나라 3대 주체(朱棣: 재위, 1402-1424)의 시작으로 약 170년 동안 長城(변장) 축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명말⸱청초의 사학자인 장대(張岱:1597-1684)는 “명(明)일대에 국사(國史)는 진실성을 잃었고 가사(家史)는 객관성을 잃었고 야사(野史)는 억측한바가 많으니, 280년 동안 이 모두가 하나의 속임의 세계였다.” 張岱, 瑯環文集卷1, 石匱室自序.; 閔斗基, 중국의 역사인식 하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7), p. 483.
라고 한 사실을 기억한다면 명대(明代)의 역사가 얼마나 진실성이 없었는가를 잘 반영해 준다할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문명은 江을 중심으로 발생했으며 그 강의 수원(水源)은 대체로 산(山)에서 비롯되었다. 산이 있으면 물의 근원이 되고 물이 있는 곳은 반드시 산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천과 산은 서로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다. 요서와 요동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 산(맥)과 하천에 중점을 두고 조사하려고 한다. 고구려에는 요산(遼山)이 있어 소요수(小遼水)의 발원지였고, 대요수(大遼水)가 말갈의 서남쪽 산에서 발원한다 하였다. 姚思廉, 梁書 卷54, 「高句麗」 “句驢地方可二千里, 中有遼山, 遼水所出. 其王都於丸都山下. 多大山深谷 無原澤百姓依之人居, 食澗水.”;南史 卷79 「列傳」제69,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其先所出事詳北史. 地方可二千里. 中有遼山, 遼水所出. 漢.魏世南與朝鮮獩貊 東與沃沮北與夫餘接. 其王都於丸都山下 地多大山深谷 無原澤百姓依之人居, 食澗水.”;新唐書 卷220,「高[句]麗」“水有大遼.少遼: 大遼出靺鞨西南山, 南歷安市城, 少遼出遼山西, 亦南流, 有梁水出塞外, 西行與之合. 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號鴨綠水, 曆國內城西, 與鹽難水合, 又南至安市, 入於海. 而平壤在鴨綠東南, 以巨艫濟人, 因恃以爲塹.”
하동(河東)인 산서성에 있던 이 요수(遼水)로 인하여 요동과 요서가 나누어지게 된 것임을 밝히려고 한다.
따라서 고구려시기(232BC-668AD)상서(尙書)卷11,“武王旣伐東夷肅愼來賀.”;상서정의(尙書正義)卷28.「주관(周官)」에“성왕(1055-1021BC)이 동이를 정벌하니 숙신이 축하하였다란 기사에 대해 서한의 학자 공안국(孔安國)이 주석하기를 “海東諸夷駒麗扶餘馯貊之屬武王克商皆通道焉(해동의 여러 이족인 구려(駒麗), 부여, 한(馯), 맥(貊) 등과 같은 족속인데, 주무왕이 상(商)을 정벌하자 모두 길을 통하였다)”고 하였다. 구려는 고구려를 뜻함으로 BC1000년경에 고구려란 이름이 보이고 있다.;일주서(逸周書) 「왕회해」에 고이(高夷)가 나오는데 진(晉)나라 학자 공조(孔晁)가 “고이는 동북의 이(夷)로서 고구려다.”라고 주석하였다. 서주초기인 BC1000년경에 고구려란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서주는 섬서성 호경(서안)에 도읍하고 있을 때로 동북은 황하북부 산서성을 일컫는 말이다.;漢書卷1(上) 고조4년(203BC) 8월, “北貊燕人來致梟騎助漢, 師古曰貊在東北方三韓之屬(북맥과 연나라 사람이 와서 날랜 기병을 보내어 한나라를 도왔는데 안사고는 이 맥은 동방의 삼한(진한, 마한, 변한)의 무리들이다)”라고 적고 있다. 서한 역시 섬서성 서안에 도읍하고 있어 동북은 황하북부 산서성을 가리키고 북맥은 고구려를 뜻하는 것이다. 유방이 항우(232-202BC)와 싸울 때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때 장량이 고구려를 찾아가 고구려의 날랜 군사와 기병의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기원전 203년의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당서와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역대명신주의, 흠정성경통지, 당회요, 옥해, 책부원귀 등 모든 사료에 “고구려는 900년이 되기 전에 80세의 대장이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다. ...지금 900년이 되었으며 이적의 나이 80이다”고 한 기록에 주목해야한다. 이적의 나이 80이라는 것은 고구려가 망한 668년을 뜻한다. 따라서 900년에서 668년을 빼면 232년이 도출된다. 고구려가 기원전 37년 훨씬 이전에 건국하였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다름 아닌 광개토호태왕 비문의 기록이다.“大朱留王紹承基業, 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二九登祚號爲永樂(대주류왕은 시조께서 창업하신 국가 기반을 계승하고 제17대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은 18세에 이르러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永樂)이라 하였다.)”고하여 시조로 부터 17세가 광개토호태왕이라 기록되어 있다. 1세를 30년으로 보아 17세면 대략 510년이 된다. 정리하면 신당서, 삼국사기, 상서, 상서정의, 일주서, 한서, 광개토호태왕 비문의 사료에 근거하여 고구려의 건국이 BC232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에 기록되고 그 시대를 반영하는 문헌 및 자료들에 근거하여 요서와 요동의 위치를 찾아 밝히려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등한시되어온 水經注(수경주),中國古代地名大詞典(중국고대지명대사전), 中國古今地名大辭典(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歷史地名大辭典(중국역사지명대사전), 漢書(한서) 「地理志(지리지)」, 大淸廣輿圖(대청광여도), 각종 地圖冊(지도책), 그리고 25사중 특히 각 사서의 「地理志(지리지)」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위치를 조사, 검토, 비교, 분석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우리 사서에 ‘요서’란 단어가 맨 처음 등장한 것은 고구려 제6대 태조 궁 무열제 때이다. “태조대왕 3년 봄 2월에 요서에 열 개의 성(城)을 쌓아서 한나라 군사를 방비하였다.” 金富軾, 三國史記 제15권, 高句麗本紀 제3, “太祖大王: 三年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秋八月 國南蝗害穀.”
란 기록이다.
지금까지 요서에 관해 언급되어 있는 학위논문 이병헌, 윤병모, 정현승, 박진호, 김현숙, 배현준, 허강, 복기대.(자세한 내용은 참고자료 참조)
8편과 국내학술 논문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김성한, 임기환, 김정열, 문안식, 공석구, 송호정, 오강원, 이형구, 박세이, 정병준, 박경철, 복기대, 薛志强, 김병준, 이정빈, 신용하, 오대양, 정경희, 정현승, 송호정, 윤병모, 조진선, 이경식, 노은주, 조원진, 조빈복, 유원재, 이후석, 안국승, 박선희, 이용범, 정원철.(자세한 내용은 참고자료 참조)
28편 참고자료 참조.
이 있어 검토해 본 바로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첫째, 요서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거나 둘째, 현재의 요녕성 요하(遼河)의 서쪽으로 비정하거나 셋째, 난하유역으로 비정하고 있다.
복기대는 요서를 중국의 요녕성 서부지역과 내몽고 동남부 지역으로 파악하였다. 복기대, 「기원전 7-4세기 遼西地域의 정치적 변화에 관하여 - 秦開 동정을 중심으로 -」, 문화학사 - 21, 한국문화사학회, 2004.
배현준은 요서지역을 일반적으로 요하이서의 서요하 수계구를 지칭한다고 하였다. 배현준, 「중국 遼西지역 점토대토기 연구: 이중구연토기 및 遼東지역 점토대토기와의 관계를 중심으로」(국내석사), 한양대학교, 2011.
박진호 역시 요서지역은 중국 요녕성 내의 요하 서쪽지역을 일컫는 것이라 하였다. 박진호, 「요서지역 초기 신석기 문화연구: 소하서 흥륭와 문화를 중심으로」(국내석사), 인하대학교, 2014.
이병헌은 그의 논문에서 단순히 요서라고 언급하였으며 요서의 구체적인 위치를 밝히지 않았다. 이병헌, 「백제 枕流王의 요서진출과 그 의의」(국내석사), 동국대학교, 2015.
정병준 역시 「唐代 遼西 平盧軍의 南下와 田神功의 活動」이란 그의 논문에서 요서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정병준, 「唐代 遼西 平盧軍의 南下와 田神功의 活動」, 인문학연구, 충남대학교 인문학 연구소, 2013.
신용하는 고조선 요서지역이 난하(灤河)의 양안과 난하를 건너 지금의 북경부근까지로 설정하였다. 신용하, 「조선 국가의 요동.요서 지역으로의 발전」, 고조선 단군학 -25, 단군학회, 2002.
정현승은 그의 논문 「中國 冀北·遼西 地域의 中原式 銅戈 硏究」에서 요서지역을 요녕성에 흐르는 요하를 기준으로 요하의 이서(以西)지역으로 정하였다. 정현승, 「中國 冀北.遼西 地域의 中原式 銅戈 硏究」(국내석사), 영남대학교, 2015.
송호정은 요서지역을 “요녕지역, 즉 남만주”라고 정리하였다. 송호정, 「요서지역 고고학 . 고대사 연구 성과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상고사학회 - 10, 한국상고사학회, 2016.
허강은 요서를 요하 이서(以西) 지역으로, 요동을 요하 이동(以東) 지역이라고 지칭하였다. 허강, 「唐 전기의 營州都督府와 遼西 經略」(국내석사), 서강대학교, 1996.
윤병모는 高句麗의 戰爭과 遼西進出 硏究란 그의 논문에서 요서를 산동반도와 요동반도에 둘러싸인 연해지역으로 이해하였으며, 전한과 후한이 존재하던 220년대까지 고대의 요서와 요동 경계는 현재의 요하(遼河)가 아니라 대릉하와 의무려산으로 인식하였다. 윤병모, 高句麗의 戰爭과 遼西 進出 硏究(국내박사), 성신여자 대학교, 2009.
중국에서 발표된 논문 역시 ‘고구려의 요동 요서’란 제목의 논문은 단 한편도 찾아볼 수 없으며 요서(遼西)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요서를 언급한 논문들이 대부분이다. 주로 고고학적 측면에서, 오늘날의 요녕성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 유물들을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물들이 발굴된 내몽고와 요녕성 일대를 요서지역(遼西地域)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관윤화(關潤華)는 「1-3世紀初遼西民族分布格局硏究」란 그의 논문에서 “요서는 지리적인 개념으로 원래 요하의 서쪽이다.” 關潤華, 「1-3世紀初遼西民族分布格局硏究」(碩士), 吉林大學, 2004.
라고 하였다. 또한 위염염(魏琰琰)은 明遼東鎭軍事聚落分布及防御變遷硏究란 그의 논문에서 요동(遼東)을 명대(明代)에 축조된 장성(長城)이 있는 요동으로 설정하고 있다. 魏琰琰, 分統擧要, 網維秩序-明遼東鎭軍事聚落分布防御變遷硏究(博士). 天津大學, 2016.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윤병모를 제외한 이들 논문들은 특정한 고구려시기를 반영한 ‘고구려의 요동 요서의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더 자세하고 구체적인 선행연구 분석과 비판에는 한계가 있다. 필자가 조사 비교 분석한 요서는 앞의 세 부류와는 완전히 다른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남서부, 하남성(河南省) 서북부, 섬서성(陝西省) 동북부이다. 따라서 본고는 꼼꼼히 살핀 사료에 근거한 요서와 요동의 위치가 기존 통설과 다르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계속>
출처: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pk&wr_id=43 뉴스로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영의 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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