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4년도에 모 인터넷 사이트에 게시한 글로서 그때의 글과 일부를 보충하여 다시 올립니다)
長白山在興京東北, 橫亘千餘里, 形勢阻絶[皇淸開國方略卷五 太祖高皇帝] 장백산은 흥경 동북쪽에 있으며 가로 뻗은 길이가 천여 리이며 형세가 험절하다.
흥경은 현 신빈(新賓)만족자치구를 말합니다. 현 집안시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흥경은 서북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장백산이 이 흥경에서 동북쪽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현 백두산을 말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지도상에서 이를 확인해보면, 하나의 산맥이 거기에 있습니다. 현재의 이름은 길림합달령(吉林哈達嶺)입니다. 이를 위 인용문은 장백산이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本朝發祥建州. 及得瀋陽. 遂定都焉. 開原之東爲長白山. 橫亘千里. 高二百里. 上有潭. 周八十里. 其水南流爲鴨綠江. 北流爲混同江. 山下四時泥?. 阻人往來. 歲時遙祭而已.[淸代史料筆記叢刊/永憲錄/卷一] 본조의 발상지는 건주(建州)이다. 심양을 얻어 마침내 정도(定都) 하였다. 개원(開原)의 동쪽이 장백산이다. 횡으로 뻗어 천 리이며, 산 높이가 이백 리이다. 정상에는 못(潭)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다. 그 물이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이요,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이다. 산 아래는 사철 진흙탕이어서 사람의 왕래를 어렵게 하니, 철따라 요제(遙祭)를 지낼 뿐이다.
위 문장을 언뜻보면, 영락없이 백두산, 그리고 천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산 정상에 호수가 있고, 둘레도 80리에다가, 압록강까지 흘러내리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장백산이 ‘開原之東’이라 한 점입니다. 청나라때의 개원(開原)은 지금도 개원이니, [嘉慶重修一統志]에 의하면, 심양에서 동북쪽으로 2백리에 위치합니다. 이 동쪽에 큰 산이라 할만한 것은 오직 길림합달령(吉林哈達嶺)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이 산맥을 넘어가면 그 몇 배나 멀리 있는 백두산까지 가겠지만, 개원 중심으로 백두산의 위치를 설명한다는 것은 상당히 억지스러운 부분입니다. 길림합달령이 장백산이라는 증거는 지금껏 이를 도외시하였을 뿐이지 문헌 도처에 있습니다.
啓運山. 謹案, 大淸一統志, 啓運山在興京城西北十里自長白山西麓一幹綿亘至此, 層巒環拱衆水朝宗萬世鴻基實肇於此.[滿洲源流考卷十四 山川一]
[大淸一統志]에 의하면, 계운산(啓運山)이라고 있는데, 이 산이 흥경성 서북쪽 10리 지점에 있으며, 장백산의 서쪽 여맥이 여기에까지 이르른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현 무순시 동쪽의 막일홍산이라고 지도에 표시된 제법 큰 산이 있는데 여기까지 다 길림합달령, 아니 그 당시까지의 장백산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길림합달령의 이름 변천부터 잠깐 살펴보면, 이 이름 이전에는 계림합달령(鷄林哈達嶺)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土門河出柳邊外之鷄林哈達, 在興京東北百六十里, 英額城東南百五十里, 其山?峻綿亘派, 自長白而西至斐得里山, 折而西北爲?家江源大山. 又西爲黑林嶺, 又西爲哈達連峰不斷. 河有三源, 合而北流···[水道提綱卷二十五 주석]
흥경 동북쪽 160리에 계림합달(鷄林哈達)이 있는데, 여기서 토문하(土門河)가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현 길림합달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 이름이 재미 있습니다. 중국과 간도영유권 문제로 유명한 토문강과 그 이름이 같은 토문강이 여기에도 있습니다. [水道提綱]에 의하면, 이 강은 꽤 먼 길을 굽이굽이 돌아 흑룡강으로 들어가는 강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 중국의 길림이라는 지명이 원래는 꽤 오래전부터 계림이었다는 사실은 [滿洲原流考]에 조금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이제 이 길림합달령의 위치가 제법 분명하게 밝혀집니다. 수도제강에 의하면 흥경에서 동북쪽 160리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 중국지도를 보아도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은 앞으로의 논의에서도 참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몇 가지 자료를 더 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渡句驪河, 雙流合一稱句驪. 句驪河亦名遼河, 源出邊外, 有二. 其一自西北來者遠不可考, 其一自東來者出長白山西北諸窩集中, 西北流繞鄧子村, 西南折合而爲一, 經鐵嶺縣北, 入雙峽口, 西南分爲二, 曰內遼河外遼河, 繞縣之西南合而爲一. 此河左右?遼東遼西所由分.[欽定盛京通志 卷十四 주석] (청황제가) 구려하(句驪河)를 건넜다. 두 줄기 강이 합해서 하나로 되는데 구려(句驪)라 칭한다. 구려하는 또한 이름이 요하(遼河)이다. 원류는 변경에서 나오는데, 두 원류가 있다. 그 하나로 서북쪽에서 오는 것은 (너무) 멀어서 고찰할 수가 없다. 다른 하나로 동쪽에서 오는 것은 장백산 서북쪽의 여러 강줄기를 모아서, 서북쪽으로 흘러 등자촌(鄧子村)을 감싸고 돈 다음 서남쪽으로 꺾어 합해져 하나로 된다. 철령현(鐵嶺縣) 북쪽을 경유하여 쌍협구(雙峽口)로 들어가서 서남쪽에서 분기하여 두 강으로 된다. 이르기를 내요하, 외요하라 한다. 현의 서남쪽을 빙둘러 합하여 하나로 된다. 이 강의 좌우가 즉 요동, 요서의 분기점이 된다.
동서요하를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 현재는 대요하입니다만, 당시에는 고구려강이라는 뜻의 구려하(句驪河)로도 불렀습니다. 이때에는 고구려가 없어진지 천여 년이 넘게 흘렀지만, 그 흔적은 이렇게 강 이름으로도 역력히 남아 있었습니다. 현 요하는 고구려 당대에는 분명히 고구려 영역내의 강이었고, 또한 고구려 영역내에서는 이 강이 최대의 강이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만 분명히 하였어도, 지금껏 오해되어온 몇 개의 크게 잘못된 통설이 수정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두 개의 큰 지류 중 동쪽의 동요하는 현 길림합달령에서 발원합니다. 지도에 보면, 현 길림 경내에 들어있는 산맥 중간쯤의 북쪽에 요원시(遼源市)가 있고, 산쪽으로는 요하원(遼河源)이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서는 이 동요하가 장백산에서 발원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현재의 길림합달령이 장백산이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참고로 이 동요하의 흐름은 앞으로의 논의에서도 상당히 중요한데 미리 이를 정리해보면, 인용문에서 제시된 것처럼 발원하여 처음에는 거의 북쪽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러다가 크게 시계반대방향으로 타원을 그리는데 그 과정에서 서요하(시라무렌강)와 합하고, 현 개원과 철령 인근에서 다시 한 번 꺾이어서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갑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현재의 동요하는 장백산에서 발원합니다. 사료에 따라 이 동요하를 부르는 이름이 천차만별인데, 참고로 [皇朝通志卷二十八 地理?五 水道一]에서는 이를 흑이소하(黑爾蘇河)라 하며, 여기에 모여드는 여타의 지류들로, 아합하(鴉哈河)·합달하(哈達河)·대청하(大淸河)·양식목하(養息牧河)·소요하(小遼河)·해주하(海州河) 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다음의 인용문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①元一統志 開元路 長白山在舊會寧縣南六十里, 橫亘千里?二百里, 其頂有潭周八十里, 淵深莫測, 南流於鴨?江, 北流於混同江, 今呼爲松阿?江, 東流爲愛呼(舊訛阿也苦今改正)河. 明一統志 長白山在故會寧府南六十里, 橫亘千里高二十里, 其?有潭周八十里.[滿洲源流考卷十四 山川一] ②按遼史, 聖宗太平四年, 改鴨子河爲混同江. 其名始於此. 方輿紀要曰, 長白山在會寧南六十里, 其山橫亘千里高二百里, ?有潭周八十里, 淵深莫測, 南流爲鴨?江, 北流爲混同江, 東流爲阿雅勒古河.[遼史拾遺卷十三 志第二] ③本朝發祥建州. 及得瀋陽. 遂定都焉. 開原之東爲長白山. 橫亘千里. 高二百里. 上有潭. 周八十里. 其水南流爲鴨綠江. 北流爲混同江. 山下四時泥?. 阻人往來. 歲時遙祭而已.[淸代史料筆記叢刊/永憲錄/卷一][앞서 제시한 두 번째 인용문]
앞의 두 인용문에 역시 장백산이 나오는데, 길이가 천 리요, 높이가 이백 리에다가 정상에 못이 있어 둘레가 80리 등등이라고 하니, 이 글 두 번째로 제시한 인용문, ‘開原之東爲長白山···’으로 시작하는 그 장백산과 특징이 완전히 일치합니다. 압록강(鴨?江), 혼동강(混同江) 이야기도 같습니다. 다만 하나의 큰 차이점은 여기 인용문 ①과 ②에서는 장백산이 회령현(會寧縣) 남쪽 60리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위 인용문 ①, ②, ③을 서로 다른 장백산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너무도 그 동일한 특징이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 문제가 되는 차이점을 보면, 장백산의 위치가 현 개원시의 동쪽(흥경의 동북쪽도 마찬가지)에 있다는 것과 현 흑룡강성 아성시(阿城市) 남쪽 60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금의 발상지인 회령현(會寧縣)을 현 통설에서는 아성시(阿城市) 남백성자(南白城子)에 비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따른다면 달리 다른 길이 없습니다. 동일한 장백산이어야 할 것이 사료에 따라, 하나는 길림합달령에, 다른 하나는 터무니없이 다른 곳에 비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성시 남쪽 60리에는 비정할만한 산 즉, 장백산이 없습니다. 따라서 저로서도 언급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 아성시 남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대청산(大靑山)이 하나 있습니다. 흑룡강성내에서 제법 큰 산에 해당됩니다. 현 중국에서는 그래서 그런지 이 대청산도 장백산으로 보고 있습니다. 앞선 글에서 혼동강이 여기저기 비정되는 것을 이야기 하였습니다만, 사실 그와 거의 같은 이유로 장백산도 지금 중국 삼성 도처에 널리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료에 의해 우리민족의(금과 청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발상지인 백산 또는 장백산은 단 한군데에만 있어야 할 고유명사입니다. 현재 우리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것에 의하면 오직 백두산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벌써 3군데입니다. 길림합달령, 백두산, 대청산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중국에서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동북삼성의 높은 산들은 거개가 다 장백산이기도 합니다. 갈 길이 바쁘지만, 잠시 이 문제를 짚어 보도록 합니다.
장백산맥의 동쪽은 길림성 경내 대흑산(大黑山)과 흑룡강성 경내의 대청산(大?山)이며, 중간은 장광재령(張廣才嶺)에서 일어나 길림성 경내로 들어오면 두 지맥으로 나누어진다. 서쪽 지맥은 노야령(老爺嶺)과 길림합달령(吉林哈達嶺), 동쪽 지맥은 위호령(威虎嶺)과 용강산맥(龍崗山脈)에서 남쪽으로 뻗쳐 천산산맥에 이른다. 동쪽으로는 완달산(完達山)과 노야령(老爺嶺), 그리고 장백산맥 주맥을 말한다. 면적은 약 28만제곱킬로미터이다.
위 설명은 중국의 인터넷검색사이트에서 ‘장백산’으로 검색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결과물 중의 일부 요약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중국의‘中國東北地區東部山地的總稱’이 장백산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협의의 장백산 개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관점에 따라 백두산의 화산추체(火山錐體) 부분만을 일컫거나 또는 길림경내 산지만 일컫는다고도 하여 약간씩 차이가 있습니다. 어쨌든 위와 같은 장백산 개념이라고 한다면, 굳이 여기서 장백산에 대한 논증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길림합달령도, 백두산도, 대청산도 장백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현 중국 사이트들에서 언급하는 광의의 장백산을 말하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인용문들을 통해 제시한 장백산은 협의의, 특정한 장백산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흑룡강성내의 아성시와 대청산은 지적한 것처럼 사료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방향이 좀 맞지 않습니다. 산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일 터이니, 그러면 회령현(會寧縣)을 현 통설에서 말하는 아성시(阿城市)로 하지 말고 위치를 조금만 거기서 동북쪽으로 옮겨서 비정하면 현 대청산의 위치와 비교하여 큰 무리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여도 크게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압록강, 혼동강, 애호하(愛呼河) 등의 강이 여기서 발원한다는 기록 때문입니다. 산이 있으니 발원하는 강이 없을 리 없겠지만, 주변에 큰 강들이 지나가기 때문에 이 대청산에서 이렇다하게 발원한다고 할만한 강이 없는 까닭입니다. 있다고 해봐야 고작 수십 리를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가 버리는데, 원류를 따지고 말고 할 강이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름도 낯익은 압록강, 혼동강, 애호하 등이 나온다고 하니 이대로 넘어가기에는 사실 고민이 좀 되는 부분일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애호하(愛呼河)란 강이 어떤 강인지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이것도 만만히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같은 강이 이름만 무려 열 개나 넘는데다가, 그 지역도 하나는 현 길림성과 흑룡강성 남쪽 경계의 영안시(寧安市) 인근에 비정되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흑룡강성 한참 북쪽의 흑룡강 인근에 비정되는 까닭입니다. 잠시 그 애호하(愛呼河)로 비정되는 강 이름들의 변천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각각의 근거는 생략합니다.
애호하(愛呼河)=애호하(愛瑚河)=애야굴하(愛也窟河)=애아하(愛阿河)=아아륵고하(阿雅勒古河)=오고리(烏庫?)=오고열랄(烏古?剌)=오고랄(烏古剌)=오골리(烏骨里)=오고례(烏古禮)=올고린(兀古隣)=오고린(烏古隣)=오고론(烏古論)=오호리(烏虎里)=오고리(?庫理).
따라서 무작정 회령현(會寧縣)이 현 아성시 일원에 비정된다고 하여 위 인용문 ①, ②에 나오는 장백산을 아성시 일원에 가져다 놓을 수는 없습니다. 이를 만회하는 방법은 또 한두 개가 있습니다. 회령현을 달리 비정하든가, 아니면 이 회령현이 이리저리 옮겨다녔다고 하면 됩니다. 발해의 상경용천부, 거란시기의 황룡부, 금나라 때의 회령부 등에 해당하는 개원로(開元路)에 대한 지역 비정이 현 학계의 설명으로는 대표적으로 옮겨다녔다고 하는 케이스입니다만, 이상하게도 회령현이 옮겨 다녔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모순들을 해결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회령현(會寧縣)이 아성시나 그 인근에 있었다고 보지 않고, 다른 곳에 있었을 것이라 보는 관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료에 따른 합당한 해석을 할 길이 없어집니다. 물론 최후의 방법도 있습니다. 제가 인용한 ①, ②의 사료 내용 중 일부를 부정하면 됩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관점에서는 이를 부정하지 않고도 합당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금의 회령현을 현 개원시 동북쪽 길림성 경계에 비정할 무모함만 있다면 말입니다. 무모함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청의 시조 발상지인 악다리성(鄂多理城)은 수십 리 정도 옮겨간 기록은 확인하고 있습니다만, 개원로가 옮겨다녔다는 것은 현 학계의 설명 이외에 원사료에서 확인이 되는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만일 없다면 현 학계의 개원로에 대한 지리비정이야 말로 무모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開原縣. 在(奉天)府東北二百里. 東西距二百七十里南北距六十里. 東至吉林界七十里, 西至新民廳界二百里, 南至鐵嶺縣界五十里, 北至昌圖廳邊界十里, 東南至?嶺縣界六十五里, 西南至鐵嶺縣界六十里 東北至威遠堡門吉林界三十里 西北至昌圖廳邊界六十里 唐虞息?氏地?周及秦肅?氏地. 漢屬夫餘界, 至隋因之唐置黑水州都督府. 後渤海取扶餘地爲扶餘府 又爲上京龍泉府, 遼屬?龍府, 金會寧府. 地元初設開元萬?府, 至元中改開元路. 明洪武閒改元爲原, 二十三年置三萬?. 永?中於城內置安樂, 自在二州?遼東都指揮使司, 本朝康熙三年設開原縣, ?奉天府. 按故三萬衛在今開原城內, 明?所置也. 明統志云, 古開元城在三萬衛西門外金末, 元擒其將布希萬努於此, 置萬?府由, 今開原以知. 明三萬?由三萬衛以知古開元城可知改元爲原, 非二地明矣. 後漢書?婁在扶餘東, 今鐵嶺西北正界開原 開原爲古扶餘 鐵嶺爲古?婁也. 布希萬努舊作蒲鮮萬奴, 今改正.[嘉慶重修一統志] 개원현(開原縣)은 봉천부 동북쪽 이백 리에 있다. 동서 거리가 270리이며, 남북 거리가 60리이다··· 당나라때는 흑수주(黑水州) 도독부(都督府)가 설치되었다. 발해때는 부여부로 되었다가, 상경 용천부로 바뀌었다. 요나라때는 황룡부였으며, 금나라때는 회령부였다. 원나라때 개원(開元) 만호부(萬?府)였으며, 다시 개원로(開元路)가 개설되었다. 명 홍무간에 개원(開原)으로 개명되었다. 홍무 23년에 삼만위(三萬?)를 두었다. 청 강희중에 개원현으로 되어, 봉천부에 예속되었다.
워낙 많은 문제들이 걸려 있기에 정말로 난감할 지경입니다만, 예컨대 부여성 하나의 위치만 하더라도 현 학계의 견해는 통설을 포함하여 대체로 5가지 정도로 갈려 있습니다만, 총장원년 2월28일에 이세적이 빼앗았다는 부여성을 현 중국의 한 견해는 이를 현 요령성 사평(四平). 즉 현 요령성과 길림성의 경계에 위치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우리 학계에서 이렇게 보는 견해가 있나요?) 여기 또는 이 주변이 발해의 상경용천부이며, 흑수부의 하나가 있었으며, 요나라때의 황룡부이며, 금나라때의 회령부라면, 제가 위에서 ①과 ②로 번호를 붙인 인용문에 등장하는 장백산, 그리고 ③의 장백산은 현 길림합달령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현재 중국에서 동북 삼성 여기저기 가져다 놓은 장백산이란 이름은 대개는 그 역사적인 근거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아니 실제 거기다 붙여 놓은 장백산이란 이름은 제거해야만 합니다. 유일하게 남는 것은 현 백두산과 길림합달령입니다. 그러면 둘 중 어느 것이 불함산(不咸山)이란 이름에서부터 비롯된 실제 장백산일까 하는 논의로 압축이 됩니다. 여기서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한마디를 덧붙인다면, 현 백두산이 우리 민족의 영산이라는 것에 어떤 이유를 달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대로 충분히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백산, 마자수가 흐르고 압록수로 이름이 변하기도 하는, 그리고 흑수가 발원하는 그 장백산을 찾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 본격적인 라운드로 넘어가겠습니다.
보론 : 都司城北至三萬衛三百三十里, 古肅?氏地. 衛西有開元城金置會寧府, 號爲上京. 禹貢?州之北界當極于此. 衛東北距長白山千餘里, 其水北流爲混同江, 南流爲鴨?江. 唐書東夷傳云高麗馬?水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此江也.[行水金鑑卷八十七 運河水] 요동도사성(都司城) 북쪽으로 삼만위(三萬衛)에 이르는데 3백30리이며, 옛 숙신씨(肅?氏) 땅이다. 삼만위 서쪽으로 개원성(開元城)이 있는데, 금나라가 회령부(會寧府)를 설치하고 상경(上京)이라 불렀다. 우공청주(禹貢?州)의 북쪽 경계는 마땅히 여기에 이르러 끝난다. 삼만위 동북쪽으로 장백산이 있는데, 천여 리이다. 강물이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이며, 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압록강이다. 당서 동이전에 이르길, 고구려 마자수(馬?水)가 말갈의 백산에서 나오는데, 물색이 압두와 같다고 한즉, 이 강이다.
위의 요동도사성은 현 요양을 말합니다. 이 요동도사성 기준으로 여러 위치가 나오는데, 위 인용문이 지금까지의 제 입장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문장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다만 장백산의 위치를 삼만위 동북쪽이라 하였는데, 이는 동쪽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에 보면 위치 설명상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삼만위=개원성=회령부’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회령부가 현 요령성 개원시 또는 그 인근에 비정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현 학계에서 보는 것과 같은 흑룡강성 아성시로 볼 정황은 없습니다. 여기 강의 원류를 설명하는데 있어, 역시 북쪽으로 혼동강이 흐르고, 남쪽으로 압록강이 흐르며, 말갈의 백산에서 나온다는 마자수를 여기 압록강에 비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 인용문에 따른다면, 마자수는 (여기에서 발원하는 여러 크고 작은 강들 중에서) 현 동요하일 가능성이 크며, 백산은 장백산 즉 현 길림합달령이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몇 개의 인용문을 통해 알려진 이 장백산의 정보를 잠깐 정리해보면, 길이가 대략 천 리에 이르며, 높이는 이백 리이고(明一統志에서는 높이가 20리로 되어 있습니다), 흥경 동북쪽, 개원 동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길이가 천 리에 이르니까, 그 동쪽 끝은 물론 현 길림성 경내로 들어갑니다. 오히려 길림성 경내에 한 2/3쯤 걸쳐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산맥의 정상부(구체적으로 어느 봉우리를 말하는 지는 미상입니다만)에 호수가 있는데 둘레가 80리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산 아래쪽에는 인마가 통행하기 어려운 진흙탕도 있다고 하였으며, 철따라 제사도 지낸다고 하였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잘알려진 것처럼 이 장백산이 금·청의 발상지였기 때문입니다. 더하여 청나라에서는 수백년간 봉금지역으로 정해 사람의 발길을 묶어놓기도 하였습니다.
기타 사료들 : ①소위 마자수가 나오는 말갈백산은 장백산이다(靺鞨白山卽長白).[심양기정과 동북여지석략 108쪽] ②長白山, 草木鳥獸盡白, 上有古城.[武經總要前集 卷十六下 邊防 北番地] 장백산에는 초목과 새와 짐승이 모두 흰색이다. 산상에 고성이 있다. (지금 백두산에는 고성이 없다. 인적이 드문 고산 원시림 지대로 인류 활동이 드문 곳으로 성을 지을 이유가 없다.)
|
출처: 자하루 원문보기 글쓴이: 자하루
첫댓글 이 글은 제가 <다음 블로그>에서 "스크랩"한 것인데, "장백산(長白山)은 길림합달령(吉林哈達嶺)이다"라는 주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