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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1일 토요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욥 42,1-3.5-6.12-17
복 음 : 루카 10,17-24
그때에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주 산업의 경제 가치는 대단하다고 합니다.
2040년에는 1천조 원이 넘는 시장으로 성장하리라 예측합니다.
우리가 운전 때마다 쓰는 내비게이션, 인터넷, 위성 TV 등도
모두 우주 경제의 범주에 들기 때문에 경제 가치는 계속 늘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우리나라가 우주 사업에 뛰어든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였습니다.
그리고 1992년 대한민국 소유의 인공위성 우리별 1호가 발사되었습니다.
개발에 투입된 비용이 31억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이 많았지요.
그래서 인공위성과 같은 쓸데없는 사업에 국비를 낭비한다는 질타가 심했습니다.
여기에 소비되는 국비로 수십만 명은 구제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이 말의 설득력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주 산업에 뛰어들지 않았으면
지금 우리나라의 발전도 없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소위 IT라고 하는 것도 모두 우주 산업의 일환이기 때문입니다.
의미 없다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의미 없는 것은 없습니다.
미래를 보지 못하기에 의미 운운하는 것이며,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남을 누르는 잘못된 힘을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 중요하다고 판단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것처럼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은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고 하는 일이 아니지요.
바로 미래를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귀환 보고를 통해, 제자들의 전교 활동은
주님의 지시를 따랐고 자기들의 능력을 내세우지 않고
주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마귀들까지도 복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은 기쁨에 넘쳐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이 흥분하여 호들갑 떠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태도는 태연하고 평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이 말씀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마귀를 이겨 구원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워진 것을 기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서 기뻐하실까요?
단순히 세상 안에서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마귀를 누르면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말과 행동으로
알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라십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제대로 바라보고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해피 엔딩
-결국은 잘 될 것입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 하리라.”(마태18,3)
오늘은 10월 묵주기도 성월 첫날이자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학자 기념일입니다.
제가 34년 전 요셉수도원에 부임했을 때
임시 제의 방에 있던 사진이 바로 오늘 성녀 데레사 사진이었습니다.
참으로 가난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던 작은 길, 작은 꽃이라 일컬어지는 성녀로
24년 참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그 영향력은 참 놀랍습니다.
성녀보다 3배의 제 나이니 성덕聖德의 삶을 위해
남은 동안 더욱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교황 비오 10세는 성녀 데레사를 현대의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녀의 마지막 유언도 감동적입니다.
1987년 8월 9일 마지막 성체를 모신 성녀 데레사는
9월 30일 저녁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남긴 후 숨을 거둡니다.
“나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의 소명, 마침내 저는 그것을 찾았습니다. 제 소명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의 품 안에서 제 자리를 찾았습니다.
저의 어머니이신 교회의 심장 안에서 저는 사랑이 될 것입니다.”
정말 해피엔딩의 복된 선종입니다.
마지막 임종어만으로도 충분한 성인입니다. 선종도 은총이자 선택입니다.
평상시 사랑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한결같이 사랑할 때 선종의 죽음일 것입니다.
해피엔딩의 선종의 죽음을 위해 미리 임종어를 생각하여
좌우명으로 삼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지금까지 잘 살았어도,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잘 사는 것이 중요하며,
마지막 잘 죽는 선종의 죽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참 좋은 해피엔딩의 선종의 죽음은 이웃에게도 최고의 선물이 됩니다.
중국의 위대한 학자로 감리교 신자였다가 성녀의 자서전에 크게 감명받은 후
가톨릭으로 개종한 ‘동서의 피안’의 저자인 오경웅 박사의 고백도 인상적입니다.
“성녀의 자서전을 다 읽고 난 후
‘만일 이 책이 가톨릭 정신을 대표한다면 내가 가톨릭 신자가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고
생각할 만큼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는 그 책에서 겸손과 대담함, 자유와 기율, 기쁨과 슬픔, 의무와 인애,
강한 힘과 유연함, 은총과 자연, 어리석음과 지혜, 부유함과 가난,
공동성과 개성 같은 한 쌍을 이루는 대립 사이에서 살아 숨 쉬는 종합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성녀의 성덕은 불타의 심성과 공자의 덕성,
그리고 노자의 철학적 초연성을 합친 것과 같아 보였다.
24세를 일기로 죽은 젊은 수녀가 이런 완덕에 도달하다니!
그 비결은 무엇일까?
성녀가 만일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불가결의 지체가 아니었던들
자기 개성을 어떻게 이렇게 충분히 실현할 수 있었으랴!”(동서의 피안, 309-310쪽, 김익진 옮김)
성인들의 삶 전체뿐 아니라 내 삶 전체도 보아야 하고 해피엔딩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함과 동시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나눴던 24년 전 쓴 ‘봄(觀)’이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전체를 보는 것이다
삶은 흐른다
애정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다
가을의 황홀과 겨울의 적요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
아름다움과 추함
강함과 약함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다
이래야 해피엔딩의 삶이요 죽음이다”-1998.11.4.
오늘로서 제1독서 욥기는 끝납니다.
지금까지 참 처절한 고통을 인내하며
하느님을 저주하지 않았던 욥의 인생은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욥은 해피엔딩의 참회의 고백과 더불어 큰 복을 받습니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이런 해피엔딩의 참회의 고백은 은총이자 선택입니다.
평상시 절망하거나 좌절함이 없이 최선을 다한
진인사대천명의 삶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큰 복을 받은 욥은 그 뒤 백사십 년을 살면서, 사대에 걸쳐 자식과 손자들을 보고
늘그막까지 수를 다하고 죽으니 정말 해핀엔딩의 죽음입니다.
오늘 복음도 어제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에 대해 불행선언을 하신 장면이 어둠이라면
오늘 일흔 두 제자들의 귀환을 기뻐하는 장면은 빛의 충만입니다.
이처럼 전체를 보면서 삶의 중심을 잡아야 하고
해피엔딩의 삶이 될 수 있도록 늘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일흔 두 제자들의 해피엔딩의 귀환을 기뻐하시는
주님의 다음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 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제자들이 얼마나 하늘이신 주님께 깊이 영혼의 뿌리를 내린 삶인지 잘 드러납니다.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삶의 중심이신 하늘이신 주님께 깊이 뿌리 내림을 일컫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하늘이신 주님께 우리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백절불굴의 낙관적 삶이요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은 삶에
결국은 모두가 잘 되는 해피엔딩의 삶이요, 죽음이 될 것입니다.
자기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이뤄졌음을 즐거워하며 감사하는 예수님입니다.
어둠과 빛, 어떤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최선을 다했기에
이런 해피엔딩의 고백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어지는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 우리까지 망라되고 있는
다음 말씀의 은총이 우리 모두 남은 동안 분발하여 해피엔딩의 삶을 살게 합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이들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선택하여 늘 삶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과 일치된 삶을 살 때
언제 어디서나 참된 행복이요 모든 것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니 절망보다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주님의 매일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해피엔딩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소서.”(시편119,135ㄱ).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엄동화 선생님의 ‘진리 치유의 길’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에서 ‘스트레스’ 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우리는 살면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예전에는 사느냐 죽느냐가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고 합니다.
자연은 약육강식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적자생존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생명체는 위기의 순간에 ‘호르몬’이 생성된다고 합니다.
그런 호르몬은 순간적으로 근육을 강화시켜 주기고 하고, 힘을 키워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명을 보존하고 보호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는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현대인들은 먹고 먹히는 삶의 스트레스는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욕망, 성공, 명예, 재물에 대한 스트레스를 늘 받고 살아갑니다.
위기의 순간에 나오는 호르몬은 우리의 몸을 지켜주지만
늘 스트레스를 받는 현대인들의 몸에 나오는 호르몬은 우리의 몸을 병들게 하기도 합니다.
원형탈모, 소화불량과 같은 증세는 스트레스가 원인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마치 국가적인 위기의 상황에 계엄령은 필요한 조치이지만
매일 계엄령 속에 산다면 자유에 대한 심각한 침해가 발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스트레스를 대처하는 방법에는 ‘반응과 감응’이 있습니다.
반응은 효과는 있겠지만 더 큰 스트레스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흔히 하는 말싸움은 ‘반응’의 결과인 경우가 많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반응’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따르면 은총과 축복이 주어지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우상을 섬기면 심판과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회의 법과 질서도 ‘반응’을 강조합니다.
교통법규를 어기면 그에 따는 처벌을 받습니다.
성과를 내고 이익을 내면 그에 따른 포상이 있습니다.
감정에 따른 반응은 때로는 큰 사고가 되기도 합니다.
‘홧김’에 큰 사고를 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잠시만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고 싸우기도 합니다.
저도 ‘욱’하는 성격 때문에 큰 상처를 준 적도 있었고, 후회한 적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반응’을 유보하거나 끊어버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반응’을 하지 말고 ‘감응’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까지 내어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오리를 가지고 하면 십리까지라도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응의 방법도 알려 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도 이렇게 하라고 ‘본’을 보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반응이 유리판에 물이 튀는 것과 같다면 감응은 스펀지에 물이 스며드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인은 즉각적인 반응을 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마음에 새기며 감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정든 땅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반응하기보다는 감응하였습니다.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반응하기보다는 감응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에게 땅을 축복해 주셨고, 자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요즘 우리가 제1독서로 묵상하는 욥은 하느님의 말씀에 반응하기보다는 감응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 감사드렸다면 나쁜 것을 주신다 할지라도 감사드립니다.
나는 알몸으로 이 세상에 왔으니 알몸으로 간다해도 아쉽지 않습니다.”
그런 욥에게 하느님께서는 다시금 재물과 자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요즘 나의 삶이 즐겁지 않다면, 감사할 일이 없다면
내가 주어지는 시련에 감응하기보다는 반응하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불평과 원망 그리고 분노와 미움이 있다면
내가 주어지는 삶에 감응하기보다는 반응하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많은 아픔이 있었고,
이른 나이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지만 반응하는 삶이 아니라 감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교회는 수도원 밖을 나와 보지도 않았던 데레사 성녀를 선교사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습니다.
감응하는 삶이 선교사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파견 받았던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드리는 감사기도요 찬미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루카 10,21)
이는 마치 예수님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과의 친교와 일치를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겟세마니에서의 기도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태 26,42)라는
수난의 길을 앞두고 드리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그러니 마치 이 기도는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47)라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곧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파견된 제자들에게
곧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주심에 감사를 드리십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잘난 체하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니라,
받아들이며 기뻐하고 돌아온 철부지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께 넘겨주셨다.”(루카 10,22)는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만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고,
동시에 당신과 당신이 드러내 보여주려는 이들만이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루카 10,22).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를 알게 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과 자비를 입은 경험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찬가(마니피캇)'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아버지!
저희에게서 일어난 모든 것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저희가 응답하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선하신 뜻을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당신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제자들은 예수께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갔다가 돌아와서
기쁨에 넘쳐 스승님께 일의 결과를 기쁨에 넘쳐 보고드리고 있다.
예수께서는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18절).
이 말씀은 사탄이 높은 하늘에서 땅으로, 기고만장한 오만에서 굴욕으로,
영광에서 모멸로, 막강한 힘에서 무력한 상태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그자가 세상을 지배하였고, 모두 그를 경배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 말씀이 하늘에서 내려오시자,
그는 자기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19절)
뱀과 전갈을 밟을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짓밟으신 사실에서 온다.
그들이 뱀과 전갈의 독침에 쏘이더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치유될 것이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사탄을 물리치셨고,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도 같은 능력을 주신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기적을 행하고
사탄을 물리친 일로만 기뻐한다면 교만이 커질 수 있다.
그래서 그 교만을 싹일 때 잘라버리신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20절) 하신다.
논에 피가 올라오면 즉시 뽑아버리는 농부처럼 하신다.
제자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 역시 기쁨으로 찬가를 부르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21절).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란
이방의 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점성사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복음서의 중심 사상이며 예수님의 본 모습이다.
스승님은 우리를 철부지들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흠숭과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미사 (첫 토요일 미사) :
열 두 살 예수님 – 10월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학자 기념
이병근 대건 안드레아 신부
저는 또 하늘과 땅에 있는 성인들의 모든 공로행동과 천사들의 사랑을 당신께 드립니다.
오, 복되신 하느님 성삼이여,
마침내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사랑과 공로를 드리고,
성모님께 나의 봉헌을 맡기며, 그것을 당신께 바쳐 주시기를 청합니다.
… 저는 죄인들이 당신께 배은망덕할 때 당신을 위로하여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마음을 거스르는 자유를 제게서 없애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혹시 제가 연약함으로 인해 어떤 죄에 떨어지거든,
곧 당신의 ‘거룩한 눈길’로 제 영혼을 정화시켜 주시며,
모든 것을 同化시키는 불처럼, 저의 모든 결점을 불살라 주십시오.…
… 오, 저의 지극히 사랑하는 하느님,
그림자들이 사라져 영원히 당신과 마주보고 ‘사랑’의 말씀을 드릴 수 있을 때까지,
제 심장이 뛸 때마다 수없이 이 봉헌을 새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하느님의 인자하신 사랑에 저를 희생으로 바치는 기도문 중
아기 예수와 성면의 마리 프랑수와즈 데레사(소화 데레사), 1895년 6월 9일 삼위일체대축일)
성화되고 싶은 이들에게 봉헌의 삶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특별히 주님의 구원사업에 참여하고 싶은 이들에게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은 가장 완전하고 빠른 방법이라고 확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알고 사랑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성모님을 맡겨주십니다.
우리가 성모님께 순종하고, 성모님의 것이 되면 될수록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될 것이고 뜨겁게 변화될 것입니다.
마리아를 공경하여 받들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치고,
마리아께 재한 존경과 봉사를 위해 완전히 자신을 봉헌하는 자에게
마리아도 당신 자신을 특별한 방법으로 양도하신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8-49)
이스라엘 사람들은 순례를 통해자신들의 정체성을 확고히 했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정체성입니다.
열두 살 예수님께서는 이 정체성을 넘어선 당신의 신적 사명과 만납니다.
오늘 복음 속 성모님의 말씀은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성모님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성모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사랑하고
가까이 있는 이들이 겪는 고통의 신비를 이해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말씀은 루카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당신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표현하시고,
자신을 십자가와 부활로 인도하시는
하느님께 순종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루카 2,50-52)
성모님께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축소 시키며 이해했다고 선언합니다.
성모님처럼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기보다는
예수님을 가르치고 길들이려는 삶을 택합니다.
자신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성모님을 은근히 무시하고 모욕하는 삶을 택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순종은 언제나 우리의 이해 능력을 넘어섭니다!!
열두 살의 예수님께서는 이미 신적 지혜로 충분히 성장했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순종하며 지냅니다.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의 현존을 느끼는 분이 성모님의 품 안에서 지냅니다.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잃어버린 민족은
그 아드님에 대한 믿음도 잃게 됨을 기억합시다.
영원하시고 완전무결하신 하느님께서 미천한 조물이 마리아께 순종했다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도 기묘한 일인가!
… 어머니 마리아에게 30년동안 순종하며 사신 것은
예수님께서 큰 기적을 행하여 전 인류를 회개시킨 것 이상으로
하늘에 계신 성부께 큰 영광을 드렸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일한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마리아께 우리 자신을 예속시킴은
얼마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되겠는가?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18)
아기 예수님 : 가시로 덮인 지극히 거룩하신 네 어머니 성심을 가엾게 여겨라.
배은망덕한 사람들은 순간마다 그 가시로 어머니의 성심을 찌르는데,
그 가시들을 빼 드리기 위해 보상행위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성모님 : 딸아,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불경과 배은망덕으로
매 순간 나를 찌르는 둘러싸인 내 성심을 보아라.
적어도 너만은 나를 위로하도록 힘써라.
그리고 다섯 달 동안 계속 첫 토요일에 고백, 영성체하고 묵주기도 5단을 하고,
또 내 성심을 거스른 죄를 보상하기 위한 지향으로
15분 동안 로사리오의 15가지 신비를 묵상하면서
나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종 때에 내가 구원에 필요한 은총으로 도와줄 것을 약속한다고 말해 주어라.
(1925년 12월 10일, 루치아의 기록 중 ‘파티마 이야기’)
내 딸아,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이 마리아의 티 없는 성심을 거스르고 모독하는 것에 다섯 가지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모독
둘째, 마리아의 동정성에 대한 모독
셋째, 마리아의 천주의 모친성에 대한 모독과 동시에 마리아가 인류의 어머니임을 부정하는 것
넷째, 어린이들의 마음에 마리아에 대한 무관심과 경멸, 심지어 미움을 주입시키는 사람들에 의한 모독
다섯째, 마리아의 성화나 성상에 직접적으로 불경을 저지르는 이들에 의한 모독
내 딸아, 티 없으신 성심의 마리아께서 이 작은 배상의 행위를 요청하여 마리아를 거스름으로써
불행에 처해있는 영혼들을 내가 용서하도록 나를 움직이려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내가 그 불쌍한 영혼들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기도와 희생을 끊임없이 바쳐라.
(1930년 5월 29일과 30일 사이 밤 주님의 메시지, 루치아 수녀)
“나는 묵주기도의 모후이다.
나를 공경하는 뜻으로 이 자리에 성당을 짓기를 원한다.
계속적으로 묵주기도를 바쳐라.
곧 전쟁이 끝나서 군인들을 각자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어떤 것은 들어 줄 수 있으나 어떤 것은 들어줄 수가 없구나.
먼저 그들의 삶을 바로잡고 죄의 용서를 빌어야 한다.”
“인류는 이제 더 이상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 드려서는 안 된다.
그분은 이미 너무 상처를 입으셨다.”
(파티마의 성모님, 여섯 번째 발현 메시지 중)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