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년 전, 그해 잊지 못할 성탄절 풍경
겨울바람이 쇳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코트 깃을 세우고 허리는 구부정하게 수그리고 종종 걸음을 한다.
세밑과 성탄절을 앞둔 서울 풍경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이들은 떼를 지어 거리를 활보하고 노인들은 서둘러 귀가를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젊은이 축에도 끼지 못하고 광화문 K문고에서 책 구경을 하며 두 시간 족히 시간을 때웠을까.
나는 그 시절 너무 가난한 신학생이어서 책 한 권 마음 놓고 살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아버지의 병환으로 가세가 잔뜩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나는 숙명처럼 내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난을 탓할만한 한 줌의 여유도 없었다.
K문고에서 빈손으로 나와 터덜터덜 광화문 지하도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참으로 처량하고 쓸쓸한 소리가 들려 오는 것이었다. 가느다란 바이올린 소리였다.
지하도 모퉁이에서 한 노인이 낡은 바이올린으로 크리마스 캐롤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지나갔다.
그러나 그 노인의 바이올린 연주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다.
나도 잠시 후에 그 앞으로 지나 지하도 계단을 이용하여 밖으로 나왔다.
집에 가려면 광화문에서 버스를 타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나를 강하게 당기는 듯한 느낌이 압박해 오는 것이었다.
무엇엔가 홀린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광하문 지하도의 노 악사의 캐롤을 따라 부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내 온몸에 번져 나갔다.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내성적인 성격으로 숫기 없이 자란 탓에 남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마치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이 내 발걸음은 다시 광화문 지하도를 향하고 있었다.
여전히 늙은 바이올리니스트는 캐롤을 연주하고 있었다. 누구나 잘 아는 멜로디였다.
나는 바이올린 연주에 노래를 따라 부르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내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었고,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르다가 들킨 사람처럼 가슴은 쿵쾅거렸다.
하는 수 없이 자리를 떴다. 그러나 내 발걸음은 이내 거리악사에게로 되돌아 왔다.
그렇게 하기를 몇 차례…. 나는 용기를 내어 노래를 따라 불렀다. 눈을 지그시 감고.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내 노래 소리에 고무되었는지 노 악사는 더 큰 동작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에는 연인 인듯한 두 남녀가 내 옆에 서서 함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우리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발걸음을 멈추고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5분쯤 지났을까?
광화문 지하도에는 적어도 70-80명의 사람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고 서로 손을 잡고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기 시작했다. 어느 새 노인 앞에는 지폐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노 악사는 신이 나서 더 큰 소리를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사람들의 마음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 손을 잡고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헤어질 때는 서로 악수를 하며 "메리 크리스마스!"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풍경이었다. 지금부터 꼭 25년 전 이야기이다.
매년 크리스마스 계절이 다가오면 그때 일이 생각난다.
20대 청년이었던 내가 50을 넘은 중늙은이가 되었다. 그때처럼 아름다웠던 순간이 있었을까?
올 크리스마스에서는 우리교회 교인들이 단체로 헌혈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교회 청년들과 함께 부산역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고 크리스마스 캐롤을 부르며 노숙자들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팥죽을 대접하기로 했다.
자꾸 25년 전 광화문 지하도에서 있었던 그때 일이 생각난다. 나도 늙어가는 모양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순간은 세월이 지나가면 갈수록 더욱 간절해지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