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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平壤城)과 개마대산(蓋馬大山), 하(河) 그리고 현토군(玄菟郡)
○ 우리가 추구(追究)하는 “조선사(朝鮮史) 진실(眞實)찾기”는 많은 원전(原典)이 왜곡(歪曲)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서 하나의 진실(眞實)이라도 찾으려 노력(努力)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을 찾자”는 똑같은 목적(目的)을 갖고 있는 개인(個人) 또는 인터넷등의 블로그 또는 카페 등지에서, 자신(自身)의 주장(主張)만이 옳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意見)이나 주장(主張)은 무조건 잘못된 것처럼 말하는 분들이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게 한다.
예를 들어보자. ‘산 해 경(山海經)’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언제, 누가, 무슨 목적(目的)으로, 어느 곳에서 기록(記錄)했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추정(推定)하고, ‘그럴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을 뿐, 누구도 ‘산 해 경(山海經)’에 대해 정확(正確)한 이야기를 못하고 있는 실정(實情)이다.
또 그 속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내용(內容)을 정확(正確)하게 번역(飜譯)했다거나, 해설(解說)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설사 정확(正確)하게 번역(飜譯)하고, 해설(解說)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평가(評價)할만 한, 전문지식(專門知識)을 가진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판별(判別)할 수 있겠는가? 『산 해 경(山海經) 기록(記錄)을 번역(飜譯)하여 해설(解說)하려면, 이 기록(記錄)이 쓰여 진 때의 시대상(時代相 : 사회상)이나, 당시(當時) 사람들의 갖고 있던 사상(思想), 철학(哲學), 종교(宗敎)등에 가깝게 근접(近接)하지 않는 한 어려운 것이다. 또 이 책이 첨삭(添削)되는 과정(科程)이 있었다.』고 하기 때문에, 더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본다.
○ 문제(問題)는, 이것을 번역(飜譯)하고, 해설(解說)하는 과정(科程)에서, 자신(自身)만의 것이 마치 정설(定說)인 냥 하는 것은, 독선(獨善)일 뿐, 누구에게도 도움 될 일이 없다. 왜냐하면 또 다른 사람이 그것을 번역(飜譯)하고 해설(解說)하다보면, 오류(誤謬)를 발견(發見)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늘 겸손(謙遜)해야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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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카페의 회원(會員)님 중에서 대륙조선(大陸朝鮮)에 대해 반신반의(半信半疑)하시는 분이 계시는 것 같아, 이참에 한 가지를 예로 들면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은 망국사관(亡國史觀)이란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優先), 원전(原典)은 : “동한서(東漢書) 또는 동한기(東漢紀)라고도 하는 후한서(後漢書)”를 갖고, 조선(朝鮮)의 적장자(嫡長子) 격이었으며, 삼한(三韓)의 주인(主人)이었다고 하는 고구려(高句驪)의 중요(重要)한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설명(說明)하는데, 믿고 아니 믿고는 글을 읽는 회원(會員)님이 판단(判斷)할 일이다.
○ 후한서(後漢書)=동한서(東漢書)는 : 《송(宋)나라의 선성령(宣城令) 「범 엽(范 曄)」이 찬(撰)한 것인데, “10제기(帝紀) 12권 8지(志) 30권 80열전(列傳) 88권”다. 범 엽(范曄)은, 〔「사승(謝 承)· 설영(薛 瑩)· 사마 표(司 馬 彪)· 유 의경(劉 義 慶)· 화교(華 嶠)· 사침(謝 沈)· 원 산송(袁 山 松)과 전한(前漢) 유진(劉 珍)등의 「동 관 기(東 觀 記)」와 공연(孔 衍)의 「독한상서(讀 漢 尙 書)」〕중에서 깎아내기도 하고, 채택(採擇)하기도 하였다.「천문지(天文 志) 30권은 또 ‘사 엄(謝 儼)’」에게 찬하도록 했는데, 지(志)가 완성되기 전에, 「범 엽(范曄)이 반역죄(反逆罪)로 복주(伏誅)되자, “사 엄이 밀랍으로 봉하여 수레로 덮어 두었었다.”」 그 뒤 양(梁)나라 때에 와서 유소(劉 昭)가 구본(舊本)을 구해 주를 보충하여 완성하였다고 전해진고 있다. 범 엽(范曄)은 「동한기」를 짓고는 천하(天下)에 부끄러움이 없는 양사(良史)라고 자부하였는데, 범엽(范曄)은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의 예를 모두 변경(變更)하여 제후(諸侯)를 제기(帝紀)의 다음에 올리고, 지(志)에 백관지(百官志)를 더 추가하였다. 사통(史通)에서는 그 간략하면서도 명료하며 소략(疏略)하면서도 누락(漏落)이 없음을 칭찬하였고, 섭씨(葉氏)는 그 분류(分類)와 차서가 정제(整齊)되고 사용된 규칙(規則)이 자세하고 깊다고 칭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런 고사(古事)가 전해진다. 《 청(淸)나라 왕 사진(王 士 禛)의「양한기견문후록(兩漢紀見聞後錄)」발문(跋文)에 이르기를 : “신종(神宗)이 범 엽(范曄)의 이름을 싫어하여「후한서(後漢書)」를 다시 편찬(編纂)하려고 「동관한기(東觀漢紀)」를 구했으나, 오래도록 구하지 못하였다. 뒤에 『고려(高麗)에서 그 책을, 의관(醫官) 모(某)에게 부쳐왔는데』, 이때는 신종(神宗)이 이미 죽은 뒤이다. 원우【元 祐 송 철종(宋 哲宗)의 연호】중에 『고려(高麗)』에서 사람을 보내, 그 내용(內容)을 이야기하므로 중서성(中書省)에서 찾아보도록 했으나, 아는 자가 없었으며 의관 역시 죽은 뒤라, 그의 집에 가서 책을 찾아, 궁중(宮中) 비각(祕閣)에 소장해 두었었다. 내가 일찍이 ‘여 급 공(呂 汲 公)’의 집에서 이것을 베껴 왔었는데, 전쟁(戰爭)통에 잃어버렸다. 》고 전해지고 있다. 【출처(出處) : 사적총설(史籍總說) /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 편 4 - 사적 류 1】
● 『송(宋)나라에서 조차 알지 못하는 것을, 고려(高麗)에서 알려주고, 동관한기(東觀漢紀)를 보내주었다!!!!!!!!!!!!!!!』이게 가능(可能)한 이야기가 되려면, 송(宋)나라는 고려(高麗)의 제후국(諸侯國)이어야 하며, 고려(高麗)는 송(宋)나라의 상국(上國)이어야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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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기록(記錄) 중 일부에,
〔册府元龜夫餘國本濊地也漢武帝元朔元年以其地為滄海郡數年乃罷至元封三年滅朝鮮分置樂浪臨屯元莵真畨四郡至昭帝始元五年罷臨屯真畨以并樂浪元菟元莵復徙居句麗自單單大嶺【後漢書作單大嶺魏志通考與此同】已東悉屬樂浪後以境土廣逺復分嶺東七縣置樂浪東部都尉. : 책 부 원 구(册府元龜)에 따르면 : 부여국(夫餘國)은 본시 "예(濊)"의 땅이다. 한(漢) 무제(武帝)원봉 3년에, 이 땅을 창해군(滄海郡)이라 했으나, 수년(數年) 후에 이를 파하고, 원봉3년에 조선(朝鮮)을 멸하고 낙랑(樂浪). 임둔(臨屯). 현토(玄菟). 진번(眞番)등의 4 군을 나누어 설치했는데, 소제(昭帝)때에 이르러, 시원(始元) 5년에 임둔(臨屯)과 진번(眞番)을 파하고, 낙랑(樂浪). 현토(玄菟)에 병합하였다. 원토(元菟 : 현토(玄菟))는 구려(句麗)가 거하였으나, 스스로 다시 단단대령(單單大嶺)의 동(東)쪽으로 옮겨 남김없이 낙랑(樂浪)에 속(屬)하게 하였는데, 뒤에 낙랑(樂浪)의 강토(疆土)가 넓고 멀어 단단대령(單單大嶺)의 동쪽에 다시 7 현으로 나누고 낙랑동부도위를 두었다.〕고 하였는데,
○ 개마대산(蓋馬大山)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카페를 통해, 원전(原典)의 설명(說明)과 함께 게재(揭載)한 것이다. 여기에서 고구려(高句驪)의 전신(前身)인 <구려(句驪)=구려(句麗)=구려(駒驪)>는 본시 단단대령(單單大嶺)의 서(西)쪽 지방에 있었으나, 단단대령(單單大嶺)을 넘어 동(東)쪽으로 옮겨갔다는 원전(原典) 내용을 가지고 논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 또 「현토군(玄菟郡)은 하(河)의 상류(上流)와 천산(天山)과 밀접(密接)한 관계(關係)가 있다」는 「진서(晉書) : 晉 書 卷 101. 載 記 第 一」의 기록(記錄)과 다른 원전(原典)의 기록(記錄)을 비교(比較)해 보면,
➊ 단단대령(單單大嶺)이 어디에 있는, 어떤 산(山) 또는 산맥(山脈)인지를 추정(推定)할 수 있다는 것에 착안(着眼)한 것이며,
➋ 또 고려(高麗)와 원(元)의 접경(接境)지대(地帶)를 알 수 있기 때문이며,
➌ 이로써 원(元)의 영토(領土)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추정(推定)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개마대산(蓋馬大山)은 :
후한서(後漢書)의 : 단단대령(單單大領) 또는 단대령(單大嶺)이다.
원사(元史)에서 말하는 : 자비령(慈悲嶺) : 고려(高麗)와 원(元)의 국경(國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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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것을 알기 위해서는 후한서(後漢書) 동옥저(東沃沮) 편을 보아야 하는데,
〔後 漢 書 東 夷 傳 東 沃 沮 本 文 : 東 沃 沮 在 高 句 麗 蓋 馬 大 山 之 東, 【주석(註釋) ; 蓋 馬 縣 名 屬 玄 菟 郡, 其 山 在 今 平 壤 城 西, 平 壤 卽 王 儉 城 也.】東 濱 大 海 : 北 與 挹 婁, 夫 余, 南 與 濊 貊 接. :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驪)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東)쪽에 있는데, 【주석(註釋) : 개마(蓋馬)현은 현토군(玄菟郡)에 속(屬)해 있다. 그 산(山)은 평양성(平壤城) 서(西)쪽에 있는데, 평양(平壤)은 곧 왕검성(王儉城)이다.】동(東)쪽은 큰 바다에 임하며【큰 바다인지, 큰 하천을 말하는 것인지를 판별(判別)해야 한다.】, 북(北)쪽으로 읍루(挹婁), 부여(夫余)가 있고, 남(南)으로 예맥(濊貊)에 접(接)한다. ] 라고 하였다.
※ 개마대산(蓋馬大山)이 왜 단단대령(單單大領)인가?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예(濊)편 : 〔濊北與高句驪,沃沮,南與辰韓接,東窮大海,西至樂浪.濊及沃沮,句驪,本皆朝鮮之地也.(中略).玄菟復徙居句驪.自單單大領已東,沃沮,濊貊悉屬樂浪.後以境土廣遠,復分領東七縣,置樂浪東部都尉. : 예(濊)의 북(北)쪽은 고구려(高句驪)와 옥저(沃沮)이고, 남(南)쪽은 진한(辰韓)과 접(接)한다. 동(東)쪽은 큰 바다에 그치며, 서(西)쪽은 낙랑(樂浪)에 이른다. 예(濊)는 옥저(沃沮), 구려(句驪)는, 본래(本來) 모두 조선(朝鮮)의 땅이다. (중략). 현토(玄菟)는 다시 구려(句驪)가 사는 곳으로 옮겨갔다. 단단대령(單單大領)의 동쪽은 이미, 옥저(沃沮), 예맥(濊貊)은 남김없이 낙랑(樂浪)에 속하였다. 뒤에 그 강토(疆土)가 넓고 멀어, 다시 령(領) 동(東)쪽을 7 현(縣)으로 나누고, 낙랑(樂浪)동부도위(東部都尉)를 두었다.〕
위의 후한서(後漢書)에서 말하는 것은, 개마대산(蓋馬大山)은 곧 단단대령(單單大領)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동옥저(東沃沮)는 :
● 동옥저(東沃沮) : 『개마대산【蓋馬大山 : 단단대령(單單大嶺)】의 동(東)쪽에 있다. 또 개마 현(蓋馬縣)은 현토 군(玄菟郡)에 속해 있다. 동옥저(東沃沮)의 동(東)쪽에 평양성【平壤城 : 장안 성(長安城)이다.】이 있는데, 곧 왕검성(王儉城)이다.』라는 이야기다.
○ 이러한 지형지리(地形地理)를 반도(半島) 땅의 지세(地勢)와 비교(比較)해 보자.
ⓐ 반도(半島) 땅 : 평양성【平壤城 : 장안 성(長安城) : 왕검성(王儉城)이다.】서(西)쪽은 오늘날의 바다(海)이며, 그 동쪽지방에 낭림산맥(狼林山脈)이 있고, 산맥(山脈)의 동(東)쪽에 동옥저(東沃沮)가 있었다고 설명(說明)한다. 또 평양성(平壤城)의 동북(東北)지방에 개마(蓋馬)고원(高原)지대가 있다. 《반도(半島)의 지세(地勢)로 보면 : 모두가 평양성【平壤城 : 장안 성(長安城) : 왕검성(王儉城)이다.】의 동(東)쪽 지방이다.》
ⓑ 후한서(後漢書)의 지세(地勢) : 평양성【平壤城 : 장안 성(長安城) : 왕검성(王儉城)이다.】서(西)쪽에 동옥저(東沃沮)가 있었고, 동옥저(東沃沮) 서(西)쪽 지대에, 현토군(玄菟郡) 개마 현(蓋馬縣)이 있으며, 개마대산【蓋馬大山 : 단단대령(單單大領)=단대령(單大嶺)】이 있다. 《후한서(後漢書)로 보면 : 모두가 평양성【平壤城 : 장안 성(長安城) : 왕검성(王儉城)이다.】의 서(西)쪽 지방이다.》
ⓒ 방향(方向)으로 보면 : 반대(反對)방향(方向)으로, 끝없이 달려가더라도 기어이 만날 수 없는 방향(方向)이다.
ⓓ 후한서(後漢書)를 범 엽(范曄)이 찬(纂)할 때, 당시(當時)의 많은 옛 기록(記錄)을 참고(參考)했다는 것을 이미 서두(序頭)에서 말했다. 후한(後漢) 때, 《열수(洌水 한강) 이북에서 압록강(鴨綠江) 이남(以南)은 한 무제(漢 武帝) 이후(以後)로 늘 한(漢) 나라 땅이었었는데, 광무제(光武帝) 때부터 살수(薩水 청천강) 이북(以北)은 고구려(高句驪)에 소속시키고, 이남(以南)은 한【漢 : 동한(東漢) 곧 후한(後漢)】 나라에 소속시켰었는데, 그 후에 패수(浿水 대동강) 이북은 모두 고구려(高句驪)에 편입되었다. 출처 : 다산시문집중에서 제(題) 강역 고(疆域 考)》이미, 반도(半島) 땅을 경략(經略)했다고 했기 때문에, 후한(後漢) 왕조(王朝)는 “반도(半島)의 지세(地勢)”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는 위치(位置)에 있었다. 이러한 자(者)들이, 『동(東)쪽과 서(西)쪽도 구분(區分)치 못했다.』는 말은, 「지구(地球)라는 행성(行星)안에서 “후한(後漢)”이란 왕조(王朝)는 없었다.」는 말과 같다.
ⓔ 그런데 문제(問題)는, 후한(後漢)이 망(亡)하고 난 뒤, 한참 후대(後代)의 왕조(王朝)인, 진(晉)의 역사서(歷史書)인 “진서(晉書)”에서는 「현토군(玄菟郡)은 하(河)의 상류(上流)와 천산(天山)과 밀접(密接)한 관계(關係)가 있다」는 【출처(出處) : 진서(晉書) : 晉書 卷101. 載記 第一 : 然 則 燕 築 造 陽 之 郊 ,秦 塹 臨 洮 之 險 ,登 天 山 ,絕 地 脈 ,苞 玄 菟 ,款 黃 河 ,所 以 防 夷 狄 之 亂 中 華 ,其 備 豫 如 此. : 이민족(異民族)들의 침략(侵略)과 약탈(掠奪)에 대비하는 것은, “연(燕)나라가 조양(造陽) 주변(周邊)에 성(城)을 쌓은 것이나, 진(秦)나라가 임조(臨洮)의 험한 지형(地形)을 이용(利用)하고, 천산(天山)에 올라 지맥(支脈)을 단절시키고, 현토(玄菟)를 감싸 안고, 황하(黃河)에 다다르게 한 것은, 모두 이적(夷狄)으로부터 중화(中華)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라는 말이다.】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말은 현토군(玄菟郡)은 『천산산맥(天山山脈)과 하(河) 상류(上流)와 관계가 깊다.』는 뜻이다.
결국(結局), 반도(半島) 땅에 “조선(朝鮮)이라 불렸던, 구려(句驪)니 동옥저(東沃沮)니, 예(濊)등의 나라는 없었다.”는 뜻이며,
이러한 지세(地勢)가 가능(可能)한 곳을 찾아본다면,『대륙(大陸)의 천산산맥(天山山脈) 또는 아이태산맥(阿爾泰山脈)과 하(河) 상류(上流)지방인 신강 성(新疆省)과 하서회랑(河西回廊)지대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事實)이다.』
○『개마대산(蓋馬大山)=단단대령(單單大嶺)=단대령(單大嶺)=자비령(慈悲嶺)』은, 곧『천산산맥(天山山脈)이나 아이태산맥(阿爾泰山脈)』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후대(後代)에, 원(元)나라와 고려(高麗)의 접경(接境)지대가 된다. 【이 산맥(山脈)의 서(西)쪽도 고려(高麗) 땅이었으나, 원(元)나라에게 빼앗기고, 자비령(慈悲嶺)으로 경계(境界)를 삼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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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사실(事實)을 일천(一千)여년(餘年)이 지난 후(後)의,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도 이를 참고(參考)하여, 인용(引用)하고 있다면,
그 만주(滿洲) 땅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원류(源流)라는 말이 무엇인가? 사물(事物)이 일어나는 근원(根源)이나 기원(基源)을 뜻하는 말이다. 이럴진대, 현재(現在)의 북방삼성(北方三省)지대가 만주(滿洲) 땅이라고 한다면, 지하(地下)에 고이 잠드신 선열(先烈)들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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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역사서(歷史書 : 원전(原典))속의 이야기는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이야기하는 한국사(韓國史)와는 전혀 다른 방향(方向)으로 전개(展開)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은 이러한 조선사(朝鮮史)를 원전(原典)의 내용(內容)과 전혀 다르게 “반도(半島)와 그 북방(北方)일부에 있었다.”고 가르치고 해설(解說)하는 것일까?
○ 초강대국(超强大國)에서 약소국(弱小國)으로 전락(轉落)한 조선(朝鮮)의 영토(領土)를 빼앗아, 분할(分割)하려는 집단(集團)과 초강대국(超强大國)이었던 일만(一萬)년 이어온 위상(位相)을 깨드리기 위한 것이며, 황제(皇帝)로 군림(君臨)하며, 그 아래에서 수없는 세월(歲月)을 “야만인(野蠻人)”으로 취급(取扱)당하고, 변방(邊方)으로 돌던 이민족(異民族)들이 “황제국(皇帝國)”을 깨고, 강(强)해진 국력(國力)을 바탕으로 복수(復讐)의 칼날을 들이댄 것이다.
대표적(代表的)인 것들이, 서구(西歐)의 만인(蠻人)들과 서남(西南)과 남방(南方)의 만인(蠻人)들이었다. 특히 서남(西南)과 남방(南方)의 만인(蠻人) 종족(種族)인 “왜(倭)”는 조선(朝鮮)을 해체(解體)하는 대표적(代表的) 하수인(下手人)이다. 먼저 군대(軍隊)를 동원(動員)하여 선점(先占)하고, 조선사(朝鮮史)를 개편(改編), 반도(半島)와 그 북방(北方)일부(一部)가 조선사(朝鮮史) 영토(領土)라고 못 박고, 또 선점(先占)한 지방을 통치(統治)하기 위한 방편(方便)으로, 역사서(歷史書) 개조(改造)작업(作業)을 하여, 토착(土着) 조선인(朝鮮人)들은, 옛 부터 제후(諸侯)왕의 전하(殿下)로써, 천승(千乘)의 나라로, 상국(上國)에 사대(事大)하던 나라로 묘사(描寫)하여, 식민지(植民地)지배(支配)를 받는 것은 당연(當然)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실체(實體)다.
○ 우리가 경계(警戒)해야 할 대상(對象)이 바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이다. 이것은 나라를 망(亡)치는 폐해(弊害)를 심어주고, 민족(民族)의 자존심(自尊心)을 여지없이 짓밟아 놓았고, 우리의 정체성(正體性)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07월 16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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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의 것은 '조선사의 진실 찾기'에 나서는 우리들에게 아주 초보적인 문제로 지형지리와 방향등에 대한 고찰입니다. 이러한 많은 것들에 대해 하나 하나 재 점검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글 잘 봤습니다.
사서를 조금만 봐도 한반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렇다고 한반도가 남의 땅은 또 아닙니다. 이 세상 어느 곳 보다 조선에 대한 흔적들이 많은 곳이니까요.
물론 원류는 아니겠지요. 너무 한반도만 껴앉고 있는 분들도 문제입니다.
아직도 한반도를 벗어나서 생각 못 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제가 잘 못 해석했는지 모르지만 원사에는 고구려가 한나라에게 나라를 얻었다고 합니다.
전한이 평양에서 도읍하고 고구려도 평양으로 옮겼고, 후한이 낙양에 도읍하고 당이 그곳에서
도읍하여 서쪽에 있는 고구려를 무너뜨리려고 한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당은 요동을 영토로 갖고 있지
않았다라는 송사의 기록이 있네요.
대조연에도 비슷한 글이 있는데 동남쪽에 당이 있고 당의 서북쪽에 고구려가 있다라는 글을 본 기억이 납니다.
반도에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죠. 더욱이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원주는 맥국, 춘천은 예국의 도읍지라고
했잖아요. 현 중국의 동북공정을 하는 인간들도 맥국과 예국의 도읍을 북경북쪽에서 반도 북쪽으로 비정하더라고요. 그들이 조선왕조가 반도에 있었다고 알고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들도 아마 반도에 있었던 게 아니네 라고 했을 겁니다.
@마포대사 신라의 6부의 현재 인구수를 봐도 반도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문무선생님이 싫어하는 족보로 봐도 한반도에는 이상한 현상이 생겨납니다.
조선 중기에 씨족을 집대성한 서책이 있는데 거기에 실려 있는 본관의 수가 지금 현재 반도에
많이 빠져 있습니다.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이죠. 횡성모씨족이 x구려 왕족의 2째 아들의 후손이라고
구라를 치는 마당에 있는 본관이 늘었으면 늘었지 줄어들 수는 없거든요. 절때로요. 국세조사를 보면
각 본관별로 1930년대 부터 30년 주기로 조사를 하는데 계속 인구가 비례적으로 늘어납니다.
좋게 말해서 줄어 들었다라는 거지 없어졌다라는 겁니다. 말이 안 되죠.
사서에 기록된 지명(地名)과 현대의 지도에 있는 지명(地名)이 일치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요....즉 지금의 지도에 있는 수많은 지명들은 얼마나 믿을수 있는지 모르겠읍니다. 황하, 장강, 동정호 정도이고 그나마 황하도 100%믿기 어려운것 같습니다. 현 신장성등 중국 서부에 있는 백룡퇴, 옥문관, 흑수, 등등은 중국 동부(현 만주)에 있는 심양, 요동, 봉황산등과 같이 왜곡의 산물은 아닐런지요.... 중국 남부의 뢰주(雷州)와 양자강 하류의 항주(북청..?)등도 그 본래의 자리인 이른바 중국(中國)이란 땅에 있어야할 지명들인데 지금은 현 중국대륙 사방에 퍼저 마치 지금의 중국이 역사속의 중국인양 행세하고 있읍니다. 천산산맥의
천산도 이러한 범주의 지명은 아닐까요....
지명은 <<본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왕조의 흥망성쇠를 따라 이동된 것. 이민족의 침략으로 인해 내지로 옮겨진 지명(교치). 조선사를 동북삼성과 반도로 이동시키면서 함께 이동된 것>>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황하는 하. 장강은 강이라고 원전에서는 말하는데, 그 이전의 호칭은 아직까지 발견치 못하고 있습니다. 백룡퇴는 그 땅의 지형지리, 특이지형, 형상등을 지명과 합친 것으로 옳다고 봅니다. 천산은 현재 3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분명 왜곡입니다. 그래서 현재에 있는 지명으로 조선사를 연구하는 것은 자살골을 넣는 것과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1900년대와 소위 고지도속의 지명으로 조선사를 연구하면, 조선의 영역은 대륙의 동해연안과 현 동북삼성과 반도에 자리잡게 됩니다. 이렇게 고지도와 현재의 지명등을 가지고 조선사를 연구하는 곳이 여러 군데 있는데, 그래서 이들의 주장은 대륙의 동해안(하북성. 산동성, 산서일부, 강소성, 안휘성. 복건성. 절강성) 변에 위치해 있는 곳에 옛 조선이 있었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반도사관과 종이 한장의 차이일 뿐입니다. 지명의 본래 위치를 찾는 것은 조선사를 찾는 것과 직결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우리 카페에서도 그 지명을 찾고 있으며, 또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명의 이동에 관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요동>이란 지명이 역사적으로 이동된적이 있습니까..? 요동의 크기는 시대마다 조금씩 변화될 수는 있어도 그 기본적인 땅에 붙은 지명(요동)은 연나라때나 고구려, 고려, 조선시대 연행사들이 거처갈때까지 거의 같은땅이 아닌지요....?
현 만주에 있는 요동은 왜곡자들에 의해 강제로 붙혀진 지명이지 조선 말렵까지 의 요동은 연나라와 고구려때의 그 요동이 맞는 것 아닙니까...?
요동요서에 대한 지명은 3차례에 걸쳐 이동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 신강성지방 또는 중앙아세아 카자흐스탄 동부지지방(포괄적 의미입니다). 둘째 : 감숙성으로부터 영하성을 흐르는 황하(한서.후한서.오대사등에 기록된 도요장군), 셋째 : 요녕성의 요동요서>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원전에 의해 고증이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신강성의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부지방과 그 북쪽지방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원전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하는데, 환국고려님께서는 카자흐스탄의 발하슈호 와 신강성 사이에서 유적유물을 확인하셨다고 합니다. 이곳은 당초의 요동요서라는 주장이십니다.
본시의 요동요서는 오로지 한 곳의 땅을 말하는 것인데, 역사서는 여러 곳에 있는 것처럼 기록된 것은 왜곡의 산물이다라고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