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페론은 194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후안 페론의 부인이다. 빈민층의 딸로 태어나 온갖 역경을 딛고 ‘퍼스트레이디'가 된 그녀의 인생은 인생 그 자체만으로도 한편의 영화와도 같다. 퍼스트레이디가 된 후 남편과 함께 노동자와 서민들을 위해 파격적인 복지정책을 내놓아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성녀'로 존경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정권유지를 위한 선심성 정책으로 나라 경제를 피폐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국민적 영웅이라는 평가와 한편으로는 아르헨티나 몰락의 단초라는 너무나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주인공
"Don't cry for me Argentina.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나는 그대를 떠나지 않아요) 란 가사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유명한 노래는 미국 브로드웨이의 거장 앤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가 작곡했다. 이 노래는 1978년 초연된 뮤지컬 [에비타]에서 여주인공 에비타가 부르는 노래이다. 뮤지컬 [에비타]의 여주인공은 바로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에바 페론이다. 에비타는 에바 페론의 애칭이다. 머나먼 남미의 퍼스트레이디를 미국의 공연계의 거장이 주목한 이유는 그녀가 한 시기를 가장 극적으로 살아냈던 여인이며 그 인생 역정 또한 남다르기 때문이었다. 에바 페론은 시골 빈민층의 사생아로 태어나 삶의 온갖 역경을 다 겪은 후 극적으로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퍼스트레이디가 된 인물이다. 선동가로서 정치가로서 봉사자로서 아르헨티나 국민들로부터 ‘성녀’라 불리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또한 너무나 극적이게도 30대 초반에 나이에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그녀의 이러한 드라마틱한 인생사의 배경에는 20세기 초중반 아르헨티나의 현대사가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팜파스의 사생아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드넓은 초원지대 팜파스에 속한 작은 마을 로스톨도스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 후아나 이바르구엔은 인근의 농장 주인 후안 두아르테의 정부였다. 에바 페론은 후아나 이바르구엔과 후안 두아르테 사이에 태어난 5명의 아이 중 4번째 사생아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머니 후아나 이바르구엔과의 사이에 많은 아이들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식들을 법적인 딸로 인정하지 않았다. 출생부터 불우했으며 아버지에게서 버림 받은 에바 페론의 어린시절은 가난과 불행의 연속이었다. 현실을 잊기 위해 어린 에바 페론은 대중잡지의 기사를 읽으며 도시로 나가 화려한 배우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하는 연극과 연주회 등에서 자신이 가진 재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 나이 15살 무렵, 에바 페론은 과감히 가출을 감행했다. 고향 팜파스의 흙먼지를 떨치고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것이다.
남자들 품을 전전하는 삼류배우
그러나 가진 것 없는 시골의 소녀가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에바 페론은 어린 나이부터 성공을 위해서는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잔혹한 현실을 깨달았다. 그녀, 에바 페론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것.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몸’이었다.
에바 페론은 자기의 앞길을 이끌어 줄 것 같아 보이는 남자와 스스럼없이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실속이 없으면 가차없이 떠났다. 에바 페론은 여러 명의 남자 품을 전전하며 삼류극단의 삼류 배우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살기 위해 여러 남자의 품을 떠도는 비애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을 귀엽고 순진하게 꾸미고 싶어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에비타라고 불렀다. 에비타는 꼬마 에바라는 뜻이다.
성공을 향한 불물을 가리지 않은 노력 덕분에, 그녀는 삼류 연극배우부터 시작해 영화배우, 라디오 성우 등으로 차츰 영역을 확장해갔다. 그리고 1940년경 마침내 에바 페론은 어느 정도 유명한 연예인으로 그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
16세 무렵 에바 페론. <출처: en.wikiepdia.org>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는 에바 페론. <출처: en.wikiepdia.org>
후안 페론과의 운명적 만남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지 10년 만인 1944년 에바 페론은 큰 행운을 잡았다. 당대 실력자인 ‘통일 장교단’의 리더 후안 페론을 만난 것이다.
1944년 산후안에서 6000명 이상이 사망하는 지진이 일어났다. 당시 노동부 장관이던 후안 페론은 이재민 구호를 위한 기금 마련에 앞장섰다. 이때 이 구호기금 운동에 연예인 자격으로 동참한 것이 에바 페론이었다.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은 만나자마자 서로의 이용가치를 본능적으로 감지하였다. 첫 번째 부인을 잃고 독신으로 살던 후안 페론은 에바 페론의 젊음과 미모에 빠져들었으며, 에바 페론은 후안 페론이 자신에게 가져다 줄 부와 명예를 한 순간에 알아차렸다. 두 사람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함께 살기 시작했다.
1945년 후안 페론과 에바 페론. <출처: en.wikiepdia.org>
당시 후안 페론은 페론주의라는 새로운 기치를 걸고 정치적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페론주의는 산업의 국유화, 외국 자본의 축출, 노동자 위주의 사회 정책 등 국가 사회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페론주의의 기치는 참신해 보였지만 당시의 아르헨티나 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군부에 의지하는 성격이 강해 독재로 흐를 가능성이 많았다.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이 동거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후안 페론에게는 정치적 시련이 닥쳤다. 반 페론주의자들이 정권을 획득한 후 후안 페론을 구금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뜻밖에도 기회가 되었다. 에바 페론의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재능이 이를 계기로 한 순간에 발현된 것이다. 단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연예인으로만 생각되었던 에바 페론에게는 뜻밖에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힘이 있었다.
정치적이며 선동적이고 남을 설득할 줄 아는 그녀의 재능이 애인 후안 페론의 석방운동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팜파스의 가난한 딸이라는 그녀의 출생과 비루한 인생 역정이 빈민과 노동자들에게 동질감을 안겨주었다. 에바 페론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연설은 민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에바 페론은 구금된 후안 페론을 위해 노동자들을 부추겨 총파업을 일으켰다. 그리고 파업 10일 만에 후안 페론은 노동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전격 석방되었다. 에바 페론의 도움으로 정치적 우위를 확보한 후안 페론은 이런 선물을 가져다 준 에바 페론에 감사하듯이 1945년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에바 페론과 포퓰리즘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 있다. 대중에 아부하여 인기 몰이를 하지만 실은 대중을 기만하고 인기를 정치적인 입지 확보에만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포퓰리즘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사람들로 평가되고 있다.
1946년 대통령 선거에서 에바 페론은 남편 후안 페론의 선거 유세 자리에 동행하며 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확신에 찬 연설은 아르헨티나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에비타라는 애칭이 전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알려진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에바 페론의 인기 덕에 후안 페론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대통령이 된 후안 페론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정책을 내세우며 정권유지를 도모했다. 후안 페론의 뒤에는 에바 페론이 있었다. 더욱 정교화 된 '페론주의'하에서 외국자본의 추방, 기간 산업의 국유화,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한 노동입법 추진, 노동자 생활 수준 향상, 여성 노동자의 임금 인상 및 여성의 시민적 지위 개선, 친권과 혼인에서의 남녀 평등의 헌법 보장, 이혼의 권리를 명시한 가족법 추진, 여성의 공무담임권 획득 등 획기적인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1946년 대통령 선거 중 남편 후안 페론을 위해 유세를 하는 에바 페론 <출처: en.wikiepdia.org>
그러나 이런 수많은 개혁들은 일부는 좋은 평가를 내릴 만 한 것이었지만 대부분은 대중의 인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일 뿐 실질적으로 나라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후안 페론 정권은 겉으로는 노동자와 여성 등 약자를 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혜택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는 허세와 기만의 정권이었다. 외면적으로는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인기의 이면에는 페론 부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세력에 대한 끊임없는 탄압이 감춰져 있었다. 비판세력의 제거로 아르헨티나는 정치적으로 경직되었고 후안 페론과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독재 속에서 부정부패가 만연해졌다.
한편,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 전역을 다니며 복지사업과 봉사활동을 벌이며 성녀를 자처하였지만 실제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그것은 페론 정권이 내건 정책들이 기본적인 사회개혁 아니라 대중을 사탕발림으로 마비시킨 후 기존의 지배구조는 그대로 지속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중적 인기를 더욱 더 이끌어내기 위해 에바 페론은 남편 후안 페론과 자신의 우상화 작업을 시작했다. 초등학교에서는 매주 페론 부부를 찬양하고 기리는 글짓기를 하도록 하였으며, 스페인어 수업 시간에는 에바 페론 본인의 자서전 [내 인생의 사명]을 교재로 채택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페론 정권 시기에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하향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은 비판세력을 제거한 아르헨티나에서 나라 돈을 자기 것처럼 마음대로 썼다. 에바 페론의 사치는 극에 달했고 횡령한 많은 돈이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에 입금되었다.
에바에 대한 엇갈린 평가
에바 페론은 9년 간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였다. 그녀는 1952년 34세의 나이로 척수 백혈병과 자궁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아르헨티나 대중들은 에바 페론의 죽음을 광적으로 애도했다. 한달 간의 장례식은 국민들이 바치는 꽃으로 뒤덮혔다.
에바 페론의 죽음 이후 그간에 숨겨왔던 페론 정권의 문제점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리한 경제정책은 실패로 돌아갔고 끊임없는 인플레이션과 실업, 노동자의 동요 등등 에바 페론이라는 방패를 잃어버린 후안 페론은 문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결국 군부마저도 후안 페론에게 등을 돌려 후안 페론은 군부 쿠테타로 쫓겨나 해외로 망명하였다.
에바 페론의 시신 <출처: en.wikipedia.org>
후안 페론의 망명으로 에바 페론의 시신도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한때는 페론주의의 부활을 염려한 아르헨티나 군부에 의해 에바 페론의 시신이 탈취되어 이탈리아에 숨겨지기도 하였다.
에바 페론은 죽었고 그녀가 실제적으로 남긴 혜택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생전에 그녀를 좋아했던 수많은 노동자, 여성, 빈민들은 여전히 그녀를 그리워했다. 후안 페론은 죽은 아내 에바 페론의 후광을 등에 업고 십 수년 만에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1973년 다시금 대통령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이때 에바 페론의 시신도 아르헨티나로 다시 돌아왔다. 에바 페론의 후광은 후안 페론이 재혼한 이사벨 페론에게까지 미쳐 이사벨 페론은 남편 후안 페론이 대통령이 된 후 10개월 만에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죽은 뒤에도 그 인기 탓에 편히 눈을 감지 못하던 에바 페론의 시신은 레콜레타 공동묘지의 가족 묘역으로 옮겨졌다. 죽은 지 24년 만의 일이었다.
에바 페론, 혹은 에비타. 그녀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로 엇갈린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에바 페론의 인생은 공연 작품거리가 될 만큼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 이후 아르헨티나와 남미의 여러 나라가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페론주의와 포퓰리즘의 그늘에 놓여 있어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이러한 엇갈린 평판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의 많은 대중들은 아직도 에바 페론을 그리워하고 그녀를 성녀로 추앙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시골 농가에는 아직도 에바 페론의 초상화가 걸린 집이 종종 있다고 하니 그녀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