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비해 가난한 집은 참 많이 없어졌다. 비록 가난하다 하더라도 끼니를 걸러야 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은 잘 보지 못했다. 그리 넉넉하지는 않지만 얼마간 정부에서 현금으로 지원해주는 덕이지 않을까 한다. 집안에 가난한 친척이 있다. 젊었을 때 아재는 꽤 건장해서 36개월의 힘든 군 생활도 너끈하게 마쳤고, 결혼해서 농사도 지었지만 무슨 이유인지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둔해져서 요즘은 문 밖 출입조차 힘들어하신다. 설상가상으로 두어해 전에는 살던 집에 불이 나서 전소된 바람에, 주변 친지들과 면사무소에서 돈을 얼마간 모아 열 평정도 되는 집을 장만해주었다. 그리고 생계는 손 바닥만한 농지에서 푸성귀를 심어 나오는 반찬 찬거리와 면에서 다달이 나오는 생활 지원금으로 살고 있다.
지나간 토요일은 그 집의 아들이 장가가는 날이었다. 평소 가난한 생활에 이웃집 애경사 때 부조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또 세 시간이나 걸리는 온양에서 하다보니 하객도 많지 않아 예식장은 안은 설렁한 바람이 하객들 사이를 숭숭 지나갈 정도였다. 그 예식장에서 나는 부조금을 접수하였다. 부조해 주신 집은 다해 봐야 수십 집에 불과했으니 그리 바쁘게 서둘 필요도 없었다. 축의금 봉투를 하나씩 확인해 가던 중에 인편으로 보내주신 봉투 하나를 열었다. 그 봉투 안에는 꼬깃꼬깃한 만원권 지폐하나, 그리고 오천원권 지폐 두장해서 2만원이 들어 있었다. 잠시 이 돈을 보면서 액수보다 이 봉투를 한 주인공의 정성을 상상해 보았다. 지독한 자린고비라기보다는 가난하고 힘들게 사시는 어느 촌노가 생계비 일부를 떼어서 봉투에 담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 보았다. 잘사는 사람의 10만원은 한달 생활비의 1%에 불과할 수 있지만, 이 봉투의 주인공은 생활비의 몇 10%는 되는 소중한 돈이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엉뚱한 상상에 빠져들었다.
촌노의 젊은 시절에는 꽤 농사도 잘 지었다. 농사를 지으면 제값을 받고 팔았으니 수입도 괜찮았다. 그러나 부부는 결혼하고 수년이 지나도 자식을 얻지 못하여 애를 태우던 중에 겨우 자식을 하나 얻었다. 그리곤 남편이 이유도 모르는 병이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구들장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몸으론 더 이상 자식을 얻지도 못했을 뿐 더러, 여자 혼자 힘으로 농사지으며 남편 병수발을 했으니 가세는 눈에 띠게 기울어져 갔다. 설상가상으로 농자재값은 하루가 다르게 널뛰고 수입 농산물이 넘쳐나면서 농촌경제는 더욱 피폐되어갔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부부의 유일한 희망인 아들의 공부는 포기하지 않았다. 피 같은 전지까지 팔아서라도 어렵게 얻은 자식의 교육비에 아낌없이 썼다. 아들이 크면 클수록 집안은 더욱 기울어졌고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영세민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나라에서 주는 얼마간의 돈으로 남편의 의료비와 생활비로 쓰기엔 턱도 없이 모자라 찢어지도록 가난하게 살았다. 믿었던 자식은 대처에 돈 벌러 나갔지 미모의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자기를 길러준 집에는 도통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니 생활은 영 낳아질 기미가 없고, 죽지 못하는 심정으로 지아비를 간호하며 살 따름이었다. 그러던 중에 이웃집에서 청첩장이 날아 왔다. 지금껏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면서 축의금을 낼 처지도 못 되었다. 그러나 혼기에 차있는 아들을 생각하니 무작정 모른 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쪼개고 쪼개 쓴 한 달 생활비를 모아보니 남은 것은 달랑 오천원 두장과 만원 1장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거라도 전에 쓰고 접어 두었던 봉투에 담아 이웃집에게 전달 해 달라며 부탁했다.
“축의금 받아주세요.”
헐떡거리며 늦게 달려온 하객 한분이 넋 나간 내 상상의 바다로 뛰어 들면서 퍼뜩 정신 차렸다.
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문장을 읽기편하게 더 나누어 주시는게 ...
제목이 참으로 재미 있네요. 마음 아파하며 읽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아들이 밉습니다 .
그부모와 아들이 평행선으로 가지 말았으면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