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 97년 5월 12일 토요법회
□ 김제원 교무님 설법
여러분은 교당에 왜 오는가.
나를 위해서 온 것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여러분의 선택이 있어서 온 것이다.
여러분 내면의 깊숙한 곳에는 구도적 열정이 있을 것이다.
여러분 가슴 속에는 뜨거운 열정이 있다. 내게도 있다.
시립대 동아리에서는 그 사람들이 마치, 교당에 오는 것이
자신을 위해 오는 것이 아닌, 교무를 위해 오는 것으로 생각할까 싶어서
첫 법회에서 강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처럼 어린아이같이 “밥 안먹겠다”하는 남을 위해 사는 인생같은 삶에서는 빨리 벗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체적 인생이다.
주체적 입장이 되어야 한다. 아까 법문을 읽으셨는데 그것을 내 실지와 대조해 보는 것이 주체적인 것이며, 그것이 무시선이며 사사불공이다. 내가 주인이 되어 그 시간에 일심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교무님들이 아쉬운 소리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도 대학 나왔으면 무엇이 주종인지 알기는 해야 한다.
화요공부방 이야기를 하였는데 9월 첫째주 법회가 화요공부방 시작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멤버 중 박윤호, 진대성, 오은진, 전성욱, 박순명 멤버들이 열심히 한 것 같다. 당시 나는 부교무도 간사도 없었다. 내가 설거지도 하고, 회보, 청소도 했어야 했다. 때문에 화요공부방 때 책상이 엉망이어서 지인에게 돈을 달라고 하여 을지로에서 탁자 맞추었다. 직접 봉고차 가서 싣고 왔으며, 키보드도 사고, 대산종사 DVD도 구입하기도 했다.
그 때 준비하면서 큰 교무님께 계속 건의하여 조르다시피 하여 허락을 받고 혼자 몇 달간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큰 교무님이 “저 사람 징그럽다”고 하였다.
대종사님은 신분의성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것이 만사성공이다.
그간의 사진을 보면.. 있다 없어지거나 마음이 죽은 사람이나, 출가한 사람들 등
다양한 인생이 펼쳐지고 있다.
중간에 서원이 약해지고 신이 약해진 사람, 대종사님의 법보다는 이 세상의 자본주의의 탐욕에 마음이 돌아간 사람들, 우치한 사람들, 자행자지한 사람들은 중간에 나가게 되었다.
이진원 교우 출가, 박윤호 교우 출가
진대성 교우는 일반 가서 아이도 낳고 잘 살고 있다.
뭐라고 해도 법을 좋아하고, 잘 따르고 대종사님을 잘 따른 사람은 분발심을 내고
까닭있는 마음을 내서 진급을 하였다.
진급을 나는 올랐다 내렸다 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싶다.
살다 보면 주위 외부 환경,
처음에는 순명 교우가 일원상 진리를 듣고 너무 좋았다고 한다.
물론 처음에는 교리가 너무 좋아서 온다. 그런데 마음이 바뀌기도한다.
영생과 인과에 대해 체가 잡힌 사람은 내가 힘들고 아플지언정 잠깐 멈추고 쉴지언정,
믿음을 바꾸거나 공부를 저버리지는 않는다.
내가 출가한지 25년이 되었다.
힘든 적은 있었지만 한번도 이 회상을 나갈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힘들 때는 단순하게 생각하거나, 훈련, 기도를 통해 힘을 얻어야 한다.
그렇게 차고 올라가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다가 낮아지더라.
여기에서 원불교를 떠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경계를 헤쳐나갈 힘이 부족하다고 본다.
경계가 올 때마다 도망가는 방법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해결책이 없다.
교당 다니다 보면 언제나 좋을 수만은 없다.
내외간에도 갈등과 마찰이 있을 텐데, 교당에서 왜 갈등과 마찰이 없기를 바라는가.
반드시 어디에 가나 힘든 경계는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을 신분의성을 내어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어떤 경계가 왔을 때 핑계대고 원망하고 바꿔버릴 것이 아니라
꿋꿋이 대의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집단이나 문제가 있지만 원불교만큼 문제없는 집단은 없다.
인간이라는 것이 잘 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원불교는 참 깨끗하다.
문과 무에 대해, 우리나라는 크게 분리한 것 같다.
그러나 서양은 문무를 잘 구분하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아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었다면 확실히 공도자숭배를 해 준다.
우리는 6.25때 빨치산과 우리 정부군이 주야로 오면서 백성들을 죽였다. 백성들이 국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국가를 위해 전쟁터에 나가는 것 보다, 글쓰고 시쓰는 것이 귀족문화가 되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전쟁터에 직접 나가고, 노동을 하고 땀을 흘린 사람들에게 대우를 해 주었다.
노벨상은 공도자 숭배의 극치라고 본다.
우리나라 4000만 중 대학졸업자가 400만이 안된다. 10%가 안되는 것이다.
내가 볼 때 대학졸업자들은 나 혼자 잘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은의 은혜, 국가의 은혜,
천지자연의 은혜 속에서 어떻게 잘 살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세상을 즐길 줄 아는 문화적 안목이 생겼다면 정말 봉사를 해야 한다.
내 돈 내가 쓰겠다는 데 무슨 말인가! 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폐해이다.
원불교인은 사요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전에 남자교무 모임 앞에서 발표하면서 앞으로 10년 후에 교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했다. 세상이 변화하는 것이다.
결국 이 사회를 정당과 정치가가 끌어가는 것보다,
우리가 어떻게 이 사회를 끌어갈 것인가. 이것을 말한 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제이다.
우리는 사회의 도움을 입었으니 당연히 보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원불교를 다닌 사람은 이미 상류층이라 생각한다.
삼학 사은 사요를 아는 사람은, 지구를 하나로 보는 안목인 것이다.
과거의 공덕 속에 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럼 철든 사람이면 어떻게 될까. 앞으로 지도자는 어떻게 될까.
봉사하지 않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는 없다.
이기적인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도 싫어한다.
도둑놈이 자기 아들에게는 도둑질하지 말라고 한다고 한다.
대종사님이 말씀하신 인격관리를 마음공부를 통해 한 사람은 대 사회적으로
사은에 보은하는 공동체적 시각과 안목을 가진 사람이 많이 난다면,
인터넷공간, SNS 등을 통해 법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좋은 것을 나눠먹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국가 간에도 정치인들이 하는 것을 보면, 일단 내 나라부터 챙기고 보는 것이다.
자국의 이익을 기본적으로 깔고 한다.
그런데 진정한 공동체, 한 식구라면 이해관계만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한 식구라는 계산을 초월해 성자적 안목으로 할 것인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나 밥먹고 살기도 어려운데”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공동체적 안목을 입은 사람이 음조와 음덕을 입은 것이고, 되어지는 이치가 있으며
안목이 선공후사, 지공후사의 안목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이 생에 어디를 가더라도
주인으로서 점점 성장할 것이고, 내생에도 복덕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때 내가 나눠줄게 하는 사람이 되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