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아버지를 보내 드리고 나서
한상림
참으로 세상은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많은데도 우리는 한치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우매한 인간입니다.
아버지 병간호를 한다고 가방을 싸들고 와서는 도착하자 마자 아버지 장례식을 치루고 말았습니다.
가뿐 호흡소리가 아직도 산소호흡기를 타고 들려 오는 듯 한데,
아버지가 안 계신 아버지의 집에서 우리 오남매들은 전혀 아버지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하고
모여서 유품들을 정리합니다.
아이들은 친정 어머니를 위해 일부러 새 티비로 바꾸신 화질 좋은 티비를 보고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컴퓨터 의자를 바꾸시겠다며 새로 장만하여 놓으신 컴퓨터 책상 의자에 앉아있습니다. 그렇네요.
정말 편안히 보내드린거 같아 홀가분한 마음은 스스로의 위안일 뿐,
막상 아버지께서 떠나시고 나니 이것저것 못 해드렸던 부족한 마음들만 뇌리를 강타합니다.
장례식날,
상상치 못할 많은 분들이 다녀 가시고, 평소에 그렇게 꽃을 좋아하신 덕분인지 장례식장 입구를
꽉 메운 화환들에 파묻혔습니다.
선산에서 묘소를 만들때에는 햇빛마저 구름에 가려 비가 쏟아지기 직전에 바람마저 살랑댔습니다.
산소 만드는 일을 모두 마치고 성복제를 지내려 준비하는데 빗방울이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진행되는 30분 동안에는 빗방울이 멈추더니, 집으로 돌아오려는 그 순간 버스에 올라 타기
직전에 굵은 빗방울이 세게 쏟아졌습니다.
이렇게 자연현상 마저 아버지 성격처럼 깔끔하게 맞춰 주어서 큰 불편함을 덜어 주셨습니다.
그제였어요,
한 시간 정도 고속도로를 달려 오다가 음성휴게소에 들려 점심을 사먹고 가려는데
전혀 생각지 않은 친정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황당하였습니다.
담당의사가 아버지께서 지금 위독하시니 당장 자식들을 부르라고 하였다구요.
아니, 아침에 전화 할 때까지 좀 상태는 안좋으나 날더러 오시지 마라던 어머니의 말씀을 어기고
간호를 2-3일 하고 온다고 집을 나섰는데, 무슨 날벼락인가요?
내내 울면서 액셀레이터를 밟고 병원으로 2시 좀 넘어 도착,
아버지는 의식이 있으셨고, 내 묻는 대답에 가느다랗게 "어" 라고 하셨습니다.
묵주를 손에 쥐어 드리면서 내가 평소에 쓰던 손때 묻은 묵주이면서 아버지께서 가시고 나드라도
계속 묵주 기도를 드리겠으니 끝까지 쥐고 가시라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의식이 희미해 질때까지 꼭 쥐고 계셨습니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밝음과 어둠 속에서, 생명의 끈을 놓으시지 않으려 많이도 참으셨습니다.
그것은 서울서 달려오고 있는 나머지 자식들을 뵙고 가라고 나의 바람대로 애를 쓰신겁니다.
큰어머님께서 나중에 묵주를 보시고 "이건 뭐냐면서 빼내려고 하시니, 임종직전에 의식불명인
그 상태에서도 그 묵주를 빼지 못하게 나꿔채듯 손에 힘을 주시고 막으셨다니...
기적같은 순간의 반응이었으며, 큰어머님은 깜짝 놀라면서 얼른 손을 놓으시고선 말씀하셨습니다.
채트리듯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묵주를 못 빼게 하셨다구요.
병원에 도착한 이후 사경을 헤매시던 긴장된 6시간 동안 나는 한시도 아버지 곁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내 말을 알아들으시니 아버지를 붙잡고 울기도 많이 하였고, 드리고 싶은 말씀도 많이
해 드렸습니다.
친정 어머니 모시고 오남매 가족 잘 살거니까 편안히 가시라구요,
그리고 동안 아버지를 꼭 살려 드리고 싶었는데 못 해 드려서 죄송하다고요.
인명은 재천이라고들 하지만, 그 순간엔 내 잘못들만 자꾸 스쳤습니다.
그 당시 다시 대체요법으로 면역을 높였으면 절대 재발은 안했을 거라는 생각,
왜 내가 아버지 곁에 살면서 수시로 관찰하여 병을 일찍 발견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등등...
의식이 왔다갔다 하는 그 순간에 아버지의 이마에 볼에 입을 마추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그 동안 못 드린 내 마음과 사랑은 부족하기만 하여 내내 아버지를 부르면서
"아버지,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외쳐봐도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내 마음을 받아 주신건지, 눈물도 흘리시면서 때로는 묻는 말에
겨우 한마디 대답만을 하실 뿐, 줄곧 심장박동과 혈압, 맥박을 체크하는 기계의 숫자와 함께
산소호흡기로 내뿜는 들숨과 날숨 소리만이 더 크게 압박해 왔습니다.
우리 오남매 부부와 큰아버지 부부 즉 당신 형님 부부와 사촌오빠 내외들, 외삼촌까지 모두 당신곁에서
늘 가까이 하시던 친구분까지 계신 병실에서 마지막 눈을 감으셨습니다.
친정어머니와 함께 잠시 이별의 인사를 나누도록 자리를 비켜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부부가 꼭 50년을 함께 하신 거지만, 동안 사랑과 다툼 등등 나름대로 두 분만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붙잡고 사과도 하시고 용서도 청하시고 내내 아버지께 더 잘해 드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시는 듯 보였습니다.
긴 투병 동안 어머니의 고초 또한 크실텐데, 아버지께서는 한 마디 말씀도 못하시고
산소호흡기를 꽂으신 채 들으시기만 하시더니,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셨습니다.
장례식 3일 동안 어쩌면 날씨마저 우리를 힘들지 않도록 도우셨는지? 아니면 아버지께서 복 많은
분이시라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려 주신건지?
선산에다 산소를 만들어 드리고 나서 제를 올리려는 그 순간까지 하늘은 구름으로 가려져 살랑거리는
바람과 함께 무더위를 못 느끼도록 선선한 바람이 불더니, 제를 올리려 시작하려는 찰나에 빗방울이
떨어져 우리 모두는 서둘러 평토제를 시작하며 절을 올리는데,
빗방울이 서서히 멈추어서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온 집안 친지들이 돌아가며 절을 하고
술 한잔씩 돌리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일을 마무리를 하고 장지를 출발하려는 그 시간에 모두들 버스에 올라 타기직전에
굵어지는 빗방울......
이제 아버지를 고향 선산의 새집에 아주 편안히 모셨습니다.
고향 마을이 보이는 선산에서 매일 당신께서 태어나신 곳을 바라 보시면서, 당신 부모님 곁에다
새 집을 마련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새 집에서는 아버지께서 태어나시고 자라시면서 늘 그리워하던 고향집에 보입니다.
앞으로 3-4개월의 시한부 생명이시라는 판정을 받고, 어떻게 그 긴 고통을 견디실까 걱정하면서
한편으로는 호스피스 과정까지 알아보고 편안하게 보내드려야 할까, 아니면 고통스러우셔도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다시 항암과정을 들어갈까, 갈림길에서 일주일을 이곳 저곳 알아보다가 겨우
대전 건양대 병원에 입원해 드렸는데, 입원하신지 하루가 지난 그시간에 운명을 하신겁니다.
평소에 늘 자식들 힘들게 하지 않고 얼른 고통속에서 헤어나는 길이 빨리 가는 길이라고 하시더니,
그렇게 당신의 운명도 성격대로 마침표를 찍으시고, 지금은 새집에서 편안히 잠드셨습니다.
오늘따라 비가 종일 내리고, 이제 장마가 시작 되었네요.
남동생들은 내일이 삼우제라서 그때에 찾아뵈어도 되는데, 굳이 빗속으로 차를 가지고 떠났습니다.
아버지를 뵙고 싶다구요,
아버지께서 평소에 늘 아끼며 사랑을 쏟으시던, 연산홍과 사철나무를 들고 묘소에 심어 드린다고요.
지금 친정집 베란다에는 아버지의 꽃들이 활짝 웃고 있습니다.
..........07. 6. 24. 일요일
아버지의 유품들을 정리하면서 아직도 실감나지 않는 친정집에서 잠시
첫댓글 삼가 명복을 빕니다. 긴 글 읽고 나니 가슴이 저밉니다. 이레나님 건강하시고, 잘 모시고 오시길 바랍니다^^
~~~~~~!!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