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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길을 찾다
영화 ‘길 위의 김대중’을 보았다. 서울에서도 거의 막을 내려 상영관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결국 우리 동네 작은 극장 인덕원 시네마에서 볼 수 있었다. 너무 광범위하게 검색망을 넓혔던 모양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이때 쓰는 말일 게다. 등잔 밑은 김대중 제대로 보기에도 해당된다. 오래도록 우리 시대는 김대중이란 인물 평가에 인색하였다. 애써 눈감았기 때문이다.
기대 이상이었다. 흑백 영상이 생생하게 표백된 한편의 장엄한 다큐멘타리였다. 대한뉴스 수준의 이런 영상을 어떻게 구했을까 싶은 장면이 이어졌다. 다시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일렁일 만큼 빼어난 편집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한 인물의 생애를 애초에 각본 있는 영화처럼 엮은 만듦새다. 영화는 한 인물의 일대기를 넘어 우리 시대의 이야기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독재와 반독재 투쟁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였다. 엔딩에서 후속작을 예고하고 있으니 1987년 9월 이후를 다룰 다음 편은 더 많은 사실적 영상을 장착하고 현재진행형의 호소력을 담아 찾아올 것이다.
한겨레신문 고명섭 기자가 ‘길 위의 김대중’ 5가지 명장면을 손꼽았다. 특히 1983년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가 우승한 날, 관중들이 환호하는 장면은 드라마였다. 경기장 관중석에서 벌떡 일어난 사람들은 해태를 연호하다가, 돌연 김대중을 외치기 시작하였다. 어안이 벙벙한 장면이다. 김대중 연호(連呼)는 결국 1987년 9월, 16년 만의 광주 방문에서 기차역마다 이어져 망월동까지 계속된다.
결국 왈칵 눈물이 났다. 김대중의 고난이 다른 역사가 아니듯, 광주역으로 향하던 기차역마다 차창 밖 사람들이 뜨겁게 외치던 이름과 몸부림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카메라는 호남선을 따라 이리와 정읍, 장성을 거쳐 광주까지 열차를 따라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몰려나온 수많은 얼굴을 비춘다. 그 시점과 시선은 더 이상 과거의 기록이 아니었다. 김대중의 실패와 성공, 무수한 고비고비마다 증인이 된 수많은 현재들이다.
영화에서 가장 많은 장면은 수난받는 주인공의 모습일 것이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이후 40대 의회주의자는 가장 위험한 정적으로 낙인찍혔다. 마침내 1987년 정치적으로 해금(解禁)될 때까지, 김대중은 망명과 암살 위협, 가택연금, 체포와 고문, 구속, 재판을 반복하며 사형수에 이르기까지 오롯이 순난자(殉難者)로 살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폭압적인 역사의 한복판에서 그의 존재는 민주주의와 인권, 두 단어의 대변자였다.
영화는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런저런 증거를 내비치며, 한 사람의 시련과 함께 우뚝 자라난 우리 시대의 사랑법을 들려주고 있었다. 아내 이희호와 옥중 면회 장면은 ‘영화의 한 장면’이란 관형어에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너무 안쓰러울 만큼 데면데면하기에 두 사람의 해후는 딱 할 만큼 멋쩍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속 깊은 내밀함을 그대로 보여주려고 한 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허긴 그 시대 어른들에게서 애정 어린 말 한마디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카메라와 교도소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상황이었다.
화면에 반영된 옥중에서 보낸 편지들은 놀랍다. 교도소에서 사용하는 봉함편지 안에 200자 원고지 110장 분량이 담겨있다고 한다(<김대중 옥중서신> 1984, 청사). 깨알처럼 가지런히 담긴 활자들 가운데 언뜻언뜻 눈에 띄는 단어들은 더욱 경이롭다. 아내에게 쓴 신앙고백들은 고난을 이겨내는 가장 큰 힘이었을 것이다. 그가 자서전에서 쓴바, 가장 많이 언급된 후렴구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었다. 김대중은 마치 미테랑 전 프랑스 대통령처럼 성경의 이야기들을 단골손님처럼 불러내고 있었다.
대통령선거 실패 후에 영국에서 쓴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3, 김영사)를 보면 그동안 시련을 통해 담금질한 저자의 생각을 적고 있다. 그는 날마다 실패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뜻밖의 비방을 전한다. “하루만 참자. 내일은 변화가 온다. 경험에 하루를 지나고 나서까지 참기 힘든 일은 거의 없더라.” 김대중이 말하는 것은 대단한 명언이 아니라, 일상의 금언과 같다. 저자의 생애 100년을 맞아 재출간한 이 책은 <김대중의 말>(태학사)과 함께 영화의 등장을 더욱 빛나게 한다.
“긴 인생이었다. 나는 일생을 예수님의 눌린 자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교훈을 받들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생이 있는 한 길을 갈 것이다.”(김대중의 일기 중. 2009.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