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참화를 기억하는 세대는 베트남전에서 결코 낯설지 않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울부짖음, 죽음에 대한 공포, 인간성의 상실, 이데올로기의 대립 등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모습은 고통스러웠던 한국의 현대사를 다시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한 역사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이해는 거리의 원격성보다 훨씬 더 큰 현실 역사인식의 원격성이 지배하고 있다. 이는 특히 전쟁의 주체였던 프랑스·미국이 전쟁의 성격을 규정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동일한 사안에 대해 한국이 보이는 입장의 차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차인도차이나전쟁의 주체였던 프랑스는 베트남전쟁을 스스로 ‘더러운 전쟁’이라 불렀고, 미국은 ‘개입해서는 안될 전쟁’, ‘인류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라 인정하였다. 또한 베트남전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맥나마라는 미국이 베트남전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너무 몰랐다고 스스로 반성하였다(McNamara, 1995). 그러나 실제적인 전쟁 주체의 이러한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의 베트남전에 대한 인식은 과거의 냉전의식과 전쟁에 대한 자기정당화라는 이중의 족쇄에 묶여 있다. 그 대표적인 예는 1994년 5월 20일 당시 한승주 외무부장관의 발언을 둘러싼 문제나 1995년 5월 10일 김숙희 교육부장관의 발언 파동, 2000년 6월 27일에 발생한 고엽제전우회의 한겨레신문사 난입사건 등을 통해 드러났다.
한승주 외무무장관의 발언 문제는 한 장관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레 둑 안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행한 발언이 과거사의 사과로 해석되면서 발단이 되었다. 이에 대해 청와대 당국자는 “당시 월남전 참전에는 자유수호와 반공이라는 뚜렷한 명분이 있었다”라고 밝히고 우리정부는 사과는 물론 유감 표명을 할 이유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세계일보≫, 1995년 5월 22일자). 또한 김숙희 교육부장관이 베트남전 참전군인의 성격을 용병으로 언급한 것을 놓고 ≪조선일보≫의 사설에서는 “무책임하고 혼란된 역사인식”이라고 질타했고(≪조선일보≫, 1995년 5월 14일자), 야전부대의 한 대위는 “장관이 과거 수많은 생명이 희생된 전쟁을 매도하고 군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는 말을 하는 판에 어떻게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키겠느냐”고 말했다(《조선일보》, 1995년 5월 13일자). 결국 이러한 파문은 장관의 경질로까지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한겨레신문사 난입사건에서는 전우회의 한 회원이 사진부기자를 가리키며 “베트콩이다”라고 소리를 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한겨레 21」, 2000년 7월 13일자).
전쟁의 주체였던 프랑스와 미국이 인정한 잘못된 전쟁을 우리는 왜 인정할 수 없는 것일까? 왜 이같은 역사 인식의 왜곡이 나타나는 것일까? 이는 베트남전쟁 자체에 대한 인식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정당한 역사인식을 가로막고 있는 우리 내부의 문제를 직시할 때만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위의 세 가지 상황은 다음과 같은 한국사회의 현실을 반영한다.
첫째, 냉전의식의 역사적 재생산과 내면화된 반공이데올로기.
둘째, 맹목적 애국주의와 무벌화((無罰化) 심리의 결합.
셋째, 고정된 자기 중심적 세계관.
첫째, 냉전의식의 재생산은 한국전쟁에 대한 평가와 해석에서 잘 나타난다. 한국전쟁은 베트남전쟁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해석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는 1995년 7월 27일 한국전쟁 기념관 개관식에 즈음해 행해진 클린턴의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클링턴은 “미국이 파시즘을 격퇴한 건 공산주의가 널리 퍼지는 모습을 보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줌으로써, (미국인들은) 자유세계를 냉전에서 승리하는 길에 올려놨다”(Hart-landsberg, 2000:10)라고 한국전쟁의 의미를 평가했다. 또한 한국전쟁 기념비 건립에 코디네이터 역할을 한 이종연 변호사는 베트남전 쟁기념비와 한국전쟁기념비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베트남 기념비는 잘못된 전쟁에서 잘못 싸운 것에 대한 진혼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한국전 기념비는 명분있는 싸움의 진취적 기상을 느끼게 해 준다”라고 했다(《조선일보》, 1999년 7월 13일자). 여기에서 말하는 명분은 명확히 냉전의식이다. 이는 세계적인 탈냉전 속에서 여전히 냉전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상징으로 한국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냉전의식에 기반한 전쟁의 해석은 외적으로는 분단과 전쟁과정에서 미국이 행한 역할을 정당화하며, 내적으로는 해방 이후 한국에서 벌어진 정치·사회적 갈등과 그 최종 귀결로써의 전쟁의 성격을 단순화한다. 또한 이는 국가권력의 안정적 재생산을 위한 권력안정기제였고, 외부의 적에 대한 방비 못지 않게 내부의 통제를 수행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기제였으며, 막강한 군부를 중심으로 한 억압기구에 의해 유지·내면화된 반공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한다(윤충로․강정구, 1998). 냉전에 입각한 반공이데올로기의 지배는 한국사회의 현대사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와 평가를 가로막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의 연장이 베트남전쟁으로 투영되는 것이다.
둘째, 한국의 맹목적 애국주의에 대해 리영희는 “어떤 상황에서건, 자신의 잘잘못이나 합법성, 정당성 등의 여부를 냉정하게 가리는 이성적 태도를 거부하고, 무조건 한국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는 경향”(리영희, 1999: 321-322)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또한 국가지상주의와도 통한다.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많은 민간인 학살은 국가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으며, “학살의 주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을 임무로 한 국가기관인 군대였다”(김동춘, 2000: 198). 이러한 논리에는 정의와 정당성, 올바른 역사인식이 설 자리가 없다. 또한 국가를 통해 구현되는 정당화기제는 노다 마사아키가 말하는 ‘무벌화(無罰化)’, 곧, “이겨도 져도 어차피 전쟁은 비참한 것”(野田正彰, 2000: 17-18)이라는 전쟁상황에 대한 체념적 자기 정당화와 접맥되어 더욱 명확한 역사인식을 저해한다.
셋째, 위 두 사안의 결합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이 고정된 ‘자기 중심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한겨레신문사에 난입했던 한 참전군인의 “베트콩이다”라는 외침은 베트남전쟁 당시의 인식세계에 묶여 있는 개인의 의식을 투영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의 국가건설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되어 온 집단의식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적(敵)과 아(我)를 명확히 구분해야 하는 선택을 강요했으며, 개인은 어느 한 체제 속에서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 속에서 한국의 맹목적 애국주의와 국가주의는 구현된다. 또한 폭력적 선택과정과 결합된 이데올로기기제는 그 세계를 지배하는 지배이데올로기로 부상하게 되며, 남한에서 그것은 반공이데올로기로 나타났다. 반공이데올로기는 생존을 보장하는 열쇠였으며, 최근까지 한국 사회를 강하게 지배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인식은 멈추어 섰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역사해석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론적 전이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가 필요하다. 곧, 우리의 인식 속에 남아 있는 냉전적 사고와 반공이데올로기를 털어 버리고, 객관적 시각에서 세계를 바라보아야 하며, 전쟁의 피해자였던 베트남인의 시각에서 베트남전쟁을 다시 바라보는 자세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본 논문도 이러한 작업의 연장선에 서 있다.
베트남인의 입장에서 볼 때 베트남전쟁은 연속적인 혁명전쟁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월러스타인이 언급하고 있는 20세기 혁명의 특성인 민족적·사회적인 이중의 혁명이라는 특성을 지닌다(Wallerstein, 1979: 230). 여기에서 민족적 혁명이란 외세의 식민지배를 타파하고 독립된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하며, 사회적 혁명은 식민지배에 의해 나타난 사회구조적 왜곡을 바로잡아 나가는 것이다. 탈식민국가에서 이같은 이중의 혁명은 상호 분리된 과정이 아니라 중첩성을 보이는데, 이는 완전한 독립과 식민잔재의 청산을 통한 사회구조적 재편이 서로 맞물린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을 혁명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진 혁명전쟁으로 이해하는 것은 현재까지도 한국에 남아 있는 냉전을 중심으로 한 ‘지배적 신화의 기만’에 도전하는 것이며, 이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2장에서는 1945년 8월 해방을 맞은 베트남의 새로운 정치질서와 해방 이후 지속적인 분단상황을 창출했던 외세의 개입주의적 전략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과정에서 특히 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한 베트남이 계속 전쟁상황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베트남의 민족중심적 시각을 통해 설명하고, 이를 통해 베트남전을 ‘반공이데올로기’에 바탕하여 해석하려는 입장의 허구성을 드러내도록 하겠다. 3장에서는 베트남에서 수행된 냉전정책이 지닌 반공과 반혁명의 특성을 드러내고, 베트남 민족의 지속적인 저항을 촉발한 반(反)민중적 점령정책을 검토하며, 남부정권의 한계와 더불어 전쟁이 왜 냉전에 입각한 체제수호전쟁이 될 수 없었는가를 밝히겠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베트남에서의 혁명과 전쟁이 지니는 특성이 무엇인지를 검토하도록 하겠다.
2. 해방과 분단
베트남전쟁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분출한 베트남의 민족국가 건설과 사회혁명의 달성이라는 이중과제에 대한 외세의 개입에 그 시원을 두고 있다. 본 장에서는 우선 해방이 지니는 의미와 새로운 국가건설의 방향, 이를 추동하는 정치조직의 특성을 통해 해방기 베트남의 국가건설 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저지하려는 외세의 남부분할지배전략에 대해 검토함으로써 베트남전쟁의 뿌리가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베트남인의 노력과 이를 저지하려 한 식민주의에 있었음을 규명하도록 하겠다.
(1) 해방과 새로운 정치질서
1945년 8월 베트남은 프랑스와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해방을 맞이하였다. 당시 해방공간은 2차세계대전의 종결이라는 세계사적 차원의 외적 변수와 혁명역량의 고양이라는 내적 변수에 의해 규정받고 있었다. 우선 2차세계대전의 종결과 일본의 패망이라는 외적 충격은 외세를 중심으로 한 지배권력의 공백을 초래하였으며, 베트남이 내재적 역사지향에 의해 사회를 재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는 스카치폴이 “국제적인 식민통치의 종식이 가장 일반적인 혁명의 원인”(Skocpol. 1991: 306)이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베트남 사회의 변화를 위한 중요한 혁명적 공간을 창출한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의 해방공간이 지닌 혁명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사적 변수를 과도하게 강조하기보다 베트남의 혁명역량이라는 내적 변수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는 ‘8월혁명’이라 일컬어지는 내적인 연속혁명과정을 통해 드러난다.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망하자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은 8월 16일 딴 짜오(Tan Trao)회의를 통해 “인도차이나에 연합군이 상륙하기 전에 일본인들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한 봉기를 민중들이 일으킬 수 있도록 지도하고, 일본인들로부터 권력을 접수하여 그 하수인 및 괴뢰정치인을 타도하고 … 연합군을 받아들일 때는 조국의 주인으로 행동”(HCPV, 1987: 58)할 것을 결의하고 전국적인 봉기를 추진한다. 이에 따라 혁명세력은 8월 19일 하노이를 시작으로, 8월 23일에는 중부인 후에를, 8월 25일에는 사이공을 장악하고, 드디어 9월 2일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독립이 단순히 외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적 역량에 의해 쟁취된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해방 이후 베트남의 정치·사회적 특성은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방향과 혁명세력을 중심으로 한 정치조직의 건설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첫째, 해방이 되며 형성된 해방공간에서 베트남의 혁명세력은 ‘민족사적 호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과거의 식민유산을 척결하고 새로운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는 ‘베트남민주공화국 독립선언’에 잘 나타난다.
모든 베트남 인민을 대표하는 임시정부의 일원인 우리는 지금부터 프랑스와의 모든 식민지적 관계를 일소함을 선언하며 프랑스가 베트남 대신 지금까지 서명해 온 국제계약을 폐지한다는 것을 선언한다. 또한 프랑스가 우리 조국에서 부당하게 얻었던 특권들을 철폐한다는 것을 선언한다. … 베트남이 자유로운 독립국이 될 권리를 가지며 실상 이미 그러하다는 것을 세계 만방에 엄숙히 선언한다(Fall, 1987: 168).
위의 독립선언은 민족혁명으로서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명확히 밝히고 있으며, 이를 위해 구지배질서, 곧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의해 형성된 일체의 사회적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수립할 것을 내포하고 있다.
둘째, 혁명적 변화를 위한 사회적 재편과정에서 베트남 내부의 저항은 미미했다.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을 제외한 민족주의세력은 독립 후 새로운 국가·사회 건설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식민지배국에 대한 협조로 정당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따라서 해방기 권력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중심세력은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Kolko, 1985: 13-14).
이러한 혁명세력의 주도성은 또한 그들의 권력을 떠받치고 있던 정치조직에서 더욱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혁명세력의 정치조직 건설방식은 ‘아래로부터의 조직선설’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1945년 8월 해방과정에서 실질적인 주체가 된 것도 1941년 5월 19일 발족한 베트민(Viet Minh)이라는 혁명적 대중조직이었다. 이들은 ‘구국회’라는 대중조직의 건설을 통해 각계각층을 연결하고 독립운동을 수행했다. 조직건설의 측면에서 볼 때 구국회는 전국적인 대중참여 정치조직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한정된 계급·계층의 연합조직을 넘어선 광범위한 대중전선이었다(McAlister, 1969: 256-270; Duiker, 1996: 97).
해방이 되자 구국회 세포는 인민위원회를 건설하고 마을을 장악해 나갔다. 당시 촌락의 새로운 권력기관은 인민위원회였으며, 그것은 기존의 행정․사법구조를 없애버렸다. 인민위원회는 성(省)단위로 연결되었으며, 보 우엔 지압(Vo Nguyen Giap)이 지도하는 내부무 아래 계층적으로 조직되어 있었다(Sacks, 1988: 265). 이러한 체계는 ‘아래로부터 위로’ 조직되어 가는 민주집중제의 원칙을 통해 건설되었으며, 상층과 하층을 포괄하는 통일전선에 기반하고 있었다. 해방과 더불어 전면에 등장한 조직체들은 해방기 사회권력의 행방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인민위원회는 식민지배에 오염되지 않은 혁명적 민족주의자들과 결합하고 있었던 것이다.
혁명세력의 새로운 국가의 지향과 아래로부터의 조직적 기반은 식민시기와의 단절, 구지배관계의 청산이라는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가능케 했다. 신정부가 들어서자 베트남에서는 프랑스 식민지의 구질서를 청산하는 개혁조치를 단행하기 시작했다. 세제의 개편이 이루어졌으며, 프랑스인·매국노의 토지, 공유지가 분배되었고, 8시간 노동제가 법제화되는 등 획기적인 사회개혁 조치가 이루어졌다. 신정부에 의해 수행된 1년 동안의 개혁은 프랑스가 60년 이상 걸려 거두려 했던 성과보다도 커다란 사회개혁 성과를 이루어냈다(Buttinger, 1968: 233).
전체적으로 볼 때 해방기 베트남에는 권력의 공백이 존재하지 않았고, 아래로부터 조직되고 지지받는 대안의 국가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또한 초기 개혁과정은 이후 진행될 민족적·사회적 역사행로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았을 때 프랑스의 재진주는 그들이 기존에 지배하고 있던 식민지로의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국가에 대한 침탈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2) 남부 분할지배전략의 역사적 재생산
1975년 통일을 이루기 전 베트남이 통일된 민족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기회는 1945년 8월의 해방과 1954년 1차인도차이나전쟁에서 승리로 인해 형성된 2회의 열린 공간이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해방 당시 만약 외세의 개입이 없었다면 베트남은 기나긴 혁명전쟁을 치르지 않고서도 독립된 민족국가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고, 1차인도차이나전쟁의 종결기도 해방기와 유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재진주와 미국의 개입이 초래한 베트남의 분단은 민족의 독립을 위한 해방전쟁을 불가피하게 했다.
1) 프랑스의 남부 분할지배전략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로의 복귀를 전혀 의심치 않았고, 심지어 식민주의가 아시아인에게 있었던 가장 훌륭한 일이었다고 믿었다(Buttinger, 1968: 211). 이러한 태도는 베트남인들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며, 베트남 사회의 변화를 이해하려 하지 않은 것이었다. 구베트남의 황제이며 이후 분할지배전략의 협력자가 된 바오 다이(Bao Dai)는 드골(de Gaulle)에게 보낸 편지에서 해방 당시 베트남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만약 당신이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본다면, 더 이상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모든 사람의 진심어린 독립에 대한 열망을 느낄 수 있다면 … 비록 당신이 이곳에 프랑스의 통치를 다시 확립하려 할지라도 그것이 더 이상 소용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각 마을은 저항의 보금자리가 될 것이고, 구래의 협력자들은 적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관리와 식민주의자들은 그들이 숨쉴 수 없는 분위기 때문에 떠나게 해달라고 요청하게 될 것이다(Hammer, 1954: 102).
프랑스는 바오 다이의 경고를 무시했다. 프랑스는 베트남 전체를 지배할 수 없더라도 남부 코친차이나는 계속 프랑스령의 식민지로 유지하고자 하였다. 완전한 통일국가를 이루려는 베트남민주공화국과 남부만이라도 분할지배하려는 프랑스의 의도는 갈등의 씨앗이었으며, 이는 이후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어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프랑스의 남부분할지배전략은 2단계의 과정을 거쳤는데, 1단계는 1946년 초부터 추진된 코친차이나 분리정부의 수립계획이며, 2단계는 1947년부터 수행된 ‘바오 다이를 통한 해결(Bao Dai Solution)’이었다.
첫째, 프랑스의 남부분리정책은 프랑스군이 진주하기 시작하면서 바로 시작되었다. 프랑스는 베트민을 중심으로 한 남부행정위원회가 1945년 9월 23일 영·불군에 의해 사실상 해체당한 상황에서 식민시대의 행정당국을 부활시켰으며, 1946년 2월 4일에는 지주·부르주아 등의 친프랑스 세력을 중심으로 한 ‘코친차이나 자문위원회’를 창설함으로써 남부분리정책을 체계화했다. 이어 베트남민주공화국과 체결한 1946년 3월 6일의 예비협약에서는 “코친차이나를 통합해 단일국가로 할 것인지의 여부는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한다”(이영희, 1991: 180)라는 조항을 통해 남부를 통일된 베트남의 지역으로 인정하는 것을 유보하였다. 이후 남부문제를 둘러싼 회의에서 프랑스는 지속적으로 남부의 분리지배가 정당함을 주장하였고, 마침내 1946년 6월 1일 응우엔 반 띤(Nguyen Van Thinh)을 대표로 하는 코친차이나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둘째, 완전한 민족국가 수립의 좌절은 프랑스와 베트남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했다. 전쟁 초기 프랑스는 물리력으로 기선을 제압했으나, 1947년으로 접어들면서 전쟁은 혼전을 거듭했다. 또한 응우엔 반 띤의 체제로는 남부의 체제가 안정화되지 않고 식민주의 전쟁을 희석시킬 수 없게 되자 구베트남의 황제인 ‘바오다이를 통한 해결’을 시도하게 된다. “바오 다이를 통한 해결의 진정한 목적은 베트남의 독립을 막는 것”(Buttinger, 1968: 315)이었고, 이는 또한 베트남 내에 자체의 정부를 세우라는 미국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Pantagon Paper, vol. 1, 1971: 57-75). 이러한 시도는 1948년 6월 5일의 ‘하룽만협정’을 거쳐 1949년 3월 8일 엘리제협정을 통해 달성되었다. 사이공에 있는 부르주아지와 많은 반공주의집단, 곧, 카톨릭교도, 까오 다이(Cao Dai), 호아 하오(Hoa Hao) 등이 이 정부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었고, 남부만의 형식적인 정부가 탄생했다(Duiker, 1996: 144). 그러나 새로운 정부의 형성에 따른 베트남 내의 권력이동은 없었다. 프랑스군은 여전히 베트남군을 통솔하고 있었고,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은 합법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경제적 이익은 여전히 보호되고 있었다(Tranger, 1966).
2) 제네바협정과 미국의 남부 분리정책
1954년 1차인도차이나전쟁은 혁명세력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승리로 끝났고, 그것은 제네바협정에 반영되었다. 베트남의 통일과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핵심적인 사안은 제네바협정 최종선언의 6항과 7항이었다.
6항) 베트남과 관련된 협정의 근본 목적이 적대행위 정지를 위한 군사문제의 해결이라는 것, 군사경계선은 결코 계속적인 정치적 혹은 영토적 경계로 해석되어서는 안될 것임을 승인한다…. 7항) 베트남의 정치적 제문제의 해결이 독립·통일 및 영토보전의 제원칙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져야 하며 베트남 인민은 비밀투표에 의한 자유로운 총선거의 결과 수립될 민주적 제도에 의해서 보장되는 기본적 제자유를 향유해야 한다. … 국제위원회의 감독 하에 1956년 7월 자유선거가 시행될 것임을 선언한다(FRUS, 1952-1954, vol., xv, 1541).
만약 ‘협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의 연속’이라면 그 협상에서의 승리자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이었다(SarDesai, 1992: 63). 혁명세력은 전쟁이 종식되고 베트남 지역이 강대국의 물리력에서 효과적으로 중립화된다면 정치적 방법을 통해 혁명을 달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혁명세력의 영토적 지배력은 13°선 이남까지 미치고 있었고, 정치적 지도력은 베트남 전역에서 관철되고 있었다.
그러나 제네바협정은 그것이 지니는 역사적 의의에도 불구하고 형식과 주체의 측면에서 문제를 지닌 것이었다.첫째, 형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협정이 서명되지 않은 합의에 의한 협정이었기 때문에 2년 내에 실시될 선거는 공약이라기보다는 단순한 계획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둘째, 주체의 문제는 더욱 중요한 문제를 야기했다. 협정의 주체는 베트남민주공화국과 프랑스 당국이었으며, 바오다이와 미국은 협정에 조인하지 않았다. 또한 프랑스는 협정을 준수할 계승자를 지정하지 않고 철수함으로써 협정의 합법적 기반을 파괴하고 새로운 군사적 적대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미국은 이러한 빈 공간을 통해 베트남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의지는 프랑스의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해진 1954년에 접어들면서 적극적으로 표명되기 시작했다. 덜레스(Dulles)는 1954년 5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동남아 지역에서 도미노 상황이 적용될 수 없는 여건을 창출하는 것이다. … 우리는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포기할 수 없다”(Gardner ed., 1985: 163)라고 언급했다. 이같은 입장이 제네바협정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미국은 협정의 최종선언에 조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미국이 제네바협정에 긍정적일 수 없었던 이유는 선거를 통한 통일에서 남부가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또한 최종선언 6항에서 명시하고 있는 “군사분계선은 결코 계속적인 정치적 혹은 영토적 경계로 해석되서는 안된다”는 조항을 무시했다. 미국은 처음부터 17°선을 ‘영토적·정치적 분계선’으로 사고하고 있었으며, 그것에 기반하여 남부정권의 설립을 지원했던 것이다. 이것은 1954년 10월 23일 아이젠하워(Eisenhower)가 지엠(Diem)에게 보낸 서안에서 명확히 드러나는데, 영(Young)은 이 내용을 “1954년 10월경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목적은 강력한 국가의 발전과 유지였다. 우리는 강력하고 독자적인 정부를 발전시킬 것을 요청하였고 희망했다”(Young, 1967: 501)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미국이 제네바협정에 동의한 것은 두 개의 베트남 성립에 대한 외교적 반발을 막고 1956년으로 정해진 선거까지의 유예기간을 통해 남베트남만의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55년 10월 남베트남에는 미국의 전격적인 지원을 통해 지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으며, 이는 남북베트남에 ‘영토적·정치적 분단’을 초래했다. 미국은 프랑스에 이어 베트남인들이 민족해방전쟁을 통해 확보한 통일의 기회를 다시 한번 무산시켰고, 2차인도차이나전쟁은 미국이 베트남인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남베트남에 새로운 정권을 세운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 프랑스와 미국의 반혁명 전략과 남부정권의 한계
베트남에 대한 외세의 개입은 식민관계의 기존질서를 역전시키고,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베트남인의 열망을 좌절시키고자 했다는 점에서 명확히 반혁명이었다. 본 장에서는 외세의 개입이 지니는 반혁명의 성격과 그로 인해 형성된 남부정권의 한계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 곧 첫째, 프랑스와 미국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고자 했던 이데올로기인 냉전에 기반한 반공정책의 허구성, 둘째, 베트남인의 의지와 열망에 반(反)한 점령정책, 셋째, 외세에 의해 만들어진 남부정권의 한계와 전쟁의 베트남화를 위한 노력을 통해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1) 식민주의에서 냉전에 입각한 반공전쟁으로
프랑스와 미국은 베트남전쟁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냉전에 입각한 체제방위전쟁으로 치환함으로써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 식민주의의 연속성과 미국의 제3세계에 대한 패권전략을 은폐하려는 이데올로기 기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전쟁의 성격을 변화시키려는 프랑스·미국의 노력과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개입주의 이데올로기의 변화과정, 그것이 지닌 허구성에서 잘 드러난다. 전쟁과정에서 개입주의 이데올로기는 다음과 같은 세 차례의 변화과정을 겪는다.
첫째, 프랑스의 식민주의전쟁(1945년 9월~1948년)
둘째, 식민주의와 냉전이데올로기의 접합(1949년~1954년)
셋째, 냉전에 입각한 도미노론에 의한 전쟁 수행(1954년~1973년)
첫째, 드골은 1944년 1월 브라자빌의 회의에서 “(식민지에서) 그 어떤 자치의 개념이나 프랑스권 밖의 그 어떤 발전의 가능성도 배제한다. 식민지에서의 자치의 달성은 설사 먼 장래의 일이라도 배제해야 한다”(Thchman, 1997: 26)라고 식민주의의 지속을 명확히 했다. 프랑스는 이러한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에 대한 설득기제 유포와 베트남 내에서 자신의 재지배를 위한 ‘남부 분리지배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시도하게 된다.
우선 프랑스는 미국의 루즈벨트(Roosevelt)가 주장하는 신탁통치안에 불안을 느껴 1944년 가을부터 Foreign Affairs를 비롯, 국방부에서 널리 읽히는 학술지에 프랑스 식민주의가 베트남 주민들에게 베푼 이득을 열거하고, 식민지의 장래에 대한 드골주의자들의 구도가 미국의 이익과 의도성에 반하지 않음을 선전했다(Stetler, 1990: 28). 그러나 프랑스가 주장한 ‘베트남인들에 대한 이득’의 부분은 루즈벨트가 인도차이나에 대해 인식했던 사실과도 반대되는 것이었다. 루즈벨트는 1944년 1월 코델 헐(Cordell Hull) 국무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의 3천만 주민을 백 년 가까이 지배했고, 국민들은 프랑스가 지배를 시작했을 때보다 생활이 더 나빠졌다. 프랑스는 베트남인들을 백 년 동안 쥐어짰다. 인도차이나인들은 지금의 상태보다 훨씬 더 낫게 살 자격이 있다(Pentagon Paper, vol. I, 1971 : 10).
물론 루즈벨트가 명백히 식민주의의 부활을 반대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Pentagon Paper, 1971, vol. Ⅰ: 9-10) 그러나 루즈벨트의 인도차이나에 대한 인식은 프랑스의 주장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가 주장한 두 번째 사안인 프랑스와 미국의 이해의 합일은 사실 미국의 냉전정책이 본격화되면서 현실화되었다.
‘남부분리지배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는 프랑스가 베트남에 재진주하면서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프랑스는 1946년 달랏(Dalat)에서 열린 회의에서 베트남의 남북은 지리적 단일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남부 코친차이나는 17세기까지도 베트남에 통합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남부의 발전을 위해서는 프랑스인의 지배가 필요하며, 더 나아가 프랑스는 코친차이나인의 이익에 반하는 베트남 문제의 해결은 참을 수 없는 것이라 밝혔다(McAlister, 1969: 290). 그러나 프랑스의 복귀와 남부분리지배는 프랑스로부터 이익을 얻었던 지주와 프랑스의 교육을 받은 사람, 프랑스의 시민권을 얻은 사람들에게만 이익이 되는 것이었고, 베트남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무시한 처사였다.
둘째, 프랑스는 식민주의전쟁을 냉전이데올로기와 접합함으로써 대내외적인 정당성을 획득하려 하였다. 이는 1951년 7월에 있었던 드 라뛰르(de Lattre)의 “프랑스의 관심은 … 자유세계를 위해 베트남을 구하는 것이다. 십자군운동 이후 프랑스가 이처럼 사심없는 행위에 착수해 본 적은 없다. 이 전쟁은 베트남인을 위한 베트남의 전쟁이다”(Buttinger, 1968: 278)라는 언급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라뛰르의 말에는 1944년 1월 드골이 브라자빌에서 보였던 식민주의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프랑스는 체제수호전쟁의 십자군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전쟁성격의 전환은 1947년 트루먼독트린과 마샐플랜을 통해 나타나는 냉전체제의 심화에 의한 것이었다. 냉전이 심화됨에 따라 프랑스는 전후 소련에 대항한 유럽 방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미국은 유럽의 방위와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장을 막는다는 명목 하에 지속적으로 프랑스를 지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9년 중국혁명의 승리와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 성공은 1차인도차이나전쟁의 성격을 바꾸는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1950년 1월 31일 소련과 중공이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승인하자 2월 1일 애치슨은 “소련과 중공의 호찌민정부에 관한 인정은 호찌민이 목적하는 민족주의의 본성에 대한 모든 환상을 제거했으며, 호찌민이 인도차이나의 독립에 대한 숙명적인 적으로서의 자신의 진정한 색깔을 드러낸 것이다”(Archer, 1971: 76)라고 논평하고, 2월 7일 바오 다이정부를 승인했다. 1950년 한 해 동안 미국은 인도차이나에 대한 공식적인 원조를 시작하고, 군사고문단을 파견했으며,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미국의 군사원조는 계속 증가했으며, 1954년에는 총전비의 80%를 지출하여, 전쟁의 미국화가 진행되었다. 1949년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기간은 프랑스의 식민주의와 미국의 냉전정책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미국은 이 시기를 통해 인도차이나를 본격적으로 냉전적 가치에 의해 평가하기 시작했으며, 프랑스는 반공을 통해 식민주의전쟁의 성격을 은폐할 수 있는 명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식민주의전쟁의 본질을 완전히 희석시킬 수는 없었다. 프랑스는 베트남 내에서뿐만 아니라 본국에서조차 전쟁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1954년 초 프랑스군은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고국으로부터의 압도적인 견해에 의해 사기가 저하되고, 전의를 상실했다(SarDesai, 1992: 61). 체제 간의 전쟁을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보 우엔 지압이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이 일으킨 침략전쟁은 점차 ‘미국의 달러’와 ‘프랑스인의 피’를 쏟아붓는 전쟁이 되어갔다. 그것은 진실로 더러운 전쟁이었다”(Vo Nguyen Giap, 1988: 18)라고 표현한 것처럼 ‘더러운 전쟁’의 오명을 벗을 수 없었던 것이다.
셋째, 프랑스가 물러가자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미국이었고,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개입을 정당화했던 것은 냉전정책에 바탕한 도미노(Dominoes)이론이었다. 미국은 도미노이론에 입각해 만일 베트남을 방치하면 이웃의 라오스, 캄보디아, 타일랜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이 차례로 공산화되고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까지 위험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도미노이론은 1965년 커넥티컷의 상원의원 도드(Thomas J. Dodd)가 “만약 베트남에서 라인을 그리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외로운 전초기지로서 하와이와 시에틀, 알레스카에까지 방어선을 후퇴할 수밖에 없을 것”(Olson & Roberts, 1991 31)이라고 언급한 데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도미노의 쓰러짐을 막기 위한 미국의 개입은 체제와 자유의 수호, 미국의 개입주의가 지니는 타당성이라는 차원에서 정당화되었다.
우선 미국의 자기 정당화는 CBS 특파원과 가진 케네디의 대담에서 나타난다. 케네디는 “(프랑스는) 식민지를 위해서, 설득력이 없는 대의를 위해서 싸웠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를 위해서, 그들을 공산주의자와 중국에서 해방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그들을 독립시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Tuchman, 1997: 111)라고 말해 자신들의 전쟁이 식민주의전쟁과는 구별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맥노튼(McNaughton) 국방차관보가 1965년 3월 4일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보낸 ‘베트남을 위한 행동계획’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맥노튼은 “베트남전 수행목적 중에서 70%는 미국의 굴욕적 패배를 저지하기 위해서, 20%는 남베트남 및 이웃 나라를 중공의 위협에서 지키기 위해서, … 베트남 국민과 정부의 민주주의적 자유를 보장하고 공산주의로부터 지키기 위한 목적은 10%”(리영희, 1999: 345)라고 밝혔던 것이다.
개입주의가 지니는 타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제3세계 지역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스스로의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패권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미국은 패권국가로서의 자신의 지위를 의심치 않았다. 존슨(Johnson)은 부통령이었던 당시 케네디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의 지도력을 대체할 것은 없다. 동남아 각국의 지도력은 … 미국의 힘과 의지와 이해력에 대한 지식과 신뢰감에 의존한다”(Williams etc., ed., 1985: 192)라고 밝혔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베트남이 “미국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던 이유는 그들이 누구를 정복하겠다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지역이 다른 나라들에게 민족자립을 조장할 본보기를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Chomsky, 1996: 27-28)라고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식민주의전쟁을 체제전쟁으로 치환하려 했던 프랑스의 노력과 냉전에 의해 자신의 패권전략을 은폐하려 했던 미국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은 베트남 내부에 이념적 대립을 조장하고, 이를 통해 베트남인들을 내적으로 분할하며, 침략주의전쟁을 정당화하려 했던 외세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전쟁에서의 전선은 피부색의 대립만큼이나 명확했다.
(2) 반(反)민중적 평정계획(Pacification Programs)
외세와 남부정권의 반(反)민중적 정책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평정계획(Pacification Programs)이다. 이는 프랑스의 식민통치 시기부터 미국과의 전쟁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지역통제전술로 정치·경제·군사·심리적 수단들을 결합하여 혁명세력과 지역민을 분리하고, 나아가 지역을 중앙정부의 통제 아래 귀속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아래의 논의에서는 평정계획의 적용을 프랑스의 사례와 미국을 중심으로 한 남베트남 정부의 사례로 나누어 검토하도록 하겠다.
우선 프랑스의 점령정책은 군사작전과 대민작전을 결합한 기름얼룩전술에 주로 의존하였다. 기름얼룩전술은 “분견대가 배정받은 지역 내에서 계속 움직이면서 공격, 매복, 정찰, 수색을 행하고 첩보망을 구축하며, 주민들과 접촉을 유지하는 전술”로 점령과 평정작업을 같이 수행하는 것이었다. 또한 프랑스는 점령지에 대민선전반인 ‘이동작전관리반(Groupes Administratifs Mobiles Operationnels: GAMO)’을 운영하여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다(Asprey, 1989). 그러나 이러한 전술은 근본적인 정치·사회적 개혁을 동반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에 한정적인 효과밖에는 발휘하지 못했다. 프랑스군이 철수한 지역에는 바로 베트민이 복귀했던 것이다. 프랑스는 자신들의 정치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더욱 강압적인 폭력에 의존하였다. 이는 1951년 11월 25일 투 키(Thu Ky)에서 포로로 잡힌 프랑스 장교의 자백에 잘 드러나 있다.
프랑스 사령부가 이 지역을 사막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집들은 모두 불태워졌다. … 며칠 동안 계속해서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살아있는 것이라곤 프랑스 병사들밖에 없었다(Fall, 1987: 255).
이는 프랑스 점령정책의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프랑스의 평정계획을 검토하면서 또 한 가지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미국과 남베트남이 행한 전략촌계획의 원형이 ‘강제집중촌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행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프랑스의 평정계획과 미국의 평정계획이 기본적으로 유사했음을 보여준다. 남베트남인에게 있어 미국은 새로운 대안일 수 없었다. 미국은 프랑스 식민주의의 연속으로 인식되었으며,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다만 식민주의의 주체가 바뀐 것이었다.
남베트남에 대한 평정계획은 사실 미국이 개입한 순간부터 시작되어 전쟁의 전 기간 동안 계속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정책적 전환과정에 따라 특징적인 시기를 구분하자면 전략촌계획(Strategic Hamlet Program)을 체계화하는 1961년~1963년에 이르는 전반기와 ‘신생활촌계획(New Life Hamlet Program)’과 ‘불사조계획(Phoenix Program)’이라고 알려진 양면정책을 통해 지역평정계획을 수행한 1966년~1972년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전략촌계획은 ‘지역을 완전히 소탕한 뒤 유지’하는 것이었다. 초기에 이 계획은 지엠의 형제였던 고 딘 누(Ngo Dinh Nhu)에 의해 중심적으로 수행되었다. 전략촌은 1959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1962년 8월 경에는 2,500개가 만들어졌고, 그보다 더 많은 전략촌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다(Pentagon Paper, vol. Ⅱ, 1971: 129).전략촌은 가시철망과 지뢰밭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전략촌 외부의 인물은 적으로 간주되어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혁명세력을 농민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한 전략촌계획은 초기에 어느정도 성공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러한 성공은 한시적인 것이었다. 전략촌계획이 계속 진행됨에 따라 베트콩(Vietcong)으로 알려진 혁명세력은 더욱 많은 병사를 획득할 수 있었다. 전략촌에서는 병원, 마을, 학교, 집을 제공했지만 이를 위해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는 농민들의 전통적인 고향마을을 파괴했고, 그들을 거리로 내몰았으며, 이에 저항하는 자는 죽였다. 이것은 그들이 고립시키고자 했던 베트콩보다 더 많은 베트콩과 그들의 지지자를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둘째, 1966년~1972년의 평정계획도 전반기와 유사한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특징적인 것은 당근과 채찍을 더욱 확실히 구분하여 구사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인민의 애정과 마음을 획득(winning the hearts and minds of the people)”한다는 기치 아래 학교, 병원, 농장 등을 짓는 데 1년에 5억불에 달하는 돈을 쏟아부었고, 이러한 지원은 신생활촌계획으로 연결되었다(Olson & Roberts, 1991: 161). 1968년에 접어들어 평정계획을 관할한 것은 CORDS(Civil Operations and Revolutionary Development Support)였으며, 8,000여 명의 미국인이 이 계획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사회개혁적인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1970년에 이르러서는 농지개혁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본질적으로 군사적 성격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불사조계획이다.
불사조계획은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으며, 1972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계획에는 미국의 CIA와 CORDS가 관여하였고 남베트남 정부에 의해 추진되었다. 불사조계획의 목적은 남부지역에서 공산주의자의 정치적 기반을 제거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체포, 전향사업 추진, 암살 등을 행했다(Olson, 1987: 369-370). 또한 제거 대상의 인원을 할당하고, 살아 있는 베트콩의 경우에는 11,000달러까지 상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1972년까지 20,987명이 암살되었으며, 28,778명이 투옥되었고, 17,717명이 재교육을 받아야 했다(Harrison, 1989: 202-203).
평정계획과 더불어 기억해야 할 것은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의 정책에는 기본적으로 파괴와 살상이 따랐다는 점이다. 1966년 말경까지 불의의 폭격과 군인들의 파괴로 2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집을 잃었고, 이는 1967년에는 3백만, 1968년에는 거의 4백만에 달했다. 또한 1965년~1972년 사이에 남베트남에서는 40만의 사람이 죽었고, 백만 정도가 부상했다. 이 기간 동안 미군에 의해 남베트남 인구의 1/3, 농촌인구의 50%가 집을 잃거나 죽거나 혹은 부상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파괴에 대한 미국의 인식이다. 웨스트모렌드는(Westmoreland)와 MACV(Military Assistance Command, Vietnam)의 인물들은 이러한 상황이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라 여겼던 것이다(Olson & Roberts, 1991: 160-161).
(3) 남부정치체제의 한계와 ‘베트남인에 의한 베트남전쟁’
남부정권은 권력뿌리의 정당성, 정치체제의 특성, 농지개혁을 둘러싼 사회개혁의 측면에서 베트남인의 민족적·사회적 요구를 전혀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는 프랑스와 미국이 추구했던 ‘베트남인에 의한 베트남전쟁’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조건이 되었다.
식민지배를 경험한 국가에서 권력뿌리의 정당성은 새로운 국가체계를 형성해야 할 정치세력의 민족적 정당성을 평가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프랑스의 남부분리지배전략에 의해 탄생한 바오 다이정권과 미국에 의해 형성된 지엠(Diem)정권은 권력뿌리의 정당성을 전혀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이는 실제로 독립국가의 외형을 지녔던 지엠정권의 특성을 검토하면 명확히 드러난다. 지엠은 대중적 지지기반이 전혀 없는 남부지역에 자신의 정치적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식민시대의 지배세력을 통합하였다. 1차인도차이나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혁명적 상황이 고조되어 있던 상황에서 남부의 대지주들과 프랑스 식민시대의 관료, 군인들은 지엠정권에 합류함으로써 새로운 안식처를 찾았으며, 자신의 기득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들을 통해 프랑스 식민시대의 지배체제나 행정체제가 그대로 계승되었으며, 이로 인해 새로운 정권은 이전의 식민정권과 자신을 구분지을 수 없게 되었다(Joiner, 1967). 이중에서 특히 군집단은 프랑스 식민시기와 1차인도차이나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이는 지엠 이후의 정권까지 이어졌다(Wurfel, 1967: 534; Woodside, 1976: 281).
남부정권의 정치체제는 이들의 정치적 상상력이 얼마나 부재했던가를 잘 보여준다. 이는 중앙정부와 농촌지역, 지배집단과 피지배집단 사이의 정치적 간극과 합리적 정치제도보다는 강압적 수단에 의존한 지배체제의 특성에서 잘 드러난다. 첫째, “베트남공화국은 중앙정부 내에 농촌 인구를 통합할 수 있는 효율적인 정치제도를 지니지 못했다”(McAlister, 1969: 6). 이는 프랑스의 식민통치기부터 지속되어 온 지방통치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지만,다른 한편으로는 남부정치체제가 지닌 계급적 기반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바오 다이나 지엠, 그 이후 정권의 기반이 된 것은 친서방적이고 도시 중심적 인물들이었다. 남부의 지주들마저도 대부분이 도시에 거주하는 부재지주였다. 특히 남부정권 초기 북부로부터 남하한 카톨릭 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고위직의 분배는 70% 이상이 불교도라 생각하고 있는 남부인들 사이에 정치적 불균형을 초래했고, 심한 종교적 갈등을 유발했다(Scigliano, 1964). 이러한 상황은 지방을 포괄하는 중앙집중적인 행정체계를 갖추고자 했던 남부정권에 심각한 제약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둘째, “정치제도가 구조적 영역뿐만 아니라 도덕적 영역 또한 지니고 있다”(Huntington, 1968: 24)고 볼 때 남부정권의 토대가 된 지엠정권은 식민잔재를 그대로 이어받은 태생적 한계에 의해 도덕적 정당성을 지닐 수 없었다. 이것은 강압과 물리력에 의해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1956년 1월 11일 지엠은 ‘강제집단수용소설치령’을 내려 그와 정부에 반대하는 자에 대해 거의 무제한적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Fall, 1966: 12). 반정부적 지식인과 혁명세력에 동정적인 사람들은 ‘국가안정과 공공질서 수호’의 이름으로 체포·구금·살해되었다. 이러한 폭정은 1959년 3월 1일 제정된 법령 10-59의 ‘치안유지법’에서 정점에 달했다(Kahin & Lewis, 1969: 101-102). 지엠을 출발로 한 공포정치 유형은 전쟁이 종국으로 치달았던 티우(Thieu)정권하에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티우정권은 미국에 의해 지원받는 경찰기구에 의해 유지되는 정권이었으며, 그의 지배하에서 주민들은 야만적으로 대우받고 평정되었다(Chomsky, 1992: 386-391).
인구의 대다수가 농민이었던 베트남의 경제구조를 생각할 때 농지개혁은 정권의 정당성을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남베트남 정부에 의해서 행해진 대표적인 토지개혁은 1956년과 1970년에 행해진 개혁이라 할 수 있다. 우선 1956년 10월 22일 지엠정부는 벼농지를 1가구당 100헥타르로 제한하고, 이 상한선을 넘는 토지는 몰수될 것이라고 명시한 법령 57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지엠의 토지개혁정책은 근본적인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
첫째, 지엠의 토지개혁은 정권의 정치체계의 특성에 의해 제약받고 있었다. 계급적 측면에서 볼 때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관계는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 측면 또한 가지고 있다(Mitchell, 1967: 579). 토지개혁은 농민의 부를 증진시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지주와 농민들 사이에 존재하던 기본적인 사회적 관계, 곧 권력과 지위의 재분배를 포함하는 것이다(Huntington, 1968: 299).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지엠의 정치구조는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가져올 수 없는 것이었다.
둘째, 농지개혁의 결과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100헥타르 이상의 농지에 대한 몰수는 지주들의 물적 기반을 해체하는 데 실제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주들에게 몰수된 681,260헥타르의 토지도 그중 단지 261,213헥타르만 재분배되었다. 1961년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남부지역 토지의 62.5%는 여전히 임차지 상태였고, 전체 토지의 21.9%만이 소유자에 의해 직접 경작되고 있었다. 인구의 약 20%가 무토지 노동자들이었으며, 메콩삼각주 지역 주민의 80% 이상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했다(Paige, 1975: 303). 결과적으로 지엠의 개혁은 과거 식민정권에 의존한 세력의 재강화를 가져왔으며, 지주들은 거의 피해를 보지 않은 채 다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970년 3월 티우에 의해 수행된 토지개혁법인 ‘경작자에게 토지를(land to the tiller)’은 지엠의 개혁에 비해 훨씬 진전된 것이었다. 토지 상한선은 100헥타르에서 15헥타르로 제한되었고, 메콩텔타의 1/2정도의 토지가 분배되었다. 또한 지엠의 지배하에서 폐지되었던 전통적인 마을 위원회가 부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너무 늦은 것이었다(Harrison, 1979: 271). 이미 전쟁의 주도권은 혁명세력에게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와 미국은 자신이 세운 남부정권의 정당성 부재에 의해 지속적인 한계에 봉착했다. 이는 특히 전쟁과정에서 추진했던 ‘베트남인에 의한 베트남전쟁’, 곧 ‘전쟁의 베트남화’계획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전쟁의 베트남화는 전쟁의 성격을 내부화함으로써 외부세력과 민족해방세력의 전쟁이라는 전쟁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희석시키고, 나아가 베트남인들을 통해 자신의 전력을 보강하려는 전략이었다. 프랑스는 1948년부터 미국은 1969년 1월 파리회담 개시 이후부터 이를 본격화한다. 1차인도차이나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프랑스는 약 30만의 베트남군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1968년경 남베트남의 정규군은 100만에 달하고 있었다. 인원과 장비면에서 본다면 전쟁의 베트남화를 통한 ‘베트남인에 의한 베트남전쟁’은 성공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미국의 전략은 제대로 이행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버팅거(Buttinger)의 논의에서 잘 드러난다.
교육받은 중간계급집단은 그들이 경멸하는 정권을 위해, 비록 공산주의자들이 이끌고 있는 집단이라 하더라도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 반대해서 프랑스군이 지휘하는 군대에서 싸울 마음이 없었다. 이러한 정치적 이유 때문에 베트남 국군(Vietnam National Army)은 결코 강력한 군이될 수 없었다(Buttinger, 1968: 331).
위와 같은 남베트남군의 특성은 베트남전쟁의 전 기간을 관통하는 특성이었다. 남부정권의 반민족적 성격은 남베트남의 군인들이 정권을 위해 싸워야 할 동기를 제공할 수 없었다. 이는 이미 1963년 1월에 벌어진 압박(Ap Bac)전투의 사례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당시 전투에서 2000명이 넘는 남베트남 군인은 200여 명의 베트콩를 상대로 해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은 베트콩을 공격할 것을 거부했으며, 지휘관 또한 증원군을 보낼 것을 거부했다. 베트콩은 12명의 사상자를 데리고 탈출했고, 그 뒤로는 200명의 죽거나 다친 남베트남 군인과 사망한 3명의 미국인 고문관이 남겨졌다(Buttinger, 1968: 461; Olson & Roberts, 1991: 98-99).
이는 당시 전쟁이 지니는 정치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라면 프랑스와 미국은 스스로 정당성이 부재한 정권을 세우고 지원함으로써 전쟁에서 획득해야 할 정치적 정당성을 상실했다. 전쟁의 내부화를 위한 ‘베트남인에 의한 베트남전쟁’의 실패는 이들의 정치적 실패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4. 혁명과 전쟁
프랑스와 미국의 반혁명전략에 대한 혁명세력의 대응은 물리적 측면보다는 정치적 측면에 의존하여 혁명세력과 인민을 결합하는 대중통합기제에 의존한 것이었다. 이는 경제적 통합기제인 토지개혁과 정치적 통합기제인 통일전선으로 가시화되었다. 본 장에서는 이같은 혁명전쟁과정에서 나타난 대중통합정책이 지니는 특성을 검토하고, 나아가 혁명전쟁을 결정적인 승리로 이끌었던 디엔 비엔 푸와 테트 대공세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 혁명으로의 길
전쟁과정에서 나타난 남부정권과 혁명세력의 차이점은 대중에 대한 사회 경제적·정치적 통합기제를 어떻게 구사했느냐에 있었다. 앞 장에서 검토한 대로 외세인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남부정권은 소수 지배계급을 중심으로 한 통합과 다수 대중에 대한 배제를 통해 억압적인 사회체제를 유지하였고, 이는 남부에 들어선 체제가 지속적으로 대중들과 유리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혁명세력과 대중의 관계는 남부의 체제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혁명세력은 전쟁과정을 사회 경제적·정치적 혁명과정과 결합시키고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토지개혁과 통합적 정치체제의 건설이 있었다. 전쟁과정에서 수행된 토지개혁과 통합적 정치체제의 건설과정을 유형화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농지개혁과 통합적 정치제제의 건설>
전쟁기간
대중통합기제
1차인도차이나전쟁
2차인도차이나전쟁
북베트남
남베트남
토지개혁의 유형
1. 해방구를 중심으로 한 토지개혁
2. 1953년 이후 개혁의 본격화
혁명적 토지개혁
해방구를 중심으로 한 혁명적 토지개혁
정치체제의 특성
리엔 비엣: 베트민의 확장 - 반프랑스세력의 광범위한 대중전선체
조국전선 : 리엔 비엣의 대중통합적 정치구조를 계승한 북부의 대중전선체
NLF: 남부의 혁명적 대중조직 - 농민+노동자+중간계급
해방 이후 북베트남의 혁명세력에 의해 수행된 토지개혁은 1945년~1953년 말에 이르는 온건 개혁기와 그 후의 적극적 개혁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 개혁의 온건성은 프랑스의 침탈에 맞서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제1의 과제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당시 채택된 “민족과 조국이 무엇보다 우선한다”라는 슬로건에서도 드러난다. 혁명세력은 급진적인 토지개혁이 가져 올 계급 간의 분할을 막고 통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급진적인 개혁을 유보하고, 농지문제는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상호 이해와 양보에 의해 조절해 나가려 했다. 따라서 당시의 토지분배는 지주·소작관계를 직접적으로 파괴한다기보다는 합리적이고 평등한 방법에 의해 공유지를 먼저 분배하고, 프랑스 식민주의자와 베트남 민족반역자가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농민에게 임대하는 형식으로 온건히 진행되었다(Ngoc-Luu Nguyen, 1987: 226-228). 그러나 토지개혁의 성과가 아주 미미했던 것은 아니다. 1945년~1953년 사이에 베트민은 310,210헥타르, 곧 북베트남의 총 경작지 중 15%에 해당하는 면적을 분배하였고, 북부지방에서 토지를 가지고 있었던 농가 중 약 17%에 해당하는 농가가 그 혜택을 받았다. 또한 지대는 1/4로 감소되었으며, 1945년 8월 이전에 계약된 고리대 부채는 말소되었다(Wolf, 1984: 185).
1953년 이후의 적극적인 토지개혁은 그간의 개혁이 지주의 정치·경제적 권력을 파괴하지 못했고, 농민의 경제적 이해를 적절히 보호하지 못했다는 반성에서 비롯되었다(Ngoc-Luu Nguyen, 1987: 258).이에 따라 1953년 11월 당중앙위 제5차 총회는 지주계급의 토지소유권을 폐지하고 토지를 농민에게 할당하기 위해 토지강령 및 농촌에서의 당의 일반노선과 토지개혁 원칙, 토지 몰수와 청구 및 강제수용에 관한 정책을 수립하고, 같은 해 12월 역사적인 토지개혁법을 발표하게 된다. 토지개혁은 1953년 12월 25일부터 시작되어 1955년 6월 20에 이르는 3회의 지역적 개편기와 1955년 6월 27일~1956년 7월 30일에 이르는 북부 전역을 포괄하는 2회의 개혁기로 총 5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Ngoc-Luu Nguyen, 1987: 307-308). 봉건제를 타파하고 “토지를 경작자에게(Land to the Tillers)”라는 구호와 더불어 진행된 토지개혁은 1956년 여름경까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개혁을 통해 봉건적 토지 소유권을 폐지하고, 지주계급을 소멸시켰으며, 지주들이 소유하던 810,000헥타르의 토지는 토지가 없거나 토지 취득을 갈망하는 농민들에게 분배되었다(HCPV, 1987: 97).이같은 개혁과정은 토지의 이전뿐만 아니라 농촌에서의 근본적인 정치․사회·심리적 혁명으로 인식되었다.
북부의 사회주의개혁이 지속되고, 남부의 혁명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남부에서도 해방구를 중심으로 토지개혁이 진행되었다. 민족해방전선(NLF)은 지엠정권이 100헥타르로 정한 벼경작 토지상한선을 그것의 1/50인 2헥타르로 정했다. 그에 따라 디엠정권 하에서는 최종적 분배가 1/3에 미치지 못했던 데 비해, 메콩삼가구의 85% 이상을 재분배해 주었다. 민족해방전선의 통제 아래 있던 지역들에서 농민들은 자신들이 일하던 토지의 실질적인 소유주가 되었다. 그 외의 지역들에서도 민족해방전선의 제재위협으로 지대가 현격히 낮아졌으며, 민족해방전선의 통제가 강화되면 될수록 지대가 더욱 인하되었다(Paige, 1995: 445). 이같은 개혁의 진행은 남부정권의 개혁을 무력화하였으며, 대중을 지속적으로 혁명운동과 결합시키는 사회 경제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토지개혁이 대중들과 혁명세력이 결합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기제였다면 통일전선은 정치적 통합기제였다. 초기 베트민으로 출발한 통일전선조직은 프랑스의 재진주 이후 리엔 비엣(Lien Viet)으로 확대되었으며,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나자 북부에서는 조국전선이 남부에서는 새로운 대중전선체인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ational Front for the Liberation of South Vietnam)이 나타났다.
베트민의 결성이 지니는 가장 큰 의의는 식민지배 기간 동안 정치공간에서 계속 배제되어 왔던 피지배계급이 정치공간으로 복귀할 수 있는 조직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베트민은 조직적인 측면에서 수직적인 중앙집중적 체계를 발전시킨 것뿐만 아니라 각각의 조직을 수평적으로 교차시켜 권위구조의 편향된 집중을 피하려 하였다. 각 단체의 성원들은 한 단체에 국한되어 활동한 것이 아니라 다른 단체와 긴밀한 연계 하에 활동할 수 있었고, 이러한 조직체계는 대중들의 정치 참여 기회를 증대시켰다(Wolf, 1984: 186). 이후 혁명과정에서 베트민의 조직구조는 외형적인 부분의 변화는 있었으나 대중적 정치참여를 보장하는 구성방식의 특성은 거의 변화없이 유지되었다.
1946년 5월 29일 결성된 리엔 비엣은 베트민이 참가하고 있던 제 단체 외에 베트남국민당, 베트남혁명동맹회, 베트남사회당 등에 의해 결성되었다. 리엔 비엣의 기본적인 목적은 베트민에 결합하고자 하지 않는 비공산주의자와 중도파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 반프랑스 세력을 결집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호찌민은 종교조직 및 여타의 비정치적인 단체들도 리엔 비엣에 가입시켰고, 이를 통해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베트남인을 포괄할 수 있는 범민족적인 애국단체가 탄생했다. 전쟁 기간 동안 리엔 비엣은 1941년 결성된 베트민이 수행했던 대중통일전선체의 역할을 수행했다.
1차인도차이나전쟁이 끝나자 1955년 11월 리엔 비엣 전국대회가 열려 동 전선을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베트남조국전선이라는 새로운 대중전선체가 출현했다. 조국전선은 두 가지 목표를 지니고 있었는데, 첫째는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주요한 대중조직이 되는 것이었고, 둘째는 남부에서 주요한 실질적 조직으로 기능하는 것이었다. 북에서 그것은 기존의 연합전선이라기보다는 전체 대중조직을 포괄하는 초국가적인 조직으로 인식되었다(Pike, 1985: 141). 그러나 조국전선이 표방했던 남부 혁명을 위한 주도적 역할은 남부정권의 형성과 혁명세력에 대한 지속적인 탄압에 의해 제대로 수행될 수 없었다.
1960년 이후 남부의 민족해방투쟁을 이끌었던 것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이다. 1960년 12월 20일 정식으로 출범한 NLF는 1954년 8월에 형성된 ‘사이공-촌론평화위원회(Saigon-Cholon Committee for Peace)’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 단체는 지엠에게 제네바협정의 준수와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며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했다(SarDesai, 1998: 73). 그러나 통일을 위한 민족적 요구와 사회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지엠정권의 탄압에 의해 한계에 부딪히자 SCCP는 보다 전투적으로 변했으며, 남부혁명을 위한 대중조직인 NLF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NLF는 혁명적 강령보다는 낮은 수준의 강령을 채택함으로써 많은 계급·계층을 혁명운동에 포괄하려고 시도하였다. NLF의 강령은 조직결성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미제국주의자와 그 앞잡이 일당의 지배를 타도하고 나라의 남부에 독립·민주주의·주민의 생활개선·평화·중립 그리고 나아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정치적 견해와 무관히 모든 사회단체·종교 및 애국자의 단결을 주장한다(이승헌, 1969: 290).
NLF가 강령의 도입부에서 밝히고 있는 조직의 목적은 사실 과거 베트민이 주장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적이 미국으로 바뀌었고 분단모순에 의해 통일의 목적이 추가되었다는 점이다.
NLF가 결성되고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혁명적 대중 조직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NLF는 한편으로는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혁명적 선전·선동에 착수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을 동원하기 위한 기층조직망을 건설하였다. 지엠의 정치형태가 프랑스의 기술을 계승한 것이고, 중앙과 지역을 매개할 수 있는 정치적 통로를 확보하지 못해 지역권력의 공백을 초래한 반면, NLF는 베트민을 계승하는 수평적․수직적 조직체계를 활용함으로써 중앙과 지역을 잇는 조직을 지닐 수 있었다(Joiner, 1967).
토지개혁과 정치조직의 건설은 사회 경제적·정치적 권위의 배분과정이었으며, 구질서의 청산과정이었다. 이는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통한 ‘전인민의 저항전쟁’을 가능케 한 물적 토대였으며, 혁명세력과 베트남인민이 직접 만나는 접점이었다.
2) 디엔 비엔 푸와 테트 대공세의 의미
디엔 비엔 푸전투와 테트 대공세는 1,2차인도차이나전쟁의 승패를 갈랐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으며, 30여 년에 걸친 베트남전쟁의 특성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아래의 논의에서는 양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했던 요인들의 공통점, 혁명조건의 차이에 의해 나타난 두 시기 투쟁 방식의 차이점, 전투의 결과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검토함으로써 베트남전쟁의 혁명성과 민족해방전쟁의 성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요인은 양 전투의 전반적 특성을 지배했던 전쟁수행양식, 전쟁의 성격에 대한 정당화, 외적 요인으로 프랑스와 미국 내의 반전운동의 영향 등을 들 수 있다. 첫째, 베트남 혁명세력의 전쟁수행 양식은 재래식전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재래식전쟁의 목적이 적의 군사력을 패배시키는 것에 의해 국가의 통제력을 획득하는 것이었다면, 게릴라전으로 알려진 베트남의 비재래식전쟁(unconventional warfare)은 우선 대중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는 것에 의해 국가의 통제력을 획득하려 했던 것이다(Lindsay, 196: 254). 이러한 전쟁수행 원칙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대중 속의 정치적 기저에서 인민의 국가방위로 나간다”는 것이다. 인민의 애정과 마음을 우선시했던 혁명세력의 전략은 적절한 군사·경제적 원조를 수행한다면, 그들이 지원하는 정권이 결국 정치적 정당성과 대중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미국의 정책적 가정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둘째, 혁명세력은 자신들의 전쟁이 외국의 지배와 정당하지 못한 남부정권에 대항한 ‘정당한 전쟁’임을 주장함으로써 대중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었다(Duiker, 1996: 358). 정당한 전쟁에 대한 주장은 아래와 같은 보 우엔 지압의 논의에 잘 드러난다.
여러 계급이 분화되어 있는 사회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정치를 구별할 수 있다. 착취자·억압자인 계급 및 민족의 정치와 피착취·피억압 계급 및 민족의 정치가 그것이다. 따라서 서로 적대적인 국가와 군대 사이에는 두 가지 종류의 전쟁, 곧 하나는 혁명적이고 대중적이며 ‘정의로운 전쟁’과 다른 하나는 반혁명적이고 반민중적이며 ‘불의에 찬 전쟁’이 있다(Vo Nguyen Giap, 1988: 29).
정의로운 전쟁에 대한 인식은 전쟁과정에 대한 대중들의 참여도에도 반영되어, 1964년 말까지 인민해방군(People's Liberation Armed Forces) 인원의 90%가 자발적인 지원자들이었다.
셋째, 쯔엉 찡(Truong Chinh)은 베트남 혁명과정에서 외부적 요소가 지닌 중요성을 강조했다(Duiker, 1996: 136).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는 프랑스 내의 민주세력이 혁명운동의 정치적 동맹세력으로 인식되었고, 이들은 실제로 디엔 비엔 푸전쟁을 빨리 끝내라는 반전여론 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는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1966년 베트남전에 동원될 병력 증원계획이 발표되자 베트남전에 대한 미국 내의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고, 반전운동은 거세졌다(Tuchman, 1997, 204-208). 프랑스와 미국 내의 반전운동은 전쟁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외적 환경을 조성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전반적인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양 전투는 혁명의 조건과 과정의 차이로 인해 대중들의 동원과 저항방식에 차별성을 보인다. 우선 디엔 비엔 푸전투는 보 우엔 지압이 ‘전 인민의 저항전쟁’이라고 전쟁의 특성을 정리한 바와 같이 민족해방의 목표를 전면에 내세웠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사회혁명의 과제는 민족해방이라는 최우선 과제 앞에서 잠정적으로 보류되었고, 모든 역량은 민족해방투쟁에 투여되었다. 물론 1953년 말 이후 토지개혁이 수행되기 시작했지만, 당시의 저항전선은 계급투쟁을 중심에 놓았다기보다는 민족해방의 과제를 우선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테트 대공세 시기는 상황이 달랐다. 남부정권과 북부정권이 대치한 상황에서 남부의 혁명세력은 사회적·민족적 혁명을 동시에 추구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정치투쟁과 군사투쟁을 결합시켰다. 정치투쟁과 군사투쟁은 결합된 하나의 투쟁으로 시기별로 한쪽의 특성이 우세한 면을 보이는데 1960년 이후 초기의 투쟁은 정치투쟁이 강조되었다. NLF가 만들어지자 혁명세력은 남부지역에 통일을 원하는 정부를 탄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고, 이를 위한 정치적 선전과 조직 역량 강화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미국이 직접 개입하면서 통일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그 정점에는 테트 대공세가 있었다. 테트 대공세는 물리력에 의한 완전한 승리를 추구했다기 보다는 공세를 통해 전쟁에 대한 미국 내의 반발을 가속화시키고 베트남의 위기를 미국 대통령선거의 주요 쟁점으로 전환시키려는 정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Duiker, 1980). 이는 베트남의 혁명세력이 추구했던 전쟁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무장투쟁은 단지 정치투쟁의 연장”이었던 것이다.
디엔 비엔 푸전투와 테트 대공세의 결과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는 크게 세계체제상에서의 의미, 베트남의 국가건설과정에서 지니는 의미, 전쟁과정에서 능동적 행위자였던 베트남인들에게 지니는 의미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양 전투의 결과는 기존의 지배·피지배관계가 역전될 수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며,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역사에 조종(弔鐘)이었다고 할 수 있다. 테트 대공세에 대한 월러스타인의 논의는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1968년 초의 구정공세(Tet Offensive)는 제3세계 인민들의 지적 능력과 의지를 억누르는 데 자본집약적 전쟁이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 공세 후 채 5년도 못되어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해야만 했고, 남북관계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Wallerstein & Hopkins, 1994: 123).
프랑스의 구식민주의와 이를 지원하고 마지막에는 직접 전투까지 수행했던 미국은 베트남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했던 냉전에 입각한 개입주의의 명분을 상실했다. 이는 특히 2차대전 이후 미국이 제3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수행한 군사적 역할이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가를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둘째, 프랑스의 재진주나 미국의 남베트남에 대한 지원과 개입은 베트남의 통일국가 건설을 가로막은 가장 주요한 요인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제국주의적 개입주의는 다른 한편으로 베트남의 국가를 완성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혁명세력은 전쟁과정을 통해 인민을 조직하고, 동원하며, 혁명적 질서를 세우고, 국가의 체계를 만들어 갔다. 이는 “전쟁이 국가를 만든다”는 명제에 들어 맞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셋째, 전쟁 기간을 통해 베트남인들은 좋던 싫던 간에 전쟁과정에 편입되어야 했다. 이는 이들이 특정 정치체를 선택하고, 정치과정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 여건을 조성했다. 전쟁의 결과는 베트남인들이 어떠한 정치체를 선택했는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이는 파리 휴전협상의 수석대표였던 에이브릴 헤리만(Averell Harriman)의 다음과 같은 논의에서 잘 드러난다.
남베트남에서의 투쟁의 승부는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다. 한쪽은 자기 민족을 억압한 식민지세력에 협력한 사람들이 이끄는 집단이고 또 한쪽은 긴 독립·반식민지 투쟁에 몸바쳐 싸운 사람들이 이끄는 집단이다. 어느 쪽 지도자들이 베트남인을 더 사랑하는가는 분명한 사실이다. 민중의 사랑을 받는 쪽이 결국은 승리할 것이다.
베트남인들은 전쟁이라는 격렬한 정치과정 속에서 자신의 선택을 명확히 하였고, 정치과정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단순히 동원되는 대중이 아닌 참여와 선택을 통해 그들의 통치질서를 만들어 가는 능동적인 주체로 성장했다. 전쟁은 베트남인들을 정치적으로 각성된 정치행위자로 탈바꿈시켰던 것이다.
5. 맺음말
현재의 시점에서 베트남전쟁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본 논문에서는 전쟁에 대한 패권주의적 정당화와 자기중심적 관점이 베트남의 내적 역사지향에 대한 이해와 이를 바탕으로 한 전쟁과정의 독해를 통해 극복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같은 입장에서 전체 베트남전쟁을 정리한다면 베트남전쟁은 한편으로는 외세의 침탈에 저항한 민족해방전쟁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의 식민지배와 미국의 개입에 의해 발생한 사회구조적 왜곡을 바로 잡아 나가려는 사회혁명의 성격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베트남은 전쟁을 승리로 이끎으로써 비로소 1945년 해방기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역사의 괘도를 원래의 위치에 돌려놓을 수 있었으며, 통일된 국가의 사회체제를 새롭게 정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1975년의 전쟁 종결이 베트남전쟁의 끝은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베트남은 미국의 봉쇄와 금수조치로 인해 경제적 재건과 도약의 기회를 박탈당했으며, 그로 인해 최악의 빈곤국으로 남아야 했다.(이삼성, 1998: 227-234). 미국은 1995년 7월 11일 베트남과 국교정상화를 선언하기까지 제2의 전선에서 베트남과 전쟁을 치렀으며, 1975년의 패배를 상쇄하려 했던 것이다. 30년에 걸친 전쟁과, 20여 년 동안 지속된 경제적 봉쇄와 금수조치는 미국에 이해에 반(反)한 국가가 치러야 할 대가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이는 패권국가의 아집과 독선이 제3세계의 약소국을 얼마나 철저히 유린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발전의 현실이 베트남의 고통을 모두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는 200만에 이르는 고엽제 환자들의 고통과 6만여 명이 넘는 지뢰와 불발 폭탄의 피해자들은 베트남 내에서 과거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또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전쟁에 대한 냉전적 정당화는 베트남전쟁이 역사의 화석이 아닌 살아 숨쉬는 실제로 현제 속에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베트남의 현재는 그들이 치렀던 전쟁의 연속선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베트남이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역사적 본질에 접근할 수 없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20세기 ‘야만의 역사’를 자성하고, 이를 정당화했던 역사인식을 해체하는 작업인 동시에 현재 베트남의 실체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출발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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