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창작문학상 운문부문 당선자는 '정보영' 학생입니다.
당선작은 <스타팅블록-탈출> 입니다.
모두 크게 축하해주기 바랍니다.
<제4회 창작문학상 운문 당선작>
스타팅블록
-탈출
정보영
1.
남자는 당신이 맨날 뛰고 있는 시간 속에 있어.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남자는 당신과 함께 달리고 있어.
남자는 달려야만 해, 지하에서 지상으로, 또 지상에서 지하로. 남자는 육상선수처럼 뛰고 있어. 언제부턴지는 모르지만 층마다 남자가 당신과 함께 달리고 있어. 계단을 오를 때, 스타팅블록을 힘차게 딛으며, 출렁이는 근육의 힘줄을 하나로 뭉치는, 100m 달리기 선수의 단아한 순간처럼.
남자는 계단 사이사이 당신과 장애물 경기를 하고 있어. 남자는 앞으로만 달릴 줄 알아. 앞으로만 달리라고 누구도 당신에게 가르쳐준 적 없지만, 당신도 또한 앞으로만 달리고 있어. 그러므로 당신은 남자의 본보기야.
당신도 계단의 出口를 찾아본 적 있어. 그럴 때마다 남자는 당신을 따라 다녔어. 당신은 매일 시계를 보며 남들보다 빨리 달리려고 했어. 아령 같이 작은 공간 속에서 무거운 어깨를 치켜든 남자는, 당신을 보며 보이지 않는 出口를 향해 먼저 뛰어가 있었어.
남자에겐 하루하루가 비상이었음으로 달릴 수밖에 없었는데, 당신도 그런 남자를 본 적이 있어. 하지만 당신은 의아하게 고개를 갸우뚱하며, 서둘러 계단을 빠져 나갔어.
당신은 매일매일 장애물경기를 하며, 계단을 두 칸씩 달리고 또 달렸어. 당신이 술에 취해 계단을 비틀거리며 내려올 때도, 시계를 보며 똑깍똑깍 구두를 신고 계단을 올라갈 때, 남자는 약속된 시간에 당신보다 먼저 허들을 넘고 달리고 있었어.
2.
다시 고막을 찢는 쇳소리가 사람들을 배웅하고, 항문을 조이듯 주름 가득한 사람들이 설사처럼 쏟아져 나온다.
당신은 각도기처럼 계산된 시간 안에서 다시 달리고 있다. 계단은 시간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角(각)이 있다. 그래서 남자가 있다.
벨이 울리고 사람들이 지하철에 오른다. 모두들 便秘(변비)에 걸렸는데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눈에 초록색 불을 켜고 달릴 뿐이다. 지하철은 便秘를 가득 싣고 다음 역을 향해 말없이 달린다.
남자는 언제나 뛰고 있는데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초록색 불을 깜빡깜빡거리며 빨리 다음을 향해 건너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초록 불을 찾는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남자는 언제나 계단계단 장애물경기를 하며,
계단 둘, 허들 넷, 스타팅블록을 딛고 서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온몸이 노곤한 당신, 매일매일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계단을 뛰어 넘고 있다. 얼굴이 누렇게 부은 당신, 까칠하게 손톱이 튼 당신, 모두가 건조한 눈동자를 갖고 있다.
鉤蟲症(구충증)에 걸려 구충이 당신의 빨간 피를 쪽쪽 빨아먹는 중에도, 자꾸만 어디론가 서로에게 달리기를 권하고 있다.
3.
남자는 지상과 지하의 짧은 호흡 사이에서 언제나 달리고 있어. 층층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계단 끝에서 숨고르기 한 번.
서서 남자의 초록색 문을 찾아봐. 남자는 언제나 스타팅블록에서 당신의 탈출을 기다리고 있을 거야.
하지만 당신은 1번 출구를 향해 오른쪽, 2번 출구를 향해 왼쪽, 당신은 어디에서 환승할 것인가.
이번 역은 이 열차의 종착역인 신도림, 신도림역입니다. 합정·을지로 방면으로 가실 손님은 1번 승강장에서 내선 순환열차를 이용하시고, 수원·인천·청량리·까치산 방면으로 가실 손님은 이번 역에서 열차를 갈아타시기 바랍니다. 내릴 때에는 차안에 두고 내리는 물건이 없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고맙습니다.
<제4회 창작문학상 운문 심사평>
광주대학교 문창과 동창회 주최 제4회 창작문학상 시부문 응모작을 읽고 심사위원은 잠시 흥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응모된 작품의 수준이 너무도 높았기 때문이다. 1, 2, 3학년 할 것 없이 응모작의 수준이 모두 한결 같았다. 역시 광주대학교 문창과 학생들의 창작시 수준은 대단했다.
예심에 통과된 작품들을 여기에 적시해본다. 조남희의 「태종대의 모성」, 황정애의 「가죽장갑」, 임가희의 「한숨에 말아먹는 밥」, 주병태의 「각질」, 김민정의 「계단」과 「아버지의 사막」, 박가영의 「401호」와 「나비」, 김나리의 「하노이 처녀」와 「귀에 꽃피는 남자」, 정보영의 「스타팅블록―탈출」과 「아무도 울지 않는 밤」, 이현명의 「발톱」과 「낮잠」 등이 그것이다. 이들의 시 14편은 모두 일정한 경지에 올라 있는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심에 통과한 이들 14편의 시를 읽고 또 읽은 끝에 심사위원은 먼저 조남희, 황정애, 임가희의 시를 선외로 했다. 제2심에서는 김민정, 박가영, 김나리, 정보영, 이현명의 시로 압축을 한 셈이었다. 이들 각각의 시는 장단점을 고루 갖추고 있어 심사위원을 고통스럽게 했다. 다시 여러 차례 독해 끝에 정보영의 시와 이현명의 시로 압축해 주변의 의견을 물었다. 김민정, 박가영, 김나리의 시는 개성 있는 정서와 섬세한 감수성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언어의 정밀성과 섬세성이 조금은 떨어졌다.
이들 두 학생의 시는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뽑아도 크게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특히 이현명의 시 「발톱」은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발톱의 상징성도 돋보였지만 이야기와 이미지, 정서를 구성해내는 솜씨도 정밀했다. 이 시는 “2차선/국도가 흰 뼈를 드러내며 나뒹군다”라든지 “라디오에선 파전 냄새가 나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등 감각적인 표현도 뛰어났다. 하지만 전체적인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는 한계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정보영의 시는 우선 긴 호흡의 리듬으로 대상을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는 솜씨가 돋보였다. 대상에 부여하는 언어에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는 그가 충분히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하리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화폭을 적당히 추상화하는 가운데 지성을 부여하는 솜씨도 좋았고, 이미지를 매개로 장면을 구성하는 능력도 좋았다. 지나치게 길다 보니 완성도가 떨어져 보이기는 했지만 그의 「스타팅블록―탈출」은 달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속도 중심의 현대사회를 에둘러 비판하고 있어 더욱 주목이 되었다. 게다가 달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현대인의 자아가 끊임없이 분열되고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도 섬세하게 그려지고 있어 관심을 끌었다.
오랜 고민 끝에 정보영의 시 「스타팅블록―탈출」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했다. 달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현대인의 불안하고 초조한 삶의 모습을 섬세한 형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시를 응모한 정보영에게 축하를 보낸다. 낙선한 학생들은 훗날을 기약하며 시의 칼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기를 부탁한다. 바이블에 늦게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런 일들을 계기로 광주대학교 문창과 동창회에서 주최하는 창작문학상이 더욱 발전하기를 빈다.
2009년 5월 25일
심사위원: 김은수(수필가, 광주대 문창과 교수)
이은봉(시인, 광주대 문창과 교수)
첫댓글 보영이 자랑스럽다~ㅎ 축하해~~
아~보영이가 당선됐구나. 그런데 심사가 신춘문예보다 더 치열한 거 같은데~~추카, 추카~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