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서남쪽에 사람이 사는 섬은 15개소로 모두 성읍이 있었는데, 후에 위나라 효문제(孝文帝)가 무리를 보내 정벌하였다.'-통전
효문제는 남제서에 백제와 북위의 전쟁이 기록된 488년, 490년 때의 왕입니다.
이 15개의 섬은 다른 사서에도 나타납니다.
'나라의 서남쪽에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이 15군데 있는데, 모두 성읍이 있다.'-수서
'그 나라의 서남쪽에 사람이 사는 섬이 15군데 있는데, 모두 성읍이 있다.'-북사
이 사료는 백제의 대북위 전쟁을 입증하는 사료가 될 수 있나요?
@@@@@ 님의 글 가운데 주목할 것은 통전의 기록입니다. 우선 문장으로 볼 때 수서와 북사 등의 기록에는 15개의 섬이 있었다는 것만 있을 뿐, 북위가 그곳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따라서 통전에 나온 효문제의 공격 대상은 15개 섬이 아니라, 백제 그 자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통전의 내용이 중요한데, 통전에 대해서 약간 소개를 하면 통전은 중국 역대의 제도를 모두 기록한 책으로 당나라 시대에 두우(杜佑)가 편찬한 것으로 상고시대부터 당나라 현종때까지의 제도를 식화전(食貨典;재정)·선거전(選擧典;관리 임용)·직관전(職官典;官制)·예전(禮典;儀禮)·악전(樂典;樂制)·병전(兵典;兵制)·형전(刑典;刑法)·주군전(州郡典;행정지리)·변방전(邊防典;외국)의 9부분으로 나누어 기술한 책입니다. 제도사 연구상 없어서는 안될 책이며, 특히 수·당나라 부분은 사료적 가치가 높고 저자 두우의 진보사상이 반영되어 있다고 합니다. 총 200권이나 되는 책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통전의 기사가 다른 곳에 없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싣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 책은 신당서, 구당서 보다 빨리 편찬되었으며, 북사, 남사 및 위서, 진서, 주서 등 보다는 늦게 편찬된 책입니다.
특히 통전 변방전의 고구려, 백제 등의 기록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을 알려줍니다. 특히 백제 전에서는 몇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에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먼저 원문과 번역한 것을 제시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通典 卷第一百八十五 邊防一 東夷上 百濟
1) 百濟,卽後漢末夫餘王尉仇台之後,後魏時百濟王上表云:「臣與高麗先出夫餘。」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晉時句麗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自晉以後,呑幷諸國,據有馬韓故地。其國東西四百里,南北九百里,南接新羅,北拒高麗千餘里,西限大海,處小海之南。國西南海中有三島,出黃漆樹,似小檟樹而大。六月取汁,漆器物若黃金,其光奪目。自晉代受蕃爵,自置百濟郡。義熙中,以百濟王夫餘腆佗典反爲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宋、齊並遣使朝貢,授官,封其人。 전
백제는 즉 후한말 부여왕 위구태의 후손이다. 후위 때에 백제왕이 표를 올려서 말하기를 “신은 고구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일찍이 나왔다”고 했다. 처음 백여가구가 바다를 건넘으로써 국호를 백제라고 했다. 진나라때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 2군을 점거하였으니, 지금의 유성과 북평의 사이다. 진나라때 이후로 여러 제국들을 병탄하고, 마한의 옛 땅을 점거하였다. 그 나라는 동서로 4백리요, 남북으로 9백리이며, 남쪽에는 신라와 접하고, 북쪽에는 고구려 천리와 대치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경계지어 있고, 소해의 남쪽에 위치하는데, 나라의 서남 바다에는 3개의 섬이 있어서 황칠수가 나오는 흡사 작은 개오동나무와 같으나 크기가 크다. 유월에 그 즙을 채취하여 기물에 칠하는데, 마치 황금을 칠한 것과 같이 그 빛이 사람의 눈을 빼앗는다. 진대이후로 번작을 받았고,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의희(405-418)년중에 백제왕 부여(전타전반-전지왕?)을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로 삼았다. 송,제 양국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관직을 받았으며, 그 사람을 봉했다.
2) 土著地多下濕,率皆山居。其都理建居拔城。王號「於羅瑕」,百姓呼爲「■■吉支」,■■音乾。夏言並王也。王妻號「於陸」,夏言妃也。官有十六品:左平一品,達率二品,恩率三品,德率四品,扞率五品,柰率六品,以上冠飾銀花;將德七品,紫帶;施德八品,皁帶;固德九品,赤帶;季德十品,靑帶;對德十一品,文督十二品,皆黃帶;武督十三品,佐軍十四品,振武十五品,克虞十六品,皆白帶。統兵以達率、德率、扞率爲之,人庶及餘小城咸分隷焉。其衣服,男子略同於高麗,拜謁之禮以兩手據地爲敬。婦人衣似袍而袖微大,在室者編髮盤於首,後垂一道爲飾,出嫁者乃分爲兩道焉。兵有弓、箭、刀、槊。俗重騎射,兼愛墳史。其秀異者頗解屬文,又解陰陽五行。用宋元嘉曆,以建寅月爲歲首。亦解醫藥、卜筮、占相之術。有投壺、樗蒲等雜戱,然尤尙弈碁。僧尼寺塔甚多,而無道士。賦稅以布、絹、麻、米等。婚娶之禮略同華俗。父母及夫死者三年持服,餘親則葬訖除之。氣候溫暖,五穀、雜果、菜蔬及酒醴、餚饌、樂器之屬多同於內地,唯無駝、騾、驢、羊、鵝、鴨等云。其王以四仲之月祭天,又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大姓有八族:沙氏、燕氏、劦氏、劦音俠。解氏、眞氏、國氏、木氏、■■音白氏。國西南人島居者十五所,皆有城邑。
사람들은 토착생활을 하는데, 땅이 낮고 습하여, 모두들 산에서 산다. 그 도읍은 거발성이라고 하며, 왕은 어하라라고 하는데, 백성들은 건질지라고 부른다. 중국말로 왕이란 뜻이다. 왕의 아내는 어륙이라 하는데, 중국 말로 왕비라 말이다. 벼슬은 16품게가 있다. 좌평은 1품, 달솔 2품, 은솔 3품, 덕솔 4품, 한솔 5품, 내솔 6품인데, 이상은 관에 은화로 장식한다. 장덕은 7품인데 자색 허리띠를, 시덕은 8품은 검은 허리띠를 한다. 고덕은 9품으로 적색 허리띠를 계덕은 10품으로 청색 허리때를 하며, 대덕 11품과 문독 12품은 모두 황색 허리띠를 무덕 13품과 좌군 14품, 진무 15품과 극려 16품은 모두 백색 허리띠를 한다. 군대를 통솔하는 것은 달솔, 덕솔, 한솔 들이 하며, 도성 내에 사람들과 여러 작은 성이 함께 모두 여기에 예속되었다.
그들의 의복은 남자는 대개 고구려와 동일하며, 높은 분을 뵙는 의례에서는 양손을 땅을 집어서 공경을 나타냈다. 부인의 의복은 도포와 흡사하지만, 소매가 약간 크다. 시집가자 않은 여자는 편발로 머리ㅟ에 또아리를 틀고, 뒤로 한 가닥을 늘어드려 꾸미기도 한다. 출가한 여자는 두 갈래로 늘어뜨렸다.
무기로는 활, 화살, 칼, 창이 있고, 그들의 습속은 말타고 활 쏘는 것을 중하게 여겼고, 아울러 경전과 사서릉 래옥하니, 뛰어난 사람은 제법 문장을 이해하기도 했다. 또 음양, 오행도 이해했다. 송나라 원가력을 사용하여 인월(3월)로 한 해의 머리를 삼았다. 또한 의약, 점치기, 관상학 등도 알고 있었다. 투호와 저포 등의 여러 놀이들이 있으나, 특히 바둑, 장기를 좋아한다. 중과 승려 탑은 심히 많지만, 도사는 없다.
세금은 베, 비단, 삼베, 살 등으로 하며, 혼인의 예는 중화의 풍속과 대개 같다. 부모 및 남편이 죽으면 3년간 상복을 입고, 그 나머지 친족은 장례가 끝나면 상복을 벋는다. 기후는 온화하고 따스하며, 오곡과 여러 과일과 채소 및 술, 음식, 악기 등의 풍속은 거의 내지(중화)와 같다. 오직 낙타, 당나귀, 노새, 양, 거위, 오리 등이 없다. 기 나라의 왕은 매 계절의 중월(2,5, 8,11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또 매년 4번 그의 시조인 구태의 사당에서 제사드린다. 나라에는 8 씨족의 대성이 있는데, 사씨, 연시, 협시, 해씨, 진시, 국시, 목씨, 백(묘)씨가 있다. 나라의 서남쪽에는 사람이 거처하는 15개의 섬이 있는데 모두 성읍이 있다.
3) 後魏孝文遣衆征破之。後其王牟大爲高句麗所破,衰弱累年,遷居南韓地。隋文開皇初,其王夫餘昌遣使貢方物,拜爲帶方郡公、百濟王。大唐武德、貞觀中,頻遣使朝貢。顯慶五年,遣蘇定方討平之。舊有五部,分統三十七郡、二百城、七十六萬戶,至是以其地分置熊津、馬韓、東明等五都督府,仍以其酋渠爲都督府刺史。其舊地沒於新羅,城傍餘衆後漸寡弱,散投突厥及靺鞨。其主夫餘崇竟不敢還舊國,土地盡沒於新羅、靺鞨,夫餘氏君長遂絶。
북위(후위) 효문제(471-499)가 무리를 보내 정복하여 깨뜨렸다. 후에 그 왕 모대가 고구려에게 여러번 패한 바가 되어 차차 쇠약한지 오래되어 남한의 땅으로 옮겨갔다. 수문제 개황(581-600)초에 그 왕 부여창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기에 대방군공 백제왕으로 삼았다. 대당 무덕(618-6260, 정관(626-649) 시기에도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해왔다. 현경 5년(660)에 소정방을 보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예전에는 5부와 37개군, 200성을 나누어 76만호로 통치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땅에 웅진, 마한, 동명 등 5도독부를 나누어 두게 된 것이다. 이에 그 추장 거수를 도독부자사로 삼았다. 그 옛 땅은 신라에게 편입되었으며, 성과 주변의 남은 무리들은 후에 점점 적어지고 약해졌으며, 흩어져서 돌궐 및 말갈에 투항을 했다. 백제의 주인인 부여숭은 마침내 옛 나라로 돌아가지 못했으며, 토지는 신라, 말갈에 모두 흡수되고 말았으므로, 부여씨 왕가는 마침내 끝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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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임의로 통전 백제전의 문단을 3개로 구분을 해 보았습니다.
첫번째 문단을 보면 "백제는 즉 후한말 부여왕 위구태의 후손이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언젠가 이곳에서 유정님과 토론하면서 백제의 시조 문제를 논하면서 위구태에 대해 말한 바가 있습니다. 위구태는 부여의 왕으로 후한의 수도를 방문했기 때문에 매우 후한사람들에게 매우 유명한 왕입니다. 그런데 위구태와 백제의 시조로 알려진 구태하고 이름이 유사하다는 이유로 종종 헤갈리는 기록이 보입니다.
통전의 이 문장을 통해 백제가 부여왕 위구태의 후손이라고 보는 것은 별 설득력이 없습니다.
다음 문장들은 대체로 송서, 양서 등 다른 사서에 있는 문장을 그대로 옮겨온 것입니다. 송서에도 이미 백제가 요서, 진평군을 두었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문장들은 크게 주목할 것은 못됩니다.
다만 황칠수란 나무에 대해서는 아마도 통전에서만 언급된 듯합니다. 다른 25사 백제전에서는 찾기 힘든 귀한 자료입니다.
2) 두번째 문단은 대체로 주서와 북사 등에서 그 원문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리 특별한 내용이 없습니다. 약간 문장이 끊어지고, 조금씩 표현을 달리한 정도로 대체로 평이합니다.
3) 문제는 바로 세번째 문단입니다. 그 첫머리에 나오는 "북위 효문제(471-499)가 무리를 보내 정복하여 깨뜨렸다." 문장과 마지막에 나오는 "그 옛 땅은 신라에게 편입되었으며, 성과 주변의 남은 무리들은 후에 점점 적어지고 약해졌으며, 흩어져서 돌궐 및 말갈에 투항을 했다. 백제의 주인인 부여숭은 마침내 옛 나라로 돌아가지 못했으며, 토지는 신라, 말갈에 모두 흡수되고 말았으므로, 부여씨 왕가는 마침내 끝어지고 말았다." 는 문장이 통전 백제전을 읽을 때 항상 걸리는 내용입니다.
후위 효문제가 백제를 공격했다는 문장은 흔히 위서 백제전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기록과 비교될만 합니다. 백제는 472년 북위 효문제에게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함께 공격할 것을 제한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북위가 거절함으로써 양국간의 국교는 곧 단절되고 말지요.
따라서 이후로 백제와 북위는 전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남제서 백제전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듯 488, 490년에 백제와 북위간에 전쟁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자, 그런데 이 문장은 전쟁 터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제가 대륙에서 활동했는지 여부를 확정지어 주지 않습니다. 다만, 남제서에 나온 자료를 보완해주는 아주 중요한 자료임에는 분명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백제 멸망의 문제입니다. 백제가 멸망한 후 그 유민들이 돌궐과 말갈에게 투항했다는 것과, 백제 땅이 말갈과 신라에게 넘어갔다는 표현은 기존의 통설을 깨는 문장입니다.
돌궐이 당시 한반도까지 오지 않았음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고, 말갈도 당나라인이 본 말갈은 한반도의 동해안에 있던 말갈이 아니라, 만주에 있었던 말갈입니다.
그렇다면 백제가 멸망한 660년 당시에 백제가 대륙에 영토를 갖고 있어야만, 그곳에 사는 백제유민이 돌궐로 갈 수도 있고, 그 땅이 말갈의 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두우는 당나라 시대에 살던 사람이며, 구당서와 신당서 보다 먼저 통전을 집필했습니다. 그런만큼 통전이 정통 25사에 비해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는 책이라고 하더라도, 분명 당나라 시대에는 백제인을 대륙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보는 사료가 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미 재야사학자였던 문정창, 임승국 님등은 통전을 활용하여 백제가 멸망할 때에 대륙에 영토가 있었음을 말한 바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아직 학계에서는 정식으로 이 문제가 거론된 바가 없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미스테리라는 것이지요.
대륙에 백제,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요. 가장 유력한 지역으로는 산동성 동부와 강서성 일대, 그리고 구체적으로 지명까지 언급된 유성에서 북평 사이의 중국 동해안 지역일 것입니다. 특히 백제 멸망시에 만약 그 유민들이 돌궐로 갔다면, 그때 백제의 대륙 거점은 유성과 북평 사이쪽이 가장 유력하겠지요.
하지만, 왜 중국사서에서 이런 기록들이 대부분 사라졌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성급하게 통전의 자료를 놓고 대륙백제에 대해서 있다 없다는 말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통전의 자료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당시 정황 증거를 먼저 수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지금 백제사를 쉽게 못 건드리고 있는 이유는 바로 대륙백제에 대해서 아직까지 확신을 가질만한 구체적인 정보들을 충실하게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은 그저 대륙백제에 관한 자료가 통전에도 있구나는 정도만 이해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대륙백제가 있다면 언제부터 언제까지, 그리고 그 지역은 어디이고, 그시대의 유물은 무엇이고, 대륙백제를 통해 백제는 어떤 역할을 했으며, 문화사는 어떻게 변했는지, 백제의 정치조직은 어떤 이중 구조를 가졌는지, 왜 백제는 한반도의 백제만 전해지는지, 왜 두개의 백제에 대한 사료가 전해지는지 등 종합적인 고찰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대륙백제설은 쉽게 학계의 공인을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섣불리 우리가 대륙백제설을 강하게 주장하면 중국에서 대륙백제에 대한 자료들을 더 감출 수도 있는 만큼 신중하게 하나 하나 자료를 모으고, 대륙백제의 성격에 대해서 차분하게 검토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