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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1일, 밤 11시 30분 이마바리를 출발했다.
이마바리에서의 긴(!) 하루를 보낸 터라 출발부터 피곤함이 느껴졌지만,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야간에 강한 조류가 흐르는 쿠루시마해협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엔진에 정말로 문제가 생긴다면...
수온알람이 켜진 상태에서, 확신이 없는 상황이라 엔진을 2000 알피엠 정도로 유지했다.
순류의 도움으로 6노트 정도가 나왔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이 흘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수시로 엔진룸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다행히, 엔진은 이상이 없다.
도박이 성공한 것 같다. ^^
배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잔잔한 내해를 부드럽게 헤치고 달려갔다.
한국에서, 자전거를 전철 앞 주차장에 세워놓고 일을 보고 돌아올때면 언제나
'혹시 내 자전거가 없어진건 아닐까...' 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곤 한다.
실제로 전철 주차장에서 자전거를 두어 대 잃어버린 경험이 있으니 완전히 근거없는 강박은 아니다.
요트에 있어서 내가 갖고 있는 강박관념은...
1. 엔진이 넓은 바다에서 멈춰버리는 것
2. 마스트가 강한 바람에 넘어져 버리는 것
3. 빌지가 넘쳐 선실이 침수 되는 것 등 이다.
그리 길지 않은 세일링 경험이지만 세가지 모두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적이 있으니
이 또한 근거없는 강박은 아니다.
평온하던 일본내해에서의 항해가 나의 이 강박관념 때문에 갑자기 고단해 졌다.
순조로운 야간항해를 마치고 이와이시마를 지난 시간이 오전 11시 경,
목적지인 신모지 마리나까지는 약 48마일 정도 남은 상태, 6노트 내외로 달리면 8시간...
잘하면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섬 사이를 다닐 때는 느끼지 못하던 강한 바람이 탁트인 관문해협(시모노세키)쪽 방향에서 불어왔다.
정면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파도를 맞으며 일단 최단거리로 방향을 잡고 달려 나갔다.
조파저항 때문에 3노트도 나오지 않는다. 파도를 넘을 때 마다 둔중한 충격음이 들려온다.
바람은 15~20노트, 파도도 1미터가 채 되지 않아 보였지만 웬지 모르게 매서운 놈들이었다.
이런 상태로 신모지까지 가는 것은 무리다. 같은 방향 17마일 지점에 있는 히메시마로 목적지를 변경했다.
제노아를 줄여서 홀리고 크로스 홀드로 전환했다.
속도는 4노트 이상이 나왔지만, 지그재그로 전진하는 상태인지라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정면으로 달릴 때 보다는 나았지만 파도를 타고 넘을때마다 배는 출렁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조급한 마음에 전자해도가 깔려있는 노트북을 컴패니언웨이(콕핏->선실로 내려가는 입구)에 올려놓고 항적을 계속 확인했다.
아뿔싸! 큰 파도를 한 방 제대로 얻어 맞았다.
노트북과 스마트폰이 바로 먹통이 되었다. 컥~
갑자기 비관적인 생각이 머리를 가득채우기 시작했다.
'이 고생을 해서 어느 세월에 히메시마에 도착하나..
10마일 더 간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이와이시마로 돌아가(뒷바람이라 가는 길은 빠르고 편안할 것이다) 피항을 하자'
배를 돌렸다. 7~8마일만 더 가면 히메시마에 갈 수 있었는데..
예상했던 대로 이와이시마로 돌아가는 길은 편안했다. 뒷파도와 뒷바람을 타고 1시간도 안 결려 이와이시마에 다달았다.
바람 뒤편에 있는 섬의 동쪽 포구를 찾아 갔다.
섬에 막혀 바람이 잦아들 것을 기대했지만, 웬걸 바람이 더 강했다.
바람이 도토리처럼 생긴 섬의 양 사이드를 돌아 더 강하게 합쳐지는 것 같다. 젠장~
때마침 저조시간인데다 포구의 수심이 전자해도에 정확히 나와있지 않다.
수심계도 없이 알수 없는 포구에 진입하는 건... 정말 도박이다.
강한 바람 때문에 혹시라도 문제가 생겼을때 재빨리 배를 돌려 나오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다시, 배를 돌렸다. 히메시마로 가야한다.
패잔병이 된 기분이었다.
나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갈팡질팡, 시간만 낭비하고 고생은 고생대로 했다.
섬 뒤쪽은 바람이 약할거라는 섣부른 생각과 엔진에 무리가 갈까봐(엔진에 대한 평소의 강박관념 때문에!)
알피엠을 올리지 못하고 삐질삐질 파도에 밀리면서 전진을 포기한 것...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상태로 어기적 어기적 히메시마에 입항한 것이 밤 8시 경.
4~5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를 9시간에 걸려 도착했다.
P.S. 엔진 수온알람은...?
나중에 저절로 사라졌다.
알피엠 게이지와 유량계도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아무래도 전기적인 접촉 불량이었던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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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강한 바람, 높은 파도는 아니었지만... 역시 정면으로 달리는 것은 힘들다.
크로스 홀드로 달릴때는 인내심이 필요한 것 같다.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요기에 전자해도를 올려놓을 필요는 없었다.
다만, 조급증이 문제였다. 파도 한 방을 맞고 노트북와 스마트폰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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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메시마(姬島, 공주 섬)는 이름때문인지... 여성들이 웬지 기운차게 느껴졌다.
배를 정박하려 밤에 접근하는데, 산책 중이던 아주머니들이 먼저 다가와 이것저것 안전한 계류를 위해 조언을 해 주었다.
정박 후 찾아간 주점 겸 식당에서도 주인 아주머니(마담?)가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이것저것 최대한 많이 주문하게 만드는 솜씨가 일품, 기분나쁘지 않게 돈을 많이 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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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메시마의 진짜 공주, 야옹이~
아침에 배 옆에 다가와 애처로운 소리로 "야옹~' 거리길래 깡통을 몇 개 까 주었더니 날름날름 잘도 받아 먹는다.
배가 홀쭉 한 것이 꽤 굶었던 것 같다.
배를 채우고 나더니 공주님 모드로 돌변, 언제 그랬냐는듯 아는 채도 안 한다. ... 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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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봤습니다. 보통이들은 그냥 지나치고 마는데 조그만 일들도 재밋게 표현해내는 작가의 자질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재미없어도 좋으니 무난한 항해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ㅋㅋ
노트북하고 스마트폰은 다시 살아 났나요.
해도없이 어떻게 항해하셨는지요?
노트북은 결국 완전히 다이 했고요.. 스마트폰은 A/S로 살아났어요 ^^
이휘윤크루님의 백업 노트북을 이용했습니다.
장거리 항해에서는 전자해도의 경우, 백업의 백업의 백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
한번 사고가 나니 두 세 개가 거의 동시에 문제를 일으키곤 하더군요
1m의 파도에도 무리하지않는 항해는 각종 트러블을 방지하는 최선책이니 엄선장님답게 항해했군요. 글도 재미있네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제가 보기에는 저의 "소심증" 인 것 같습니다 ㅋㅋ
3가지 강박 관념 중 저역시 두가지는 겪어서 무슨 마음이셨을지 제게 그대로 전달 되네요.
글 잘봤습니다.
중고요트를 사가지고 끌고오는 경우에는 특히, 배의 상태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평소의 강박이 더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평소에 자기 배에 대한 확신이 갈 수 있도록 정비하고 관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엄청 재민네요!!! 나중에 책자로 출판하시면 분명히 베스트셀러가 되리라 믿습니다^^
엄청... 씩이나요.. ㅋㅋ
아마추어라 좌충우돌 에피소드가 많아서 그런거 같습니다.
다음에는 여행안내서처럼 정보는 가득하지만 무미건조한 항해기를 쓰고 싶습니다. ^^;
좋은 세일링 경험담, 실감납니다. 글로 표현하는거 보통 일이 아닙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