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턱 막히는 폭염엔 입맛도 싹 달아난다. 이럴 때 뼛속까지 시원하고 맛있는 강원도 국수여행을 떠나는 건 어떨까? 강원도의 DMZ 접점 지역에는 평양냉면, 회냉면, 막국수, 초계국수 등 대를 이어 맛으로 승부하는 국수명가가 수두룩하다. 새콤달콤한 명태회냉면에서 담백한 순메밀 막국수, 여름보양식인 초계탕과 먹을수록 중독되는 인생막국수까지 무더위에 지친 몸을 달래줄 DMZ 누들로드를 떠나보자.
가슴까지 얼얼한 냉국수열전
귀하디 귀한 100% 순메밀국수의 매력
땅과 날씨가 척박했던 강원도 산골에는 양식이 귀했다. 메밀은 건조한 땅과 서늘한 기후에서도 잘 자라는 덕분에 평안도와 강원도 산간지방에서 많이 길렀고, 겨울을 나는 귀한 양식이었다. 대동강이 꽁꽁 어는 한겨울이면 평안도 사람들은 뜨끈한 아랫목에서 동치미국물에 메밀국수를 말아 먹으며 겨울을 났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의 평양냉면이다.
Since 1955년 간판이 눈에 띈다
백프로 순메밀국수의 뽀얀 자태와 시원한 동치미국물이 합체하는 순간
강원도 막국수는 평양냉면과 맥이 같다. 강원도 사람들은 막국수, 냉면이라는 이름이 여전히 어색하다. 그냥 ‘국수’였다. 밀가루가 귀하던 강원도 산골에는 메밀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는데, 마을 행사 때 빠지지 않던 음식이다. 국수분틀이라고 규모 있는 집이나 마을마다 국수 뽑는 나무틀이 있었다. 잔칫날 국수를 뽑으면 집집마다 동치미 국물을 가져와 국수를 말아 먹었다.
비빔국수와 궁합이 좋은 촉촉한 수육
겉바속촉 감자전도 최고
평양식 순메밀국수를 맛볼 수 있는 65년 된 집이 있다. 남북면옥은 1955년에 개업해 오랜 세월 인제 대표 맛집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이 집 메뉴는 단 하나, 평양식 순메밀국수뿐이다. 메밀은 점도가 약해서 가루로 만들고 다시 국수로 뽑기까지 여간 힘든 게 아니지만, 여전히 그때 방식 그 맛 그대로 손님상에 낸다. 반죽부터 국수를 뽑고 삶는 일은 오직 사장님만 한다. 뽀얀 국수 그리고 그 위에는 무채와 오이채 몇 가닥이 전부다. 흔한 김가루 조차 없다. 국수의 맛을 헤치지 않는 심플한 고명이다. 새콤한 동치미국물과 슴슴하고도 담백한 국수의 조합이 기가 막힌다. 평양냉면이 그리운 날, 저절로 떠오르는 국수다.
65년 내공이 담긴 남북면옥 한상차림
먹을수록 오묘한 막국수의 세계
강원도하면 막국수다. 막국수 맛이 다 비슷해 보이지만 지역마다 가게마다 스타일이 다르다. 춘천을 비롯해 대관령을 기준으로 강원도 내륙은 희고 고운 속메밀을 쓰는 영서식이고, 영동식은 겉메밀을 섞어서 면이 거칠다. 크게 차가운 동치미 국물이나 담백한 고기 육수에 면을 말아먹는 ‘물 막국수’와 양념장에 비벼 즐기는 ‘비빔 막국수’로 나뉜다. 비벼 먹든지 말아 먹든지 강원도 구석구석에는 담백하고 오묘한 막국수집이 많다.
양구 사람들이 앞 다투어 추천하는 국수명가
이집만의 별미 민들레전까지 차려진 한상
DMZ 지역 양구에서 군생활 한 사람들이 앞 다투어 추천하는 막국수 명가가 있다. 1992년에 오픈한 광치막국수다. 돌돌 말아 올려진 야무진 면의 자태. 그 위로 맛깔난 양념과 김이 안착했다. 비빔국수 물국수가 따로 없다. 육수를 얼마나 붓느냐에 따라 비빔국수가 되고, 물국수가 된다. 이 집 단골들은 일단 육수를 조금 부어서 비빔으로 먹다가 국수가 반쯤 남았을 때, 육수를 더 부어 물국수로 마무리한다. 각종 과일, 생강, 대파 등 15가지 재료를 더해 푹 우려낸 사골육수에 동치미국물을 잘 배합해 만든 육수가 깔끔하면서 먹을수록 오묘한 맛을 낸다. 무김치에 올려 먹는 편육과 민들레전은 이 집만의 별미다.
야무지게 말아올린 국수의 포스
강원도 감자 맛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백석시인이 좋아한 함흥냉면의 진수를 맛보다
“나는 정말이지 그대도 잘 아는 함경도 함흥 만세교 다리 밑에 님이 오는 털게 맛에 헤가우손이를 치고 사는 사람입네. 하기야도 내가 친하기로야 가재미가 빠질겝네. 회국수에 들어 일미이고 식혜에 들어 절미지.” 1938년 6월 7일자 『동아일보』에 발표한 백석의 「동해」라는 산문에는 가자미를 넣은 함흥냉면을 묘사하고 있다.
오미냉면 앞 아야진해변
함경도에서 많이 먹는 회국수는 함흥냉면의 원조다. 함경도 사람들은 백석처럼 가자미나 홍어, 명태를 양념에 버무려 국수에 얹어 먹는 것을 즐겼다 한다. 속초와 고성에는 명태를 고명으로 얹은 함흥냉면집이 많다. 고향과 가까운 이곳에 함경도 실향민들이 많이 정착했기 때문이다.
3대고집이 담긴 회냉면 한그릇
고성에 아야진이라는 작은 해변 앞에 오리지널 함흥냉면집이 있다. 45년 전통의 3대가 운영하는 유서 깊은 맛집이다. 맛있게 먹는 법이 벽에 붙어 있다. 양념장 한 스푼, 설탕 한 스푼, 식초와 겨자를 조금 넣고, 주전자에 담긴 시원한 육수를 면 중간 정도 붓는다. 이제 잘 비벼서 먹으면 된다. 매콤달콤하고 고소한 명태회와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면발이 입에 착착 감긴다. 오미냉면의 인기 비결은 명태회다. 오로지 생태만 쓴다. 말린 명태의 퍽퍽한 식감과는 달리 촉촉하고 부드럽고 고소하다. 마지막으로 뜨거운 육수를 한잔 마시면 속이 편안하다.
생태살로 만드는 명태회가 맛의 비결, 수육과도 찰떡궁합
뼛속까지 시원한 이북 여름보양식, 초계탕에 반하다
우리나라는 뜨거운 닭요리가 여름보양식이다. 복날이면 한 그릇 싹 비우고 땀 쫙 빼는 삼계탕을 최고로 친다. 북한에서는 시원하게 먹는 초계탕이 여름 보양식 중 하나다. 닭육수를 차게 식혀 식초와 겨자로 간을 한 다음, 푹 익혀 잘게 찢은 살코기와 채소를 넣어 먹는 것이 초계탕이다.
시원하게 먹는 북한식 보양요리, 초계탕
쫄깃한 닭고기와 차가운 육수가 더위를 날려준다
경기도와 강원도에 북한 초계탕을 잘하는 집이 몇 곳 있다. 살얼음 동동 뜬 차가운 닭육수에 쫄깃한 닭고기와 동치미김치, 오이, 적양배추가 푸짐하게 나온다.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식초의 새콤한 맛과 겨자의 톡쏘는 맛이 언제 입맛을 잃어버렸냐는 듯 젓가락이 멈추질 않는다. 닭고기와 채소를 건져 먹다가 담백한 막국수를 말면 또 다른 맛이다. 마지막 남은 국물까지 싹 비우고 나면 가슴속까지 짜릿하게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