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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선지자란/ 새 언약의 일꾼(정바울)
[고후3: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세례 요한이 등장함으로부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곧 메시아가 나타나신 이 시대가 신약 시대입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이 거룩한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구원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내려주셨지만,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은혜와 진리를 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의 시대에 사는 게 아니고 은혜와 진리의 시대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의 일꾼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냐?
첫째는 긍휼하심을 입은 자입니다. 긍휼하심을 입은 자는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이 새 언약의 일꾼들에게 나타나는 첫째 특징은 낙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 사도바울은 우겨싸움을 당하여도 우리가 넘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고난을 당할지라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새언약의 일꾼은 절대로 낙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3장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각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마지막에 하시는 말씀은 이기는 자에게는 이러이러한 상급을 주신다 하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로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마귀와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 되자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2절에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마다 숨은 부끄러운 일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드러난 죄가 있고 드러나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 또 남들이 아는 죄가 있고 남들이 모르는 죄, 곧 나만 혼자 알고 있는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거는 남들이 아는 죄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숨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건 나 스스로가 압니다. 그래서 이건 내 양심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양심의 찔림을 받고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 하나님 앞에 이것을 내놓고 철저히 회개함으로 숨어있는 부끄러움의 일들을 다 처리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용서하였다고 선포해 주시면 내 속에서 이 숨은 부끄러움의 일, 이걸로 인해서 괴로워하고 양심의 찔림을 받던 것들이 다 해결을 받고 마음이 밝아지게 되고 누가 뭐라고 할지라도 내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이렇게 해서 주님이 다 용서하셨다 하나님이 용서하셨다고 하는데 누가 나를 정죄하겠느냐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당당하게 삽니다. 물론 부끄럽고 그런 죄를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들이 죄를 찔러서 나에게 책망하면 우리는 이미 회개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죄송합니다 하고 다시 사과할 수 있고 겸손하게 나를 책망할 수 있기는 해야 되지만 이미 용서를 받고 나면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양심에 찔려서 무슨 일을 하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회피하고 도망가게 되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합니다. 넷째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합니다. 말씀이 혼잡하다고 하는 거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 있어야 하는데 여기다가 다른 것들을 섞어서 뒤죽박죽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혼잡한 겁니다. 그래서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3~4절에 보면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위한 스승들을 많이 두고 자기 귀를 진리로부터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섯째로는 오직 진리를 나타내므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정말 사모해야 할 것이 진리입니다. 마지막 시대에 이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에서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전함으로 너희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얼마나 끔찍한 말씀입니까?
그러면 새 언약이란 무엇인가? 예레미야 31장 31절, 그리고 에스겔 38장에도 나오는데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게 신약성경에서는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 8장에 8~10절에 보면 우리에게 새언약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설명해 주십니다. 새 언약은 두 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내시고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이런 역사가 첫째 기둥입니다.
둘째 기둥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께 올라가셨다가 거기로부터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셔가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강하게 만드시고 그래서 마귀와 싸워서 이기게 만드시고 참과 거짓을 분별해 낼 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지혜롭게 전파할 수 있게 하시고 이 놀라우신 구원의 새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데 이 새언약이 두 개의 기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기둥이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것을 정말 우리가 마음에 깊이 새기고 이 두 기둥을 깊이 연구하고 깨달아서 우리가 항상 이 두 기둥을 세워나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두 기둥의 첫째는 사도의 자격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물러났기 때문에 열한 제자만 남았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시기 전에 먼저 결원이 된 가룟유다 자리에 다른 사도를 채우자 그래서 열두 제자가 채워져야 되겠다 그래서 맛디아라고 하는 사람을 채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새롭게 채워져야 되는 이 사도의 기본적인 자격이 무엇이냐?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성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때까지는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 그런 가운데도 낙심하여 떨어져 나가지 아니하고 여기에 모여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간구하는 사람이 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기를 시작하실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와 항상 같이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채우자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의 자격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파할 사람이라야 하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조금 더 자세히 얘기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첫째는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그 기둥이 세워져 있어야 되고 또 하나는 부활의 증인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두 개의 기둥이 제자의 기본적인 자격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울의 전도의 주제인 것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그다음 4절에 가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에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였다. 그러니까 여기에도 두 기둥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또 하나는 성령, 그래서 우리 설교에 항상 이 두 기둥이 있어야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에도 항상 이 두 기둥이 있어야 합니다. 또 성도들을 향해서 베드로가 축원한 것이 바로 이렇게 나타납니다. 베드로전서 1장 첫머리에 보면 곧 하나님 아버지의 곧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므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많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이런 모든 놀라운 요소들이 다 들어있지 않습니까?
넷째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바른 예배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을 때에 말씀하셨어요.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예배는 첫째,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려야 된다. 둘째, 진리로 하는 예배를 해야 한다. 진리는 십자가의 도가 진리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르게 깨우쳐 주고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회개하고 새 사람으로 변화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보면 구원에 두 개의 요소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절에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에게는 성령에 나타남과 십자가의 도가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서도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한다.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났습니다. 인간에게는 의가 없어요. 인간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서 거기서 흘리신 보혈로 내 죄를 씻고 양심을 씻어서 새롭게 변화받을 때에 그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입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린도후서 4장 1절부터 나오는 이 말씀, 새 언약의 사람이란 어떻게 사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깊이 마음에 새기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에 공격하면서 사는 사람,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이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믿음에 서서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일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이 놀라운 은혜가 더욱 충만하게 임하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2. 산 위와 산 아래
[막9:20-29]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산 위에서 일어나는 일과 산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서 우리가 어디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새롭게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산 위에는 무엇이 있었느냐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산 아래에 계실 때 평범한 우리 사람들처럼 보이셨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원래 목수 출신이었습니다.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나셔서 별 볼일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변화산 위에 올라가시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변형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입고 있던 옷까지도 변했습니다. 세상 사람 누구도 희게 할 수 없는 아주 흰 옷으로 변했고 예수님의 형체도 예수님의 몸도 완전히 변화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가운데 모세와 엘리아가 나타났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앞에 나타나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제자들이 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이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된다고 하는 엄청난 비밀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이 산 위에는 한마디로 신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처음에 사역을 시작하실 때 귀신을 쫓아내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려내시는 이런 역사를 일으키시면서 복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전파되는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의 출발은 바로 이 신비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변화산 위에 어떤 신비가 나타났느냐?
첫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가, 우리가 알던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그냥 평범한 사람보다는 조금 뛰어나신 분 놀라우신 분으로 믿으면서 따라다녔는데 이분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이시구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다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예수님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신비로우신 분이다. 하나님은 오묘하신 분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깨닫게 해주세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비밀이 뭔지를 모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무스테리온, 영어로 하면 미스터리 또는 시크릿입니다. 우리말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하나님의 신비다 이것이 언제 깨달아지게 하느냐 언제 나타나 주셨느냐? 이것이 변화산 위에서 나타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화산 위에 올라가는 이런 신앙을 가질 때에 드디어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겁니다.
둘째로는 어떤 신비냐?
거기에 모세와 엘리아가 나타났어요. 모세와 엘리야가 대관절 누구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어요. 그래서 구약을 크게 나눠서 두 개로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하려고 왔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데 이 두 분을 완성시킨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셋째로는 또 무엇이 있었느냐? 산 위에서는 두 세 분이 모여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너무너무 신비로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장차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을 얘기했어요. 뿐만 아니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또 얘기했어요. 십자가와 부활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십자가와 부활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말로 말해서 진리라 하는 거죠.
그러면 반대로 산 아래에는 무엇이 없느냐? 이 세 가지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지 못해요. 이 지식이 없어요. 그래서 성경도 풀리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도 전혀 풀리지가 않는 거예요. 그냥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경이 없습니다. 율법과 선지서가 없어요.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들이 싸구려 복음을 가르쳐요. 율법 안 지켜도 된다. 예수만 믿으면 된다. 듣기는 좋은데 그거는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우리가 이 산 위에 올라가는 신앙 생활을 하지 않으면 교회는 다니지만 성경이 없는 신자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셋째로 이 땅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진리잖아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는구나 그러니까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는 없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고 하는 이 표적을 갖지 못하면 인간에게는 진리가 없는 거예요. 표적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 살아계시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신다는 걸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계신다는 거를 모르는 겁니다. 이 다음 세상에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전부 모르고 사는 거예요.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답답하게 살아야 합니까? 그래서 세상이 가는 방향과는 우리는 반대로 살아야 돼요. 그거 따라가면 멸망이고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더욱 성경 말씀을 사랑하고 이 말씀을 열심히 읽고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고, 하나님 이 말씀 깨닫게 해 주세요.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세상 사람들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을 가면 부활이 있고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부활이 없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신 길이잖아요. 그래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정말 부활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생명의 부활을 받기를 원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를 달게 지고 주인과 함께 고난을 받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 믿음이 작은 연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너희가 기도하지 아니하면 이런 유가 나갈 수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21절이 있는데 거기에는 금식과 기도가 아니면 이런 류가 나갈 수가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능력 받아서 산 위의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다.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에 속해서 세상 사람들 따라가지 말고 하늘에 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늘 체험하면서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야 되겠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길 축원합니다.
23.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
[사 40: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선지자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다, 선지자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듣고 사는 사람은 마음에 평안이 있고 행복이 있고 감사가 있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더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고 성장해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천국을 알려주는 소식이고 우리의 구원을 가르쳐주는 소식이고 죄악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이겨나갈 수 있느냐 하는 소식입니다. 이것을 신약에 오면 복된 소식이라고 해서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란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아름다우신 분이 보내주신 선지자들, 아름다우신 그분을 전파하는 선지자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다 이렇게 말씀을 하는 거죠. 아름다우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란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누구냐?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기 때문에 항상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고,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살아가고, 세상에서 부정적으로 살지 아니하고 긍정적으로 살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아름답지 못하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행복하지 못하면서 남들에게 행복을 전할 수 없습니다. 가르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한다고 하는 말이 얼마나 복된 말씀인가 하는 거를 마음으로 깊이 깨닫고 다 아름다운 소식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천사가 와서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천하노라”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그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에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복음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은 요약하면 무엇이냐? 그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이에요. 전능하신 하나님, 아름다우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영광스러우신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것이 아름다운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잘난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아름다운 게 아니고 이 세상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주여 늘 나와 함께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나와 동행하시고 나의 발걸음을 복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하나님께 소원을 올리며 주님과 동행하는 그런 사람이 될 때에 우리가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고 이런 사람이 되어야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을 보면 누구에게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느냐 하는 그 전도의 대상을 세 가지로 설명을 했어요. 아름다운 소식을 첫째는 시온에 전하는 자요. 둘째는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셋째로 이 아름다운 소식을 유다의 성읍들에게 전하는 자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름다운 소식을 누구에게 전할 것이냐 첫째는 시온에 전해야 된다. 그다음에는 예루살렘에 전해야 한다. 또 한걸음 더 나가서 유다의 성읍들에 전해야 한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지나가시게 됐을 때 야곱의 우물가에 가서 잠깐 쉬셨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우물에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죠. 그래서 예수님과 이렇게 대화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말씀하셨다가 그다음에는 “내가 너에게 생수를 줄 것이다”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이 여자가 깜짝 놀라서 “이제 보니 선지자시군요. 선지자시라면 내가 한마디 꼭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평소부터 궁금했던 게 하나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니까 이 여자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당신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관절 어느 것이 옳은 겁니까?” 이렇게 묻잖아요. 아마 유대인 같았으면 당연히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된다 이렇게 강조했을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죠.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 이렇게 예배에 있어서 가장 큰 원칙을 여자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 이것은 장소가 문제가 아니고요.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로 예배를 드리느냐, 이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라 말씀을 하셨는데 이 여자가 그 말씀을 듣고 얼마나 큰 감명을 받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근본적인 자세에 대해서 다시금 새롭게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누구에게 전할 것이냐 시온이다, 예루살렘이다 유다의 성읍들이다 이 세 가지로 나오는데 이것의 공통점이라고 하면 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소식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해라 하는 거예요.
본문 말씀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세 가지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첫째가 이겁니다. “너는 높은 산에 올라가라” 말씀하시죠. 그다음에 둘째는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여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첫째 높은 산에 올라가야 되고 둘째 힘써서 소리를 높여야 된다고 그랬고요. 셋째로는 아름다운 소식을 이번에는 “유다의 성읍들에 전하는 자여” 이 사람들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가서 전하는데 무얼 전하느냐 “너희 하나님을 보아라” 이렇게 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가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다시금 첫째로 돌아가서 봅니다. 첫째 너는 높은 산에 올라가라. 그 말은 첫째로는 지식의 높은 산에 올라가라,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모든 분야에 자기 전공을 하는 데 공부를 많이 해야 됩니다. 과학 기술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발전시키는 거죠. 농사를 짓는 것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새로운 품종도 만들어내고 곡식의 여러 가지 성격을 잘 알아야죠. 여러 가지 물건 만드는 것들도 전문가들이 되어야 좋은 물건을 만들어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문가가 된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첫째로 높은 산에 올라가라. 첫째, 지식의 높은 산에 올라가라 그 말이죠. 둘째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돼요. 그래서 인격의 높은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인격이 비루하면 안 됩니다. 인격이 잘못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남들에게 지탄받는 사람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도덕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게 아주 중요한데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거기에서 멈춰버릴 수가 있어요. 그런데 정말 더 중요한 거는 우리가 영적으로 높은 산에 올라가야 되는 거죠. 그래서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깊이 있게 잘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늘 아름다운 교통을 이루어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십시다. 너나 나나 우리가 다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는데, 높은 산에 올라갈 때 혼자 올라가는 것보다는 이왕이면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 열사람 이렇게 같이 힘을 모아가지고 올라갈 때 훨씬 더 힘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먼 길을 갈 때는 좋은 친구와 동행하면 먼 길도 쉽게 갈 수 있다 그렇게 가르칩니다. 두 사람이 모이면 힘이 납니다. 세 사람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진리의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하면서 동행하면 놀라운 새 역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둘째로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는 소리를 높여서 외쳐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죠. 소리를 높여서 외친다. 언제 우리가 소리를 높여서 말할 수 있느냐 첫째는 확신이 있을 때 소리를 높여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확실하게 보고 들은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확신을 가진 사람이라야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본 사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목격한 사람,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돼야 자신 있게 외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너희는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는데 이 증인은 도덕적인 증인이 돼야 돼요. 그래서 뒤에 켕기는 게 없어야 됩니다. 그래야 자신있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목소리를 높여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계시를 받는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거 전해라 하고 주신 말씀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입을 벌려서 예수님이 전하시려는 그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전하는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능력을 받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찔림을 주고 감동을 주고 깨달음을 주고 우리를 새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소리를 높여라. 당당하게 말해라. 자신있게 말해라. 더 나아가서 순교할 각오를 가지고 힘있게 전파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유다의 성읍들에게 뭐라고 전하라고 했습니까? 너희 하나님을 보아라 이렇게 외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세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너희가 나와 함께 이렇게 오래 있었는데 아직도 나를 알지 못하느냐 아직도 나에게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 예수님을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늘 보고 살면서도 아버지를 보지를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빌립 한 사람만 그런 게 아니라 열두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좀 보여주세요 이렇게 말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천국이 있다, 지옥이 있다 얘기하면 하나님을 내가 볼 수 있으면 하나님을 나도 믿겠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하나님을 보여줄 수도 없겠지만 하나님을 보여주면 그 사람은 죽습니다. 하나님을 보고는 살 자가 없다고 하셨으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저 태양도 너무 눈이 부셔가지고 똑바로 보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 태양을 지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감히 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고 말씀했고, 사도 바울은 내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어라 말씀해요. 우리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은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성결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의로운 삶, 불의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멀리 던져버리고 의를 행할 수 있는 거룩함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생활을 보여주게 될 때에 우리 뒤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서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로구나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이로구나 하면서 우리를 따라올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사람의 지혜로 살지 아니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성령의 지혜로 살아가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돼야 하겠고 힘써서 소리를 높여 담대하게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되겠고, 셋째로는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 마지막 때에 정말 신실한 일꾼, 충성된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4. 나귀의 비밀
[마21:1-7]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본문에서 예수님은 수도인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다. 왜 하필이면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을까? 우선 성경에 나타나는 나귀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지만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3가지를 골라본다면 제일 처음 나타나는 것이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모압왕 발락의 초청을 받아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왕을 만나러 가는데 “나귀를 타고 가더라”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귀가 갑자기 길에서 버티고 서는 바람에 발람이 발을 다치고 화가 난 발람이 회초리로 나귀를 3번 때리자 나귀가 갑자기 말을 한다. 나귀가 발람을 향해서 사람의 말로 왜 때렸나고 물었다는 이야기는 신약 성경에서도 설명을 해준다. 말 못하는 짐승이 하나님의 명령을 분순종하고 왕을 만나러 가는 발람을 책망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발람을 책망한 것이 바로 나귀였다는 것이다.
나귀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는 사울이 아직 왕이 되기 전에 암나귀 한 마리를 잃어버려 찾다가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되고 사무엘은 사울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사울은 그냥 나귀 하나 잃어버린 것만 생각했는데 나귀를 잃어버린 것에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 나귀를 통해서 사울을 사무엘에게로 인도하시고 사무엘은 그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삼는 이 놀라운 역사에 하나님은 나귀라고 하는 짐승을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나오는 중요한 이야기가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더라”하는 것입니다. 왜 나귀를 타셨다고 하느냐? 스가랴 9장 9절에서는 메시아는 나귀를 타고 오시는데 “그가 겸손하여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겸손하심만을 나타낸 것이지, 왜 나귀를 타고 오셨는지 자세한 설명은 안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귀의 특징이 무엇이고, 또 어떤 상징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나귀는 다른 짐승들에 비해서 특별히 큰 귀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건 무얼 상징할까 귀가 크다고 하는 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라는 거죠. 하나님은 나귀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라” 하고 교훈을 주십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께서 “거룩한 것은 개에게 주지 말며 또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개는 무엇이고, 돼지는 무엇입니까? 또 내가 너희를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거기서 양은 우엇입니까? 양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 전도하려 내보내는 열두 제자 또는 70명의 제자들을 말하고 있고 이리는 바깥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제자들을 핍박하는 무리를 향해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헤롯 왕에 대해서는 저 여우에게 가서 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내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나의 갈 길을 가다가 제3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이렇게 가서 전하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근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이렇게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짐승에 대한 비유가 다 우리 인간들을 가리켜서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기에 나귀라고 하는 것도 다 우리 사람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거예요.
그래서 나귀라고 하는 놈은 대관절 무엇을 상징하느냐? 하나님의 원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라 하시는 건데 인간들은 귀를 가지고 사람들 소리에만 신경쓰고 집중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시간도 없고, 그럴 마음의 여유조차도 없는 가련한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예수님 잘 믿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의 귀를 하나님의 음성에 기울여서 하나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던 사람들이고,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못듣고 마귀의 속닥거리는 소리만 듣고 또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내가 어느 편에 서야 유익하겠나하고 눈치를 봐서 인간들 편에 서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결국 거짓 선지자가 되고 멸망의 길로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귀가 크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으라고 주신 것인데 이것을 잘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음성 듣는 일에 더욱더욱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나귀란 놈은 아주 고집이 쎈 놈으로 나타나요. 출애굽기 13:13 유월절 규례를 쭉 설명하는데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많은 짐승들 중에서 우리 집에서 키우는 소, 양도 아니고 나귀의 첫 새끼를 대속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깊은 것입니다. 그럼 나귀란 무엇이고, 첫 새끼란 무엇이냐? 그런데 거기서 첫 새끼가 숫컷이든 암컷이든 그런 말은 없고 대속하라는 것입니다. 제사법에도 보면 번제나 속죄제나 전부 숫컷인데 화목제에는 암컷이나 숫컷이나 구별하지 않고 하나님게 바치라고 하시는데 이 첫 새끼를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 하는 말씀도 보면 구별이 없습니다. 그러니 암놈이 되었거나 수놈이 되었거나 처음 낳은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거든 나귀의 목을 꺾어버리래요. 나귀 한 마리 값보다는 양 한 마리가 더 싼 거니까, 양을 죽여서래도 나귀를 살려야죠. 이것이 출애굽기 13장에 모세에게 주신 명령인데 십계명이 오기도 전부터 벌써 유월절 유례를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양 한 마리 죽여서 나귀를 대속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근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목을 꺾어라 하는 것은 고집이죠. 고집을 꺾어 놔라. 광야의 백성들이 다 이 고집 때문에 망했습니다. 이것을 강팍하다, 완악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다 멸망 당했어요. 그러니까 백성들의 고집을 다 꺾어 놓을 수 없는 거니까 상징적으로 고집을 꺾는 것입니다.
셋째 특징은 이 놈은 고집이 쎌 뿐만 아니라 정욕도 아주 굉장히 쎈 놈입니다. 에스겔 23장 20-21절에 이스라엘 백성을 설명하면서 “그의 하체는 나귀 같고 그의 정수는 말 같은 음란한 간부를 사랑하였도다 네가 젊었을 때에 행음하여 애굽 사람에게 네 가슴과 유방이 어루만져졌던 것을 아직도 생각하도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란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을 나귀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귀는 귀가 큰 놈이고 고집이 센 놈이고 셋째로는 음란한 놈이다. 그래서 대속하라고 하시는 거죠. 이것을 꺾어버려야 하고 죽이고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특징은 체력이 아주 강해서 여러 가지 기후에도 이놈은 잘 견딘다고 하는 거예요. 적응을 빨리하고 잘 견딘다, 이것이 나귀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들입니다.
그러면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겸손하시기 때문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고 대표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용도 목사님의 책을 읽어보니까 거기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나는 한 마리의 나귀다 나는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한 마리의 나귀라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들어가실 때 많은 백성들이 길거리에 나와서 환호하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놓고 또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길에 펴고 예수님을 환영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이 나귀란 놈이 사람들이 다 자기를 보고 환호하는 줄 알고 고개를 뻣뻣하게 쳐들고 우쭐거려가면서 이놈들 잘한다. 나를 이렇게 환영하는구나 이러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거냐 이런 놈은 채찍에 맞아가지고, 헛되게 아주 혼이 나야 될 놈이다. 그래서 이용도 목사님은 자기가 부흥할 때 사람들이 몰려들고 또 환호를 하니까 이것이 내가 잘 나서 이렇게 환영을 받는 줄 알면 내가 큰 착각을 하는 것이다. 자기를 책망하고 자기를 채찍질하는 것이죠.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나를 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환호하는 것이지, 나를 보고 환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나귀에서 내려버리시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다음에는 무거운 짐을 싣고 또 채찍에 맞고 어린 애들한테도 조롱을 당하고,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 나귀의 운명인데 지금 백성들이 나를 보고 환호한다고 해서 내가 잘나서 환호하는 줄로 착각하면 큰일 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예수님을 태우고 이렇게 살아가면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고, 환호 소리를 듣게 되고, 영광을 받게 되지만 예수님 없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나는 한 마리 나귀에 불과합니다. 주님 앞에서 이것을 고백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 나는 보잘 것 없는 한 마리의 나귀일 뿐입니다. 나귀 새끼가 뭐 잘 난 것이 있다고 큰 소리치고, 사람 앞에서 잘난 척 할 것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모습을 볼 때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중요한것입니다. 왜 수많은 짐승들을 다 버려두고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을까? 예수님께서 어린 양 한 마리가 되셔서 내가 너를 대속하기 위해서 너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말씀이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반드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야 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고 나를 보고 좋아하고 우쭐해질 수도 있는 거지만 동시에 깊이 깨달아야 될 것은 내 등에 태우신 예수님이 바로 나를 위한 제물로 나의 죄를 대속하시고 나를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걸 깨닫고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알수 있습니까? 내 등에 싣고 들어갔던 예수님이 바로 나를 위한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에 허다한 짐승들 가운데서 특별히 나귀를 택하셔서 어린 양으로 대속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예수님이 장차 이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므로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이 나귀를 위해서 대속하실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정말 주님 안에서 더욱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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