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치(金先致)는 김득배(金得培)의 동생이다. 〈김선치는〉 낭장(郎將)으로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 유탁(柳濯)이 왜적을 공격하는 데 따라가 직접 수십 명을 죽였으며,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겨 호부낭중(戶部郎中)이 되었다. 〈이후〉 공민왕(恭愍王) 때 도원수(都元帥) 이암(李嵒)이 홍건적(紅巾賊)을 방어하는 데 따라갔다. 〈홍건적이〉 서경(西京)에 이르자 적의 세력이 매우 강성하였는데, 이암이 적에게 군량을 주지 않으려고 김선치를 시켜 창고를 불태우게 하였다. 김선치가 말하기를, “만약 창고를 불태우면 적은 군량이 궁핍해져서 갑작스럽게 〈서경〉 안으로 들어올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암이 노하여 책망하였으나 안우(安祐)가 곁에 있다가 조용히 말하기를, “김선치의 말이 옳습니다.”라 하니, 이암이 따랐다. 적이 평정되자 〈김선치는〉 1등 공신에 책록(策祿)되었으며 벽상(壁上)에 초상을 그리고 땅과 노비를 하사하였으며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선발하였다.
〈김선치가〉 양광도(楊廣道)에 안렴사(按廉使)로 나가게 되자 재상들이 남경(南京)의 궁실을 헐어 백악(白岳)으로 옮겨서 지으려고 하였다. 김선치가 출발하려고 하면서 아뢰기를, “전에 남경의 궁궐을 지을 때 사람들과 가축이 피폐해졌는데, 지금 다시 헐려고 하니 백성들이 원망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놀라 말하기를, “내가 실로 잘 알지 못했구나. 재상들이 스스로 한 것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즉시 명을 내려 허물지 말도록 하였다. 홍건적(紅巾賊)이 서울을 함락하자 〈그가〉 여러 장수들을 따라 수복하였으며, 관직을 여러 차례 옮겨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어 나갔는데, 이때 강도를 옥에 가두었는데 연루된 자가 백여 명으로 오랫동안 판결을 할 수 없었다. 김선치가 처리하자 온전히 살게 된 자가 매우 많았다. 〈김선치는〉 상성군(尙城君)에 책봉되고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아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 승진하였으며,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가 되었다.
우왕 초에 왜적 등경광(藤經光)이 그 무리들을 이끌고 와서 장차 들어가 침략할 것이라 말하고 공갈하며 식량을 요구하였다. 조정에서 순천(順天)과 연기(燕歧) 등에 군사를 나누어 진을 치게 하고 관에서 군량을 지급하였으며, 곧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세우(金世祐)를 보내어 김선치에게 유인하여 죽이라 일렀다. 김선치가 술과 음식을 크게 차려놓고 먹여서 죽이고자 하였으나 모의가 누설되어 등경광이 무리를 이끌고 바다로 나가 떠나버렸는데 겨우 3명만 붙잡아 죽였을 뿐이었다. 김선치가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70명을 참수하였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수졸(戍卒)로 편제되어 유배되었다. 이 전에 왜적이 주군을 침략하면서도 사람과 가축은 죽이지 않았는데 이로부터 왜적이 쳐들어오면 부녀와 어린아이들을 남김없이 도륙하였으며, 전라도와 양광도 해변의 주군(州郡)은 하나같이 모두 텅 비어버렸다. 김선치 때문에 〈그들이〉 격노하였던 것이다.
이후에 〈김선치는〉 낙성군(洛城君)으로 책봉되었으며 추충보절찬화공신(推忠保節贊化功臣)의 칭호를 더하여 하사받았다. 상주(尙州)로 물러나 살았으며 나이 81세에 죽으니 아들은 김추(金錘)·김전(金銓)·김균(金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