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6,33).
Ⅳ.“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2828“저희에게 주소서.”이 말은 자기 아버지께 모든 것을 기대하는 자녀들의 아름다운 신뢰이다.“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5).모든 생물에게“제때에 먹이를”(시편104(103)27)주신다.예수님께서는 이 청원을 드리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실로 이 청원을 드리는 사람은,아버지께서 모든 선을 초월하여 더없이 선한 분이심을 깨달은 사람이기에,우리 아버지게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2829“저희에게 주소서.”라는 청원은 또한 계약의 표현이기도 하다.우리는 아버지의 것이고,아버지는- 우리를 위한-우리의 아버지이시다.그러나 이 ‘우리’(저희)라는 말은 또한 그분을 모든 사람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것이다.그리고 우리는 결핍을 느끼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이루는 연대에서,그들 모두를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드리는 것이다.
2830“저희의 양식.”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아버지께서 삶이 필요한 양식과,물질적이고 영적인‘합당한’모든 재화를 주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우리 아버지의 섭리에 협력하는 이 자녀다운 신뢰를 강조하셨다.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온갖 불안과 걱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신다.그리고 이것이 하느님의 자녀들이 자녀답게 의탁하는 일이다.
2831그러나 양식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이 청원의 또 다른 깊은 의미를 일깨워 준다.세상에 굶주림의 비극이 있다는 것은,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개인적인 처신에서나 인류 가족인 그들과의 연대에서나,자기 형제들에 대한 실질적 책임을 다하라고 호소하는 것이다.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이 청원은 거저 라자로의 비유나 최후의 심판의 비유와 뗄 수 없다.
2832반죽 속의 누룩과 같이,하늘 나라의 새로움은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이 세상을 ‘부풀어 오르게’해야 한다.이는 개인적,사회적,그리고 국제적 관계 안에서 정의를 확립함으로써 드러나야 하며,올바르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없이는 올바른 사회 구조란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2833여기서 말하는‘우리’의 빵은‘여럿’을 위한 ‘하나’인 빵이다.참행복에 언급된 가난은 나눔의 덕이다.이 자발적 가난은 강요가 아니라 사랑으로 물질적 정신적 재물을 공유하고 나누어,가진 사람들이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줄 것을 요구한다.
2834“기도하고 일하여라”(“Ora et labora.”)“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하고,모든 것이 그대들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일하여라.”우리가 일을 하였어도,양식은 여전히 우리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이다.아버지께 양식을 청하고 감사를 드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에서 드리는 식사 전의 기도의 의미이다.
2835이 청원과 이 청원이 부과하는 책임은,사람들이 겪는 또 다른 굶주림에도 해당된다.“사람은 빵으로 살지 않고,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곧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숨결(성령)로 사는 것이다.그리스도인은 모든 노력을 다해“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한다.땅 위에서는“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8,11).그렇기 대문에 이 네 번째 청원의 특별한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생명의 빵,곧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하느님의 말씀과 성찬으로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된다.
정녕 그는 본다.지혜로운 이들의 죽음을,
어리석은 자도 미욱한 자도 함께 사라짐을,
그들의 재산을 남들에게 남겨둔 채로!
(시편49,11)
이 구절은 죽음의 보편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그”는 일반적인 사람 누구나를 가리킨다.그러므로 ‘그가 본다’는 말은‘누구나 다 알고 있다’는 뜻이다.누구나 다 아는 보편적인 지식은‘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이다.죽음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든다.죽음으로 모든 구별이 없어진다.“지혜로운 이들의 죽음”이 언급되는 것은 인생의 진리를 깨친 자들도 죽는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는 뜻을 내포한다.이스라엘의 지혜교사들이 지혜로운 이들이지만,일반적으로는 부유하고 권세 있는 자가 자신을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리석은 자”는 지혜문학에서 의도적으로 주님의 뜻과 계시를 거부하는 자다.그는 지혜롭지 못한 자로 주님을 경외하지 않는다.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재물을 믿고 그것이 많음을 자랑하는 자다(49,7).그러나 그는 그 재산을 죽을 때 가져가지 못하며‘남들에게’주고 만다(루카12,20참조).시인은 재물을 가지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그것을 영원히 자기 것이라 생각하고 의지하는 것이 어리석다고 한다.악인들의 재산은 불가피한 죽음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질 것이다.예수님은“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마태6,25)고 하셨다.“미욱한 자”는 훈계를 싫어하는 사람이다(잠언12,1).그는 자신이 비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어리석은 자도 미욱한자도 모두 불쌍한 자다.그는 자신이 육신 안에 있는 동안 죽기 시작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소 아르노비우스).
시편 49편의 전체적 의미:시편 49편의 시인은 지혜의 스승으로서 스스로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어 제자들에게 자신이 터득한 인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가르쳐 준다.시인은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지혜는 잠언을 경청하고 묵상하는 데에서 얻어진다고 한다.그 잠언은 “사람은 영화 속에 오래가지 못하여 도살되는 짐승과 같다”(13,21절)는 것이다.이 시편의 중심 주제는 죽음,특히 인간적 부와 권세를 지닌 사람의 죽음이다.그러므로 재물만 의지하고 사는 사람도,자기 잘난 맛으로 사는 사람도 모두 모두 죽고 말기 때문에 하느님을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지혜로운 일임을 말하고 있다.시인은 가르침의 핵심은 재물이 인간의 생명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아무리 큰 부자라 해도 생명의 위기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없다.그러므로 인생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재물에만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시인은 어리석은 부자들의 목자는‘죽음’이라고 한다.그 목자가 그들을 저승으로 데리고 간다.따라서 시인은 자신의 운명이,재물을 믿고 자기 자신을 믿는 이들의 운명과는 다르다고 확신한다.시인은 자신의 수수께끼를 풀고,믿음으로 죽음의 권세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다.그는 하느님이 자신을 죽게 버려두시지 않는다는 믿음 속에 산다(16절).이 시편은 우리를 죽음에서 영원히 생명으로 옮겨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일임을 가르쳐 준다.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없다.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은(로마8,35-39)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시편 42-89’에서 발췌)
“영화는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해하는 당대 교회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으며 신부인 로렌죠와 같은 광신자가 끝없이 양산되는 구조로 되어 있어으며, 교회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더 큰 잘못을 거듭하는 교회, 심지어는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 국왕, 그리하여 어두운 감옥에서 고문을 받고 겁탈을 당해 미쳐가는 죄 없는 어린 여자아이를 누구도 돌보지 않고 있었다. 영화는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하고 종교재판소를 폐지하는 모습을,또한 영국이 다시 스페인을 수복하여 종교재판소를 재건하여 과거의 질서를 복원하는 과정을 관찰자인 고야의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자유를 표방하지만 실은 총칼을 든 침략자일 뿐인 나폴레옹와 그를 몰리쳤으나 새로운 질서를 세우지 못하는 영국 사이에서 고야는 인간과 권력을 추종하는 이를 혐오하게 될 뿐이다”(유명화가의 모델이란 이유로... 교회가 한 소녀에게 벌인 짓/ 영화‘고야의 유령’/김성호의 씨네만세625)
지나간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재평가한 영화를 향유하는 것 또한 역사 공부와 아울러 영화보는 재미를 더 할 수 있을 것이다.
모짜르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아마데우스’로 유명한 밀로스 포만 감독의 2008년 작 ‘고야의 유령’을 추천 합니다. 재미있게 보시길!
나이가 드니 안녕이 참 많군요
안녕이란 말이 참 무서워지는군요
가면 갈수록 사랑이 오기보다
이별이 더 많이 걸어오는군요
나이가 드니 뒤를 돌아보는 일이 많군요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을 생각할 때도
뒤를 돌아보면서 앞을 바라보는군요
그대와 나,
우리가 얼마나 많이 왔는지 뒤돌아봐요
많은 강을 건너고 많은 산을 넘었어요
나와 함께 걸으면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게 보기 좋았어요
그때도 그랬듯 난 특별히 해줄 게 없네요
나에겐 그래도 가야 할 길이 남아있어,
생을 건 약속이 하나 있어 앞을 바라봅니다
뒤를 돌아보면서,안녕
(뒤를 돌어보면서/박노해)
행복한 날만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