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중 가장 거룩한 때를 보내는 가톨릭 교회, 그 성주간의 첫날 주님 수난 성지주일 미사를 함께 봉헌하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수난과 고난받으시는 예수님, 그리고 아직 감추어져 있지만 곧 드러날 부활의 영광에 대해 함께 묵상하는 시간을 보내시며 부활 대축일의 기쁨을 기다릴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약식 전례의 경우 – 봉독되지는 못 하였지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특히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저 역시도 저의 탈 것, 저의 애마를 마련하던 때에 대해 잠깐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신자 여러분들은, 제가 크게 운전하시는 모습을 보지 못하셨기에 모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본당 마당에 제 차가 대어져 있긴 합니다. 예전 본당에서 사목할 때, 이 차를 구매할 때 얼마나 고민하고 공부하였는지, 많은 형제님들, 특히 차 사 본 형제님들께서는 많이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고민하여 첫 차를 장만한 뒤 주임신부님께만 말씀드리고 본당 주차장 구석에 주차하고 며칠이 지난 때였습니다. 본당의 사무원 님께서 제가 사무실 앞으로 지나가고 있을 때 조심스럽게 말을 거셨습니다. “신부님, 며칠동안 계속… 저 ‘이상한 차’가 본당에 서 있는데요… 어느 분 차인지 아세요?” … 이상한 차라는 말에 조금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끼며 ‘제 찹니다…’ 라고 해명했던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이상한 차’라는 말에 왜 기분이 이상해졌을까요? 다들 공감하시겠지만 ‘차’ ‘탈 것’은 단순히 이동수단이라는 의미를 넘어 우리 삶 가운데 자리잡아 있습니다. 탈 것은 탄 사람의 지위, 권력, 재력 그러한 것들을 함축해서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로서 자리잡아 있기에 우리는 ‘탈 것’이 우리 자신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네 차 똥차!’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 나빠하고 나 자신이 모욕당한 듯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시대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사회의 모습이었습니다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메시아이심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시는 그 예루살렘 입성의 때에 초라한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시는 때에는 죽음과 고난만이 보이는 십자가에 오르시어 그 길을 나아가셨습니다. ‘네 차 똥차’라고만 들어도 화가 나는 우리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마음으로 그 보잘 것 없고 초라한 당신의 나귀와 십자가에 오르셨을까요?
오늘 제1독서는 고난받는 주님의 종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대목이 저에게 이 질문의 답으로써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분을 위해 수난받는 주님의 종은 결코 수모를 겪지 않으리라는 약속, 예수님께서 매맞으시고 모욕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시는 복음 말씀을 읽으면서도 우리는 이 주님의 종께서 결코 수모를 겪지 않으셨다는 하느님의 약속 역시 분명하게 이루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매맞고 모욕당하고 십자가를 지는 그 고통들은 그분께 ‘수모’가 아니라 그분께서 겸손하게 오르신 십자가를 감내하시기 위해 ‘받아들이셨던’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설명하기 조금 힘들 순 있지만 노력해보자면, 매맞음 모욕, 고통 그러한 것들은 우리의 시각으로는 수모와 치욕의 모습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를 ‘받아들임’으로서 수모가 아닌 당연함으로 이루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교황님께서도 예전에 이 복음 말씀에 대해 글 쓰신 것이 있어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 모든 것을 감내하는 받아들임을 보여주셨고, 그 절정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그분의 울부짖음이었다는, 그러한 묵상이었습니다. 이 울부짖음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내버리는 데서’ 오는 울부짖음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버림받음조차도 감내하는, 절망조차도 기도의 영역으로 가져오시는 바로 그러한 울부짖음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버림받음을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모습은, 예수님을 내버린 제자들, 하느님을 내버리는 우리들의 모습과 완전한 대비를 이룹니다. 겸손하지 않기에 자꾸만 무언가에 오르려는 우리들은, 그렇기에 자꾸만 수모를 겪습니다.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고난 때문에 불행해지고 괴로워집니다. 보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겸손하지 않기에,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우리의 ‘수모’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온전히 받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시련, 십자가의 죽음도 수모가 아니라 온전히 감내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이루시는 방법이 되었으리라 그렇게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는 이제 성주간을 보냅니다. 이 한 주간 우리들은 우리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겸손함과 낮춤을 통해 고난을 받으러 가시는 예수님을 묵상케 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끝에 영원한 생명을 돌려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 한주간의 묵상과 기도가 우리에게 세상이 믿는 이들에게 주려는 고난과 시련을 수모가 아닌 영광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아직도 ‘네 차 똥차’라고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나쁜 보통의 사람일지언정 우리 주님의 모범을 따라 모든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세상이 우리를 상처입히지 않도록, 우리의 생명을 빼앗게 하지 못하도록 나아갑시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