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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원성왕릉(괘릉) 등 신라 왕릉에 있는 무인석(武人石)은 8~9세기경 실크로드를 통해 교류한 페르시아·서역인(소그드인 등)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석상이다. 큰 코, 깊은 눈, 덥수룩한 턱수염, 터번 형태의 모자 등 한국인과 다른 외형을 특징으로 하며, 페르시아 문양(입수쌍조문)과 함께 신라와 서역 간의 활발한 문화·인적 교류를 증명한다.
9C 아랍 기록에 신라를 찬양하는 내용이 있으며,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h)에는 페르시아 왕자가 신라 공주와 결혼하는 이야기가 있어 교류의 실증적 근거다.
이라크는 전쟁 초기에 도화선이었던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 수로를 장악했고, 곧바로 후제스탄(Khuzestan)의 주요 도시 호람샤흐르(Khoramshahr)와 아바단(Abadan)을 점령하는 등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대부분의 서구 군사전문가들은 단기간 내에 이라크의 승리로 전쟁이 끝날 것으로 예견했다. 하지만 이 예견은 완전히 빗나갔다. 호메이니는 이란 국민들을 대규모 민병대로 조직해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전쟁은 장기전에 돌입했다. 이 전쟁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에서 일어난 가장 치열한 전쟁 중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8년간 지속되었고 양국은 (비공식) 1백만 명 이상의 사상자(이라크 30만명, 이란 70만명)가 발생했고 3천억 달러 이상의 전비가 소모됐다.
이라크는 이 전쟁을 ‘카디시야 전쟁(Qadisiya War)’이라고 불렀는데,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다. 637년 이라크의 카디시야에서 제2대 칼리프 우마르의 아랍군대는 페르시아의 사산조(224-651) 군대와의 전투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사산조를 멸망시킨 결정적인 전쟁이었다. 반면에 이란은 이 전쟁을 ‘강요된 전쟁(Imposed War)’이라고 명명했다. 즉, 미국의 음모에 의해 일어난 전쟁이라는 것이다.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자, 미국은 이라크의 침공을 비난하려는 안전보장이사회의 모든 조치에 반대하고 나선다. 또 미국은 이라크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지우고 미군의 무기가 이라크로 송달되는 것을 승인한다.
이란-이라크 전쟁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아랍인과 이란인의 민족 문제를 들 수 있다. 이라크는 셈족 계통의 아랍인이지만 이란은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페르시아인이다. 아랍인들은 이슬람 이전의 시대를 자힐리야(Jahiliyya), 즉 무지의 시대라고 말한다. 따라서 아랍인들은 이슬람 이전의 전통과 역사를 부정하면서 이슬람 이후 아랍사회에 나타난 문명만을 추종한다. 하지만 이란인들은 이슬람 이전의 시대를 그 자체로 거대한 문명으로 표현한다. 그것은 아랍 무슬림에 의해 나라가 점령당해 종말을 맞이한 자존심 있는 제국이었고 또한 이란인의 정체성을 지속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아랍인과 이란인의 뿌리깊은 대립의 역사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후 그의 후계자들이 정복사업을 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랍인들은 637년 페르시아의 사산조(224-651)를 멸망시키고 아랍인들을 중심으로 이슬람제국을 건설하였다. 페르시아가 이슬람제국의 일부로 병합되면서부터 이란인들은 정치적, 종교적으로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란인들은 아랍인들에 대한 자신들의 우위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이란인들은 다수파인 순니파를 버리고 소수파인 시아파를 선택하여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면서 생존할 수 있었다. 16세기초에 등장한 사파비조(1501-1732)는 이슬람세계에서 최초로 시아파를 국교로 한 페르시아 민족국가였다. 이때부터 아랍인들과 이란인들은 이슬람세계의 두 민족으로서 반목과 대립관계를 유지해 왔다.
두 번째로는 종교 문제를 들 수 있다. 이슬람은 크게 순니파와 시아파로 나누어진다.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세계는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양분되었다. 순니파는 아랍인의 관습에 따라 선출된 칼리프를 추종하는 세력으로 쿠란, 예언자의 언행록 및 정통칼리프의 선례에 바탕을 두고 있고 이슬람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이슬람국가를 통치해 왔다. 반면에 시아파는 예언자의 사위이자 제4대 칼리프인 알리의 가문에게 칼리프위를 돌려주려는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알리의 차남 후세인은 680년 이라크의 쿠파(Kufa) 근처 카르발라(Karbala)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참혹하게 살해당했다. 이후 시아파에서는 알리와 그의 자손들을 이맘(Imam)이라고 부르고 이맘이 이슬람공동체를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교분쟁의 근원은 중세이슬람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래 순니파이건 시아파이건 이슬람은 이라크에서 발전되었다. 순니파는 중세이슬람제국인 압바스조(750-1258)의 수도였던 바그다드에서 성장하였으며 시아파는 이라크의 남부지역에서 발생하여 발전하였다. 따라서 이라크의 북부에서는 순니파, 남부에서는 시아파가 강하였다. 이라크의 전체 인구에서 시아파는 55-60%를 구성하였으나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서 순니파보다 열악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전체 인구의 35-40%를 차지하는 순니파는 수적인 면에서 시아파보다 적음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이래 오늘날까지 이라크의 정치를 지배하여 왔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시아파는 항상 순니파의 억압과 박해의 희생물이 되어 왔다. 오랜 기간 동안 순니파는 권력을 장악하였고 시아파는 변혁과 현상타파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시아파는 오늘날에도 이라크의 정치에서 내부불만세력으로 커다란 위협요인이 되고 있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성공하자 이라크 내의 시아파는 크게 고무되었다. 더욱이 호메이니는 15년동안 이라크에서 망명생활을 했으며 그곳의 시아파 지도자들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다. 시아파 지도자들은 다와(Da'wa)당을 결성하여 이라크 공산당과 쿠르드족 민주당과 연합전선을 펼쳤다. 한편, 이란의 혁명정권은 정권수립초기부터 이라크에 이슬람혁명이데올로기를 수출하고자 했다. 호메이니는 이라크의 시아파에게 이라크정권에 항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란의 이슬람혁명을 계기로 사우디 아라비아, 바레인, 쿠웨이트에서 시아파의 폭동이 일어났고 또한 주위로 확산되었다. 특히 이라크의 남부지역 나자프(Najaf)에서는 시아파 성직자를 시위음모죄로 체포하였다.
세 번째로는 국경선 문제가 있다. 이란-이라크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 된 사건은 샤트 알 아랍(shatt al-Arab) 수로를 둘러싼 영유권 확보와 경계선 설정 문제였다. 이 수로는 이란의 유일한 대아랍국경이며 대이라크 국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수로는 페르시아만과 연결되어 있어 경제적, 전략적으로 이란과 이라크 양국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이 수로의 영유권문제는 양국 간 분쟁의 근원이 되었다.
이 수로의 영유권문제는 1937년에 체결된 양국간 국경협정에서부터 제기되었다. 이 협정에서는 양국 간의 경계선을 수로의 동안으로 임시 결정함으로서 이라크가 이 수로의 영유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이란은 국제법의 관례를 들어 이 수로의 계곡선(강의 가장 깊은 곳)을 국경선으로 정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란측의 의도는 당시 중동지역의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영국이 이라크를 지지함으로서 실패했다.
1968년 영국군의 철수선언과 더불어 이 수로의 영유권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1969년 4월 15일 이라크 정부는 이란에게 이 수로가 이라크의 영토이므로 이란의 모든 선박들은 이 수로 내에서 이란 깃발을 달지 말아야 하며, 이란 해군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경고문을 보냈다. 이에 대해 이란의 팔레비 정권은 그 보복조치로서 1937년 국경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이라크의 이란 선박에 대한 간섭행위는 무력충돌을 야기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또한 팔레비 정권은 1969년 4월 22일 해군과 공군의 호위 아래 이란 깃발을 게양한 채 선박들을 수로에 항해시켰다. 그러나 이라크 정부는 이같은 이란의 강경조치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이유는 잦은 정권교체로 인해 대외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라크군은 국내 쿠르드족과 대결하고 있었으며 시리아와 요르단과 함께 이스라엘에 대한 동부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많은 병력이 투입되고 있어 이란에 대한 군사력 행사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 수로의 영유권 문제가 어느 정도 공식 해결된 것은 1975년 알제이협정이다. 당시 이라크는 이란이 이라크 내의 정치, 사회적 안정을 위협하고 있던 쿠르드족의 반란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 수로의 계곡선을 양국간 경계선으로 정한다는 원칙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이라크의 자발적 동의보다는 어쩔수 없는 다급한 현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라크로선 항상 이 협정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양측 모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긴 채 종식되었다. 하지만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양국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공격해 합병하자, 미국을 비롯한 다국적군이 전면적으로 무력 개입한 ‘걸프 전쟁’이 일어났다. 걸프 전쟁은 1991년 2월 28일 개전 43일, 지상전 개시 나흘만에 이라크의 완패로 끝났다.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이라크의 무장해제와 사담 후세인의 23년 철권통치 종식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이라크를 침공했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의 독재체제를 무너뜨리긴 했으나 대량살상무기는 아직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2006년 12월 30일 사담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 중 1982년 이라크 두자일 마을에서 시아파 주민 148명의 학살 주도 혐의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때 미국의 동지였던 사담 후세인은 그들의 손에 의해 체포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란은 이라크와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미국의 봉쇄 정책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얼마전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 쿠쉬나메(Kushnameh)에는 페르시아 왕자가 신라 공주와 결혼하는 이야기가 있어 교류의 실증적 근거다.
이란의 대서사시 <쿠쉬나메>에는 페르시아 왕자가 신라로 망명하여 신라 공주와 결혼했다는 내용과 함께 신라군과 페르시아인들이 폴로 경기를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이러한 유물들의 역사적 배경을 뒷받침한다
폴로는 고대 중앙아시아의 이란지역에서 다리우스대왕(기원전 521-485년) 시기에 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마구(馬球) · 격구(擊球) · 타구(打球)로도 불렸는데 당나라 때에 처음 들어왔다. 당 봉연(封演)의 『봉씨문견기(封氏聞見記)』에 의하면 “당 초기 이세민(627~649)이 사람을 서번(西番, 티베트)에 보내 타구를 배워오게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송의 고승(高丞)도 『사물기원(事物紀原)』에 “구장(毬杖)은 오래지 않으며, 당대부터 놀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와 문화교류를 빈번하게 했던 신라가 이러한 신문물을 접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한치운의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발해 사신 왕문구(王文矩) 일행이 889년에 일본에 가서 격구를 하였다라는 기록이 우리나라 최초의 폴로에 대한 기록이다. 고려시대에는 『고려사(高麗史)』 태조 2년에 아자개 일행의 환영식을 격구장에서 했다는 기록이 처음 나타나 적어도 후삼국시대 폴로를 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의 기록은 없지만, 당나라의 경우와 후삼국 시대에 격구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신라 시대에 폴로가 들어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렇다면 서역인이 든 물건은 실재 폴로스틱이 맞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당시 중국의 폴로스틱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1971년 중국 섬서성 건릉(乾陵)에서 발굴된, 당 고종의 여섯째 아들인 이현(684년 사망)의 무덤 벽화 가운데에는 폴로를 하는 장면이 있다. 말을 타고 공을 쫓아가는 인물들은 모두 한 손에 폴로스틱을 쥐고 있다. 한 손으로는 말고삐를 쥐어야 하므로 폴로스틱은 한 손으로 쥐기 쉽게 얇고 길다. 이 밖에 당삼채와 동경(銅鏡)무늬 등에서도 폴로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데 모두 얇고 긴 스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스틱은 그 끝이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어 월장(月杖)이라고 불렸는데 길이는 약 1.5m 정도였다. 이에 비교하여 경주박물관의 서역인이 들고 있는 것은 끝이 휘어져 있다는 점만 빼고 더 짧고 굵다. 휘어져 있는 부분도 당나라 것과 달리 넓적하고 둔탁해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서역인이 들고 있는 것을 폴로스틱으로 보기엔 어려울 것 같다. 당나라 시대 당시나 이후의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격구에 쓰이는 채 모두 얇고 긴 형식으로 실용적이지만 서역인이 들고 있는 것은 실제 말 위에서 공을 치기 위한 용도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馬)도 타지 않은 채로 폴로스틱만 들고 있는 인물이 무덤 입구에 있어야 할 이유도 찾기 어렵다. 폴로채가 아니라면 무엇을 들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 서역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사자의 역할과 의미
이 서역인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다른 면에 조각된 사자를 주목해야 한다. 별개의 공간에 표현되어 있지만 하나의 기둥에 인접해서 조각된 것으로 보아 서역인과 관계성을 맺고 있음이 틀림없다. 별개가 아닌 하나의 도상으로 봐야 한다는 의미다. 사자는 사람처럼 서서 왼쪽 다리를 내디디고 있어 마치 걷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얼굴은 하늘을 보며 입을 벌리고 있고 그 속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 듯하다. 이 사자상과 인물상을 동시에 본다면 인물이 이 사자를 이끄는 것처럼 보인다. 이 사자가 무덤에 조각된 것은 벽사(辟邪, 귀신을 물리치는)의 의미가 있음이 틀림없다. 이러한 사자를 이끄는 서역인, 우리가 놓치고 있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신라문화가 가진 강한 불교적 색채를 염두에 둔다면 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많은 사자상은 대부분 불교와 관련이 깊다. 이 경우 사자는 백수를 굴복시키는 왕으로 불법을 수호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리고 사자는 문수보살을 등에 태우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 경우 곤륜노(崑崙奴)라는 인물이 사자를 이끄는 것으로 표현된다. 곤륜노는 머리가 곱슬머리이고 피부가 검은 노예를 의미해 서역인의 이미지와는 매우 다르다. 6세기 북위의 양현지가 지은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는 서역의 사신이 사자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낙양의 장추사(長秋寺)에는 행상이라는 행사를 할 때 악을 물리치는 사자가 그 앞을 인도하였고 칼을 삼키거나 불을 토하는 등 기이한 묘기를 부렸다는 기록이 있다. 서역인과 사자의 결합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폴로는 페르시아 왕족 스포츠다. 신라 왕족 곁에 무인석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왕족끼리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무왕 딸과 결혼했던 아비틴(Abtin)은 페르시아 사산 왕조가 아랍의 침공으로 멸망한 후, 망명생활을 하던 페르시아의 왕자다. 아비틴은 당나라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되자, 의상대사의 도움을 받아 신라로 오게 되었으며 문무왕을 알현한다.
신라의 왕(타이후르)이 낸 시험을 통과하고, 문무왕의 딸이자 신라 공주인 프라랑(Fararang)과 결혼하게 된다.
나당전쟁에서 신라를 도와 군사적 업적을 세웠으며, 프라랑 공주와의 사이에서 페르시아를 재건하는 영웅인 아들 페리둔(Fereydun)을 낳는다.
그 후 페르시아 왕자 아비틴은 이슬람 세력을 정복하고 원수를 갚아달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신라공주와 가족들을 다 데리고 페르시아로 귀국한다.
그리고 신라를 잊지 말라고 신라의 지형, 풍습, 문화, 언어를 기록한 책을 만든다.
이 책은 1111년에 엮은 페르시아 구전 서사시 800쪽으로 엮은 쿠쉬나메(Kushnameh)라는 책이며 500쪽이 신라에 관한 기록이다, 2009년 영국 국립박물관에서 우연히 발견된다.
다시 말하면 이란은 우리 대한민국과 사돈국가다. 사극 드라마 대장금이 시청률 90% 나온 것이 우연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