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기록한 바 - 바울은 이제까지의 논증을 '기록'에 의존하여 결론짓고 있는데, 이는 기록된 말씀에 대한 신적이고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혹자는 이를 구전된 전승들이라고 한정짓기도 하지만 본절에서 언급하는 '기록한 바'는 선교상의 변증과 논증을 목적으로 확실하게 제시되었던 자료들로 보여진다.
시가서를 비롯한 구약성경들이 초대 기독교에 수납되었다는 사실은 쿰란 문서들을 통해 입증되었다. 바울은 여기서 시편을 주로 인용하였는데, 12절은 70인역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고, 10절과 11절은 약간씩 변형하여 바울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강조해서 말한 것이다.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 시 53:2에 대한 70인역의 번역에 의하면 '깨닫는'의 목적어로 '하나님' 최할 수 있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을 깨닫는 자도 없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바는 피상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하여 체득한 직접적인 지시과 체험이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간접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직접적인 지시이며 깨닫음이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바울은 지적인 면에서 인간의 무능력을 진술한 후 곧 이어 인간의 의지적 무능력에 대하여 진술한다.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이 없는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좀더 적극적인 의미로는 인간이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하여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롬 3: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본절은 70인역의 번역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다 치우쳐 -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본 구절이 시 14:3에서는 '사르'로, 시 53:4에서는 '사그'로 약간 다르게 표기되어 있으나 '가버리다', '떠나다'라는 의미를 비슷하게 갖는다. 70인역(LXX)은 본 구절과 동일하게 '여세클리난'으로 번역하고 있다..헬라어 '여세클리난'은 '돌아서다', '피하다', '멀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타락상은 하나님에게로 향하지 않는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인간은 올바르게 걸어가야 할 길을 돌이켜서 그 길을 떠났으며 그 결과 끊임없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 이 말은 무익한 것을 추구하여 마음의 생각조차 부패해진 인간의 상태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이 추구하는 바 그 자체도 악하고 무익하며 무의미할 뿐이다.
한편 '무익하게'의 헬라어 '에크레오데산'은 '유용한'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크레이오스'와 부정 접두어 '아'의 합성어 '아크레이오스'('쓸모없는')에서 온 동사 '아크레이오오'('쓸모없게 하다')의 단순 과거형이다. 이는 쓸모없게 되어버린 인간의 무가치한 상태를 지적하는 표현이다. 특히 함께 쓰여진 부사 '하마'는 '모든', '다'의 의미와 더불어 '동시에', '즉시로' 등의 의미도 갖는다.
즉 '모든' 인간들이 '동시에' 무익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적용되지 않고 인류 전체가 전적인 타락 상태에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 혹자는 본 구절을 '인간이 애정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렸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선'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스토테타'가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 대한 '선'을 의미하는 '아가도스'와는 달리 인간에 대한 선행에 더 가깝기 때문에, '애정'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러한 '선' 또는 '애정'을 버린 자를 가리켜 바울은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 이미 선포한 적이 있다
[롬 3:13]"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본절은 시 5:9;14:3에서 인용된 것이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 팔레스틴에 있는 무덤은 사람이 서서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큰 굴로 되어 있으며 그 입구는 돌로 막게 되어 있다. 따라서 바울이 사람의 목구멍을 열려 있는 무덤에 비유한 것은 그 목구멍이 어떠한 것도 삼킬 만큼 넓다는 의미이다.
이와 유사하게 예수께서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고 비유적으로 책망하신 적이 있다. 인간은 입을 통해서 온갖 더러운 것을 토해내며,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불이 수많은 나무를 태울 수 있듯이 인간의 혀도 자신의 영혼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혼조차 죽일 수 있는 지옥 불과 같다
그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 시 5:9의 인용으로 히브리어 사본에서는 '혀로 아첨했다'는 의미로 쓰였는데, 70인역은 이를 '혀를 유창하게 만든다'고 의역하였고, 본문의 원어도 이와 똑같이 인용되어 있다. '속임을 베풀며'의 헬라어 '에돌리우산'은 '속이다', '사기하다' 등의 뜻을 가진 동사 '돌리오오'의 미완료형 '에돌리운'에서 '뉘'대신에 '오산'이 붙어 반복적인 의미의 미완료형이 되었다.
즉 계속해서 속이고 사람을 죽이는 혀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곧 온전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타락한 인간의 입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타인을 살리는 말이 나올 수 없고 오히려 죽이는 독이 가득할 뿐이다 이것은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지 못함과 같고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롬 3: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 본절은 시 10:7의 의미를 요약하여 인용한 것이다. 저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저주가 자기에게 임한다는 사실을깨달아야 한다. 몇몇 주석가들은 저주와 악독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설명하고자 한다. 즉 저주하는 주체인 가해자와 악독을 당하는 피해자로 구분한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은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온갖 더러운 것을 대표적으로 '저주와 악독'이라고 표현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본 구절이 인간의 전적 타락을 뒷바침해주는 시구이고, 문맥상 강조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롬 3:15]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그 발은 - 본문은 잠 1:16의 앞 부분과 동일하지만 다음 구절.이 사 59:7, 8의 인용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사 59:7 상반절을 요약하여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은 12절에서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선포한 후에 13절과 14절에서는 '말'에서 비롯되는 악행을 설명했으며, 본절에서는 직접적인 행동을 통한 악행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입의 말과 악행은 악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와 같이 타락하여 부패해진 자연인의 마음에서는 어떠한 '선'도 나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만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갈 수 있다.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 피를 흘린다는 것은 악행에 대한 결과를 의미한다. '피' 는 성경에서 '생명의 원천' 또는 '생명의 좌소'를 의미하는데, 본절에서는 '쏟아버리다',
'피를 쏟아내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에크케오'의 단순 과거 부정사 '에크케아이'와 함께 쓰여 '생명에 대한 위협이나 도발'의 의미로 쓰여졌다. 한편 '빠른지라'로 번역된 분사 '와세이스'는 신약성경에서 '날카로운', '예리한' 등의 의미로 쓰였으며 본절에서만 '빠르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70인역에서는 '빠르다'를 뜻하는 헬라어 '타키노스'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다른 단어 '와세이스'를 쓴 것 같다.
[롬 3: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
파멸과 고생 - 직접적으로 영혼과 관련된 것이다. 혹자는 이 표현을 인간의 지독한 잔인성에 대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이미 2:9에서 바울은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라고 선포한 적이 있다. '환난과 곤고'와 '파멸과 고생'은 모두 영혼이 지옥의 형벌 가운데 있을 때 나타날 상황에 대한 표현이다.
그 길에 있어 - 원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들의 길에 파멸과 고생이 있다'라는 뜻이 된다. 본절은 앞절의 결론으로서 피흘리는데 빠른 발을 가진 '그들의 길에' 파멸과 고생이 결과로 남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공동번역은 '간 데 마다 남겨진 흔적'으로 파멸과 고생을 이해하였으나 그 보다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미래에 주어질 형벌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인류의 잔혹한 피흘림은 그들의 행위로 인하여 결국 그 보다 더 비참하고 고통스런 파멸(破滅)을 초래하게 된다.
[롬 3: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 혹자는 '평강의 길'을 현실적인 평화 내지 이웃과의 화목으로 해석한다.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내적인 평강이라 해석될 수도 있다. 예수께서 평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에게 평강을 주시리라는 약속이 성취되었다. 이 평강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됨으로 말미암아 현재 성도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서 주어진다.
이 길은 (1)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며 동시에 (2) 모든 사람들과 함께 화평을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야 할 길이다. 또한 (3)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이 가야 할 길과는 대조를 이루는 길로서 성도들의 종말론적인 구원을 동시에 나타내는 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떠난 인간은 결코 이길을 찾을 수도 없으며 또한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평안을 얻을 수도 없다.
[롬 3:18]"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 본절은 시 36:1 하반절의 직접적인 인용이다. 마음으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없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11절에서 17절까지의 인용 구절들에 언급된 부패상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어리석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머레이는 본절을 보다 자세히 해석하기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평가의 중심부에서 제외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계산 속에서도 사라지고 말았음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우리의 사악함을 견제하는 굴레이므로 그 경외심이 사라질 때 온갖 종류의 방탕한 생활에 거침없이 탐닉하게 된다"고 설파했다.
아무튼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을 진실로 섬기며 사랑하는 것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러한 자가 받을 축복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