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잉카의 공중도시 ‘마추픽추’ |
‘솔빛별가족’ 세계여행기(112)-페루 마추픽추(1) / 조영호 |
2004-08-12 10:48: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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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잉카제국의 숨겨진 공중도시 마추픽추 전경 ⓒ 조영호 | 나는 마추픽추가 정말 이런 곳일 줄 몰랐다. 그동안 교과서나 여행서적, 신문이나 텔레비전으로 여러 차례 듣고 보았던 마추픽추(Machu Picchu)였다. 그러나 내가 직접 와보기 전까지는 막연히 그런 곳이 있겠지, 대단한 곳이기는 할거야, 잉카의 후예들이 도망가서 그렇게 산꼭대기에서 살았던 곳이라지…하는 피상적인 상상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쿠스코에서 안데스산맥 안으로 기차를 타고 네 시간,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30여분간 산 정상으로 올라가서 내 눈으로 직접 본 마추픽추는 내가 사진으로나 TV화면으로 보던 그곳과는 엄청 달랐다. 마추픽추 입구를 들어선 순간 “악!” 하며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과연 이게 인간이 만든 도시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감이 나질 않았다. 까마득하게 내려다 보이는 저 밑바닥까지는 족히 1,000m는 될 것 같은 산 정상, 절벽 위에 세워진 도시는 현재도 (조금 과장한다면) 10,000여 명은 거뜬히 들어가서 생활할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도 우르밤바 강의 열대우림지역에서 올려다 보면 바벨탑처럼 치솟은 산꼭대기 위에 이처럼 큰 도시가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실제로 나도 기차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올라갈 때만 해도 도대체 이곳 어디에 사진에서 본 것처럼 그런 도시가 있을까 의아했었다. 예를 들어 63빌딩 꼭대기에 멋진 정원이 있다면, 그곳은 올라가 보거나 비행기를 타고 위에서 내려다 봐야 겨우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추픽추도 마찬가지였다. 위에서 내려다 봐야 확인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1903년)한 지 고작 8년 후인, 1911년 미국의 역사학자 하이람 빙검은 잉카사람들이 만든 비밀도시(비르카밤바)가 ‘대단히 높은 산꼭대기에 있고, 정교한 기술로 건축된 건물들이 치솟아 있다’라는 전설같은 한 줄의 문구에 힌트를 얻어, 험한 이 산꼭대기까지 기어올라와 잡초에 뒤덮여 있는 이곳을 발견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400여년 이상 이곳은 비밀에 묻혀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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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단식 논밭의 정연한 모습 ⓒ 조영호 | 되돌아와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펴놓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곳에서 생활했던 잉카의 후예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스페인의 군대를 피해 우르밤바 강이 휘돌아 나가는 해발 2,280m의 아찔한 안데스 산맥의 정상에다 이런 도시를 만들고 살았던 잉카인들은 어느 한순간 이렇게 큰 도시를 남겨놓고 또다시 어디로 숨어 들어가버렸을까? 이곳을 버려두고 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간 잉카의 후예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니면 다 멸망해 버렸을까? 하긴 몇만 년 인류의 역사를 놓고 볼 때 문명이라는 것은 결코 한 순간에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을 테지만… 다만 대제국을 건설했던 잉카제국의 후손들이 몇 백년이 지난 지금도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걸린다. 사방 여기저기서 푼돈을 벌기 위해 고생하고 있는 잉카의 후손들을 많이 보았다.
"잃어버린 도시" "공중도시"에 흐르는 물길
사람들이 ‘잃어버린 도시’ ‘공중도시’라 부르는 마추픽추의 총면적은 고작 5km²에 불과하다. 하지만 송곳처럼 뾰죽한 산꼭대기에다 이렇게 넓은 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돌을 쌓아 모든 논과 밭, 대지를 계단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 어디에선가 물을 끌어와 높은 지역으로부터 도시 곳곳을 연결하는 수로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현재도 수로를 통해 물이 졸졸 흘러내리고 있는데, 잉카인들의 돌을 다루는 기술은 이곳 마추픽추에서도 어김없이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돌과 돌을 이어 붙여 정말 글자 그대로 ‘물샐 틈 없이’ 수로를 만들었는데, 접착제를 쓰지 않고 당시에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으며, 그것이 지난 400여년간 아무런 보수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물이 잘 흘러내릴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 수로의 끝에는 모두 17군데의 양수장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 물을 이용해 목욕탕을 만들어, 왕녀들과 성직자들이 목욕까지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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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식하게도´ 통짜 바위를 깎아 만든 돌 계단 ⓒ 조영호 | 이들은 또 돌계단을 만들 때도 (다른 돌을 가져다 계단을 쌓은 곳도 있지만) 몇 군데에는 커다란 돌을 쪼아 계단을 아예 파버렸다. “단순 무식한 방법이 오래 간다”는 속설을 입증이라도 하듯 이 계단은 누가 일부러 파괴하지 않는 한, 수많은 관광객들이 밟고 다녀도 수백년,수천년 그대로 갈 것으로 보인다.
해시계 또한 마찬가지 방법을 썼다. 주 신전 앞쪽에 서있는 높이 1.8m의 해시계(Intihuatana)는 널따란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면 이어 붙인 흔적이 전혀 없다. 하나의 큰 돌을 ‘무식하게(?)’ 깎아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얕은 꾀로 만들지 않았기에 이 해시계는 수 백년 동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반대로 아주 정교함을 엿볼 수 있는 사례가 두개골 절개 수술 흔적이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잉카문명 이전인 프레 잉카시대부터 뇌 외과 수술이 널리 시행됐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 혹은 둥근 구멍이 있는 두개골도 많이 발견됐다고 한다. 특히 현재 리마의 황금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머리뼈를 뚫고 정교하게 황금으로 막아둔 이런 두개골 외과수술 흔적은 현재까지도 신비에 싸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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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추픽추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아찔한 우루밤바 게곡 ⓒ 조영호 | 마추픽추에는 왕녀의 궁전을 비롯, 성직자 거주지, 귀족 거주지, 기술자 거주지, 서민 거주지 등이 따로 마련돼 있고, 태양의 신전, 달의 신전, 주 신전, 신성한 광장, 대광장, 중심광장, 감옥(콘도르 신전), 묘지, 계단식 밭 등으로 구역이 나뉘어져 있는데 들어가는 길은 몇 군데 밖에 없다. 계단식 밭으로 들어가는 주된 길 이외에도 두 군데의 문은 잉카의 길과 이어져 있다.
잉카의 길(Camino del Inca)은 잉카제국이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던 모든 지역으로부터 수도였던 쿠스코까지 이어져 있었다. 북쪽은 에쿠아도르의 키토에서부터 남쪽은 칠레의 산티아고까지 남북으로 5,000여km에 이르는 길이 만들어져 이어져 오고 있었는데, 쿠스코에서부터 이곳 마추픽추까지도 이어져 있다고 한다.
이 잉카의 길에는 ‘챠스키’라고 하는 파발꾼이 나는 듯이 달렸다고 한다. 이 챠스키는 수도인 쿠스코에서 지방으로 보내는 정보와, 지방에서 수도로 보내는 정보를 담은 ‘탐보’라는 여행가방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리마에서 쿠스코까지 640km를 3일만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곳 마추픽추와 쿠스코를 이어주는 잉카의 길이 현재에도 남아있는데, 대부분은 끊겨 버렸지만 일부는 복원돼 현재 관광객들을 위한 ‘트래킹 코스’(대략 33km)가 되어있다. 우리는 푸노의 티티카카 호수를 가야 하는 일정이 꽉 짜여져 있어서 이 잉카 트래킹을 할 수 없었다. 특히 아이들은 3박 4일이 걸리는 이 트래킹을 벌써 페루에 오기 전부터 하게 해달라고 졸랐으나 결국 포기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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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합성사진처럼 나온 아내와 나의 사진 ⓒ 조영호 | 마추픽추 꼭대기에서 기차역까지 내려오려면 버스를 타고서도 20여분이 걸린다. 산 정상에서 지그재그로 난 길로 버스가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잉카의 길은 산을 거의 수직으로 내려오게 돼있다. 사람들이 버스에 타면 ‘챠스키’를 닮은 한 소년이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굿바이”라고 외치고 나서 산길을 뛰어내려간다. 그러면 지그재그로 오는 버스가 커브를 돌아 내려오고 그 소년은 다시 “굿바이’를 외치고 다시 뛰어내려간다.
이처럼 버스가 산아래까지 수십 구비를 돌아 다 내려갈 때까지 ‘굿바이 소년’은 지칠 줄도 모르고 뛰어내려 와서는 손을 내민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은 손뼉을 쳐주고 굿바이 소년에게 얼마씩 수고비를 준 다음, ‘굿바이 소년’의 마지막 “굿바이” 인사를 들으며 역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나는 이 같은 이야기를 듣고 우리도 ‘굿바이 소년’을 보기를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그 날 따라 ‘굿바이 소년’이 아픈지 나타나지 않아서 나도 아이들도 무척 섭섭해 했다. 나중에 마추픽추에 가시는 분은 꼭 ‘굿바이 소년’을 보시기 바란다. ‘굿바이 소년’ 옆에는 ‘견습 굿바이 소년’도 있다고 하니 대가 끊어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
[조영호 넷포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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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종의 라틴 화첩기행] ‘아름다운 현기증’속에 잉카, 이렇게 살아있다
조선일보 기사전송 2007-04-30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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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페루-맞추픽추
잉크빛 물 거슬러 올라… 마침내 만난 공중도시
#1. 엘 콘도르 파사
쿠스코를 떠난 버스는, 느린 파도처럼 일렁이는 옥수수의 물결과 협곡 사이를 누비며 힘겹게 기어 올라간다. 엎드려 감자밭을 일구는 농부들의 몸피와 옷차림이 두툼하다. 버스에서 내리자, 둘러선 민속악단이 연주하는 음악이 귀에 와서 감긴다. 엘 콘도르 파사. ‘철새는 날아가고’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 멜로디는 원래 페루의 작곡가 로블레스가 만든 기타곡이다. 안데스를 지키는 검은 신, 잉카인들의 영혼의 새, 콘도르. 그 콘도르가 떠나버린 텅 빈 산맥을 노래하는 피리소리는 애간장이 끊어질 듯 구슬프게 계곡 사이로 퍼져나간다. 작은 몸집, 검은 머리, 낮은 코의 인디오들은 우리네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다만 계곡물을 닮은 그 흰 눈자위는 왜 그리 안쓰럽도록 시려 보이는지.
맞추픽추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시 작은 기차를 타고 잉카 트레일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계곡을 흐르는 세찬 물살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흘러간다. 우르밤바 강이다. 만년설이 녹아 내려온 물은 짙푸른 잉크 빛이다. 기차는 지친 짐승처럼 신음을 내뱉으며 구비를 돌고, 커다란 배낭을 메고 산정을 향해 걸어가는 트레킹 족들이 멈추어 서서 손을 흔들어준다. 차를 타고 가는데도 숨이 가쁠 만큼 잉카의 마지막 유적지는 높고 아득한 산정(山頂)에 숨어 있는데, 며칠이라도 걸어서 오르겠다는 장한 결심을 한 그들의 젊음이 부럽다. 푸른 깃발 같은 그들을 뒤로 하고 기차는 하늘에라도 닿을 듯 끊임없이 위로 오른다.
#2. 라틴의 성지, 맞추픽추
나선형으로 위태롭게 산길을 감아 돌던 차가 드디어 멈춘다. 해발 2400여 미터. 차에서 내리는데 가벼운 현기(眩氣)가 느껴진다. 맑고 푸른 하늘이 이마 위로 얹힌다. 눈 덮인 안데스의 산맥이 눈 닿는 곳마다 아스라이 펼쳐진다. 하늘빛도, 공기도 싸하다. 청정한 웃음의 인디오 아가씨가 작은 이파리 하나를 내민다. 잉카의 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비표라도 나눠주듯. 코카잎이란다. 질겅질겅 씹다 뱉으면 두통과 현기증이 달래질 거라며. 이 어지러움이 다만 희박한 공기 때문일까. 손마디 하나만한 이파리로 수세기의 시간을 건너 뛰어야 하는 어지러움까지 같이 달래질까. 코카잎은 씁쓸한 풀비린내를 풍기며 입안에서 으깨어진다.
공중도시, 맞추픽추.
허다한 항공사진 속에서 보아온, 눈을 감고도 떠올릴 수 있는 풍경. 눈으로 직접 보는 유적은 차라리 비현실적이다. 어지러움인지 슬픔인지 모를 저릿함에 사로잡혀 나는 돌들의 도시를 망연히 바라본다. 돌로 된 회랑 사이를 거닐며 나는 귀를 기울인다.
노래와 눈물, 열광과 비탄의 목소리, 살육 당한 자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흔적 없이 사라졌을 리가 없다. 어느 돌 위에서 그들은 신을 향한 찬가를 불렀을까. 어느 돌 위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감자를 쪄먹었을까. 가장 건장하고 잘생긴 젊은이를 뽑아 산 채로 가슴을 열어 심장을 꺼내 산 제물로 바쳤다는 곳은 어디쯤일까.
매끄럽고 반듯하게 다듬어진 돌들은 높이가 예사로이 6미터를 넘고 두께도 1.5미터에 달한다 한다. 큰 것은 한 개의 무게만도 몇 톤이 된다는 이 돌들을 잉카인들은 어디서 어떻게 여기까지 옮겨왔을까. 게다가 두부 모 자르듯 이토록 빈틈없이 자르고 짜 맞추었을까. 거대한 돌과 돌 사이에는 면도날 하나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문자는 없었는데 측량술과 건축술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문명은,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것인가.
번성하던 잉카제국은 황금을 찾으러 온 스페인의 침략자들에게 멸망 당한다. 오랫동안 저 홀로 풍화되어가던 맞추픽추의 유적지는 미국인 하이럼 빙엄에게 20세기 초에야 발견되었다. 신전과 주거지와 농지와 묘지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 지붕 없는 유적지는 이후로 잉카인의 자긍심 그 자체이며 라틴을 하나로 묶는 성지 역할을 한다. 체 게바라, 네루다,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 등 라틴의 걸출한 인물들은 이곳을 순례한 후 거듭난 영혼으로 산을 내려가 자신들의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게 된다.
#3. 네루다의 맞추픽추 산정
나와 함께 태어나기 위해 오르자, 형제여. …농부여, 직공이여, 말없는 목동이여. 가파른 벌판을 오르내리던 미장이여. 안데스의 눈물을 나르던 물장수여. 손가락이 짓이겨진 보석공이여. 씨앗 속에 떨고 있는 농부여. …나의 핏줄과 나의 입으로 달려오라. 나의 말과 나의 피로 말하라.
〈맞추픽추 산정. 네루다〉
오랜 유럽체류에서 돌아온 네루다는 1943년 10월 나귀를 타고 맞추픽추에 오른다. 하이럼 빙엄이 눈앞에 펼쳐진 유적지를 보며 비명을 삼킨 지 삼십 년 만이었다. 이곳에서 네루다는 자신의 세계관과 시의 전환점을 맞는다. 네루다는 ‘나는 여태 세상을 읽을 줄 몰랐고 오직 나 자신만을 읽었을 뿐이다’고 고백한다. 그의 뜨거운 언어가 개인적 서정과 낭만의 경계를 박차고 날아올라 라틴 전체를 아우르는 ‘모두의 노래’를 향해 나아가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는 고백했다.
‘…마치 내 자신의 손이 아득한 어느 때에 그곳에서 밭을 갈고 바위를 다듬으며 일을 했던 것만 같았다. 나는 내가 칠레인이요, 페루인이요, 아메리카인임을 느꼈다. 그 험준한 산정에서, 그 찬란한 유적 사이에서….’
하필이면 이 까마득히 높은 산 위에, 왜, 라는 질문은 차라리 무의미하다. 쌓여있는 것은 시간이기도 하고 돌이기도 하다. 햇살이 돌의 살갗을 어루만진다. 키 작은 풀들이 돌 틈에서 희고 붉은 꽃들을 피워 올렸다. 아, 눈앞에 펼쳐진 이 지독한 비현실을 견딜 수 없어 나는 손바닥으로 돌을 자꾸만 쓰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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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Tour월드] 안데스산맥을 넘나드는 신비로운 잉카문명
매일경제 기사전송 2003-09-28 12:15 |
안데스산맥, 잉카의 유적, 인디오 여인, 불가사의한 지상그림, 아마존 밀림지대 등은 남미 페루를 대표하는 이미지들이다. 마추피추와 같은 거대한 유적을남긴 잉카문명에서부터 스페인 식민지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 유산을 만날 수 있는 낯선 땅, 페루를 찾았다.
■ 식민지 역사를 간직한 리마
페루의 수도 리마는 적도 부근 연안 사막지대에 위치하지만 페루 해류의 영향을 받아 기온은 그다지 높지 않고 월평균 기온이 15~22도 정도에 이르는 선선한 날씨를 보인다. 강수량은 불과 30mm. 건조하면서 덥지 않아 여행자들에게는쾌적한 환경을 전해준다.
시내 곳곳에서 식민 시대의 잔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551년 설립된 남미최고의 산마르코스 대학이 그렇고 1563년 건설된 남미 최고의 극장이 그렇다.식민초기에 건설된 대통령 관저, 교회, 궁전, 박물관, 미술관 등 수를 헤아릴수가 없다.
이는 페루의 수도 리마가 1535년 스페인의 피사로에 의해서 건설된 제왕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당시 만해도 남미의 여러 나라가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그 넓은 면적의 영토를 다스리는 주도가 바로 리마였기 때문이다.
아르마스 광장이 리마 구시가지의 중심이다. 피사로 동상이 있는 곳으로 광장을 둘러싸듯이 식민시대의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대성당은 스페인의 정복자 피사로가 직접 손으로 초석을 놓은 곳이다. 1535년 공사를 시작해 1555년 1단계 완성, 그 후 1585년 증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피사로의 유체라는 미라가 대성당 유리상자에 안치되어 있어 시선을 사로잡기도 한다. 산프란시스코 교회, 황금박물관 등도 리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식민지 유적들이다.
이와 반대로 공항에서 30분 거리에 위치하는 미라플로레스 지구는 지금까지의문화유적지와는 달리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신흥 관광지다.
■ 잉카문명의 관문, 꾸스코
해안가에 전망대가 있는 공원이 있고 최근에는 은행, 사무실, 고층 아파트 등이 세워져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고.
리마에서 동남쪽으로 약 580㎞, 해발 고도 3,740m 안데스 산중의 꾸스코 분지에 위치하는 꾸스코는 잉카문명으로 향하는 관문이다. 기후는 쾌적하나 공기밀도가 낮아 고산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천천히 움직이는것이 호흡하기에 좋다.
꾸스코는 케추아어로 배꼽을 의미한다. 13세기초에 건설되어 16세기 중반까지중앙 안데스 일대를 지배한 잉카 제국의 수도였다. 1533년 피사로에 의해 정복된 후, 해안지방의 리마를 수도로 정하면서 역사속으로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당시 번영의 절정기를 맞이하였던 꾸스코는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무참히 부서졌다.
태양을 모시던 태양신전, 잉카의 왕이 머물던 궁전 등은 부서지고 스페인식 교회와 수도원 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아르마스 광장의 대성당, 라콤파냐 헤수스 교회, 라메르세 교회 및 수도원, 산토도밍고 교회, 산타 카타리나 수도원등이 바로 그러한 역사를 증명하는 유적들이다.
■ 마추피추와 나스까
꾸스코시에서 우르밤바 강을 따라 북서쪽으로 약 114㎞내려가면 해발 2,280m지점에 세워진 잉카 유적 마추피추를 만날 수 있다.
마추피추는 스페인 정복자들을 피해 깊숙한 안데스 산맥으로 숨어든 인디오들이 만들어낸 도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해발 2,280m의 산정에 무려 40만 평방미터의 넓은 면적에 세워진 도시는 여전히 풀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마추피추와 함께 페루를 대표하는 불가사의를 꼽는다면 나스까의 지상그림을빼놓을 수 없다. 삼각도형, 거미, 도마뱀 같은 여러 가지 무늬가 그려져 있는지상그림은 지금까지도 누가 그렸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939년 발견된 마추피추보다 28년이나 늦게 발견된 나스까 지상그림은 마추피추보다 더욱 이해할 수없는 수수께끼다. 경비행기를 타고 상공에서 내려다볼 수 있어 독특한 경험을갖게 된다.
그밖에 작은 갈라파고스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는 바제스타스 섬, 그 관문인 빠라카스 등도 여유가 된다면 다녀볼 만하다. 바제스타스 섬은 몇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물개, 해조, 펭귄들이 서식하는 동물의 천국이다.
◇상품정보=참좋은여행(www.verygoodtour.com)에서 페루를 비롯해 멕시코, 쿠바, 칠레, 브라질 등을 둘러보는 중남미 상품을 판매한다. 이 상품은 중남미지역을 충분히 답사한 후 기획된 여행상품으로 세계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나스까 지상그림, 3,812m 세계 최고 높이에 위치한 티티까까 호수 관광 등을 포함할 정도로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 일정이 길고 세분화되어 있어 충분한 상담이필요하다. 19일 일정, 6,990,000원. <문의 : 02-595-7000>
<황국성 기자>
매일경제 기사전송 2002-11-25 15:48 |
페루는 잉카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웅장한 안데스산맥과 아름다운 해안도시 그리고 수 천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잉카의 유적들을 통해 페루의 과거와 미래를 찾을 수있다.
페루는 남미 최대의 문명으로 일컬어지는 잉카문명의 유적을 가장 잘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고대로부터 중부 태평양 연안의 고원에 위치해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페루는 동쪽으로 브라질, 볼리비아, 남부는 칠레와 그리고 북부는 에콰도르, 콜롬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남미의 중심 국가다. 수도는 인구 2천만명의 대도시 리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광객이 머무는 곳은 잉카문명의 대표적인 유적 마추피추와 그 관문이 되는 고산도시 꾸스꼬. 기후는 지역마다 가지각색, 해안지대는 온난다습, 산악지대는 우기와 건기로 구분해 여름에는 아열대성, 겨울에는 한랭기후를 보여 선선하다.
리마를 비롯한 해안지대는 11월~4월까지 여름으로 더운 편이지만 반대로 안데스산맥 건너편 산악지대인 쿠스코는 최고 기온이 24~25도,밤엔 3~5도 정도로 기온이 떨어져 선선하다.
안데스 분지의 중앙
꾸스꼬는 인디오들이 즐겨 사용하는 언어인 케츄아어로 배꼽 또는 중앙을 의미한다. 해발 3,399m의 안데스 분지에 자리잡고 있는 인구 26만 명의 도시로 잉카문명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남미 여행의백미로 꼽히는 관광도시이다.
잉카의 수도였던 만큼, 꾸스꼬에는 잉카제국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수 있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절 페루를 점령했던 스페인은 잉카의 보물을 약탈하고 유적도 많이 파괴했다. 태양을 모시던 태양신전(코리칸차)이며 신의 아들이자 잉카의 왕이 머물던 궁전, 태양 처녀의 집등을 부수고 그 자리에는 스페인식 교회와 수도원 따위를 세웠다. 광장의 대성당, 라콤파냐 헤수스 교회, 라메르세 교회 및 수도원, 산토도밍고 교회, 산타 카타리나 수도원 등은 이런 계기로 세워진 것들이다.
꾸스꼬의 중심은 아르마스 광장이며 광장에 면하여 훌륭한 대성당이솟아있다. 도시를 대략적으로 구분하면 광장주변은 관광객 상대의 상업지역이며 호텔, 레스토랑, 민예품 상점, 여행사 등이 모여 있다.
관광명소는 대부분 광장 주변에 모여 있으며 호텔은 대개 광장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그러므로 시내 관광만 할 때는 교통 수단을 이용할 필요가 없다.
미국의 고고학자가 발견
마추피추는 1911년 7월, 스페인의 침략을 피해 깊숙한 안데스산맥으로 숨어든 잉카 인들의 유적을 찾아 나선 미국의 고고학자 히람 빙엄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스페인의 약탈과 침략을피해 이곳에 도시를 형성한 잉카 인들이 머물렀던 시기는 1,200년부터 1,500년대까지. 규모로 보아 200채의 가옥과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추피추는 해발 2,280m의 산정에 자리잡고 있다. 주위는 높이 솟아있는 산들과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우르밤바 강 유역은 열대 우림이 무성한 정글로 산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고, 공중에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 공중도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스페인 침략자들의 약탈로부터 무사할 수있었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분석한다.
공중에서 본 마추피추의 총면적은 40만 평방미터, 절반 가량이 경사면으로 되어 있어 어떻게 이러한 도시가 형성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의문이 그치지 않는다.
유적 주위는 높이 5m, 두께 1.8m의 성벽으로 견고하게 만든 요새로둘러싸여 있으며, 유적의 가장 오래된 부분은 2,0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으며, 적어도 잉카 이전일 것이라고는 추정하고 있다.
마추피추는 크게 농경지, 도심, 종교지역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각의 역할에 맞게 건물과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종교지역은 수천 피트 아래의 우루밤바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스페인 정복 후 쿠스코나 다른 도시는 전부 파괴되어 잉카의 건축양식을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잉카 시대의 잃어버린 과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귀중한 유적지인 마추피추가 더욱 소중한 것이다.
◇여행정보◇
항공편 인천에서 미국 LA나 뉴욕을 경유해 페루의 수도 리마로 들어가는 항공편이 일반적이다. 인천출발 오후 3시, LA 도착 10시 30분, 리마도착 새벽 0시 45분 정도. 리마에서 잉카의 옛 수도 쿠스코로가는 항공편은 란 페루를 이용하면 된다. 리마와 꾸스꼬 사이는 안데스산맥으로 막혀있어 직선거리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은 항공편뿐이다.육로는 두 배 이상의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한다. 항공기로는 약 1시간정도 소요되고 육로를 이용할 경우, 40여 시간이 소요된다. ☎02-775-1500
기후 2~4월은 여름, 5~11월은 겨울에 해당한다. 11~3월은 우기로비가 많고, 4~10월이 건기로 여행하기 좋다. 꾸스꼬나 마추피추는 고지대에 있으므로 여름이라 하더라도 기온이 낮다. 4월에도 밤에는 영하로 내려가기도 하므로 겨울철에 입는 따뜻한 겉옷과 장갑 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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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스꼬는 팔리지 않는다"
프레시안 기사전송 2008-05-07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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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상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ㆍ<16>] 꾸스꼬
[프레시안 사진,글=손문상,박세열/.]
여행은 어느새 중반을 넘어섰다. 7000킬로미터를 달려 와 페루의 중심부에 와 있는 것이다. 꾸스꼬(Cusco)는 하늘을 나는 섬이다. 그곳에서의 삶은 지상의 그것들과 달라보였다.
내가 느낀 바, 분명히 말하지만 꾸스꼬는 '잉까의 심장'입네 하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마약과 자유를 구분하지 못하는 멋쟁이 히피 그링고들(Gringo, 남미 사람들이 미국인들을 약간 경멸조로 일컫는 말.), 짐짓 진지한 표정의 유럽 젊은이들, 그리고 커다란 배낭을 지고 가는 노부부들과 즐거운 표정의 각종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잉까의 수도는 관광과 낭만, 그리고 추억의 도시가 되었다. 잉까의 심장 따위를 느끼고 싶거든 '따라따(Tarata)' 등지의 시골 마을들을 가보라. 꾸스꼬는 거짓말 조금 섞는다면,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절반이 외국인인 도시다.
고대 잉까의 수도라는 물리적이고 시각적인 공간 속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지상의 삶과 유리된 듯 보이는 꾸스꼬에서의 무국적 삶은 그 나름의 멋이 있다.
구석구석에 예쁜 악세사리와 옷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고, 세계 각국의 요리들부터, 채식주의자를 위한 식당, 그리고 도떼기 시장의 먹거리 장터가 공존하고, 화랑, 박물관 천지에 거리에는 잉카마사지 호객꾼들과 코카인 상인들이 우글댄다. 특별히 마약에 관대한 도시라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큰 도시에 어디에나 존재하는 그런 상인들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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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엔 관광객들을 상대로 조악한 기념품을 파는 상인들이 지천이었다. 꾸스꼬 거리의 잡상인 아이. ⓒ손문상 | 버스 터미널에 내린 우리는 티코 택시를 잡아타고 일단 아르마스 광장 쪽으로 향했다. 성수기가 막 지난 때라지만, 방 값은 아직 비싼 편이었고, 우리는 한 시간여를 헤매었다. 그 때 한 아주머니가 우리의 행색을 보더니 '방 찾고 있수? 하루에 일인당 15솔(우리 돈 약 4500원) 어때? 여기서 가까워'라고 속사포처럼 말했다. 15솔이라.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어서 일단 아주머니를 따라가기로 했다.
가깝긴 했다. 다만 경사가 10도 정도 되는 것 빼곤. 우리가 방을 둘러번 후 고산병 핑계로 '올라오기 힘들다'는 둥 불만 섞인 이야기를 하며 배짱을 부리자, 방 값은 금세 30% 씩이나 할인되었다. '좋아, 일인당 10솔(약 3000원). 더 이상은 안 돼' 우리는 표정을 감추고 마지못해 짐을 부리는 시늉을 했다.
인터넷 창 한번 여는 데 5분, 차라리 불친절이라도 했으면 더 기뻤을, 무감각한 주인아주머니, 뜨거운 물은 고사하고 툭하면 끊기는 수도. 이런 숙소라면 하루에 관광객 한 명 유치하기도 힘들 것 같았기 때문에, 우린 아주머니의 파격적인 가격 제의를 납득할 수 있을 만 했다. 있는 것은 눅눅한 침대 달랑 두 개 뿐이었다. 하지만 지친 여행자들에게 침대 두 개 말고 뭐가 더 필요할까? 이런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잠에 든 후 날이 밝자 바로 방을 바꾸어버렸다.
여행은 간사하고 치사하며, 눈물이 다 날 정도의 사소한 본성과의 싸움이다. 문제는 언제나 지기 마련이라는 데 있고, 질 때마다 '대사를 위해 소사를 포기한다'는 알리바이를 세움으로써 자존심을 회복한다는 데 있었다. 우리는 결국 뜨거운 물이 나오고, 마음껏 주방을 쓸 수 있으며 아침 식사가 포함된 일인당 40솔(우리 돈 약 12000원)짜리, 초케차까(choquechaca) 거리에 위치한 키야 인띠(Killa Inti)라는 그럴싸한 숙소로 옮겼다. 그 곳에서 묵은 때를 밀어내고 거리로 나와 꾸스꼬 일정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꾸스꼬에서 배낭 메고 나침반 하나 들고 히치하이킹을 할 만큼 여유가 있지 않거나, 꾸스꼬에 사는 친한 친구! 를 하나�� 모른다면 꾸스꼬 일대를 관광하는 방법은 대개 비슷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관광 도시에 삭사이와망(Saqsaywaman)이나 친체로(Chinchero), 삐사크(Pisaq) 등 각 관광지로 가는 대중교통이 없다는 사실도 놀랍지만(대중교통은 분명 있지만, 결코 관광객들은 이용할 수 없다. 숨바꼭질에 자신있는 사람이나 동물적 본능으로 버스 정류장과 행선지를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엄청난 숫자의 투어 회사가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 일이다.
각 관광지 티켓은 일괄적으로 꾸스꼬 관광청에서 발행하며, 관광 회사에서는 대개 열 여섯 군데 정도의 유적지를 돌아볼 수 있는, 70솔(우리 돈 약 22000원) 짜리 티켓을 추천해 준다. 유효기간은 열흘. 물론 관광 회사는 차와 가이드를 제공할 뿐, 티켓은 본인이 구입해야 한다.
이런 시스템은 국가적으로 관광 가이드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인 국립꾸스꼬문화학교 (Instituto Nacional de Cultura Cusco)와 연계되어 작동한다. 우리와 상담한 여행사 직원역시 가이드를 목표로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했다. 외국어와 뻬루의 문화 역사, 그리고 인문학적 지식을 주로 공부하는데, 졸업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보다 약간 쉽다고 말했다. 우리가 만난 몇몇 가이드들은 그 곳을 졸업한 전문적인 사람들이며, 관광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가이드 자격증을 목표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꾸스꼬에서 관광 가이드는, 인텔리로 여겨지며 수입이 좋아 사람들에게 선망의 직업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사실 이는 슬픈 일이다. 최고의 재원이 관광 가이드를 할 수밖에 없는 일은 뻬루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자국의 역사를 공부하고 또 알린다는 측면에서 매우 고귀한 일이긴 하다. 그래도 자연이 준 열매를 따먹으며 과거를 마시고 사는 삶이란 '가난의 공포'에 휩싸여 죽지도 않은 경제를 굳이 '살려내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인물을 대표로 선출한 우리에게 여전히 낯선 일이다.
우리는 다섯 곳의 유적지를 이틀에 걸쳐 돌아볼 수 있다는 상품을 구입했다. 그리고 세 번째 날 맞추피추(Machu Picchu)로 가는 일정을 알아보기 위해 뿌노에서 만났던 한국인 학생에게 도움을 청했다. 여행사를 걸치면 입장권과 기차표 예매를 도와주고 수수료를 받기 때문에 직접 입장권과 기차표를 사기로 했다. 마추피추로 가기 위해선 세 가지 표가 필요하다. 먼저, 마추피추 입장권, 마추피추 ! 역에서 ��적지까지 올라가는 버스표, 그리고 꾸스꼬에서 마추피추 역까지 가는 기차표다.
이쯤에서 우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는데, 꾸스꼬로 향하는 여행 내내 기차표의 시세에 대해서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70~80 달러 정도 든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던 우리에게 매표소 직원이 96 달러를 외쳤기 때문이었다. 가격이 오른 지 몇달 되었다고 했다.
덧붙여서, 앞으론 더 오를 거라는 이야기도 친절하게 곁들여주었다. 물론 학생증이 있으면 할인이 된다고 했다. 학생증 있나요? 아니요….
게다가 입장권은 40달러, 버스비는 일인당 20달러라고 한다. 하루 일정에 일인당 15 만원이 증발하게 생겼다. 다른 방법은? 있지만 곧 없어질 거라 한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여하튼 우리는 눈물을 머금고 표를 구매했다. '에이, 다음에 시간 나면 마추피추 잠깐 들르지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일단 머리와 마음을 열고 유적지들을 돌아보기로 한다.
잉까의 혼 따위를 심각하게 포장하고 싶진 않다. 우리 안의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을 꺼내 들고 싶지도 않다. 꾸스꼬 여행 내내 날 괴롭히는 것이 있었다면, 어떻게 하면 신비하게 포장되어 있는 꾸스꼬의 모든 신화의 메타포와 동경의 이미지를 때려 부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또한 보너스로, 왜 사람들은 많은 돈을 들여 그런 고행을 하고 싶어 하는가에 관한 물음의 부스러기들도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참고로 몸을 혹사시키는 여행일수록 돈이 많이 드는 반자본주의, 반시장주의적인 풍경들에 관해서도 궁금했다.
이를테면 잉까 트레킹은 삼박사일 동안 생고생을 하며 마추피추까지 기어올라가는 여정인데, 그런 일정에 300달러 가까이 지불해야 한다.(여행사에서 부르는 가격은 천차만별이지만, 급속도로 오르고 있는 중이라 한다.)왜? 고대 잉까인들의 생활 방식에 조금이라도 더 접근하고 싶어서인가? 물론 그런 기억들은 기차와 버스를 타고 마추피추를 올라가는 것 보다 더 많은 기억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근본적인 것은 솔직히 '깃발을 꽂는 쾌감'일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2005년부터 뻬루 정부는 잉까 트레킹 가능 인원을 하루 50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는 유적지의 파괴를 우려한 것이다. 유네스코는 마추피추를 위험에 빠진 세계 유산 목록에 등재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까지 예약이 모두 찼다고 하니, 가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마추피추로 페�! 怜� 벌어 들이는 돈은 일 년에 20억 불이라 한다.
이날 오후에 우린 삭사이와망으로 출발했다. 대지의 여신, 파차마마를 모신 신전이라 하는 이 유적지는 장인정신이 물씬 풍겨 나오는 석공예의 오묘함을 눈으로 확인시켜주었다. 물론 이런 것을 며칠 보게 되면 질린다. 우리의 가이드를 맡았던 빈센트(Vincent)씨가 들려주는 농담이 차라리 재미있었다. '여러분들, 우리는 지금 삭사이와망에 와 있습니다. 참, 발음 조심하세요. '섹시 워먼(Sexy Woman)'이 아닙니다. '삭사이와망'입니다.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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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차마마를 모신 신전이자, 잉까의 요새이기도 한 삭사이와망. ⓒ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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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만들어진다. 뻬루의 이미지가 발명되는 한 방식. 삭사이와망에서. ⓒ손문상 | 이곳에서 우리는 뻬루의 원주민을 다룬 멋진 사진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목격할 수 있었다. 곳곳에 전통 잉까인 복장을 한 사람들이 야마(Llama)나 알파까(Alpaca)를 한 마리씩 끼고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1솔을 주고 사진을 찍는다. 이들은 어색함 없이 최대한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해주는 것이다. 갑자기 모든 게 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자연스럽고 선명하게 잉까인들을 찍기 위해선 게릴라를 방불케하는 촬영 작전이 필요할 거야.'라고 감탄하며 한국에서 봤던 많은 사진들에 대한 불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진 찍기 위해 적어도 돈은 주지 말자'고 다짐한 후 다음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버스로 향했다.
버스에 타려는 찰나, 한 친구가 엽서를 사라며 접근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 엽서에 내가 들어있다는 점이었다.
어, 어라? 순간 삭사이와망으로 출발하기 전, 관광객들을 열심히 찍어대던 '사진작가'들이 생각났다. 내 앞에서도 두어 번 셔터가 터졌는데, 나는 지역 기자들이나 홍보물 제작자들이려니 생각했었던 거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내 사진이 들어간 엽서가 버젓이 팔리고 있다. 한 장에 5솔. 어이가 없어 이들의 '마니또'스러운 호의를 거절했다. 자기 사진이 들어간 엽서를 보고 애교로 봐주며 5솔을 기꺼이 지불하는 관광객들도 간혹 있었다. 생계를 잇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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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알빠까' 제품을 사러 들어갔고, 옥수수를 팔던 아낙네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하루 동안의 투어 일정을 소화하고 돌아가는 길. ⓒ손문상 | 우리는 계속해서 잉까의 제례장이었던 퀜코(Q'enqo)와 잉까 왕이 신과 대화를 나누었다던 휴식장소인 땀보마따이(Tambomatay)그리고 잉까식 전투 요새라고 하는 뿌카뿌카라(Pukapukara)를 찍고 숙소로 돌아왔다. 사실 이런 유적들은 남한산성 같은 곳에 가도 비슷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인공 건축물일 뿐이다. 잉까의 유적이 고고학적 가치를 갖는 것은 유적에 대한 기록이 불분명하다는 점, 그래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는, 지극히 학술적인 부분들일 것이다. 또한 비극적인 역사가 한 몫을 할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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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인들은 '신성한 계곡'에 놓인 마을 삐사크와 태양의 신전으로 가는 길에 기념품을 팔고 있는 잉까의 여인. ⓒ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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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뻬루에서도 가장 유명한 마을 중 하나일 것이다. 삐사크 마을 전경. ⓒ손문상 | 둘째 날 아침 일찍 여행사를 찾았다. 우리는 잉까의 계단식 논이 인상적인 삐사크(Pisaq)라는 유적지를 찾았다. 고산지대에서, 그것도 낭떠러지 길 등산이라. 별로 내키지 않는 코스였지만, 이 잉까의 태양 신전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은 묵묵히 숨을 헐떡이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물론 육체적 고통은 멋진 경치에 의해 보상받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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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잉까의 모든 건축물은 신의 집이자 왕의 제례장이며 군사적 요새다. 태양의 사원. ⓒ손문상 |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는 잉까의 최후 요새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에서는 잉까 석축술의 진수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최후 요새는 사실 하나 더 있었으니, 그 곳이 바로 마추피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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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얀따이땀보는 마추피추가 발견되기 전까지 잉카 최후의 요새로 알려졌다. 왜 그들은 마추피추를 숨겼을까? 오얀따이땀보 앞에 선 우리의 가이드를 맡아주었던 빈센트씨(Vincent). ⓒ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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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르밤바 강과 오얀따이땀보 사이에 위치한 우르밤바 마을. ⓒ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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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학과 축성술에 능했다는 명성만큼 잉까 석축술의 진수를 볼 수 있다. 오얀따이땀보. ⓒ손문상 | 우리는 마지막으로 친체로(Chinchero)에 들렀다. 이곳 성당은 오래되고, 또 아름다우며, 스페인 정복 초기의 짜깁기 장식과 미술품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가이드인 빈센트는 이 성당이 어떻게 성모마리아와 파차마마를 동일시해서, 궁극적으로 스페인 선교사들에게 승리를 안겨 줄 수 있었는지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잉까인들이 믿는 악마를 '사탄'과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선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두려움을 이용하는 악랄한 방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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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체로 마을엔 스페인 선교 초기에 만들어진 성당이 있다. 미신을 대체한 카톨릭은 그 자체로 미신이 되었을 뿐이었다. ⓒ손문상 | 빈센트 씨는 이런 말을 남겼다. "서양의 사탄에는 여러 종류가 있죠. 사탄, 매피스토펠리스, 루시퍼, 벨제붑, 데몬, 이블…. 그리고 알란 가르시아." 이 부분에서 또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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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을 거닐며 꼬마 상인들에게 많이 시달렸다. 친체로 마을. ⓒ손문상 | 지금 꾸스꼬가 시끄럽다. 페루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 고대 잉카 도시인 마추피추로 가는 철도편이 꾸스꼬 노동조합에 의해 48시간 동안 점거당한 일이 있었다. 영국계 민영기업이며 꾸스꼬와 마추피추 사이의 여행 기차를 운영하는 '페루레일(Peru Rail)' 은 사고를 피하기 위해 파업기간 동안 운영을 멈추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뻬루 정부가 마추피추 주변 관광산업 개발권에 외국 자본과 민간 자본의 참여를 대폭 허용하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일어난 일이다. 뻬루에게 관광 산업은 미네랄, 석유 등의 광업 다음으로 큰 수입원이다.
한해 40억 달러를 굴뚝 없는 산업으로 벌어들인다.(그 중 마추피추 관련해서만 20억 불을 벌어들인다고 한다.) 특히 센데로 루미노소(Sendero Luminoso, 빛나는 길이라는 뜻의 농민 혁명 단체 이름) 등의 게릴라가 급속도로 사라져간 1990년대 중반 이후 뻬루 관광 산업은 꾸준한 성장을 기록해왔다. 이는 사상 최고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 현재, 뻬루의 효자 산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꾸스꼬 사람들은 이 법안에 '유산에 대한 모욕'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전면전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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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스꼬 시내의 밤 '일상'. ⓒ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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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날을 보기 힘들었던 꾸스꼬 시내 전경. ⓒ손문상 | 우리의 흥미를 사로잡은 이 가이드에게 유적지 민영 개발에 관해 물어보았다. "자, 여기 내 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쪽 방에서 부엌으로 가기 위해서는 큰 벽을 돌아야 해요. 그래서 불편하다 칩시다. 사람들이 이 방의 벽을 뚫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벽의 디자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인 면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 집에 대한 추억들이 많아서 가급적이면 손을 대고 싶지 않습니다. 분명히 유용하지 않은 벽이지만, 그 벽이 그 곳에 있음으로써 비로소 내 집은 완벽해집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 집의 벽을 뚫으시겠습니까?
생각을 해 보세요. 삐사크의 아름다운 마을과 계단식 경작지를 보셨죠? 그 한 가운데 힐튼 호텔이 세워집니다. 아주 고급스럽게요. 어떠십니까? 물론 경관의 훼손은 둘째 문제입니다. 무분별한 개발은 분명히 유적지의 오염과 파괴로 나타납니다. 이를테면 커다란 오성 호텔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낼 때 땅이 받아들여야 할 진동을 저 유적지들이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커다란 지진과도 같은 것입니다. 알란 가르시아는 그래서 '사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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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스꼬 주변 관광 개발권을 외국 자본에 개방하는 문제로 이 유명한 도시가 시끄럽다. '꾸스꼬는 팔리지 않는다. 법안 폐기.' ⓒ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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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갖고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손문상 | 빈센트 씨는 시위 당시 꾸스꼬 아르마스 광장에 발 디딜 틈 없이 모였던 엄청난 인파에 관해 묘사하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우리들도 꾸스꼬 시민들의 투쟁에 참여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정부와 언론에서 말하는 것과 달리, 시위로 인해 멈추어선 마추피추 행 기차 안의 사람들은 크게 불편해 하지 않았다는 말도 해 주었다.
"관광객들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대의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외국인 투자에 혈안이 되어 있어요. 급기야 관광산업의 특수성을 무시한 유례없는 '관광업 투자'를 허용하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입을 막고서 일방적인 보도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관광업은 수입도 수입이지만, 역사와 문화, 그리고 뻬루인들의 자존심이 결합된 특수한 산업입니다. 광산이나, 슈퍼마켓 같은 것이 아니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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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품 가게 주인이자 '아마루, 꼰도르, 뿌마(뱀, 콘도르, 푸마)' 라는 밴드의 리더이기도 한 빠꼴로(Pacolo)씨. ⓒ손문상 | 또한 이 일이 있기 며칠 전에는 페루 농민 연맹과 농부들이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하며 역시 마추피추행 철길을 점거했다. 비단 마추피추뿐만 아니라 페루 농민들은 수도 리마(Lima)를 중심으로 남부와 북부 해안을 잇는 범 아메리카 고속도로 봉쇄를 비롯해 전국적인 시위를 주도했다. 절박해진 농부들은 나무와 돌, 모래 등으로 길을 막았다고 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정부는 급기야 군대를 투입했고, 이 과정에서 농민 한 사람이 사망한 것이다. 물론 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정부의 공식 발표다.
꾸스꼬에서 만난 상인이었던 빠꼴로 벤뚜라(Pacolo Ventura)씨는 수도인 리마 남동쪽 320km 지점에 있는 아야꾸초(Ayacucho) 주에서만 4명의 농민이 사망했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열변을 토했다. 알란 가르시아(Alan Garcia)대통령은 "농민 사망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경찰의 노고는 대단한 것이었다"는 멘트로 다시 한번 농민들의 가슴에 피니시 블로우를 먹였다고 말했다. 우리는 불과 몇 년 전 있었던 전용철 농민의 죽음과 허준영 경찰청장의 '닭짓'에 대해 그에게 말해주었다.
농민들은 경작비용의 상승에 크게 좌절했고, 빚의 경감을 원했으며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은 미국 농산품의 수입으로 지역 시장의 과열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페루는 지난 12월에 미국과의 자유무역 협정서에 사인을 했다. 그리고 중국, 캐나다, 맥시코가 후순위로 협정 체결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빠꼴로 씨는 알란 가르시아를 '조지 부시의 하수인'으로 표현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렇게 확실한 증거가 어디에 또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다른 일들이라, 우리와 상관 없는 일들이라 말하길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를 것이라 말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고통을 외면하는 현실만큼 비극적인 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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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난 수의 관광객에 비해 상권이 작은 이유도 있지만, 뻬루 관광청의 정책이 개입되어 최고의 물가를 자랑한다. 마추피추 기차역 주변. ⓒ손문상 | 다음 날 마추피추로 향하는 날이 밝았다. 우리는 전날 빈센뜨 씨의 말들을 곱씹으며 기차를 탔다.
"마추피추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요. 하지만 정부는 '백 패커(배낭여행객) 들의 경제적인 투어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마추피추로 가는 길을 어렵게 만들고 있답니다. 동시에 기차표와 버스표 값, 그리고 입장료를 엄청나게 올리고 있죠. 하지만 사람들은 불평하면서도 마추피추에 올라갑니다. 배낭여행객들의 개인적인 '고행'을 택하는 게 어려워지고 여행사가 더 많이 생기면 당연히 세수는 올라갑니다. 거기에 '세계 문화 유산 보호'라는 거창한 명분이 결합하면 일은 완성되는 것이죠. 이게 마추피추 행 기차 삯이 계속해서 오르는 이유입니다. 앞으로는 더 오를 거예요. 120달러? 아니면 150달러까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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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전진과 후진을 반복한다. 꾸스꼬 시내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반복되어 지나간다. 마추피추로 떠나는 기차 안에서. ⓒ손문상 | 지금 기차 안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그런 말들은 전혀 반갑지 않다. 유적지 보호라는 명분이 옳은 것이라면 부당한 가격책정을 통해 폭리를 취하는 것 대신 친환경 개발을 해야 할 터, 문제는 거기에 무차별 외국인 투자를 허용하는 이중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는 뻬루 정부의 사악한 전략이다. 하지만 빈센트 씨는 자유 여행자에게 불리한 '폭리'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이기적인 일이지만, 그에게는 생계가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찌되었든 우리는 기차 안에 앉아 있고, 마추피추가 줄 거대한 감동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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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가 쉬면 사람들은 일을 한다. '옥수수와 치즈 사세요'. ⓒ손문상 | 마추피추는 지금까지 꾸스꼬를 헤매며 돌아다닌 다른 유적지와 차원이 다른 곳이다. 산 꼭대기에 300 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요새 겸 마을을 지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마추피추를 둘러싼 달걀처럼 솟은 거산 사이로 거칠게 흐르는 우르밤바(Urbamba)강의 물줄기. 그리고 그 물줄기가 만들어내는 안개의 신비함은 왜 마추피추가 온갖 부당한 요금정책에도 불구하고 올라설 가치가 있는 지 설명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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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추피추는 뻬루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다. 삐죽삐죽 솟은 바위 산 틈바구니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비극이 숨어있다. 마추피추. ⓒ손문상 | 마추피추는 알다시피 미국인 고고학자인 히럼 빙험(Hiram Bingham)이 발견(빙험 씨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했다고 주장하는 곳이다. 일반에 알려진지 불과 100년도 되지 않았다. 마추피추 입구에는 빙험의 발견을 축하하는 기념비가 서 있지만, 실상 발견자라 칭하는 자의 고국인 미국은 '신사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매우 치사한 방식으로 '발견자'의 오만함을 자랑한다. 예일대가 마추피추에서 발굴한 유물 4만 여점을 가지고 돌려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물론 예일대는 4천여 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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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추피추 전경. ⓒ손문상 | 뻬루 정부는 지속적으로 '문화재 강탈' 사실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있지만, 사정은 여의치 않다. 히틀러가 '문화재 부대'를 만들어 정복하는 지역마다 훔치고 사기 쳤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물론 모두가 알다시피 이는 유럽을 비롯한, 일본, 미국 등 제국주의 시절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국가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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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도 유적이지만, 주변 풍광은 그 자체로 경외심을 자아낸다. ⓒ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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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어 있는 비극을 덮으려는지, 신비함을 돋우려는지, 이 날 안개는 진했다. ⓒ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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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추피추 전경. ⓒ손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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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화 한 폭. ⓒ손문상 | 마추피추를 돌아본 후 돌아오는 길에 많은 친구들을 만났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추피추 민영 개발에 관한 이야기들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알고 있는 사람들은 3월 초로 예정되어 있던 시위가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가급적 시위 현장을 보고 싶었던 우리에겐 아쉬운 일이었지만, 우리는 곧 이곳을 떠나야 한다. 다음 날 우리는 꾸스꼬 시내에서 꾸스꼬 지역 의회와 함께 법안 폐기 운동을 펼치는 시민들을 볼 수 있었다. "El cusco no se vende... (꾸스꼬는 팔리지 않는다.)" 우리는 묵묵히 그들이 내민 탄원서에 서명하고, 작은 돈을 기부했다.
('뻬루' 대신 '페루', '잉까' 대신 '잉카' 등으로 적는 게 바른 표기법이지만, 여행기라는 특성을 고려해 현지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적었습니다.)
사진,글=손문상,박세열/. (mendrami@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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