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재명:옛 이기붕집터 (현 419 혁명기념도서관)
2. 종목
3. 위치
4. 찾아가는 법:서대문역에서 하차- 4번출구로 나가기-1km정도 쭉 직진-4. 19 혁명기념도서관 도착
5. 역사적 사실: 이기붕은 1896년 12월 20일에 충청북도 괴산에서 출생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 접시닦기 등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아가던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허정 등과 함께 『삼일신보』 발간에 참여하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왔다. 삼일신보는 1928년에 미국에서 창간되었던 주간 동포신문이다. 그는 권력을 쥐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이승만의 눈에 띄게되고,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 창당을 주도하게 된다. 또한 이승만이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유당 세력을 야당으로 쫓아낼 때 이를 도와주고, 재적 의원의 3분의 2가 1석차이로 모자랐지만 사사오입을 통해 이를 번복시키는 데 주된 역할을 한 계기로 한층 더 성장해 국회의장이 되었다. 여기서 사사오입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4까지는 버리고 5부터는 올리는 반올림의 개념이다. 이 사사오입을 악용해 원래 거부되었어야 할-이승만에게 유리한 법이다-를 허가시킨 그는 그의 아들을 이승만의 제 1 후계자로 대통령관저로 보낼만큼 세력이 커진다. 그의 집이 서대문 경무대라 불릴 정도였다. 그는 완벽한 이승만 다음가는 제 2인자였다.그러나 이 권력은 오래가지 못한다. 처음으로 나간 부통령선거에서 낙선했던 그는 이승만과 자신이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이 되도록 만들기 위한 부정선거를 계획했고, 3월 15일 선거이후 개표 및 3월 15일 선거 도중 적용했다. 표수를 세는 자리에 자유당 당원을 올리고, 유령유권자 조작, 입후보 등록의 폭력적 방해, 4할 사전투표, 투표함 바꿔치기를 하는 등 이 부정선거는 전국적인 부정선거였다. 그러나 결국 이 일이 국민들에게 새어 나가게 되고, 이에 반발하는 국민들과 언론을 계속 총칼로 찍어 누르지만 학생들에 이어 당시 존경의 대상이던 교수들까지 반대시위에 참여하게 되고, 이를 진압하러 보낸 군대까지도 교수, 학생들과 타협하는 등 전국적으로 반이승만, 반이기붕의 세력들이 들고일어나게 되었다. 이 여파로 인해 결국 대통령직을 하야한 이승만과 함께 부통령직, 국회의장 등의 직위를 사임하고 물러난다. 자유당정권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붕괴되고, 이기붕 일가는 경무대관사 36호실에 피신하고 있다가 4월 28일 새벽 5시 40분경 권총자살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살해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기붕 집터에는 현재 4. 19 민주혁명기념도서관이 건립되었다. 이곳에는 4. 19 당시 사람들의 사진과, 4. 19에 관련된 시 등이 있다.
6. 느낀점: 이기붕은 이승만과 함께 학생, 언론인의 입을 틀어막아가면서까지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기붕 역시 이승만을 도와가며 학생들의 입을 틀어막는 데 한몪했다. 그들은 그들의 권력을 죽을때까지 누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 둘은 계속 무력을 사용했고 결국 '총칼로 세운 자신들의 권력'을 '총칼을 앞세운' 국민들로부터 망하고 말았다. 우리들도 양심이 따르자는 대로 따르도록 노력하고, 폭력을 쓰지 말아야한다. 정당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