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년 무주택자 옥명호 본지 편집장 셀프인터뷰
최근 인기를 끄는 청춘드라마에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었다. 주방겸 거실 딸린 원룸을 자가로 소유한 주인공이 자기 집을 두고 이런 말을 한다. 문에서부터 신발장까지가 자기 거고 나머지는 은행 거라고. 잠시 스쳐간 그 장면이 우리 사회 대다수 주택소유자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듯해서 오래 기억에 남았다.
‘부동산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불패 신화와 ‘부동산 문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는 패배주의가 기이하게 공존하는 대한민국은, 《부동산 계급사회》에서 지적하는 대로 아파트와 빌딩과 토지라는 새로운 신을 모시는 사회가 되었다. 인간 삶의 수단이 되어야 할 부동산을 신으로 잘 모시면 상위계급으로 올라가고 믿지 않거나 외면하면 하위계급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빚이든 여윳돈이든 모두 부동산 신에게 바쳐진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지 않으면 나라 망한다면서도 내 아파트 가격은 떨어지면 절대 안 된다며 핏대를 세우는 아이러니를 어찌 이해해야 할까. 우리나라 주택보급률은 진즉 100%를 넘어섰는데(2010년 공식 주택보급률은 101.9%, 감사원 추정 실질 주택보급률은 105.7%), 왜 자가보유율은 절반을 겨우 넘어서는 수준일까(국토교통부 통계 2010년 전국 자가보유율은 54.3%, 2017년은 57.7%). 세밀한 통계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부동산 신화 및 이데올로기를 파헤친 《부동산 계급사회》에서 저자는 그 해답을 부동산 부자를 중심으로 한 투기성 ‘집 불리기’에 있음을 구체적 근거로 입증한다.
2008년에 나온 이 책에 따르면,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1990~2005년 사이 15년 동안 새로 공급된 주택 587만채 중 54%만 무주택자의 몫이 되었고, 나머지 46%는 다주택자의 ‘집 불리기’에 이용되었다. 같은 기간 서울로 범위를 좁히면, 88만채가 새로 공급되었는데 무주택자에게는 47%(41만채)가 돌아간 반면, 절반 이상이 다주택자의 투기에 충당되었다. 범위를 강남구로 더 좁혀보면, 같은 기간 새로 공급된 주택 3만 7,000채 중 무주택자는 겨우 5%(1만 8,000채), 나머지 95%(3만 5,000채)는 다주택자가 사들였다. 결국 집을 아무리 공급하고 늘려도 투기꾼이나 집 있는 다주택자의 주택 사냥에 먹잇감이 되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아파트나 부동산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손낙구, 《부동산 계급사회》, 후마니타스, 191-192쪽 참조)
이 주제와 관련하여 특별히 서울에서 살아가는 중년의 무주택자는 어떤 생각과 고민을 하고 있을까. 20대에 서울로 상경하여 이제는 4인 가구를 이뤄 살아가는 50대 중반의 옥명호 편집장이 자신의 ‘집 이야기’를 셀프 인터뷰로 풀어냈다.
사진: Pikist.com
지금까지 여러 집에서 살아왔을 텐데 기억에 남는 집이 있나.
몇 군데 있다. 가장 먼저 대학 1학년 때 구한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5만 원짜리 자취방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식허가 없는 가건물로, 지붕이 없었다. 지붕이 없다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마당 구석에 시멘트로 지은 사각형 공간이라서 천장은 있는데 지붕이 없었다. 편평한 시멘트 구조물의 천장 위에 장독대가 있었는데, 들어간 지 이틀째던가 이른 아침에 갑자기 천장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나더라. 무너지는 줄 알고 정신없이 뛰쳐나오니 가스 배달 기사가 커다란 가스통을 옮기느라 천장 위 시멘트 바닥을 좌우로 찍으면서 옮기고 있었다. 방과 분리된 수도꼭지 하나 있는 공간이 주방이었는데, 싱크대는 당연히 없어서 쭈그리고 앉아서 쌀 씻고 밥 해먹었고, 그 수도꼭지에 호수 연결해 샤워나 세면도 했다. 거기 물 빠져나가는 수채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서 방문을 스르륵 여니 눈동자 두 개가 빼꼼 비치더라. 쥐였다. 그래도 주인할머니는 되게 좋은 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학교도 가까워서 좋았고, 아침마다 잠을 깨우던 1호선 전철 지나던 소리도 나름 운치 있었다.
처음부터 꽤나 가라앉는 이야긴데, 왜 그렇게 열악한 곳을 구했나.
왜였겠나. 당시 내 생활비로는 그게 최선이었다. 1987년이었는데, 하숙비가 11만 원 할 때였다. 한 학기 하숙을 했는데, 거의 매일 늦게 들어가다 보니 하루에 두 끼는 못 먹게 되더라. 그래서 2학기부터 자취를 택했다.
그 뒤로 계속 그렇게 자취를 했나.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옥탑에서도 살았고, 지하, 반지하에서도 살았다. 영화나 드라마 보면 더러 옥탑이 낭만적으로 그려지기도 하던데, 내가 산 곳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름엔 낮이나 초저녁까지도 집에 있으면 너무 더워서 절로 땀이 쏟아졌다. 에어컨이 있는 학교도서관을 무조건 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여름에는 화장실을 좀 길게 다녀오면 무조건 샤워를 해야 했다. 거기 앉은 채 땀으로 범벅이 되었으니까. 밤에 잘 때도 더워서 옥상에 돗자리나 박스를 깔고 자다가 소나기를 뒤집어쓰거나 모기한테 엄청 뜯기기도 했다.(웃음) 지하나 반지하 살 때는 잘 몰랐는데, 옥탑으로 이사하고서 아침마다 눈이 저절로 떠지는 경험을 하면서 지하살이가 몸에는 별로 안 좋았구나 했다. 그래도 돌아갈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게 좋았던 시절이었다. 몇 년 전엔가 형편이 어려운 청년들의 주거형태로 ‘지옥고’(지하·옥탑·고시원)를 취재한 기사를 유심히 보았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자기만의 공간 하나 얻는 게 쉽지 않구나 싶어 마음이 되게 착잡하더라.
결혼하면서는 주거형태가 달라졌나.
졸업한 학교 근처에 신혼집을 전세로 구했다. 교통도 괜찮고, 캠퍼스를 공원처럼 이용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주변 식당 밥값이 저렴했다(아내와 외식할 때 비싼 메뉴에 속한 부대찌개가 2,000원이었다). 지상은 엄두도 못 내고 대출을 받아서 구한 방 두 칸짜리 반지하였다. 그때 혼자서 도매상가 돌아다니면서 벽지와 등을 사와서 후배 도움 받아 도배하고 등도 모두 새로 달아서 신혼집을 꾸몄다.
신혼집인데다 직접 꾸미고 단장한 집이라서 더 추억이 많겠다.
직접 도배하고 등 새로 갈면서 집 꾸민 건 나중에 후회했다.(웃음) 신혼집 꾸미고 몸살 나서 사나흘 몸져누웠는데, 따져보면 그냥 업체에 맡긴 게 나았겠다 싶더라. 거기 살 때는 신혼이라 즐겁기도 했지만, 좋은 이웃과 벗들을 사귀게 되어서 좋았다. 졸업 후에도 정기적으로 만나던 선교단체 성경공부모임 멤버들을 집으로 초대하거나 아예 집에서 모임을 하기도 했다. 그리 보면 집이라는 게 결국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공간이어서 건물로서 집 자체의 안락함이나 쾌적함도 중요하겠지만, 어떤 사람과의 만남과 추억을 매개하는지가 집을 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해주는 듯하다. 그 시기 우리 부부와 비슷한 연배의 신혼 부부를 알게 되었는데, 서로 신혼집을 자주 오가며 식사도 하고 맛있는 게 있으면 서로 나눠먹으며 지냈다. 결혼 시기도 비슷한데다 첫 아이를 낳은 때도 비슷해서 계속 친구처럼 지냈는데, 그 전에는 전혀 모르던 사이였다. 지금은 다니는 교회도 같고 평생의 벗으로 살아가는데, 두 집 다 서로 가까이에 얻은 신혼집을 통해 만남과 우정을 키워온 것이다.
그렇게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인간관계가 확장되거나 깊어진 경험이 또 있나.
대학 시절 마지막 해를 보내던 반지하가 생각난다. 집이라기보다는 좁은 주방겸 거실이 붙은 한 칸 방이었는데, 거기서 후배 둘과 함께 자취를 했다. 그때 후배들과 함께 활동하던 선교단체 멤버 몇 명과 간사님까지 해서 예닐곱 명이 아침마다 우리 자취방에 모여 밥을 해먹었다. 다들 지방에서 올라와 학교 인근에서 자취를 했는데, 당번을 정해서 아침을 준비하여 함께 왁자하게 웃고 떠들면서 밥을 지어 먹고는 하루를 시작했다. 그때 밥상 멤버들은 지금까지도 정기적으로 만나는데, 저마다 각 분야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멋지게 살아간다. 집이라는 공간이 사람과 사람을 매개하고 소소한 일상을 함께하는 터전이 되어 결국 그렇게 이어진 사람들 사이에 깊은 유대와 우정을 만들어주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반대로 단절과 고립의 공간이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앞서 얘기한 철길 옆 창고 방이 그랬다. 수면과 식사를 위한 필수 기능을 제외하면, 어떤 정서적 쉼이나 아늑함을 누리지는 못한 공간이었다. 주인집 안채에서 분리되어 마당 한 켠 화장실 옆에 자리잡은 그 창고 방은 지금도 생생하게 그려지는데, 출입문을 닫고 들어가면 외부 세계와 고스란히 단절되고 고립된 느낌이 든다. 마치 철길 옆에 그 창고 방 하나만 있는 듯 휑하고 쓸쓸하여 한기마저 느껴질 것만 같다.
다시 이야기가 지하로 가라앉는 느낌이다.(웃음) 집이 다른 의미로 다가왔던 순간은 없나.
중요한 기억이나 추억이 새겨진 집은 때로 단순히 건물이나 공간을 넘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고향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내가 태어나고 청소년기를 보낸 집은 옛 성터 바로 아랫동네에 있었는데, 초가지붕이어서 때마다 짚으로 지붕을 엮어 지붕갈이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마을 한복판의 번듯한 슬레이트 집으로 이사했는데 어머니가 무척 좋아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 집을 허물고 양변기를 앉힌 현대식으로 지은 게 20여 년 전인데, 부모님 두 분이 사시다 돌아가신 뒤로 형님이 팔아버렸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을 때 고향을 잃어버린 감정을 처음 느꼈는데, 두 분이 마지막까지 사시던 집마저 남의 소유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고향에서는 내 존재의 뿌리가 뽑혔구나, 이젠 정말 못 돌아가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더라. 부모님 묘역을 찾아가도 고향 마을은 갈 일 없겠다 싶었는데, 정말 그렇게 되더라. 이렇듯 집은 그저 단순한 물리적 주거 공간이나 건물을 넘어 사람(관계)과 사연과 어떤 정서가 깃들고 쌓이는 애정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자가가 아니어서 지금까지 이사를 자주 했을 것 같다.
고등학생 시절 자취할 때야 달리 짐이랄 게 없었으니까 이사랄 것도 없겠고, 대학교 진학 이후부터 이사를 계속 다니며 살았다. 대학생 때는 휴학 기간 포함해서 1년에 한 번 이상 옮겨다녔고, 졸업 후 결혼하기 전까지도 서너 번, 결혼 후에도 2년이나 4년 간격으로 전세살이를 하면서 여섯 번 정도 이사했다. 그러니까 서울 올라와서 이제까지 35년여 간 모두 열다섯 번 정도 옮겨다닌 셈이니까 그렇게 자주 이사한 건 아니지 않나 싶다.
주거지를 옮기는 게 상당히 스트레스가 따르는 일일 텐데, 이사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
오래 전에 어느 기사에서 읽었는데, 이사 스트레스가 사별로 인한 스트레스와 맞먹는다는 내용이었다. 아마 우리나라 무주택 가구마다 이사에 얽힌 사연은 무진장하지 않을까 싶다. 새로 집을 구할 때마다 내가 바라는 집 수준과 주인이 내놓은 전세금은 어쩜 그리도 차이가 나던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집은 전세 보증금이 반드시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고, 보증금이 바라는 조건에 근접한 집은 기대에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 이사 때마다 치솟는 전세보증금을 쫓아가느라 은행 대출 받으러 뛰어다니는 건 스트레스 축에도 들지 않았다. 이사 당일에 보증금을 돌려받는 당연지사가 당연하지 않은 일인양 지켜지지 않을 때는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어느 때는 우리가 떠나는 집에 전세 들어오는 세입자가 이전 주인과 싸우는 바람에 보증금을 받아오지 못해서 그 주인집까지 찾아가서 얘기를 들어드리고 분기를 풀어드리고 나서야 보증금을 받아서 이사할 집으로 겨우 들어간 적도 있다.
그런 일들을 겪다보면 내집마련에 대한 마음이 절실했을 것 같다.
그렇지는 않다. 지금 사는 곳이 장기전세아파트인데, 앞으로 12년 더 살 수 있다. 이런 공공주택이 더 많이 보급된다면 굳이 은행 빚을 수 억씩 짊어지고 서울에서 아파트를 살 이유가 없다. 우리나라 전체 주택에서 공공주택이 차지하는 비율이 겨우 7%인데 비해, 선진국은 20-30%라는 기사를 읽었다. 2025년까지 그 비율을 겨우 3% 끌어올려서 10%를 만들겠다는 청와대 구상에 기획재정부 관료들이 반대하고 나섰다는데, 정부 공공주택정책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공공주택정책이 잘 안 먹히는 게 집값하락을 반대하는 부동산 부자들 때문인지, 부동산 투기세력 때문인지, 아니면 건설업과 연결된 기업·관료·이익단체 등의 이른 바 ‘토건 마피아’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주택이 투기수단이나 부의 증식 수단이 아니라 원래 목적 그대로 오롯이 주거(거주) 수단으로만 기능하는 주택 공공성이 확산되고 굳건해지기를 바라기도 난망해 보인다. 실은 지금 사는 임대아파트에 들어올 때 주변 시세 대비 20-30% 저렴하다던 전세보증금도 힘에 겨운 금액이었다. ‘공공주택이라면서 뭐 이렇게 전세금이 전혀 공공적이지 않게 높아?’ 하는 생각에 화가 날 정도였다. 은행 대출로도 모자라서 결국 가족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처럼 가족 도움받을 수 없었던 이들은 들어오지 못했을 거다. 그래도 보증금 인상률이 2년마다 5%여서 공공주택 이름값은 하는 수준이다.
우리 사회에는 아파트 가격은 떨어지 않는다는 신화가 있어서, 다들 사면 무조건 오를 걸 믿고 수억 대의 대출을 받아서라도 청약경쟁에 뛰어들곤 한다. 아파트 청약을 시도해본 적은 없나?
올해 처음으로 한번 알아볼까 하다가 금세 접었다. 8월이던가, 서울 어느 지역에 꽤 규모 있는 분양단지 청약이 예정되어 있는데 거기 지원해보라고, 앞으로는 그 조건으로 서울에서 집 사기는 어려울 거라고 아내의 지인이 얘길 했다더라. 당첨이 되더라도 3분의 2를 대출로 충당해야 할 수준의 집값이었는데, 남은 생애 동안 다 갚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70세에 은퇴한다는 전제로 현재 급여를 매달 통째 넣어야 겨우 다 갚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물론 이자는 뺀 거다. 아무리 100세 시대라지만, 옛말에 대문 밖이 저승이라고 남은 수명을 어떻게 장담하나. 일단 당첨만 되면 곧바로 수억이 오를 텐데 뭐가 걱정이냐고, 살다가 버거우면 팔면 차익이 남지 않냐고 하더라만, 내가 우둔한 건지 그렇게 해서 수억을 벌 마음도 없고 애초에 은행 빚에 인생 얽매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내도 우리 형편에는 너무 과하다며 깨끗이 접자고 하더라.
내집마련의 꿈을 접었다는 얘기로 들린다.
그럴리가! 다만, 굳이 이 과밀한 거대도시에서 손에 한 번 쥐어보지도 못할 수억의 빚을 짊어지면서 아파트 한 채 장만하는 걸 꿈으로 삼고 싶진 않을 뿐이다. 바람이라면, 바다가 가깝거나 보이는 곳에 느슨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갈 이들과 함께 집을 지어 사는 것이다. 이 바람이 현실화하려면 아무래도 둘째가 독립할 때쯤인 10여 년 뒤여야 할 듯한데, 실제로 가능할지는 그때가 되어야 알 수 있는 일 아니겠나. 그때의 나는 60대 중반이 되어 있을 텐데, 그 나이 즈음 인생 후반기를 함께 살고 늙어갈 이들과 그렇게 벗 삼아 이웃 삼아 지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있을까 싶다. 그렇게 서로 약함을 채우고 돌보고 돕는 인생 후반전이라면 더 바랄 게 없을 거 같다. 너무 이상향을 꿈꾸는 건지 모르겠지만.
대도시를 벗어나서 집을 짓고 사는 건 언제부터 생각한 건가?
탈서울을 생각한 건 20년도 더 되었다. 지금이 결혼 24년차니까 아이가 태어난 뒤부터 줄곧 해온 생각이다. 서울 올라온 뒤 10년 넘게 생활한 이후 자연스레 든 생각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라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라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춘기 때 혼자 속앓이를 하면서 많이 방황했는데, 그때 나를 붙들어주고 위로해준 게 다름 아닌 고향마을의 자연이었다. 무인도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길다란 모래해변이 그랬고,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옛 성터 아래 언덕이 그랬고, 언제 어디서나 눈에 들어오는 바다가 그랬다. 그래서 바다가 보이는 지역으로 옮겨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포기한 적이 없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교회 안에서도 몇몇 가정이 공동체살이로 집을 짓고 살자는 얘길 진지하게 나눴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직장 문제와 교회, 경제적 형편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구체적인 비전과 용기가 없었기 때문 아니었을지. 지금은 둘째가 고2라서 수년 내로는 물리적으로도 이주가 어렵다. 그래도 여전히 아내와 서로 ‘노후를 이 대도시에서는 보내지 말자’는 얘길 계속 한다. 대도시 생활이 큰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앞서 말했듯 내 경우는 성장기를 바다 곁에서 바다를 보며 보냈기에 노년기도 그렇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얘기일 따름이다.
그렇지 않아도 재택근무 방식이 늘어나면서 남양주나 양평 같은 경기도 일대의 수도권뿐 아니라 충청, 강원 지역까지 생활권이 확장되는 ‘근수도권’ 이야기가 나온다.
강릉에 여행차 갔다가 아예 이주하신 분을 만나 길게 대화한 적이 있는데, 재택근무와 서울 출퇴근을 반반 정도 하신다고 들었다. KTX가 연결되어 가능한 이야기다. 강릉에서 청량리까지 1시간 40분, 서울역까지가 2시간 정도 소요되니 말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이른바 언택트 생활방식이 전 세계적으로도 확산되면서 재택근무가 대안적 근무 형태가 되지 않았나. 최근 신문기사를 보니까 올해 8월 고용노동부 설문조사 결과, 5인 이상 사업장 인사담당자 400명 중에 48.8%가 재택근무를 한다고 답했다더라. 흥미로운 건, 재택근무로 업무효율이 높아졌다고 응답(‘매우 그렇다’+‘그런 편이다’)한 기업 비율이 66.7%였고, 코로나 종식 후에도 51.8%가 계속 재택근무를 시행하겠다고 했다는 거다. 그 기사는 과거의 ‘직주근접’(직장과 주거지가 서로 근접) 시대에서 ‘직주일치’(주거지가 곧 일터) 시대로 변화해가는 흐름을 실제 사례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굿바이 대도시’ 2020년 10월 10일)
그럼에도 주변에 집을 사서 들어갔거나 아파트를 분양받은 이들 얘기를 들을 때, 집 가격이 확 뛰어올랐다는 얘기를 들을 때 무주택자로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적은 없었나.
우리 아내가 들으면 타박할지도 모르겠는데, 아파트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 그다지 없어서 그런지 거의 없다. 그보다는 고양시나 파주, 남양주, 양평 같은 서울 인근 외곽에 단독주택이나 여럿이 공동주택을 지었다는 얘길 들으면 좀 샘이 나더라.(웃음) 아 또 있다. 몇 달 전부터 유튜브를 좀 챙겨보기 시작했는데, 어쩌다 부동산 투자 이야기가 나오는 채널들을 보게 되었다. 개중엔 이른바 인플루언서도 있었는데, 자기는 부동산과 주식을 해서 지금 집이 몇 채고 얼마를 벌었다는 간증(?)을 하면서 채널 구독자들에게도 투자 방법을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부동산, 주식 어느 것도 내게는 미지의 영역과 같아서 공부를 좀 해야 하나 싶어 한동안 그쪽 채널을 제법 관심 있게 보다가 지금은 안 본다. 정신 건강에 안 좋더라. 그들이 말하는 성공 방법을 따라할 열의나 재간도 없는데다, 내가 그렇게 한다고 성공한다는 보장은 또 어디 있을까 싶었다. 게다가 계속 보다 보니 욕망이 자꾸 커지더라. 부동산을 기반으로 자산을 좀 불리면 아이들 학비도, 우리 부부 노후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 그 욕망이 자꾸 나를 조바심 나게 하고 현재의 삶을 스스로 못마땅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쪽으로 몰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기야 두 아이가 나중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면 나보다는 좀 나은 여건에서 시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는 욕심은 쉽게 내려놓지 못하겠더라. 그래서 아이들 생각을 하면, 서울에 작은 빌라라도 하나 마련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요즘 집을 소재로 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늘어나고 있다. 일반인 의뢰자에게 연예인 팀이 집을 구해주는 내용부터 이동식 집 구조의 캠핑카가 주요 세트로 등장하거나, 집 내부 공간 재구성을 통한 일상의 변화와 힐링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그만큼 집에 대한 대중의 욕구를 방송 콘텐츠에 반영하는 셈인데, 대체 집이란 인간에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음, 그건 철학자나 건축가에게 물어야지 왜 나한테 물어보나.(웃음) 나는 개인적으로 EBS 다큐 <건축탐구 집>을 유튜브로 가끔 본다. 집을 짓거나 개조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건축전문가 부부가 찾아가서 그 집과 공간,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얼마 전에는 산자락 아래 꽤 가파른 언덕을 깎아내지 않고 지어올린 목조주택과 집 주인 이야기를 봤는데, 집이 꽤 근사해보이는데 화려하진 않고 자연과 잘 어울리는, 마치 집 주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배어 있는 듯했다. 주인 분 이야기가 잔잔하게 다가왔는데, 원래는 고양이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집에 살면서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배고픈 길고양이들을 보고 자연스럽게 집 베란다에 먹이와 물을 내놓기 시작했고, 그렇게 “그들과 그냥 함께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다는 거였다. 그분의 집과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서, 집이란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과 동물, 뭇 생명이 함께 공존하고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쓰일 때 더 근사하고 운치 있게 빛나는 건가 싶더라. 또 하나는 <집 이야기>라는 영화에서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딸과 열쇠수리공 아버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맘에 드는 집을 못 구한 딸이 오래전 떠나온 아버지 집으로 다시 들어간다. 엄마도, 언니도 아버지와 관계가 틀어져 진즉 떠나간 그 집은 낮에도 어둑하니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데다 안방에도 창이 없고 방문들도 뻑뻑해서 잘 여닫아지지 않는다. 그 집은 오랫동안 가족과 결별한 채 시대에 뒤처져가는 낡은 아날로그 열쇠수리공으로 살아가는 아버지를 닮아 있다. 이 잔잔한 영화에서 거의 끝무렵에 빈 목관 하나가 나오는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뚜껑을 닫지 않은 채 비어 있는 관을 보면서, 창이 없는 집이든 바다뷰가 한눈에 들어오는 집이든, 반지하 방 한 칸에 살든 초고가 스마트아파트에 살건, 결국엔 누구나 그 집을 떠나게 된다는 것, 아무리 큰 대저택에 살았어도 최후에는 그 자그마한 관에 눕게 된다는 것. 이 단순한 진리가 새삼 다가오며 소름이 돋았다. 내가 너무 중년 티를 낸 건가.
|
첫댓글 인생 후반기를 함께 살고 늙어갈 이들과 그렇게 벗 삼아 이웃 삼아 지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