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교수의 역사칼럼 (75)
권중달(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越境納土
경계를 넘어서 토지를 헌납하였다.
국회의 절대 권력을 쥐고 있는 야당대표가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지 고양이 색깔이야 무슨 상관이냐?’라는 말을 하면서 국민이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정책이라면 비록 여당의 정책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였다.
사실 이 말은 공산당이 중국을 지배하고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3백만 명의 아사자(餓死者)가 나온 뒤에 덩샤오핑(鄧小平)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내세운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원용(援用)한 말인 것 같다.
덩샤오핑은 공산주의가 가져 온 인민의 아사(餓死)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실용주의 노선으로 변경하면서 이 말을 했다. 흰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인지, 검은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공산주의가 좋으냐, 자본주의가 좋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민들이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훌륭한 좋다는 말이다.
덩샤오핑은 이러한 철학의 전환으로 죽의 장막으로 가려 있던 중국이 개혁개방을 통하여 적대시하던 서방세계와 소통하면서 중국의 경제를 오늘날처럼 끌어 올리는 물꼬를 텄고 50~60년이 지난 지금 미국과 견주며 경쟁할 정도로 국력을 끌어 올렸으니 그의 흑묘백묘론은 현대 중국에 있어서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였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이라는 것도 전국시대에 순자(荀子)가 말한 ‘군주민수(君舟民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순자(荀子)의 애공편(哀公篇)에서 권력자인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배를 띠우는 물이라고 한 것이다. 물이 잔잔할 때는 물위에 떠 있는 배는 편안하고 안락하지만 일단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친다면 배는 뒤엎어질 수 있다. 그래서 배를 탄 사람은 비록 권력 있고 지체 높은 군주라고 하여도 물이 파도치지 않고 잔잔하기를 바라거나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군주민수라는 말은 상징적인 말이지만 지배 받는 백성이 편안하게 살게 하고 화내지 않게 해야 한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니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공산혁명과 문화대혁명이라는 소용돌이를 겪고 나서야 겨우 순자의 군주민수라는 2천 몇 백 년 전의 진리를 깨달은 셈이니 늦기는 몹시 늦은 셈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이 있던가? 덩샤오핑의 뒤늦을 깨달음은 그 후에 중국에서는 다시는 3백만 명의 아사자가 나오는 일이 없었으니 지도자로서 올바르게 생각을 전환한 것이라 할 것이다.
사실 이 순자의 말처럼 물인 백성이 화가 나서 철옹성 같은 왕조를 무너트린 예는 항상 왕조말에 나타나곤 하였다. 이런 왕조말적 현상을 역사에서는 때로는 반란세력이라고 쓰고 있기는 하지만 농민봉기는 왕조를 무너트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의 진(秦)도 결국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의 반란에서 시작되었고, 2백 년 동안 왕조를 지탱하던 전한(前漢)도 왕망의 찬탈과 독재가 녹림군(綠林軍)을 등장시켰다. 후한 말 환관의 발호와 황건적(黃巾賊)의 등장은 그후로 중원대륙을 400, 500년 동안 분열의 시대를 만들었다. 근 300년을 지탱하던 당(唐)왕조도 황소(黃巢)의 난으로 기울어졌고, 북방의 거란, 여진, 몽고의 남하와 중원지역이 북방민족의 무대가 된 것은 모두 정통왕조라고 자부하는 한족(漢族) 왕조가 자초한 것이다.
따라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왕조가 정통이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는다. 그저 편안히 살게 하는 지도자가 좋고, 그런 사람의 주의주장(主義主張)이 좋을 뿐이었다. 그러니 역사에서 흔히 백성을 잘 살게 하겠다는 이론으로 백성을 유혹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알맹이가 없으면 곧 뒤 돌아 서는 것이 백성이다.
그 극단적인 예를 속자치통감에서 보게 된다. 시기는 남송 말, 300년을 지탱해 온 북송과 남송의 운명이 몽고족 원(元)의 남하로 끝날 무렵의 일이다. 몽고족은 월등한 무력으로 대몽고제국을 건설하였고, 쿠빌라이의 원은 중원지역을 맡아서 남송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한족(漢族)은 이민족에 대한 저항(抵抗)해야 하는 것이 아니가? 말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 몽고족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후대에 한족(漢族) 학자들은 몽고족의 지배를 ‘구유십개(九儒十丐)’라는 말로 몽고인들이 지식인 유학자를 멸시하였다고 술회하였다. 즉 백성을 10등급으로 분류한다면 맨 마지막 등급인 10등급이 걸인(乞人)이라면 전에 대우받던 유자(儒者)는 9등급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몽고족의 원(元)은 실용주의였다. 유자를 특별히 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회에 기여하는 정도로 보아 도가(道家), 불가(佛家)와 비슷한 처우와 대우를 했다. 어찌 보면 백성들의 소망하는 것을 잘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실용노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노선의 정치가 성공한 경우가 원 세조 쿠빌라이가 염희헌(廉希憲)을 형남(荊南)지방의 염방사(廉訪使)로 임명하였던 예에서 나타났다.
위구르 출신의 염희헌이 중국 남부지역인 형남(荊南)지역의 책임자로 갔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는 새로 원의 영토가 된 형남지역을 통치하면서 지배자로서 횡포하는 대신에 백성들을 편안하게 다스리며 불안하지 않게 하였다. 그러고 나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였다. ‘교육을 더 이상 늦출 수는 없다.’라고 말하면서 대대적으로 학교를 일으켰다. 그 위에 교관(敎官)을 선발하고 책을 구해다가 경적(經籍)을 비치하였다. 착취대신에 백성을 위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반드시 한인(漢人)이 꼭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 소문은 이웃으로까지 퍼졌다. 형남(荊南)지역 밖에 있는 사주(思州)와 파주(播州)에 근거를 둔 전씨(田氏)와 양씨(揚氏) 두 집안이 항복을 받아 달라고 요청하여 왔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 서남지역 산 속에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집단인 서남계동(西南溪峒) 사람들도 경계지역을 넘어서 형남지역으로 와서 항복할 터이니 항복을 받아달라고 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쿠빌라이는 ‘먼젓번 조정에서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영토를 얻을 수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 염희험은 수 천리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 경계지역을 넘어서까지 와서 땅을 헌납하였으니 그 정치와 교화(敎化)의 상황을 볼만하다.’고 하였다.
각설하고 야당대표의 ‘쥐 잘 잡는 고양이’론이 덩샤오핑처럼 정말로 생각을 대전환하여 백성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려는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아무리 정적인 대통령이 구속되었다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권력 싸움이고 그들만의 게임으로 본다. 주목하는 것은 구속되었던 사람이 복귀하던, 아니면 정권교체가 되던 쥐를 잘 잡는 고양인지 아닌지를 백성들은 계속하여 검증할 것이다.
첫댓글 말만 앞세우는 자의 행위가 믿을 수 없는 것은 그 당의 해결방식에 1인의 결정에 따른다는 점이다.
좋은 정치 평론 잘 읽었습니다. 고전의 내용을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