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예수뎐]인도인 눈에는 왜 갠지스 강이 천국으로 흐를까
[백성호의 예수뎐]
이스라엘 북부의 도시 티베리아스에서 남쪽 방향 갈릴리 호숫가로 갔다. 그쪽 호숫가는 산책로도 있고 호수 주변에 공원도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와서 바비큐를 즐기고 있었다. 호숫가에는 부드러운 모래밭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알갱이는 잘게 부서진 조개껍데기였다. 유대인들은 비늘이 없는 해산물은 입에 대지 말라는 율법 때문에 조개를 먹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호숫가에는 오랜 세월 부서지고 부서진 조개껍데기가 지천이었다. 처음부터 그랬을까. 유대 율법은 시작부터 격식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구약에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율법에는 하느님에게 올리는 제사와 성막의 설치, 제사장의 직무와 유대인의 생활 방식 등 아주 구체적인 항목까지 기록돼 있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제사다.
인도의 힌두교인은 갠지스 강의 천국으로 흐른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 후에 유해를 화장해 갠지스 강에 뿌려지길 바란다. [중앙포토]
(36)인도 사람은 왜 갠지스 강이 천국으로 흐른다고 믿을까
당시 유대인들은 소나 양, 염소 등을 잡아 반으로 갈라 제단 위에 올려놓고 태웠다. 단순히 소나 양을 하늘에 바치는 의미가 아니었다. 죄를 지은 자신이 누워야 할 자리에 소나 양을 대신 눕히는 제사였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불타는 양을 보며 자신의 죄를 참회했을 터이다.
유대인은 구약 시대에도 정결한 가축을 태워서 하늘에 바치는 번제를 지냈다.
인도에 처음 갔을 때다. 인도에 다녀온 사람들에 “어디가 제일 좋으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바라나시의 갠지스 강이 가장 좋았다고 말했다. 인도의 여러 지역을 돌다가 드디어 바라나시에 도착했다. 나는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시장통처럼 어수선한 길을 헤치고 갠지스 강으로 갔다.
강가에서는 꽤 큰 규모의 종교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마에 붉은 점을 찍은 힌두교인들이 많았다. 불빛이 반짝이고 음악이 울려 퍼졌다. 매우 이국적인 분위기였다. 그렇긴 했지만 어째서 갠지스 강이 특별한 곳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작은 나룻배를 타고 갠지스 강을 건넜다. 힌두교인들은 하늘에 있던 갠지스 강이 시바 신(힌두교의 신)의 몸을 타고 땅으로 흘러내렸다고 믿는다. 그래서 죽은 뒤에 이 강에 뿌려지길 바란다. 갠지스 강이 신의 나라로 흐른다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다. 힌두교 신자였던 인도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의 유해도 화장한 뒤 갠지스 강에 뿌려졌다. 실제로 갠지스 강 주변의 강들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데, 갠지스 강만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천국으로 흐르는 강, 갠지스. 강의 하류 쪽으로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럼 저 너머에 천국이 있는 걸까. 노을이 지는 갠지스 강. 저 너머에 말이다. 인도의 힌두교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그랬다. 갠지스의 석양은 매혹적이었다. 그래도 나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갠지스 강이 어째서 그토록 특별한 장소인지 말이다.
갠지스 강에 해가 비치고 있다. 인도의 힌두교 신자들은 갠지스 강이 천국으로 흐른다고 믿는다. [중앙포토]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내렸다. 배는 좀 더 상류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강가에 불을 피우고 뭔가를 태우고 있었다. 그쪽으로 배를 대고 내려서 보니 화장터였다. 말이 화장터이지, 아무런 건물도 없고 아무런 칸막이도 없었다. 그냥 강가에서 장작을 얼기설기 쌓아두고 시신을 태우고 있었다. 관도 없었다. 시신을 그저 얇은 천으로만 동여맸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들것에 실린 시신 몇 구가 강가로 옮겨지고 있었다.
불과 3m 앞이었다. 그토록 신랄한 화장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투둑투둑’ 하는 소리와 함께 물이 뚝뚝 떨어지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적나라한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그 순간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꽝!’ 하고 맞는 느낌이 들었다. ‘저게 바로 나구나!’ 싶었다. ‘인생은 순간이구나. 잠시 후면 내가 저 위에 눕겠구나. 장작 위에서 타고 있는 저 몸이 바로 나구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어떠한 사유나 논리, 설명도 필요 없었다. 그저 ‘꽝!’ 하고 한 대 맞았다. 폭풍처럼 후려치는 강고한 펀치였다.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 ‘인간의 삶이란 정말 순간이구나. 그럼 뭘 해야 하지?’ 잠시 후 답이 떠올랐다. ‘내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바쁘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뤘던 것. 그걸 하자. 언제? 지금 당장!’ 그러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어째서 갠지스를 특별하다고 하는지 말이다.
갠지스 강가에는 힌두교 행사를 위한 깃발이 늘어서 있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화장터가 있었다. [중앙포토]
모세 당시의 유대인들은 어땠을까.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고 있는 양, 그 제물은 사실 ‘자기 자신’을 대신한다. 유대인들이 그 광경을 아무런 감정 없이 쳐다봤을까. 장작더미에 불이 붙고 연기가 치솟고, 붉게 드러난 양의 살이 불에 닿고, 바람이 불어 불길이 더 거세지고 그 속에 누운 양의 몸뚱이가 타들어 가는 광경을 지켜보며 유대인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가슴을 치지 않았을까. 양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체험하지 않았을까. 그러한 의식을 통해 죄를 씻어 내리지 않았을까.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500년, 1000년, 2000년, 3000년이 흘렀다. 그 와중에 제사는 형식이 되고, 격식이 되고, 제도가 됐다. ‘양을 잡아서 제사만 올리면 나의 죄가 소멸한다’는 ‘제사=죄 사함’이라는 자동 등식이 생겨났을 터이다. 물론 모세 당시에도 ‘자동 죄 사함’을 믿는 사람들이 있지 않았을까. 불에 타는 양을 보며 모두가 자기 가슴을 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제물을 바치는 행위, 그 자체가 죄를 씻어주지 않는다. 내 마음이 씻어져야 한다. 그걸 통해 내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 내 눈이 바뀌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걸 “산 제사”라고 부른다. 그래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제물을 바치는 행위 자체가 사람의 죄를 씻어주진 않는다. 갠지스 강에서 목욕을 하는 행위 자체도 마찬가지다. 목욕을 한다고 죄가 씻어지는 건 아니다. [중앙포토]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심하라(마음의 눈을 돌려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산 제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