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년12월25일(금)맑음
점심 공양 후 피자가 배달되어 차담이 푸짐해졌다. 옆방 스님이 만들어주는 커피 한 잔을 곁들여 피자 한 조각을 먹다. 입승스님은 대중가운데 혹 피자를 많이 먹은 분들이 정진에 부담될까봐 오후 공부를 쉬겠다 한다. 선방 대중 가운데 승랍이 많은 스님들을 상판이라 하고, 승랍이 비교적 적은 스님들을 하판이라 한다. 80년대 내가 처음 선방에 들어갔을 때만해도 하판은 20대와 30대였는데 요즘의 하판은 50대이다. 갓 스님이 되어 수행을 시작할 때가 벌써 40대, 50대이니 수행에 얼마나 열의를 내거나 진취가 있을 것인지 자못 염려된다. 더구나 개인에게 방이 하나씩 주어지니 모두 자기 방에 짱 박혀서 시간을 보낸다. 스님들끼리 대화하거나 소통하는 자리가 마련되지 않는다. 아마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거나 태블렛피씨를 보거나 하겠지. 하판스님들은 공부를 잘하는 듯이 보이는 상판스님들을 찾아와 공부에 대해 물어보기도 하고, 수행의 길에 대해 대화를 해보는 것도 좋으련만 모두 각자도생이다. 세상 밖이나 산속이나 삶이 닮은꼴로 돌아간다.
도향스님께 중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포행하다.
2015년12월26일(토)맑음
토요일 아침엔 도량청소를 한다. 빗자루로 어둠을 쓸며 허우적허우적 절 밑 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다. 쓸 먼지도 없고, 쓰레기도 없는 겨울이라 빗자루질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그렇지만 스님들은 재미삼아 한다.
<不風流處也風流불풍류처야풍류, 有意氣時添意氣유의기시첨의기> 라는 선시가 있다. 풍류랄 것도 없는 게 오히려 풍류이고, 열의가 일어날 때 열의를 더 보태라는 말이다. 수행자는 억지 풍류를 부리지 않음이 오히려 멋이다. 60년대 70년대의 중들의 세계는 질풍과 노도(폭력에 물든 불교정화와 막행막식)의 시대였다. 80년대 90년대는 양산박과 풍류의 시대(무애행과 니힐적인 용맹정진)였다. 2000년대 이래 구법순례와 체념의 시대이다. 90년대 이래 일단의 스님들이 미얀마와 태국, 스리랑카와 인도로 법을 구하러 갔으며, 해외관광풍조에 편승한 인도성지순례가 유행처럼 퍼졌다. 오늘 날은 승가가 해체되어 개인주의, 각자도생주의가 되었다. 事判사판 권력승들은 카르텔을 형성했고, 理判이판 역시 기득권으로 들어가 안주하려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얇게 끼인 운수객들은 그럭저럭 살아간다. 타성에 젖어 의욕과 열의가 부족하다. 초발심의 순수함과 열의를 되살려야 할 때이다. 그리고 意氣의기를 보태야 할 시절이다. 그러나 먼저 그 의기라는 게 欲욕에 기인한 것인지, 願원에 기인한 것이지 분명해야 한다. 무엇 때문에 출가하여 수행하는가? 라고 물으면 어름하게 ‘깨닫기 위해서, 일체 중생의 성불을 위해서....’등등 뭐라고 답이 나오겠지만, 이런 건 학습되고 세뇌된 것이어서, 진실하지도 않고 힘도 없다. 그런 질문 자체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강력한 현존의 힘이 살아 있어야한다. 나무에게 ‘나무야, 너는 왜 나무가 되었니? 왜 그렇게 한 평생 제 자리를 지키며 나무 노릇을 하니?’라고 물어보라. 나무에게 그런 질문은 가당찮다. 나무에게 나무인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나무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스님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출가하여 수행하고, 수행해서 편안해지고 지혜가 생긴 만큼을 이웃과 나누며 세상에 봉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 외에 딴 길이 없다. 이건 한생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세세생생 그럴 것이다. 이것이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이며 살아가는 이유이다. 이것은 보리심이다.
밤 정진 입선하려고 선방 마루에 서서 앞산을 바라보니 보름달이 둥실 떠오른다.
2015년12월27일(일)맑음
저녁놀에 물든 남쪽하늘을 바라보니 멀리 섬진강이 굽이치며 구례를 지난다. 옛날에는 바다에서부터 강을 따라 들어온 돛배들이 저기 어디 강나루에서 해산물을 내려 농산물과 거래했을 것이다. 물산이 다양하고 풍성하니 살림살이에 윤기가 돌았으리라. 그 덕에 화엄사 큰 절이 번영했으리니 과연 오늘까지 잘 살고 있다. 그 이유를 사람들은 지리산의 덕이라느니 명당에 터를 잡았기 때문이라 한다. 내 생각에는 지리적 여건과 불교문화의 힘인 것 같다. 지리산의 덕택이 깊다. 그리고 불교문화유전자 밈meme이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名山大刹명산대찰을 보존하고 애호하게 만든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동해서 그런 게 아니다. 절에 스님이 없어지고, 불교를 가르치지 아니해도 사람들은 절을 찾을 것이고 보존할 것이다. 이제 절은 점점 문화유적지, 문화관광지로 되어간다. 사판들은 사람들이 떨어뜨리고 가는 입장료와 불전함, 불사금과 기도비로 들어오는 수입에 관심이 많다. 불법을 전하여 인심을 교화하는 일은 부차적이거나 체면치레이다. 이런 맥락에서 총무원 교육원장 현응스님이 말한 적이 있다. 미래의 스님들은 문화재 관리전문가로 복무할 것이며, 전법과 교화는 재가불자들이 맡아야할 것이라고. 한국 불교의 미래가 이러하다. 바람직한 절의 모습은 어떠할까? 절마다 누구든지 무료로 수행할 수 있는 명상센터 내지 선방이 열려야 한다. 수행하려고 오는 사람은 누구나 숙식을 무료로 제공받으면서 가르침을 받고 수행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미얀마나 태국, 스리랑카의 위빠사나 센터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 거기는 모두 자율보시로 살림이 돌아간다. 스님들은 단지 수행법을 가르치고 수행상담을 해줄 뿐 절 살림은 모두 재가자들이 운영한다. 그래도 절이 잘 돌아간다. 절에는 수행하는 스님들이 상주할 수 있는 안정된 여건과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부분이다. 지금은 돈과 권력 있는 스님들이 혼자 누리려고 하지 같이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부유한 스님들은 저 혼자 살려고 ‘토굴’이라는 이름으로 호화로운 암자나 절을 짓는다. 그런데 막상 혼자 살아봐도 별 재미가 없으니 자꾸 밖으로 나다닌다. 장차 祖室조실이 되려는 동기에서 선방에 다니거나, 아니면 해외여행을 수시로 나가고 스키 타고 골프 치러 다닌다. 그런 암자는 대체로 공양주 혼자 아니면, 상좌가 집을 지키고 있다. 자기가 살지도 않으면서 다른 스님들이 사는 건 싫어한다. 이건 암자나 절이 아니라 개인소유의 사택이 되어버렸다. 대중이 함께 살아가는 지혜로 六和육화를 든다. ①신화공주(身和共住)-몸으로 화합함이니 함께 살아라. ② 구화무쟁(口和無諍)-입으로 화합함이니 서로 다투지 말라. ③의화동열(意和同悅)-뜻으로 화합함이니 함께 기뻐하라. ④계화동준(戒和同遵)-계로 화합함이니 같이 지켜라. ⑤견화동해(見和同解)-바른 견해로 화합함이니 불교관이 같아야한다. ⑥이화동균(利和同均)-이익으로 화합함이니 균등하게 나누라. 이것이 표준인데, 현재 조계종은 六不和육불화 상태이다. ①신불화불공주(身不和不共住)-몸으로 불화하니 함께 살려 하지 않는다. ②구불화상쟁(口不和相諍)-입으로 불화하니 서로 다툰다. ③의불화불편(意不和不便)-뜻으로 불화하니 서로 불편하다. ④계불화불신(戒不和不信)-어떤 스님은 계를 지키고 어떤 스님은 안 지켜도 잘 사니 서로 불신한다. ⑤견불화오해(見不和不誤解)-불교를 이해하는 견해가 서로 다르니 오합지졸이다. ⑥이불화차별(利不和差別)-이익을 나누지 아니하니 차별이 만연하다. 14세기에 타락한 티베트불교에 비구계를 부활시켜 겔룩파를 개창한 쫑카파 존자가 그랬듯이 조계종이 갱생하려면 비구계를 부활시켜야 한다. 평소에서 가사를 걸치고, 탁발하고, 무소유/공동소유로 살면서, 보름마다 비구포살을 행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권력승과 부자 스님부터 가진 것을 포기하고 새 출발을 해야 하는데 누가 그런 미친 짓을 하겠는가? 이제까지 아무 일 없이 잘 살아왔는데 새삼스럽게 뭘 바꾸려고 하겠는가? 해온 대로 살자면서 계속 그대로 밀고갈 것이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라도 별 수가 있는 건 아니지만 주어진 환경 속에서 가능한 만큼 법대로 살려고 한다. 그리고 승가가 한국 조계종만 있는 게 아니니, 나는 심정적으로는 남방불교 비구승가와 티베트 겔룩파 승가에 귀의하고 거기에 소속되어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가상의 세계승가World Sangha에 소속된 일종에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스님으로 이쪽과 저쪽에 양다리를 걸쳐 살아간다. 내게 인연된 불자들에게는 변질되지 않은 최상 최고의 불교를 전해주고 싶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법보시이다. 그리고 그런 모임은 한국불교 가운데 작은 섬이 될 것이다.
2015년12월18일(월)맑음
어둠을 깨치고 돌계단을 오르며 도향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가 이 시대에 할 수 있는 일은 씨를 뿌리는 것과 최선의 법보시를 하는 것이라고 하다. 고호의 그림-씨 뿌리는 사람을 생각한다.
Buddha-dharma佛法에 대한 신심의 씨앗, 삼보에 대해 공덕을 지으려는 신심의 씨앗, 불법을 듣고, 배우고, 실천하려는 열의의 씨앗, 중생을 향해 일으키는 자비심의 씨앗, 중생을 구제하려는 대비심의 씨앗,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려는 깨달음의 씨앗, 이것을 통틀어 보리심이라 한다. 보리심의 씨앗을 사람의 마음에 뿌린다. 스님 자신이 법대로 수행하고, 그 수행한 향기가 몸과 마음과 말씨에서 풍겨난다. 그런 스님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이 모여든다. 모임이 만들어진다. 법의 모임이 정기적으로 자주 열리어 스님이 들려주는 법이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모여든 사람들이 법을 듣고 이해하고 실천할수록 행복해지고 고결해져서 사회로부터 신망이 높아진다. 신심 깊은 법우들이 결속되어 모임이 자율적으로 운영된다. 법우들의 모임(빠리사parisa)이 사회에 참여함으로써 법을 널리 보시한다. 진주에 있는 법우들을 생각한다.
2015년12월29일(화)맑음
하루가 갔다. 그렇게 갔다. 삶은 하루 줄어들었고 죽음은 하루 앞당겨졌다. 죽음을 응시하라.
2015년12월30일(수)맑음
대지여, 나는 나그네로 그대 땅에 들렀고
손님으로 그대 집안에 살았고,
친구로서 그대의 문간을 떠나노라.
위 구절이 타고르의 시집 <길 잃은 새Homeless Bird>에 나온다고 알았는데, 확인할 수 없어 검색하다가 다음과 같은 영시를 발견했다.
Many are the human speeches 많은 인간의 말들을
I`ve heard the migrating 나는 들었네,
in flocks, flying on 떼 지어 날아가는 철새처럼
invisible tracks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from obscure pasts to distant 희미한 과거로부터 먼
inchoate futures. 아직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향하여 날아가는 소리들.
And within myself I`ve heard 그리고 내 안에서도 듣나니
day and night 밤과 낮으로
in the company of countless 헤아릴 수 없이 많은
birds 새들과 벗하여
a homeless speeding 오갈 데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through light and dark 낮과 밤으로
from one unknown shore to yet 미지의 해안으로부터 또 다른 곳으로
another. 날아가는 소리를.
On cosmic wings of refrain 우주적인 날개를 타고
echoes through space: 허공을 날며 후렴구가 울린다:
‘Not here, no, somewhere, ‘ 여기가 아니다, 아니다, 저쪽
somewhere else!’ 저쪽 어디에!’
타고르는 마음에서 울려오는 시적 영감을 듣는 것 같다. 그 소리는 철새 떼가 날아가는 소리 같다면서 ‘여기가 아니다, 아니다, 저쪽, 저쪽 어디에!’라는 후렴구로 알아듣는다. 이것은 베단타 철학자들의 상투어인 neti, neti, neti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라는 말이다. 여기 현재 세상이 아닌, 저쪽, 피안을 향하라. 여기를 부정하고 저기를 긍정하는 세계관이다. 그리러니 이생은 집 잃은 새처럼 살게 된다. 집 없는 철새homeless bird와 유목민 정신과 통하는가? 집 잃은 새는 타고르 자신이다. 그는 플라톤적이다. 현상을 넘어 이데아의 세계를 향해 날아가려는 새다. 그러니 지상에 살아있는 동안 집을 잃어버린 새처럼 산다는 것이다. 그는 귀양 온 신선, 이태백과 같은 부류의 謫仙적선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그러면 빨리 죽어서 고향, 이데아로 돌아가야겠지.
출가 수행자는 집 잃은 새가 아니다. 그들은 귀양 온 신선도 아니다. 현상을 떠나 이데아를 향해 날아가려는 철새도 아니다. 그들은 차안과 피안에 양다리를 걸치고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사람이다. 그들은 한 쪽 발로 진흙을 밟고 한 쪽 발로는 연꽃을 밟고 가는 사람이다. 그는 중도를 가는 행자이다. 긍정도 밟고 부정도 밟고, 차안도 밟고 피안도 밟고 갈 뿐이다. 오직 ‘감’만 있을 뿐 ‘가는 자’는 없다. 如來여래 如去여거.
2015년12월31일(목)맑음
올해의 마지막 날이라 오후정진을 쉰단다. 여유시간을 이용하여 정만스님, 도향스님과 연기암까지 포행가다. 천천히 걸으면서 담화를 나누다.
적막종범야삼경 寂寞鐘梵夜三更, 범종도 잠 든 삼경 깊은 밤에
낙엽수풍작우성 落葉隨風作雨聲; 바람에 쓸리는 낙엽이 빗소리 같아
경기척창청불매 驚起拓窓淸不寐, 놀라 일어나 창을 여니 맑은 정신에 잠은 달아나고
만공추월정분명 滿空秋月正分明. 하늘 가득 보름달이 눈 시리도록 밝구나.
산 속 절 깊은 밤, 바람에 쓸리는 낙엽 소리에 비오는 줄 알고
벌떡 일어나 창을 여니 정신은 더욱 맑아져 잠은 달아나고
산하대지가 달빛에 싸여 하늘 한 가득 빛일러라.
취미수초(翠微守初,1590~1668) 스님의 시이다. 사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성삼문의 후손으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으니 흉중에 담긴 말 못할 사연이 얼마나 깊게 서렸으랴. 원한과 분노, 좌절과 환멸을 수행으로 삭여내어 滿空秋月만공추월, 하늘 가득 비추는 보름달이 되었다. 스님의 내밀한 사연이 마음을 두드린다.
아침 방선하고 선방문을 열고 하늘을 보면 남녁엔 반달이 걸려 있고, 북녁엔 북두칠성이 엎어져 있는데 북극성은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녁 방선 후 하늘을 보면 앞산머리에 오리온자리가 걸리고 삼태성이 빛난다. 자고로 산속 절집에서 별보는 일은 다반사이다. 예전에 시계가 없었던 시절 스님들은 시간을 어떻게 쟀을까? 낮에는 물시계나 해시계를 쓰고, 밤에는 별자리를 보고 시간을 쟀다. 별을 보고 시간을 알려주는 소임을 看星간성이라 했다. 간성을 맡은 스님은 아마도 천문에 능통한 노승이었을 것이다. 별을 보고 시간 잴 일이 없어진 오늘에는 간성하는 지혜가 단절되었다. 스님들이 자연과 멀어짐으로 절집에 전해오던 지혜가 사라져 간다.
우리 모두 오늘에 온 것처럼 내일에 또 닿을 것이니
사람들이여, 새 길을 가기 위해 오늘 모든 길을 멈추자. -반칠환
2016년1월1일(금)맑음
새해 첫 기적 / 반칠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10干12支가 지금 여기 한 그릇의 떡국으로 끓여져 앞에 놓여있다. 감사히 먹을 일이다. 동산에 해 오르니 선남선녀가 환희작약 한다. 새해맞이 일출 보러 노고단에 올랐다가 절에 들른 사람들이 도량을 기운생동 시킨다. 모두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경건한 발걸음이다. 작년의 묵은 빚이 드리운 그림자에서 벗어나 신년의 행운을 얻고자 함이라. 국태민안 천하태평을 기원한다.
반칠환(1964~) 시인은 아직 젊은 사람인데도 감칠맛 나게 시를 잘 쓴다.
둥근 시집
나무의 나이테 속에 벼려 넣은
여름이 있고 겨울이 있다
천 개의 손끝에 송이 꽃을 들고 불타는 햇빛을 연모하던 기억도 있다
나이테는 그 여름의 연서이자
그 겨울의 난중일기이다
나이테는 밑동 잘린 고목의 유고 시집이다
천년 고찰은 저 둥근 시집을 읽으며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천년 불상조차 한 번도 저 시 낭독이 싫어 외출한 적이 없다
풍경을 두드리는 바람은 견디기 힘든 유혹이지만
붓다의 처음 깨달음도 저 나이테의 그늘 아래서였다.
나이테는 제 가슴에 새긴 목판 경전이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좀벌레가 기어간다
저 느린 것들이 나이테의 경전을 마저 읽고 나면
곧 새로 늙은 젊은 기둥이 또 한 세월을 받치리라
새로 늙은 젊은 기둥이 유구한 역사속의 한 세대를 짊어진다. 그는 긴 대나무의 한 마디를 책임진다. 그는 ‘지금 현재 여기’에서 제 할 일을 떠맡고 묵묵히 견딘다. 그는 행동하는 인간이며, 책임지는 주인이다. 새로 늙은 젊은 기둥은 나와 너이다. 퇴역을 메꿀 현역이며, 노장을 대신할 신참이다. 상판이 힘들어지면 하판이 상판의 일을 떠맡는다. 어제가 오늘 속으로 스며들어 오늘이란 결과를 맺고, 오늘이란 씨앗이 내일 속으로 스며들어 내일이란 결과를 맺으리라.
새로 늙은 젊은 기둥이여, 繼往繼來 綿綿不節, 계왕계래하며 면면부절하리라.
2016년1월2일(토)맑음
따뜻한 날씨. 황금연휴라 사람들이 절에 많이 왔다. 먼 거리를 운전해서 절에 온 만큼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해주어야 하는데 미흡하기 그지없다. 떡국이나 국수를 무료로 점심 대접할 수도 있고, 차실을 개방하여 차를 마시며 잠시 앉아 쉬어가게 할 수도 있는데. 그 정도의 시설과 대접은 큰 절 형편으로 충분히 해나갈 수 있는데 주지스님이하 사중 소임자 스님들의 생각이 진부하니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다.
점심 때 경서가 와서 찻집에서 기다린다. 산중약차를 마시며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그는 서울 어느 절에서 산스끄리뜨어 강의를 했다. 지금은 강원도 어디에서 은거중이다. 서울에 사는 젊은 스님들의 흔들리는 삶과 그들의 불안한 속내를 들었다. 스님들이 세속을 뒤쫓아 간다. 스펙을 쌓고, 경력과 학력을 높이려 한다. 그래야 구석진 곳이라도 한 자리 차지하여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런다는 것이다. 이는 출가가 아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수행은 언감생심이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될지 알 수가 없다. 출가하자마자 행자시절부터 차근차근 불교적으로 사유하고 실천하는 교육과 훈련이 있어야 하는데, 어디 그럴만한 교육과 훈련과정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가? 계율을 여법하게 지켜가는 승가공동체가 튼튼하다면 저절로 해결될 문제이다. 새하얀 비단에 물이 들 듯이 초발심자들이 성스러운 승가에 물들면 된다. 그런데 지금 종단은 계가 여법하게 지켜지지 않고 각자도생으로 살고 있으니 신출내기 스님들은 첫걸음부터 비틀댄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가르침의 최종 결과는 무엇일까? 지금 조계종 교육과정이 가르친 대로 살면 그 결과로 나타날 승려상은 무엇인가? 출세한 현실주의자일까, 재주를 부려 인기를 모으는 스타스님일까, 돈과 권력에 아부하는 요령주의자인가, 눈치 보며 밥만 얻어먹고 사는 무능력자인가, 불교문화재 관리자일까, 역사에 참여한다면서 기득권에 야합하는 정치승일까, 화쟁을 말하면서 약자들의 저항을 무마하는 회색승려일까? 한국불교는 개혁되어야 한다. 쉽지 않은 문제이다. 위대한 불교교육자들이 출현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용수존자와 월칭보살, 아티샤 존자와 쫑카빠 존자를 비롯한 보조스님과 道元도겐선사 같은 분들이 다시 오시기를 기대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다. 너희들은 무얼 하고 있느냐고 반문하실 것이다. 답답하여 크게 한 숨 쉬며 지리산을 들여 마시고 콧구멍으로 뱉어낸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어떤 因을 심어야 하는가?
2016년1월3일(일)맑음
삭발목욕일이다. 운성스님이 삭발해주고 등을 밀어준다. 방에 돌아와 한 시간 동안 따뜻한 방에 누워 등을 지지다. 오후에 도향스님과 연기암으로 포행가다. 이렇게 또 열흘이 지나간다.
첫댓글 _()_
_()()()_
스님 수행일기를 읽을 때 마다 깨어나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수행 중이신데 여러가지 걱정을 하시는 모습에서 자비심이 전해져 옵니다. 건강하게 수행하시고 돌아오세요.()()()
六和를 되새깁니다..._()()()_
우연히 들른 불자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또한 굉장히 깊으신 듯 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