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대축일 (4월 4일) 오후 2시 성찬례 강론
"... 복음은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오직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무덤가에 우두커니 남습니다. 마리아는 그토록 따랐고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기에 예수님의 시신을 두고라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직 어두울 때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 어둠은 그가 겪는 슬픔의 깊이와 무게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상실과 슬픔의 그림자를 드러냅니다.
마리아는 주저앉아 눈물을 흘립니다. 죽음도 억울한데 그의 시신마저 사라졌습니다. 애통합니다. 작별의 기회마저도 사라진 절대 상실의 상황에서 마리아는 절망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지난해부터 지상 생애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하는 수많은 가족의 눈물을 생각합니다.
그때 천사들이 나타나 우는 이유를 물으니 마리아는 대답합니다. “누군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침내 또 다른 분이 나타나,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옮겼거든 돌려주세요. 제가 모셔야겠어요.”
바로 그때, 바로 그 눈물 속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눈물이 그의 귀를 적셨을 때,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었습니다. 그 눈물이 그의 눈을 씻어내렸을 때,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을 자신의 깊은 상실감 속에서 알아들었습니다. 상실의 눈물이 그의 막힌 귀를 녹이고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모습을 자신의 깊은 절망감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절망감의 눈물이 이전의 눈을 씻어내려 눈물의 볼록렌즈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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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무덤 - 눈물이 여는 새로운 현실> (요한 20:1-18)
+ 주님께 감사노래 불러라, 그의 사랑 영원하시다. 주님은 나의 구원이시다. 이날은 주님께서 내신 날, 다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아멘.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이 부활의 기쁨 속에서 여러분의 얼굴을 보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지요. 이 외롭고 어두운 사순절 끝에, 이 거룩한 성당에 올라 부활의 증인이 되는 여러분의 얼굴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이 힘들고 어려운 시절,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인내하며, 세상의 희망을 향해 걷는 분들의 용기는 얼마나 귀한지요?
지난 1년은 우리에게 긴 사순절이었습니다. 그 막바지에서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마지막 삼일을 함께 걸으며, 함께 인내하고, 서로 격려하며, 다 같이 희망을 품었습니다.
때로, 지독한 외로움도 있었습니다. 때로, 답답함에 지쳐 불평과 화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 그저 그리움으로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주는 사랑의 온기가 간절한 때가 있었습니다.
외로울 때마다, 우리는 성 목요일에 주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섬김을 되새겼습니다. 스스로 낮아져서 제자들과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몸과 피를 아낌없이 생명의 선물로 건네주시는 주님을 우리 몸에 새겼습니다.
화가 날 때마다, 우리는 어떤 신음도 없이 모든 일을 감내하며 십자가의 참혹한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상처를 우리 마음에 새겼습니다. 함께 애통해하는 성모 마리아의 찢긴 가슴에 우리 자신을 비추었습니다.
그리울 때마다, 우리는 완전한 침묵과 어둠을 강요하는 무덤에 찾아가, 우리의 그리운 눈물로 그분을 닦아드릴 마지막 몸부림을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님의 새로운 날에 다다랐습니다.
이 놀라운 수난과 부활 성삼일 여정을 1945년 4월 9일 나치 정권 아래서 순교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만큼 절절하게 표현한 분은 없습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기도하며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넘치는 은총의 힘에 아름답게 둘러싸여
주님의 오심을 신실하게 기다리나니
주님께서 밤과 아침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며
매일 새로운 날에 우리에게 인사하십니다.
그러나 오래된 고뇌들이 우리 마음을 괴롭히고
나쁜 나날들이 견디기 힘든 짐을 지우나니,
주님, 이 두려운 마음에 구원을 주소서.
주님께서 고통이 넘치는 쓰디쓴 잔을 주실 때,
우리는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지만,
주님의 선하고 사랑스러운 손으로 주시는 것이기에
어떤 두려움도 없이 이 잔을 감사하며 마시겠습니다.
슬픔과 고통이 많은 이 세상에
주님께서는 여전히 기쁨을 주시며, 밝은 해로 비추시니
우리가 함께 살아온 날들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모든 삶은 오로지 주님의 것이 되겠지요.”
우리는 이 모든 여정을 또한,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으며, 주님의 십자가 처형 현장을 지켰고, 예수님의 시신이 묻힌 현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습니다. 그런데 무덤의 상황이 당황스럽습니다. 무덤의 육중한 돌문은 옆으로 굴러서 열려 있습니다. 이 소식을 급히 제자들에게 알리니 그들도 놀라서 황급히 달려옵니다. 그런데 빈 무덤을 보고는 당황할 뿐, 어떤 생각인지 무심한 모양으로 집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복음은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오직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무덤가에 우두커니 남습니다. 마리아는 그토록 따랐고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기에 예수님의 시신을 두고라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직 어두울 때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 어둠은 그가 겪는 슬픔의 깊이와 무게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상실과 슬픔의 그림자를 드러냅니다.
마리아는 주저앉아 눈물을 흘립니다. 죽음도 억울한데 그의 시신마저 사라졌습니다. 애통합니다. 작별의 기회마저도 사라진 절대 상실의 상황에서 마리아는 절망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지난해부터 지상 생애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하는 수많은 가족의 눈물을 생각합니다.
그때 천사들이 나타나 우는 이유를 물으니 마리아는 대답합니다. “누군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침내 또 다른 분이 나타나,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왜 울고 있느냐?”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당신이 그분을 옮겼거든 돌려주세요. 제가 모셔야겠어요.”
바로 그때, 바로 그 눈물 속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눈물이 그의 귀를 적셨을 때, 그는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들었습니다. 그 눈물이 그의 눈을 씻어내렸을 때,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을 자신의 깊은 상실감 속에서 알아들었습니다. 상실의 눈물이 그의 막힌 귀를 녹이고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모습을 자신의 깊은 절망감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절망감의 눈물이 이전의 눈을 씻어내려 눈물의 볼록렌즈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울고 있다”는 단어가 오늘 본문 전후로 세 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겪었던 슬픔의 깊이, 우리가 겪는 고통의 깊이를 거듭해서 드러냅니다. 우리가 수시로 겪는 상실감과 절망감, 슬픔과 고통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상황이 우리의 온갖 마음과 생각을 솔직하고 세심하게 하여,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모습을 발견하는 새로운 기회를 마련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이 안내하는 깨달음의 길입니다.
빈 무덤의 장면을 좀 더 자세히 살피면, 더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예수님 무덤은 “동산”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라고 오해합니다.
정말 오해일까요? 천재적인 복음사가인 요한의 기발하고도 깊은 신학적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 동산은 태초의 에덴동산을 생각나게 합니다. 동산을 거닐던 동산지기는 에덴동산을 만들어 산책하시던 하느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빈 무덤의 부활 동산은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통해서 태초에 만들어졌던 모습대로 에덴동산으로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그동안 타락으로 거리가 멀어졌던 하느님과 인간이 다시 만납니다. 새 아담과 새 하와가 서로 그리워하는 눈물 속에서 기쁨으로 재회합니다.
분명히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할 텐데도,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는 부름에 마리아가 “예수께 돌아서서, 라뽀니하고 불렀다”고 기록합니다. 마리아의 모든 존재가 하느님을 만나는 일로, 예수님을 만나는 일로 돌아섰다는 말입니다. 그저 데면데면한 태도로는, 얼핏 설핏 교회에 다니는 모습대로는, 슬쩍 곁눈질하는 듯한 모양으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우리 존재 전체가 하느님을 향해 깊이 돌아설 때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대면의 순간을 웨일스 성공회 사제이자 시인인 R.S. 토마스 신부님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 그럴 때가 있었지, 때로는
차가운 성당 바닥에 오래도록 무릎을 꿇어앉은 후,
내 마음을 막았던 돌이 굴러가 열리던 때,
그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발견했지,
오래된 의심의 질문들이 잘 접혀 한켠에 그대로 놓여 있었네.
사랑이신 주님의 부활하신 몸을 덮었던 수의처럼”
[오직 사랑만이 대답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네…]
무덤에 남겨진 사랑의 흔적과 기억은 이제 우리를 역사의 현장으로 다시 데리고 갑니다. 우리의 아픈 역사와 현재를 새롭게 만나라고 손을 이끕니다. 부활절이 자주 드는 4월은 우리 역사에서 큰 수난과 상처, 죽음과 슬픔의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그 때문에 4월의 역사는 새로운 부활을 향한 우리의 대답을 요청합니다.
73년 전인 1948년, 제주에서는 4.3. 항쟁의 여파로 무고한 도민이 2만 5천여 명이 살육당했습니다. 찾을 길 없는 그들의 수많은 무덤 속에서 우리는 어떤 부활을 되새겨야 할까요?
61년 전인 1960년, 4.19 혁명으로 거리에서 정의와 민주를 외치다 숨졌던 186명의 희생을 우리 부모님 세대는 똑똑히 기억합니다. 이 성당은 당시 국회의사당이었던 현재 서울시 의회 건물 앞에서 일어났던 일의 생생한 목격자입니다. 그 외침과 젊음의 희생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며 새로운 힘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요?
7년 전인 2014년 4월 16일, 우리는 생때같은 304명의 가녀리고 예쁜 목숨을 세월호와 함께 물속에서 잃어야 했습니다. 그 아픔이 여전한데, 편리한 망각과 정치 계산 안에서 모른 체하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처지는 여전히 수난당하고 있지 않나요?
이러한 일은 무참하게도 세계 역사 안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
앞서 인용한 본회퍼 목사님은 76년 전인 1945년 4월 9일에 순교해야 했고, 53년 전인 1968년 4월 5일, 바로 내일 우리 교회가 순교 축일로 기념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서른아홉의 나이로 차별과 증오의 희생자가 되어 역사에 피를 뿌려야 했습니다.
현재진행형도 있습니다. 멀지 않는 나라 미얀마에서 일어나는 쿠데타와 학살을 우리는 발을 동동 구르며 듣고 보고 있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열등감이 만든 분노로 연약한 사람을 표적 삼아 공격하는 불의한 일들이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성차별과 폭력, 인종 차별과 증오 범죄, 특히 아시아인과 여성을 향한 공격과 생명을 앗아가는 폭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연약한 어린이들과 생명을 향한 학대의 현실,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쓰러지는 노동자의 현실은 우리 부활의 신앙인에게는 너무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신앙인의 신뢰 회복은 생물학적 바이러스 방역에만 달려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 널리 퍼진 비인간화 바이러스를 막아내고, 건강한 몸을 되돌리도록 우리 자신을 새롭게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 마음과 기도는 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는 교우들을 향합니다. 늘 부탁하던 대로, 주보에 있는 환우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의식이 없이 시간과 싸우는 분들과 가족, 암과 투병하는 교우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희미해지는 사랑의 기억을 지켜주려고 애쓰는 환자와 가족들, 멀리서 조금씩 쇠잔해 가는 이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분들을 마음에 품어 주십시오. 이분들의 눈물과 여러분의 눈물을 섞어 주십시오. 여러분의 기도 속에서 그분들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러 주십시오.
부활은 누군가를 새롭게 만나는 사건입니다. 모든 것이 상실된 순간, 모든 것이 없어진 순간, 그리하여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간에, 우리는 새로운 현실을 만납니다. 우리에게 눈물 밖에는 달리 흐를 것이 없을 때, 그 눈물이 새로운 사람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줍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그 아픔과 슬픔, 상처와 눈물과 함께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에덴동산,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시며, 우리에게 위로와 사랑, 희망과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알렐루야, 주님께서 부활하셨다.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