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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All Saints’ Day
Tutti i Santi
Omnes Santi
Sollemnitas Omnium Sanctorum
Soleminity of All Saints, Feast of All Saints
모든 성인들, 특히 교회력에 있어 축일로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기념하기 위한 날입니다.
609년 교황 성 보니파시오 4세가 로마 판테온 신전을 교회에서 사용하기 위해 축성하고,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면서 이 날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5월 13일에 지켜졌는데,교황 성 그레고리오 3세 (재위731-74년)가
성 베드로 대성당 안의 한 부속 성당을 특별히 모든 성인들을 위해 봉헌하면서 날짜가 변경되어 11월 1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835년 교황 그레고리오 4세에 의해 전 교회에 보급되었습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를 충실히 본받아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었듯이 우리들 역시 성인들을 본받아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우리 자신들이 곧 성인이 되겠다는 각오로 거록한 삶을 살도록 결심하는 날입니다.
성인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자녀는 그 어버이를 닮을 것이며,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성인이 될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오늘, 겨울의 문턱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넘어 새로운 삶을 바라며 살아가도록 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 준다.
또한 지상에 있는 우리와 천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연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고 한다.
성교회에서는 1년을 통하여 성인들을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이날은 천국의 있는 모든 성인들을 총합하여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이다.
본래 성인이라면 교회에서 시성식을 하여 공식선포한 이들만이 아니고 천국의 들어간 영혼은 누구나 다 성인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성인의 날에 그들을 총망라하여 기념하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 축일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묵상케 해준다.
성스러운 순교자들은 현세에서 무수한 고통을 당하였으나 지금은 천국에서 영복을 누리고 있다.
이날 수많은 사람들이 영명축일을 거행하기도 한다.
이 축일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강생하시기 전에 이미 로마에는 여러 신들에게 봉헌된 웅대한 신전이 있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가지각색의 신들을 숭배하며, 더우기 자신들이 정복한 다른 민족의 신까지 모시고 있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무수한 신들에게 일일이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그들은 하나의 원형신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모든 신들을 합사(合祀)했다.
로마인의 소위 판테온은 이 신전을 말함이요, 현재도 남아 있어 로마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의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가 되어 있다.
로마가 가톨릭의 혜택을 받자, 이 신전은 성당으로 개조되었으며, 전에 잡신들의 상이 있던 곳에 성인들의 동상이 들어섰을 뿐 아니라,
성인 순교자들의 유골이 카나콤바에서 그곳으로 옮겨졌다.
또한 교황 그레고리오 4세에게도 봉헌하고, 11월 1일을 기해 그들을 기념하는 날로 정하게 된 것이 오늘날의 모든 성인의 날의 시초인 것이다.
본래 성인이라면 교회에서 시성식을 거행해 내외에 선포한 이들만이 아니고, 천국에 들어간 영혼은 누구나 다 성인인 것이다.
그중에는 물론 덕행이 뛰어나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도 많을 것이나,
대부분은 성덕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고 하느님께만 인정을 받아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계시는 분들이다.
물론 이러한 분들도 각기 기념과 축하를 충분히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된 것은 그들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며 또 설사 알려졌다 하더라도 짧은 1년이라는 시일에 어떻게 다 기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모든 성인의 날에 그들을 총망라하여 기념하는 데 그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날 우리는 성인들을 통하여 위대하 기적을 행하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성인들을 찬미하며 그들의 전달을 청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모범을 본받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다.
성인들을 본받는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최대의 존경이다.
모든 성인 중에는 각 계급, 각종 직업인이 포함되어 있어, 제왕도 있고 병사도 있으며, 사제(師弟)가 있는가 하면 자본가, 노동자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실로 연령에 있어서도 여러 층에 있는 인물들인 것이다.
더욱이 성인은 과거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며, 현재에도 또한 장래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가 다 자기가 받들어 거울로 삼을 성인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을 격려해 말하기를, "성인 성녀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다.
그들이 할 수 있었다면 난들 왜 못할 것인가?"했다 하는데, 실지 가톨릭 신자라면 너나할 것 없이 다 이런 기백을 가져야 한다.
성인들은 우리와 같은 사명을 띠고 우리와 같은 일을 했으며, 우리보다 더 큰 고생을 겪었고, 우리와 동등한 인간이면서도 성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 갖기에 따라서 성인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다만 필요한 것은 그들같이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다. 물론 성인이 되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의 어려움을 생각할 것이 아니고 천당에서 받을 보수를 생각해야 한다.
이 축일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묵상케 해준다.
성스러운 순교자들은 현세에서 무서운 고통을 당했으나, 지금은 천국에서 영원한 복을 누리며 언제까지나 기쁨뿐, 영원히 이를 놓치지 않는다.
증거자, 성스러운 부부, 정결한 동정녀와 훌륭한 과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많은 고초를 겪지 않으신 분이 없다.
그 대신 지금은 고통, 슬품, 눈물, 고독, 병, 죽음 등 이 모든것이 말끔히 사라지고 오로지 행복과 환희와 하느님의 총애에 충만되어 천국에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살펴보니, 모든 성인의 축일을 맞이해 그들이 우리를 향하여 "영감히 참고 견고히 신앙을 지켜라.
인생은 짧고 천국의 기쁨은 영원하다"고 부르짖는 것같이 느껴진다.
우리는 모든 성인들의 충고를 듣자. 그들은 절대로 우리를 돕는데 인색하지 않을 것이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강론에서
(Sermo 2: Opera omnia, Edit. Cisterc. 5 [1968], 364-368)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형제들에게로 서둘러 나아갑시다.
우리가 바치는 칭송과 찬양 그리고 오늘 지내고 있는 이 축일 자체마저 성인들께는 무슨 소 용이 있겠습니까?
아드님의 진실한 약속에 따라 하늘의 아버지에 의해 영광에로 올림받은 이들에게 우리가 바치는 지상적 영예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들의 영광을 널리 전 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보탬되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성인들은 우리가 바치는 영예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공경심으로 그들에게 바칠 것이란 조금도 없습니다.
그분들을 기억하며 존경심을 바치는 것은 우리 편의 유익이지 그분들의 유익이 아닙니다.
내 느낌을 솔직 히 말한다면 내가 그들을 기억할 때 마음속에 열렬한 욕망으로 불타 오름을 느낍니다.
성인들에 대한 기억이 우리 안에 일으키거나 자극시켜 주는 첫 소망은 그들과 동반자가 되고
복된 영들과 더불어 동료 시민, 같은 가족 성원이 되며, 성조들의 집회와 예언자들의 지위, 사도들의 모임과 무수한 순교자들의 군단,
증거자들의 무리와 동정녀들의 합창단에 한 자리를 얻어, 마침내 모든 성도들의 통교에 하나가 되어 그들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과거에 뽑힌 이들의 교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이에 무관심합니다.
성인들은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의인들은 우리를 고대하고 있는데 우리는 모르는 체 합니다.
형제들이여, 우리의 게으름을 떨쳐 버리고 일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위의 것을 찾고 그것을 향유하도록 합시다.
우리를 고대하고 있는 이들을 우리도 고대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로 서둘러 나아가며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는 이들과 마음의 열망으로 함께 하도록 합시다.
그들과 함께 있는 것만 바라지 말고 열의와 뜻을 다해 그들이 현존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성인들의 행복과 영광을 함께 누리는 것을 염원합시다.
그들의 영광을 염원하고 열망하는 것은 결코 위험한 것도, 해로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인들을 기념할 때 우리 안에 일어나는 소망이 또 하나 있습니다.
즉 우리의 생명인 그리스도께서 성인들에게 드러내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드러내시고 우리도 그분과 함께 영광 중에 드러나기를 바라는 그런 소망입니다.
우리의 머리이신 분은 아직도 실제 그대로 드러나시지 않으며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실 때의 그대로만 즉 영광의 관을 쓰지 않으신 채
우리 죄의 가시로 둘러싸여 드러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머리께서는 가시관을 쓰고 계신데 그 머리의 지체인 우리가 호의호식한다면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화려한 옷은 그분께는 영예가 되지 않고 오히려 조롱 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 즉 그분의 죽으심이 더 이상 전파되지 않을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 역시 죽어서 우리 생명이 그분과 함께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께서는 영광 중에 나타나시고 당신과 함께 영광을 입은 당신의 지체들도 빛날 것입니다.
그때에 그분은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모시키시어 머리이신 당신처럼 영광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성을 다하여 이 영광을 희망합시다.
그러나 이 비할 수 없는 행복에 대한 소망이 성취되고자 한다면 성인들의 전구를 간절히 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속히 그것을 청합시다.
이렇게 하여 우리 힘만으로써는 얻기 불가능한 것을 그분들의 전구로써 얻게 될 것입니다.
성인의 기원과 역사
성인 공경의 기원은,
콘스탄틴 대제 때인 313 년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가 용납된 이후 순교자들을 공경하기 시작하던 일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순교는 그리스도처럼 진리를 따라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존귀함을 크게 받들어 공경하는 것이었고,
주님의 이름으로 순교하는 것을 최대의 영광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10 세기 말에 이르러 교황청에서는 성인 품위를 정하게 되었고 세계에 그 성인들을 받들어 공경하도록 선포하는 시성식을 거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복자 시복은 지방 교회에서 하였으므로 복자는 그 지역에서만 공경하게 되었고,
성인은 로마에서 교황의 권한을 따라 시성되신 분으로 세계적으로 공경하는 성격을 띠었습니다.
그러다가 시복까지도 로마 교황청에서 관장하였고, 17세기에 들어와 복자, 성인의 시복 시성 문제를 교회법으로 분명하게 규정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축일의 의미
성인의 축일은 대개 그 분들이 돌아가신 날로 정하였으며, 우리 신자들은 이 날을 기념합니다.
이는 초대교회에서 순교자들의 죽음은 바로 축복받은 새 생명으로 탄생한 것으로 여긴 데서 기인합니다.
신자들은, 성인들께 위대한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러한 은혜를 받으신 성인들께서 우리를 위한 기도를 해 주실 것을 청하며,
그분들의 생애를 모범으로 삼아 생활할 것을 바랍니다.
주보성인
가톨릭 신자들은 세례 때에 성인이나 성녀를 택하여 그분들의 이름을 자신의 세례명으로 정하고,
그 성인들께서 이 세상에 살아 계셨던 동안 실천하신 덕행을 본받아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가톨릭 신자로 태어날 때에 세례명을 정해 받는 것은 13 세기부터였고,
현대에는 필수적으로 되었으며 교회법(1917년에 공포된 현행법전 761조)에서도 이를 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각 신심단체들도 주보 성인을 모시는데, 예를 들면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강론자의 주보성인, 성녀 데레사와 프란치스꼬 성인은 전교의 주보성인 등입니다.
로욜라의 성이냐시오는 피정과 영성수련의 수호자이시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축일: 8월20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축일: 9월13일
성녀 소화데레사 축일: 10월1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 10월4일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축일
성인聖人(성인공경)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윤광 및 후광
성인의 초상에 전신 혹은 머리 부분에 광채를 그린 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관습입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교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불교에서도 부처나 보살의 초상에 후광을 그린 것등,
또는 영광과 권능 등의 표시로 일상 널리 쓰이는 상징입니다.
성화를 그리는 화가가 성인의 초상에 후광으로 빛을 그리게 된 것은
5 세기경부터며 중세 이후로 점차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빛을 그리는 양식은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후광은 초상의 전신에 빛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의미하며,
윤광은 머리만 빛으로 두른 것입니다.
윤광은 원형 또는 타원형으로 그릴 때도 있으며,
또한 머리에 둘러 그린 것도 있고 머리 위에 조금 떨어지게 그린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인이라는 소문이 있다하더라도 교회가 절차를 밟아
시복 시성하지 않은 사람의 초상에 후광이나 윤광을 그릴 수 없는데,
이런 결정은 교황 우르바노 8 세께서 결정한 것이고 오늘날까지 지켜오고 있습니다.
성인공경 聖人恭敬
라틴어 cultus Sanctorum
영어 veneration of Saints
성인들에 대한 공경은 전승(傳承)을 통하여 이어져 온 교회 영성(靈性)의 한 요소이며
한때는 신자들의 전례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가톨릭 신심(信心)의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교회는 트렌트 공의회에서 성인공경에 관하여 종교개혁자들에게 설명하는 동시에
가톨릭 신자들에게 그 남용이나 지나침이 없도록 당부하였다(Denz. 984-988).
공의회는 성인의 전구(轉求)가 하느님의 말씀에 반대되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한 분의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1디모 2:5)의 영예를 해치는 것이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배격하고,
우리의 주님, 홀로 우리의 구원자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성인들을 불러 도움을 구하는 것은 마땅하고 유익한 일이라 하였다(Denz. 984, 989).
성서에는 성인공경에 대하여 명백히 말씀하신 것이 없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의 구원 성업(聖業) 내에서 발휘하는 중개자의 기능이 나타나 있는데
대사제, 천사들, 과거의 위대한 인물 등이 중개자에 속하였다.
마카베오 시대에 이르자 피로써 증언을 한 순교자들이 생존자를 위하여 전구한다고 이해하였다(2마카 15:12-16, 7:37).
신약성서에서 이 중개자의 기능은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었고
그의 십자가상 죽음과 종말에 있을 재림 때 전면에 나타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다른 모든 중개자들은 빛을 잃는다.
이밖에 성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느님의 백성과 이의 모든 구성원들은 성성(聖性)을 본질적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 백성의 구성원들은 성인(聖人)들이라 불린다(로마 1:7,15:25, 1고린1:2, 16:1).
성서는 또한 교회의 개개 구성원들이 구원에 있어서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구성원들은 전체의 선익을 위하여 성령의 다양한 선물을 받았고,
그 선물의 능력을 서로에게 이익되게 발휘함으로써 공동체가 건설된다는 의식을 가진 것이다(1고린12 참조).
이 하느님의 백성은 구세사의 과정에서 '증인들의 구름'(히브 12:1)과 결합하나,
이 증인들의 구름은 하느님 백성의 마음속에 익명의 집합체로 남아 있지 않고 사도들과 순교자 개인별로 기억되었다.
이들을 존경하고 전구를 청한 사례가 문서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2세기 중엽이다(폴리카르포의 순교록 XVII, 3).
박해가 끝나자 이들 증인들의 구름은 증거자들로 인하여 더욱 많아졌다.
이들에 대한 존경의 성격이 교회 내에서 문제가 되자
제2차 니체아 공의회는 하느님에 대한 존경을 흠숭지례(欽崇之禮, adoratio)라 하고
성인들에 대한 존경을 공경지례(恭敬之禮, veneratio)라 하여 양자를 구별하였다.
이 구별은 중세기를 통하여 신학의 규범이 되었다.
조직신학에서 성인공경 문제가 차지하는 위치는 교회론에 속한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주제를
교회헌장(제7장 지상 여정 교회의 종말적 성격과 천상 교회와의 일치)에서 다루고 있다.
성인공경이란 교회의 종말론적 차원에 대한 부단한 인식이다.
"세상의 종말은 이미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며(1고린 10:11)
세상의 쇄신도 이미 결정적으로 현세에서 어느 정도 미리 실현되고 있는 것이니"(교회헌장 48)
참된 종말론적 성성이 이미 교회내에 존재하고 있다.
이 성성은 하느님을 직접 뵙고 있는 천상 교회의 신자들과
연옥에서 단련을 받고 있는 신자들과 지상 여정에 있는 신자들에게 모두 존재한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완성에로 초대하는 하나의 부르심에 바탕을 둔
교회의 단일성과 하나의 세례는 주님과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이를 포용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인들을 인정함은 곧 교회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며
지상에서 이룩한 하느님 은총의 승리를 찬양하는 셈이다.
이 인정과 찬양이 교회 내에서 이해되고 세상에 알려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익명의 집단으로만 언급될 수 없고 이들 증인들을 호칭하여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의하면 성인공경은 절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신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지는 흠숭을 약화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더욱 완전케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안에 한 가정을 형성한 우리 모두가(히브 3:6)
서로 사랑하며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聖三)을 함께 찬미함으로써 서로 교류할 때에
교회의 깊은 내적 생명을 다하는 것이며 완성된 영광의 전례를 미리 맛보고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성인공경은 우리의 행동적 사랑의 깊이에 있으며
이런 사랑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교회의 선익을 위하여
성인들의 생활에서 모범을 찾고 통공에서 일치를 찾으며 전구에서 도움을 찾는다(교회헌장 51).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하여 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흠숭하면서
성인들과 아울러 공경하는 이유는 이밖에도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라는 계시진리와,
현양받으신 주님의 인성(人性)이 구원에 있어서 발휘하는 영원한 기능을 깊이 성찰함으로써
더욱 명확히 밝혀질 수 있다.
[참고문헌] Ernst Niermann, Veneration of Saints, Sacramentum Mundi, Burns & Oates, 1970/
제2차 바티칸 공의회문헌 중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한국 천주교중앙협의회, 1969
(가톨릭대사전에서)
* 할로윈 Halloween :
All Hallows' Eve(Evening)라고도 함.
모든 성인(聖人)의 날 전날인 10월 31일에 지키는 거룩한 밤.
모든 성인의 날 All Hallows'day 의 전날을 All Hallows' Eve 라고 부르다가
할로윈 Halloween’으로 바뀐 것이다.
The Last Judgement (detail)-CAVALLINI, Pietro
1293.Fresco, 320 x 1400 cm (full fresco).Santa Cecilia in Trastevere, Rome
인천가톨릭대학교 이완희 신부님께서 신학교 홈페이지 신학강좌 - 전례 자료실에 올려주신 자료입니다.
위령미사(연미사)란?
1. 들어가는 말
죽은 이들을 위해 봉헌하는 미사를 위령미사라고 한다.
교회가 죽은 이를 위하여 미사를 봉헌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들이
상호간에 영신적인 도움을 주며 다른 지체들에게도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이다(미사경본 총지침 335항).
따라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 교회가 죽은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 바치는 미사성제가 위령미사이다.
2. 위령미사의 역사적 발전과정
미사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요약할 수 있는 파스카 사건의 재현이다.
따라서 초대교회 때부터 부활을 기념하는 미사가 매주일에 거행되었다.
처음에는 주일에만 거행되던 미사가 평일에도 거행되기 시작하였고 여러 가지 다른 성사 및 준성사와도 연결되었다.
죽은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을 위해 봉헌하는 미사를 위령미사라고 한다.
위령미사가 이미 2세기부터 봉헌되었다는 흔적을 Aristides의 호교론과 위경인 요한행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H.J.M.Milne, A new fragment of the Apology of Aristes, 25호 p.75와 M.J.James, The Apocryphal New Testament, Oxford, 1945 참조).
또한 3세기경에, 떼르뚤리아노(Tertullianus)는 죽은 이를 위한 기일 미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De Corona PL 2: 79/ De Castitate 11, PL 2: 926).
4세기까지의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일상생활에 있어서 로마의 관습을 따랐다.
상을 당한 로마인들은 죽은 이의 무덤에서 음식을 나누는 음복 잔치(Refrigerium)를 빼놓지 않고 거행하였다.
이 음복은 상을 당한지 3일, 7일, 30일(동방지역에서는 3일, 9일, 40일) 그리고 1년째 되던 날 거행하였는데
이러한 음복이 그리스도교화 되면서 성찬례, 즉 위령미사로 발전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는 로마 근교 오스티아에서 있었던 그의 모친 모니카의 장례를 회상하면서
어머니를 묻은 후에 바로 구원의 제사인 미사를 봉헌하였다고 전한다(고백록 9, 12).
또한 4세기 중반까지 소급할 수 있는 문헌인 <사도들의 가르침 (Didaschalia apostolorum F.X.Funk판 1권 p.276)>에서도 묘지에서 행해지는 ㎎?미사??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처음에는 음복의 관습과 무덤에서의 미사가 함께 행해지다가 서서히 음복이 사라지고 위령미사만 남게되는 것이다.
위령미사를 위한 기도문은 6세기 이전에 만들어졌으며 이미 레오 성사집(Sacramentarium Leonianum)에 5개, 젤라시오 성사집(Sacramentarium Gelasianum)에 13개가 수록되어 있다.
초기 기도문들은 죽음을 파스카 여정의 완성으로 받아들이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안식(Requiem aeternam)에 도달함을 기쁘게 찬미하였다.
그러나 중세에 이르러 이러한 파스카적 기쁨은 사라지고 심판과 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찬 기도문으로 변질되었다.
이제 죽는 날은 더 이상 태어나는 날(Dies natalis)이 아니라 심판의 날, 분노의 날(Dies irae)로 받아들여졌다.
위령미사는 중세 때에 일어난 3가지 전례적 신학적 사조와 조우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첫째, 신심미사(Missa votiva)의 등장이다.
미사는 파스카의 재현이라는 초대교회 이래의 미사에 관한 전통적인 생각이 점차 흐려지고 라틴어를 모르는 대중들이 미사집전에서 소외되면서
미사는 일부 성직자나 수도자의 전유물이 되기에 이르렀다.
더 나아가 미사가 공동체의 모든 이를 위한 제사라기보다는 개인의 신심과 청원 등을 위해 바치는 사적인 제사로 여겨지면서
미사라는 의식 자체를 절대화하는 경향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는 자연히 미사에 대한 미신적이며 주술적인 이해를 초래하였고 이때부터 미사는 개인 또는 소수의 사람을 위해서,
특별한 청원을 하기 위하거나 개인적인 일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바치는 사적인 예식으로 전락하였다.
이런 이유로 위령미사는 죽은 이들의 구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크게 성행하였다.
둘째, 연옥(Purgatorium)에 대한 교리가 널리 퍼져나가면서 연옥에서 고통받는 영혼을 위한 미사의 효험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미사를 봉헌함으로서 연옥 영혼의 고통이 감소되고 천국으로 들어올림 받는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었다.
연옥영혼이 죄를 씻고 빨리 하늘나라에 오를 수 있도록 미사를 더 자주, 더 많이 봉헌해야한다는 생각으로 인하여 위령미사는 매우 빈번하게 집전되었다.
셋째, 대사(Indulgentia)에 대한 교회의 교리가 확정됨으로써 연옥영혼을 위한 미사, 위령기도, 자선행위 등이 더욱 강조됨으로
급기야 미사가 지닌 공동체 모두를 위한 구원의 잔치라는 본래의 의미가 결정적으로 훼손되기에 이른다.
살아있는 사람이 위령미사를 한 대 봉헌함으로써 대사를 받고 그 대사만큼의 죽은 이가 연옥에서의 징벌을 경감 받게 된다는 식으로 대사의 효력이 오용되었다.
이로써 위령미사는 연옥영혼을 위한 만병치료제와 같은 효과를 지닌 주술적인 행위로 인식되었고 결국 미사가 지닌 공동체적이며 파스카적인 성격이 흐려지게 되었다.
연옥 영혼을 위해 30일 동안 매일 미사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동일한 지향으로 봉헌해야하는 그레고리안 미사도 이 때 등장하게 되었다.
이 그레고리안 미사는 "어느 죽은 수도자가 미사 30대를 통해서 연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대화(Dialogi 4.55, PL 77, 416-421)에 나오는 예화로부터 그 이름이 생겨났다.
이렇게 신심미사와 기원미사가 발달하면서 더 이상 주기 기념일뿐만 아니라 다른 날에도 연옥영혼을 위하여 위령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전통은 트렌토 공의회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위령미사의 신학
위령기도와 마찬가지로 위령미사의 신학적 근거를 <모든 성인의 통공에 관한 교리>,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있어서 인간의 협조에 관한 교리>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구원의 잔치에 초대받았다.
그러므로 산 이도 죽은 이도 모두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통하여 산 이와 죽은 이가 이 공동체 안에서 통교를 이룬다.
그러므로 위령미사는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이 먼저 죽은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그리스도와 함께 봉헌하는 것이다.
미사는 파스카의 잔치이다. 이 파스카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외아들 그리스도를 희생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미사를 통해 산 이와 죽은 이를 파스카의 영원성으로 초대하는 분이 하느님이시기에 산 이들이 봉헌하는 위령미사는 죽은 이를 위하여 의미있는 제사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스스로 마련하신 인간을 위한 구원계획에서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으신다. 오히려 인간의 협조를 통하여 그 구원계획을 완성하신다.
살아있는 동안 하느님을 믿으며 세례를 통해 새로이 태어났으나 나약함으로 인하여 세례 후에도 여전히 죄에 물든 채 살아가는 신자들이 있다.
비록 이 죄를 씻지 못하고 죽었을 때도 하느님은 여전히 구원의 팔을 펼치시며 모든 이를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계획을 변경하지 않으신다.
세상을 떠났기에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옥 영혼을 위해, 살아있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봉헌하는 것이 위령미사인 것이다.
4. 위령미사의 분류
미사경본의 총지침서에 의하면 위령미사는 3가지 등급으로 구분된다(336-337항).
가장 급이 높은 미사는 장례미사이다.
죽은 이를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미사이며 교회 공동체가 죽은 이와 송별하는 미사이기 때문이다.
이 장례미사는 의무적 대축일과 대림, 사순, 부활절의 주일이 아니면 어느 날에나 다 드릴 수 있다.
두 번째 등급은 사망 소식을 들은 후 처음 드리는 미사, 또는 장례가 있는 날 다른 곳에서 드리는 미사, 제1주년 기일미사이다.
이러한 위령미사는 주일과 축일, 대축일을 제외하고 재의 수요일과 성주간이 아닌 모든 평일에, 그날이 비록 의무적 기념일이라도 봉헌할 수 있다.
세 번째 등급의 위령미사는 그 외의 모든 위령미사이다.
이 세 번째 등급의 위령미사는 신심미사를 허락하는 날에만 봉헌할 수 있다.
신심미사를 허락하는 날은 원칙적으로는 의무적 기념일이 아닌 연중 평일뿐이지만 본당신부나 집전 사제의 판단에 따라 필요하다면
의무적 기념일과 대림, 성탄, 부활시기의 평일에도 신심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미사경본에는 위령미사의 기도문(eulogia)을, 장례미사, 주년위령미사, 보통위령미사 3가지로 분류하였고
각각 부활시기와 부활시기가 아닌 때로 나누어 기도문을 수록하는데 이는 기도문 안에 파스카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5. 위령미사와 연미사 (미사예물로 인한 혼동)
위령미사와 연미사는 본래 동일한 말이지만 미사지향(예물)과 관련하여 혼동되기도 한다.
정해진 법에 따라 미사를 봉헌할 때 사제는 미사예물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미사예물이 지향하는 바에 따라 죽은이를 위해 봉헌하는 미사를 통상 연미사라고 부르며 그 밖의 산이를 위한 미사로는 생미사, 가정미사 등이 있다.
앞에서 설명해온 위령미사는 미사 경본에 따로 수록된 위령미사의 기도문과 독서문을 사용하는 미사를 뜻한다.
따라서 미사예물 지향이 죽은 이를 위한 연미사라고 하더라도 그날의 미사가 교회의 축일표에 따른 미사라면 그것은 위령미사가 아닌 것이다.
위령미사는 사제가 흰색 혹은 검은 색 제의를 입고, 축일표에서 제시된 기도문과 독서 대신 죽은 이를 위한 고유의 기도문과 독서 등을 취하여 봉헌하는 미사를 말한다.
6. 합동위령미사
많은 연옥 영혼을 위한 미사 지향을 가지고 위령미사 한 대를 봉헌하는 것을 합동 위령미사라고 한다.
모든 사제는 한 대의 미사를 봉헌 할 때, 한 가지 지향만을 가지고 집전해야한다.
교황청 성직자성에서는 1991년 2월 22일 <합동미사예물에 관한 규정>을 반포하였다.
그 규정 제2조는 "봉헌자들이 사전에 명료하게 알고 있는 상태에서 자기들이 바친 예물이 다른 예물과 하나로 혼합하여
단일 미사를 거행하도록 자유롭게 동의한 경우 ’합동’지향을 적용하여 한 대의 미사로써 그 책무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규정에 입각하여 우리나라의 설날이나 한가위 명절,
그리고 위령의 날처럼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미사를 청하는 경우에 그 미사를 합법적으로 봉헌할 수 있으며 이를 합동위령미사라고 한다.
* 참고문헌 *
A.Cornides, Requiem Mass, (NCE 12), p.384/ H.Leclercq, (DACL 4, 1) pp.427-456; 5-2 pp.2705-15/ P.Rouillard, I riti dei funerali (amnesis 7), pp.193-227, Genova 1989/ S.Marsili, Theologia della celebrazione dell’eucaristia (anamnesis 3-2), pp.11-116, Casale Monferrato, 1983/ D.Borobio(ed.), Sacramentos (La celebracion en la Iglesia 2). Salamanca, 1988/ R.Cabi , L’Eucharistie (L’Eglise en priere 2), Paris, 1983/ F.Sottocornola, La celebrazione cristiana della morte (nelle vostre assemblee 2), pp.420-428, Brescia 1984/ 쯔찌야 요시마사, 미사 그 의미와 역사, 성바오로, 1990
인천가톨릭대학교 이완희 신부님께서 신학교 홈페이지 신학강좌 - 전례 자료실에 올려주신 자료입니다.
St. Francis-ZURBARAN, Francisco de
c. 1660.Oil on canvas, 65 x 53 cm.Alte Pinakothek, Munich
자기 의지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자기 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善)을
자랑하는 바로 그 사람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 것입니다. (권고2)
세상을 떠난 부모를 위한 기도
○ 주님,
주님께서는 부모를 효도로 공경하며
은혜를 갚으라 하셨나이다.
● 세상을 떠난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며 기도하오니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랐던
아버지 (어머니)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 또한 저희는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여
언제나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며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게 하소서.
◎ 아멘.
식사 후 기도
†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나이다.
◎ 아멘
† 주님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소서.
◎ 이제와 영원히 받으소서.
†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 아멘.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복.아시시대성당.
11월은 위령성월입니다. 그래서 11월에는 성 프란치스코가 생전에 입으셨던 검소한 수도복을 실었습니다.
이 수도복을 통해 죽음을 향해 가는 우리의 현실을 보기도 하지만
우리의 이승에서의 생명은 이 수도복처럼 소중히 깁고 기워서 잘 간수해야 할 선물임을 인식할 수도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소중히 생명을 살아갈 때 우리는 영원으로 가는 관문인 죽음을 진정 자매로서 평화로이 맞이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수도복은 아시시 대성당 지하에 소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웃의 연약함을 보고 자기가 비슷한 경우에 처해 있을때
그 이웃이 부축해 주기를 원하는 것 처럼
그 이웃을 부축해 주는 사람은 복됩니다."(권고18)
작은형제회홈에서www.ofm.or.kr
Descent of Christ to Limbo - ANDREA DA FIRENZE
1365-68 Fresco.Cappella Spagnuolo, Santa Maria Novella, Florence
위령성월
가톨릭 교회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달.
한국 교회는 위령의 날 (11월 2일)과 연관시켜 11월을 위령성월로 정해 놓았다.
이달에 신자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나 친지 의 영혼, 특히 연옥영혼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쳤는데 이는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령의 날 All Soul’S Day 11월 2일. 모든 성인의 날의 이튿날로서, 세상을 떠난 모든 신자들의 영혼을 기억한다.(일요일과 겹치는 경우는 11월 3일에 지낸다.)
998년 일년에 한번씩 위령의 날을 지키도록 명령한 클뤼니수도원의 오딜로의 영향으로 보편화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들은 이날 3번의 미사를 바칠 수 있도록 허가되었는데, 이러한 특권은 위령의 날과 성탄절에만 부여되었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위령성월이란...
성월이란 전례력과는 상관없이 특정한 달에 특정한 신심을 북돋기 위해서 정해놓은 한 달 동안의 특별신심 기간을 말한다.
특히 정해놓은 법에 따라 성월에 일정한 신심행위를 바치면 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교황들이 특전을 줌으로써 성월의 신심은 더욱 널리 퍼져 나갔다
(Enchiridion Indulgentiarum 118, 175, 217, 219, 253, 325, 364, 381, 389, 398, 466, 589).
성월 중에서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특별히 기억하며 기도하는 달이 위령성월이다.
998년에 클뤼니 수도원의 5대 원장이었던 오딜로(Odilo)는
11월2일을 위령의 날로 지내도록 수도자들에게 명하였고 이것이 널리 퍼져나가게 됨으로써 11월 한달 동안 위령기도가 많이 바쳐지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인해 11월이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위령성월로 정해지게 되었는데 한국 교회 역시 이러한 교회의 옛 전통을 받아들였다.
교황 비오 9세, 레오 13세 그리고 비오 11세가
위령성월에 죽은 이를 위해 기도를 하면 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함으로써 위령성월의 신심은 더욱 널리 전파되었다.
이로써 11월은 세상을 떠난 부모나 친지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며 또한 자신의 죽음도 묵상해보는 특별한 신심의 달이 되었다.
특히 지구 북반구에 위치한 나라들은 11월에는 낙엽이 지며 을씨년스러운 가을의 복판에 있게된다.
또한 전례력으로도 연중 마지막 시기에 속함으로써 종말에 관한 말씀을 집중적으로 미사 중에 듣게 된다.
이런 이유로 위령성월은 죽은 이를 기억하기 적합한 시기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깊이 묵상 할 수 있는 때라고 하겠다.
살아있는 이들이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며 이 기도가 죽은 이에게 도움이 된다는 교회의 전통 교리가 위령성월을 지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무엇보다도, <모든 성인의 통공에 대한 교리>가 위령성월을 지지해준다.
하느님 나라는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인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의 주인이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느님 앞에서 시간은 무의미한 것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도 이 공동체의 일원이며 살아있는 이들도 이 공동체의 동일한 구성원이다.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으며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라는 유대감 안에서 죽음으로 인해 연옥에서 고통받고 있는 영혼들을 위해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
반대로 하느님 나라에 이미 들어가 있는 성인들도 이 세상의 순례를 계속해야하는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간구할 수 있다.
이렇게 산 이와 죽은 이의 통교가 가능하므로 위령기도는 가능하며 따라서 위령성월도 더욱 의미 있어지는 것이다.
둘째로 1245년 제1차 리용 공의회에서 선포된 <연옥(Purgatorium)에 대한 교리>이다(DS 838).
이후 교회는 연옥의 존재에 관한 교의를 지속적으로 확인하였다(DS 856, 1304, 1580, 1820).
거룩하게 살다간 성인은 죽음과 동시에 하느님 나라에서 끝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보통 사람들이 세례 후에 죄를 범했을 때, 그 죄를 뉘우치고 화해의 성사를 받으면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범한 죄(Peccatum)와 영벌은 사라지더라도 잠벌은 남게 되며 이 잠벌은 보속을 통해 탕감 받을 수 있다.
이 세상에서 행해야하는 보속이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치뤄야할 보속이 있는데 그 보속을 치르는 곳이 연옥이다.
또한 인간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죄를 짓기도 하고 지은 죄를 뉘우치거나 사죄받지 못한 채 죽기도 한다.
이때 그의 영혼은 하느님 나라에 바로 들어갈 수 없으며 죄를 씻는 정화의 장소가 요청되는데 그곳이 또한 연옥이다.
연옥에는 영혼들이 속죄를 위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이러한 연옥영혼을 기도와 자선행위와 미사봉헌 등을 통해서 도울 수 있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다
(DS 856, 1304, 1743, 1753, 1820, 1867).
따라서 위령성월이 연옥영혼을 위한 특별한 시기가 되는 것이다.
이외에도 중세 이후 대사(Indulgentia)에 대한 오용이 심해지면서, 연옥 영혼을 위한 여러 가지 기도와 자선행위들이 유행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대사를 얻기 위한 여러 기도와 신심행위들이 위령성월에 많이 행해졌다.
위령성월에 바치는 기도는 위령기도로 자주 사용되는 시편 129편과 위령 미사 기도문 중에서 발췌한 기도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P.F.Mulhern, Special devotion for month 9 p.1094/ Enchiridion Indulgentiarum,
Roma, 1952/ 위령성월,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교 홈페이지 신학강좌 - 이완희 신부
연도. 煉禱 preces pro defunctis
세상에서 죄의 벌을 못다하고 죽은 사람이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화하는 연옥에서의 고통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죄벌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 때부터 사용해 온 `연도’라 는 말은, 바로 이러한 연옥에 있는 이를 위해 드리는 기도를 지칭한다.
본디 천주교에서는 연옥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한 영혼’ 이라고 호칭하는데,
그 까닭은 이들이 자기의 힘으로는 연옥에서 탈출할 수도, 또 괴로움을 완화시킬 수도 없으나,
지상 여정에 있는 신자의 기도와 선업에 의지하여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이 경우의 이 지상의 신자의 기도를 `연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 옛말은 오늘날의 바뀐 말로는 `위령의 기도’라고한다.
간혹 `鍊禱’라는 한자어를 쓰나 이는 잘못된 표기이며,
또 죽은이를 위해 기도하는 방법은 <성교예규>라는 기도서에 따라 하는 것이다.
이 기도책에는 임종때 어떻게 기도해 줄 것인가에서부터 장례 때 어떻게 기도 할 것인가까지 다 수록되어 있다.
성인의 통공.聖人의 通功
Communio Sanctorum. communion of saints
세상에 살고 있는 신자들과 천국에서 천상의 영광을 누리는 이들과 연옥에서 단련받고 있는 이들이 모두 교회를 구성하는 일원인데,
이들이 기도와 희생과 선행으로 서로 도울 수 있게 결합되어 있는 현상.
교회는 전통적으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사도신경) 신앙고백을 하여 왔다.
세상에 살고 있는 신자들은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며 동일한 권위에 복종하고 있는 신자 상호간에 기도와 선행으로 서로 돕고
또한 천국에 있는 성인들을 공경하며 그들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고 성덕(聖德)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며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기도와 희생을 통하여 도울 수 있다.
이 ’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믿음에서 ’위령성월’(11월2일)과 ’모든 성인들의 축일’(11월1일)을 기념하는 것이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죽음은 이 세상 누구에게나 두려움과 불안을 주는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단순히 모든 것이 끝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간다는 고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계시하신 진리, 즉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진리를 믿고
고백하는 교회는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해 잊지 않고 기도합니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안에서 부활의 기쁨을 누리도록 도와주는 이 신심은 가톨릭 교회의 가장 큰 신심 중의 하나로서,
11월을 위령성월로 정하고 교회 전체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