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인물탐구 - 정유성, 허적, 송시열
■ 복이 과하면 반드시 재앙이 따른다고 경고한-정유성
정유성(1596~1664)의 본관은 연일이고 자는 덕기, 호는 도촌이다 포은 정몽주의 9세손이다. 그는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고 손자 정제현이 숙휘공주에게 장가 들어 인평위에 봉해졌지만, 정유성은 몸가짐을 더욱 조심하고 생활을 더욱 검소하게 하였다.
하루는 손자며느리인 공주를 보고 말하였다.
"공주는 이 시할아버지로 하여금 손자와 함께 오래 같이 살게 해줄 수 없소?"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공주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복이 과하면 반드시 재앙이 뒤따르는 법이오. 우리 집은 대대로 청빈한 집안인데 공주의 씀씀이를 보니 과한 듯하오. 부디 절약하도록 하시오."
얼마 후에 손자 인평위가 죽자 방안에 들어가 궁중에서 내사한 의복 등을 보고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저렇게 사치하고서야 내 손자가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피할 수 없는 일이었구나."
■ 국법에 따라 연좌되어 죽는 것이 옳다고 한 - 허적
허적(?~?)의 본관은 양천이고 자는 여거, 호는 묵재 또는 휴옹이다. 인조 11년(1633)에 진사시를 거쳐 163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 부수찬을 지낸 뒤 평안 감사를 두 번 역임하고 북경에 세 차례나 다녀왔으며, 1671년엔 영의정을 지내고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숙종 6년(1680), 서자인 견이 역모로 사형되자 허적은 성 밖에 나가 왕명을 기다렸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권하였다.
"이제 공은 체포되어 죽는 것이 시간문제이니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이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자식을 잘못 두었으니 국법에 따라 연좌되어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극형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 죽는다면 이것은 임금의 명을 공경함이 아니다."
한숨을 돌린 다음 허적은 계속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사헌부 지평으로 있을 적에 길에서 한 청년을 만났는데 그 복장이 너무 사치하여 상인의 신분에 맞지 않기에 잡아 가두고 그 죄를 물었다. 그 뒤에 웬 여자가 와서 욕지거리를 한다기에 그 여인을 가두고 보니 그 연인은 바로 청년의 아내였고 복색 역시 사치스러웠으므로 두 남녀를 모두 곤장을 심하게 때리도록 하였더니 남녀가 다 장살되고 만 일이 있었지. 우리 아이 견이 태어나던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네. '몇 년 전에 청년 부부를 장살한 적이 없느냐? 나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어찌 법을 알 리 있겠느냐? 반드시 죄를 주어야 될 입장이라면 차라리 그의 부모를 벌했어야 마땅한 일이 아니냐? 남의 외동아들과 외동딸을 한꺼번에 죽이다니! 그러고도 어찌 복 받기를 바라느냐? 하늘이 너에게 벌을 내리려고 못된 자식 하나를 주어 너의 집을 망치게 할 것이니 너는 그렇게 알라!' 이런 나쁜 꿈을 꾸고 난 나는 처음에 아이를 기르지 않으려고 하다가 다시 생각하니 허왕한 꿈을 믿고 그렇게 할 수야 없지 않는가 하여 그럭저럭 오늘까지 온 것이다 오늘 당하는 이런 재앙은 다 내가 이미 지은 업보로 받은 것인데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 금관자 대신 쇠뿔로 된 관자를 한 재상 - 송시열
송시열(1607~1689)의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영보, 호는 우암이다.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꿈에, 공자가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소자를 성뢰라 하였다. 사계 김장생에게 사사하여 율곡의 학문을 간접적으로 전수받았으며, 또 주자의 저서를 많이 읽어서 일가를 이루었다.
인조 11년(1633)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종하였으며 청과 굴욕적인 화의가 이루어지자 통곡하고 성을 나왔다. 지평 벼슬에 두 번째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효종이 즉위하자 장령, 진선, 집의, 승지, 찬선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정이며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효종과의 사이는 특별히 긴밀하여 모두들 한소열과 제갈량의 관계에 비유하였는데 불행하게도 효종이 죽자 효종과 의논하던 긴밀한 뜻도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현종이 즉위한 뒤에 좌의정이 되었으며, 숙종 15년(1689)에 제주도로 귀양 가는 도중 정읍에 이르러 사약을 받고 죽으니 이때 송시열의 나이 83세였다. 그가 죽기 전날 밤에 백색의 기운이 하늘을 가로질렀고, 또 그날 밤에 규성(이 별이 밝으면 천하가 태평하다고 함)이 땅에 떨어졌으며 붉은 기운이 지붕 위에까지 뻗쳤다고 그 고을 사람들이 전한다.
우암이 생전에 겪은 일인데,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양양 물치란 마을을 지나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정립이란 사람의 집에 들어가 비를 피하면서 보니 그 집 기둥에 다음과 같은 한시가 씌어 있었다.
시장에 호랑이 나왔다는 거짓말도
세 번째는 사람들이 믿기 마련
벌떼에 쏘일까 치마 걷어 쓴 것인데
지아비는 정조를 의심한다네
세상 공명이란 모두가
나무 기러기처럼 하찮은 것
웃고 떠드는 좌석에서도
항상 입조심은 해야 한다네
그런데 이 시의 윗구는 바로 썼는데 아래구는 거꾸로 붙여 있었다. 누구의 시냐고 주인에게 물으니, 이 시를 쓴 사람이 떠날 때 한 말이, 내년에 이 날이 돌아오면 다시 오겠다고 하면서 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어느 외서(유가: 경전 이외의 책)에 나타난 입조심의 출처는 이렇다.
어떤 해동 사람이 신비한 거북 한 마리를 잡았는데, 그 거북이 하는 말이, 이 세상 나무를 다 불태워서 물을 끓인다 해도 나를 삶아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한 도인이, '마른 뽕나무로 불을 때도 네가 죽지 않는단 말이냐'고 다그치자 거북은 결국 눈물을 흘리면서 시인했다고 한다. 오늘 이 좌중에서 담소하는 여러분들도 이 거북 이야기에서 입조심하는 경계심을 배워야 한다.
화양동 초당에 매화나무가 많았는데 숙종 15년(1689) 봄에 다 말라죽었다가 1694년 봄에 다시 살아나 잎이 나고 꽃도 피었다고 한다.
우암은 재상을 지낸 신분인데도 금관자를 달지 않고 쇠뿔로 만든 관자를 달고 있었다. 문인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와 초야에 있으니 초야에 맞는 복색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문인들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벼슬할 때는 왜 그리 하셨습니까?"
우암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 때는 나의 위아래 옷이 맞지 않은 때문이었지. 그 때 나는 명주를 살 돈이 없어서 면포로써 관복을 만들었으니 면포에 금관자가 맞을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금관자를 쓰지 않은 것이다. 다만 하사하신 금관자를 받는 일은 예에 속한 일이므로 공손하게 받아서 망건에 달아 두었다가 사례가 끝난 뒤엔 즉시 떼어 낸 것이다.
우암은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신분의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쇠뿔 관자를 쓰고 있더라. 언젠가 동월이 우리나라 풍속을 기록한 글을 본 일이 있는데 관자로써 신분을 구분하는 우리의 풍습을 비웃는 내용이었지."
그제야 문인들은 우암이 금관자를 쓰지 않고 쇠뿔 관자를 쓰는 까닭이 바로 중국의 제도를 옳게 본뜬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