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비리/靑石 전성훈
문경은 떠나버린 사람이 다시 돌아온 것처럼 반갑고 정겹게 느껴지는 고장이다. 몇 번에 걸친 문경 여행이 생각난다. 2012년 가을 문화원 역사탐방 때 새재 2관문까지 걸었던 아련한 기억이 떠오른다. 2018년 봄, 지인과 함께 새재 관문 옛길 세 곳을 넘어서 저녁노을을 가슴에 안고 수안보까지 걸어갔던 멋진 추억도 생각난다. 도봉문화원을 출발한 관광버스 안에서 문화원 안내 책자를 읽으면서 기행문을 쓰는데 참조하려고 밑줄을 긋는다. 문경 하면 무엇보다도 조령(鳥嶺) 새제가 떠오른다. 새재는 문경시 문경읍과 괴산군 연풍면을 연결하는 험준한 길이다. 새재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의 ‘새(사이)재’,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재’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조령은 영주와 단양의 죽령, 김천과 영동의 추풍령과 함께 한양과 영남을 잇는 교통, 군사, 경제, 문화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영남대로였다. 새재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 조곡관, 제3관문 조령관을 1977년에 새롭게 복원하여 옛 모습을 되살려 놓았다.
고모산성(姑母山城)과는 첫 만남이다. 신라 시대 쌓은 산성으로 전체 둘레가 1,300m이다. 현재는 대부분 허물어지고 남문지(南門地), 북문지(北門地), 동쪽 성벽 일부만 남아있다. 고모산성은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사이를 잇는 삼국시대 전략적인 교통 중심지인 계립령을 지키는 성곽이었다고 한다. 고모산성에 올라서서 확 트인 주위를 바라보니 정말 이곳이 교통의 중심지였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성곽 아래 그림 같은 멋진 풍경을 진남교반(鎭南橋畔)이라 부른다. 경북팔경의 제1경으로 꼽히는 이곳에는 기암괴석과 깎아지는 듯한 층암절벽이 이어지고 말없이 흐르는 강 위로 철교, 구교, 신교 등 3개의 교량이 나란히 놓여있다. 아하하고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영남대로에 역(驛)과 관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원(院)이 생기면서, 양반과 행상인이 묵어가는 주막과 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산성으로 올라가는 고개를 돌고개 주막거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부근에 있는 성황당에는 ‘꿀떡고개’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병자호란 때 대표적인 주화론자였던 최명길 선생의 새재 성황신에 얽힌 전설도 전해 내려온다. 산성으로 올라가는 비탈길 일부 구간에는 두께가 얇고 넓적한 돌인 박석(薄石)이 깔려있다. 그 옛날 얼음이 깔리거나 눈이 많이 내려서 소달구지를 이용할 수 없는 길에, 박석을 깔아놓으면 소 등위에 올려서 짐을 나르는 데 쓰였던 교통수단인 ‘발구’를 끌고 가는데 수월했다고 한다. 길에 두 채의 주막을 복원해 놓았는데, 위는 문경의 마지막 주막인 영순주막, 아래는 예천의 마지막 주막인 삼강주막 모습이다. 조선 후기 풍속화의 대가인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주막 그림을 보면 서로 다른 모습이다. 양반 생활을 그린 신윤복의 그림에는 주막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간 곳에 그럴듯한 모양의 안채가 보인다. 그에 반하여 배고픈 평민의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그림에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허름한 주막 평상이 보인다. 고모산성을 내려와 찾은 곳은 토끼비리이다. ‘차마고도’처럼 오정산 중턱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을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파서 구불구불하게 2.5km가 이어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된 길이라고 한다. 후백제 견훤과 전투 중에 이곳에 이르자 물은 깊고 계곡은 벼랑으로 둘러싸여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데, 때마침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타고 도망하는 것을 목격한 군사 하나가 토끼를 쫓아가 보니 길을 낼 만한 곳을 발견하고, 바위를 자르고 난간을 내어 돌사다리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토끼가 지나간 험한 길은 벼랑, 절벽, 낭떠러지라는 뜻을 가진 토끼비리(토끼낭떠러지) 또는 ‘관갑천’이라고도 불리며, 2007년 문경 새재 옛길 및 죽령 옛길과 더불어 국가 지정 문화재인 명승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도봉문화원 자료)
문경의 특산물은 사과, 오미자, 문경약돌돼지와 한우, 문경족살찌개를 든다. 문경 탄광이 유명했던 시절 광부들이 즐겨 먹었던 음식인 족살찌개는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맛과 약돌돼지의 쫄깃한 맛이 잘 어우러진 대표적인 서민 음식이다. 작년 여름 가족과 함께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무를 때 족살찌개를 맛있게 먹은 적이 있다. 문경약돌돼지와 한우는 사료에 특수기능 성분인 페그마타이트(거정석, 일명 약돌)를 첨가해 사육한 돼지와 한우로, 고기 특유의 냄새가 없고 산뜻한 맛을 자랑한다. 점심때 먹었던 약돌돼지 석쇠구이정식은 평소 먹는 돼지고기와는 다른 느낌이다. 돼지 냄새가 나지 않는다. 상추에 밥 한 숟가락 얹고 된장과 고추 그리고 마늘을 넣어 한입 가득히 넣고 한참 씹으면서 그 맛을 느끼니 저절로 아아 맛있다는 생각뿐이다. 옆에 있는 다른 분들도 모두 맛있다고 한마디씩 거든다. 작가 루쉰은 단편 [고향]에서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토끼비리를 걸으며 이런 생각을 떠올린다. 멀고 먼 아주 오래된 옛날, 인적이 없었던 산속에는 짐승들만이 먹이를 찾아서 숲속을 돌아다녔다. 짐승이 다니던 작은 숲속 길에 어느 때부터 사람들이 하나둘 걷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발길에 눌린 풀이 엎어지고 누워져서 없었던 길이 생기고 신화가 열매를 맺고 전설이 익어가면서 힘겹고 한 많은 눈물 어린 길이 태어났던 것이 아닐까. 다시 찾은 문경, 구경한 장소마다 애틋한 사연이 깃든 기운이 느껴진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배운다는 이야기가 새삼스럽게 떠오른 즐거운 인문학 기행이다. (2023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