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병매(095)
* 사랑과 복수1
내왕이가 돌아왔다.
진경제 내외를 수행해서 동경에 갔다가 넉 달 만에 돌아온 내왕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아내 송혜련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주인어른의 분부를 받고 먼 길을 갔다가 돌아온 터인데, 자기 아내부터 먼저 만나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서문경부터 찾아뵙는 게 하인으로서의 도리였다.
그래서 내왕이는 진경제 내외가 먼저 서문경을 만나보고 나올 때가지 거실 밖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집안사람들의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어쩐지 좀 자연스럽지 못하고, 어색한 구석이 있어 보였다.
어떤 남정네는,
“내왕이 돌아왔는가?”
하고는 묘하게 웃기도 했고,
어떤 계집에는,
“고생이 많았죠?”
인사를 하면서 측은한 듯한 그런 눈길을 보냈다.
어찌된 일인가 싶었으나,
내왕이는 그 까닭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먼 길에 지친 몸이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공연히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고, 예사롭게 생각해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진경제 내외가 물러나오자,
교대를 해서 내왕이는 거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는데, 서문경은 낮에 벌써 걸쭉하게 한잔 걸친 듯 불그레한 얼굴로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내왕이가 들어오자,
“오-수고가 많았지?”
하고 그는 무척 반기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어른, 그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내왕이는 두 손을 모아 쥐고 이마까지 쳐들었다가
깊이 머리를 숙여 정중한 배례를 하며 문안한다.
“그래, 나야 뭐 잘 지냈지. 허허허...”
서문경은 술기운 탓인지 묘하게 큰소리로 껄껄껄 웃는다.
그 웃음소리가 어쩐지 필요 이상 거드름을 떠는 것 같이 내왕이는 느껴졌으나, 역시 피로 탓이려니 하고 생각한다.
“이번에 내왕이가 정말 큰일을 했어.
진경제 내외가 아무 탈 없이 동경에 잘 다녀오게 된 게 다 내왕이의 공이라구. 평소에 늘 내가 내왕이 자네를 하인들 가운데서 가장 신임해 왔는데,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본 게 틀림없었지 뭐야. 안 그래?”
내왕이는 약간 얼떨떨할 지경이다.
술기운이 있어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너무 과찬을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전에도 몇 차례 동경에 심부름을 갔다 온 일이 있었고, 그 때는 임무가 이번보다 월등히 중대하기도 했었으나, 수고했다는 몇 마디 말뿐, 지금처럼 노고를 추켜 세워준 적이 없었다.
“안 그러냐 말이야. 왜 대답이 없지?”
“예, 흐흐흐...”
내왕이는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좋아, 그래서 말이야 내왕이의 이번 공로를 치하하는 뜻에서, 내가 자네에게 특별히 좋은 직책을 주겠다구. 무슨 직책인가 하면...”
기왕에 선심을 쓰는 바에야 좀 생색을 내야겠다는 듯이 서문경은, 술기운에 혼혼히 젖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웃음을 내비치며 뜸을 들인다.
내왕이는 특별히 좋은 직책이라니,
무슨 직책이 주어지려나 하고 숨을 죽인다.
“지금까지 내흥(來興)이가 맡고 있던 식품 조달의 책임을 이제부터 자네가 맡도록 하라구. 어때, 괜찮지?”
“아이구, 고맙습니다요. 주인어른”
내왕이는 자기도 모르게 넙죽 고개가 숙여진다.
식품 조달계라면 양곡을 비롯한 온갖 찬거리, 갖은 음식물을 다 구입해 들이는 일을 맡아 하는 직책이어서 고지식하게 해도 절로 고물이 떨어지고, 요령껏 잘하면 적지 않은 돈을 모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런 자리를 서문경 자신의 먼 친척 조카뻘 되는 내흥이를 밀어내고, 선뜻 자기에게 넘겨주다니 너무나 뜻밖이었고, 고맙기 그지없었다.
서문경의 속셈은 물론 딴 데 있었다.
내왕이의 처를 자기 것으로 해놓은데 대한 사전 회유책(懷柔策)이었다.
그런 그의 검은 뱃속을 아직 모르는 터이라, 내왕이는 진정으로 감사를 드리며 서문경 앞에서 물러났다.
거실을 나온 내왕이는 곧바로 주방을 향해 갔다.
말할 것도 없이 아내를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주방에 아내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몇몇 아낙네들이 저녁거리 쌀을 씻고, 밀가루 반죽을 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찬거리를 다듬고 매만지며 얘기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내왕이가 들어서자,
아낙네들은 모두 일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며,
“어머, 돌아오셨네”
“얼마나 고생이 많았수?”
“몇 달만이유? 보자, 넉 달만인가...”
하고 반가이 한마디씩 했다.
그러고는 모두 어쩐지 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그런 표정들을 지으며 딱한 듯이 그를 힐끗힐끗 쳐다본다.
“집사람은 어디 갔나요?”
뭔지 묘한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내왕이는 애써 예사롭게 묻는다.
아무도 선뜻 대답을 안 하는데,
한 아낙네가 그만 킬킬 웃으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왜 그래요? 집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왜들 아무 말이 없죠?”
그제야 그 중 나이 든 아낙네가,
“팔자가 달라졌다우”
하고는 입맛을 쩝쩝 다신다.
“팔자가 달라지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요?”
내왕이는 반짝 긴장이 된다.
그때 주방으로 손설아가 들어서며,
“아니, 내왕이 아냐. 언제 돌아왔어?”
하고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조금 전에 돌아왔습니다.
마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얼마나 고생이 많았어? 얼굴이 다 거멓게 탔네”
손설아는 자기보다 두어 살 위인 내왕이에게 마님과 하인이라는 신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예사롭게 말을 놓으며, 원로에 거멓게 그을은 그의 얼굴을 나긋한 미소가 담긴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손설아는 부엌 아낙들에게 이런저런 몇 가지 저녁 준비에 관한 지시를 하고는,
“내왕이, 잠깐 나하고 얘기 좀 할까. 자, 내 방으로 가자구”
하면서 앞장을 서서 주방을 나선다.
내왕이는 말없이 뒤를 따라 나간다.
거실에 내왕이와 마주 앉자 손설아는,
“차를 한 잔 해야지. 무슨 차가 좋겠어?”
하고 묻는다.
“아무 거나요”
하인인 주제에 뭐 차를 가리겠느냐는 투로 대답한다.
“그럼 내가 좋아하는 송실차를 할까?”
“예, 좋아요”
손설아는 옆방의 월미를 불러
송실차 두 잔을 끓여오도록 이른다.
손설아가 얘기를 좀 하자고 데리고 들어왔으니,
내왕이는 마님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게 순서겠는데, 지금의 심정이 그게 아니어서 자기가 먼저 묻는다.
“마님, 우리 집사람은 어떻게 됐나요?
주방 일을 그만둔 모양인데...”
손설아 마님의 밑에서 부엌일을 해왔었으니, 혜련의 거취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리라 싶었던 것이다.
“응, 그렇지 않아도 그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다구.
내가 말이야, 내왕이 처를 오래 데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참해서 무척 아껴 왔었는데 글쎄 그만 반금련이가 데리고 가버렸지 뭐야”
“반금련 마님이요?”
“응”
“반금련 마님이 집사람을 데려다가 뭐 할려고요?”
내왕이는 너무 뜻밖이어서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글쎄 말이야,
뭐 할려고 그랬는지는 내 눈으로 직접 보질 않아서 뭐라고 말할 수가 없지만... 좌우간 나한테 한마디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주인어른의 승낙을 받았다면서 데려가 버렸다구.
데리고 갔다기보다는 혜련이가 제 발로 걸어가 버렸다는 편이 옳겠지. 반금련이는 내 앞에 코빼기도 안 내비쳤으니까.
내가 여러 가지로 속이 상해서 못견디겠다구”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내왕이는 더욱 궁금하기만 할 뿐 뭐라고 말이 나오지가 않아서, 손설아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다.
월미가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송실차를 두 잔 받쳐 들고 들어온다.
뜨거운 차를 홀짝거리며 잠시 말이 없던 손설아가 표정을 부드럽게 바꾸어 내왕이를 나긋한 눈길로 바라보며 입을 연다.
“먼 길에 고생이 많았을 텐데, 돌아오자마자 그런 얘기부터 들어야 하다니 안됐지 뭐야. 그 얘기는 나중에 내가 자세히 해줄 테니까 그쯤 알고...
우리 다른 얘길 좀 하자구. 자, 어서 차를 들어요”
지금까지 반말을 쓰던 손설아는 살짝 경어로 바꾸며 두 눈에 고운미소를 떠올린다.
그 눈매가 좀 야릇하다는 것을 느끼며
내왕이는 그제야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다.
“동경에 가서 재미있었던 일이나 좀 얘기해 봐요”
“나 같은 사람이 뭐 재미있는 일이 있었겠어요”
하인이라는 신분을 의식하며 하는 말투여서 손설아는 살짝 곱게 눈을 흘기며 말한다.
“나 같은 사람이라니...
내왕이가 뭐 어때서? 생김새가 남한테 떨어지나,
힘쓰는 일이 남한테 뒤지나. 안 그래요?”
아무래도 이거 마님의 어투가 얄궂어서
내왕이는 가슴이 얼얼해지는 느낌이다.
“동경에 가면 여자들도 많을텐데,
재미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니 말이 돼요?
괜찮으니까 한번 얘기해 봐요”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요”
“어머, 재미없어라. 난 내왕이가 어느 모로 보나 사내다울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내왕이는 몹시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기까지 한다. 살짝 고개가 숙여지자, 우뚝한 코가 한결 큼직해 보인다.
“쑥스러워하기까지 하시네. 호호호...”
손설아는 그 사내다운 코에 시선을 멈추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다.
이거 안 되겠다 싶어서 내왕이는 얼른 고개를 들고
잔에 남은 차를 단숨에 꿀컥꿀컥 마셔버린다.
그리고 그만 성큼 의자에서 일어선다.
“마님, 너무 피곤해서 좀 가서 쉬어야겠어요. 다음에 또 찾아뵙지요”
그러자 손설아는 약간 당황하면서도
얼굴에 그대로 웃음을 띤 채,
“그러라구. 피곤하고말고. 푹 쉰 다음 꼭 찾아와야 돼. 알겠지?
내가 혜련이에 대해서 자세한 얘기를 해줄 거니까”
다시 마님답게 반말로 분부를 내리듯 말한다.
자기 거처로 돌아간 내왕이는 괴나리봇짐을 한쪽에 던져놓고, 침상에 벌렁 드러누워 낮잠을 한숨 드릉드릉 코까지 골아가며 늘어지게 잤다.
그리고 일어나니 어느덧 해가 지고, 어둑어둑했다.
부엌에서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내 송혜련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내왕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부엌을 내다보며,
“여보, 나 오늘 돌아왔어”
내왕이는 무척 반가운 듯한 그런 목소리로 아내에게 말한다.
그러나 송혜련은 힐끗 한번 돌아보며,
“알고 있어요”
하고 한마디 할 뿐이다.
표정도 굳어있고, 목소리도 심드렁하기만 하다.
“아니, 여보, 당신 어디 몸이라도 아픈가?”
“아니요. 왜요?”
“그런데 어째 별로 기분이 안 좋은 것 같네.
내가 돌아온 게 반갑지도 않아?”
“왜 안 반가워요. 반갑다구요”
말은 그렇게 하나, 조금도 반가운 투가 아니다.
돌아온 남편 따위 반갑기는커녕 오히려 못마땅하다는 듯이, 돌아보지도 않고, 입만 그렇게 달싹거린다.
“음-”
내왕이는 비위가 팍 상했으나,
그렇다고 당장 시비를 걸고 나설 수도 없는 일이어서 도로 침상에 가서 벌렁 드러누워 버린다.
잠시 후 부엌에서 송혜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녁 다 차렸으니 와서 먹어요”
그 소리를 듣고도 내왕이는 일어날까 말까 망설이다가 배가 너무 고파서 별수 없이 부스스 일어났다.
부엌 한쪽에 놓여있는 조그마한 식탁에 넉 달 만에 남편과 마주 앉아, 저녁을 먹으면서도 송혜련은 굳어진 표정이 시종 풀리질 않았고,
그런 아내를 이따금 힐끗힐끗 눈치를 보듯 거들떠보며 내왕이는 우선 배나 채워놓고 보자는 듯이 말없이 먹어대기만 했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간 내왕이는 괴나리봇짐을 끌러 동경에서 사가지고 온 분과 연지 수건 따위 선물을 꺼냈다.
그리고 부엌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여보, 이리 들어와 봐. 내가 당신 선물을 사왔다구”
설거지를 하고 있는 송혜련은 그저 건성으로,
“예, 알았어요” 하고 대답한다.
서두르지도 않고,
오히려 더 늑장을 부리듯이 천천히 설거지를 다 마친 다음,
송혜련은 마지 못하는 듯 방으로 들어간다.
아내가 들어오자,
내왕이는 또 힐끗 눈치를 보듯 거들떠보고는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거 내가 당신 주려고 동경에서 사온 거라구.
이것은 분이고, 이건 연지, 이건 명주로 만든 수건이야.
이 수건 한 장이 얼만 줄 알아? 석 냥이나 줬다니까”
그것을 받으며 송혜련은,
“많이 사왔네요” 하고 말한다.
그러나 어째 그 말도 시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