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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운동의 모태 언양 작괘천 변‘인내천’바위 | ||||
‘人乃天(인내천)’바위 명각 100주년에 즈음, ‘울산독립공원’ 추진운동 활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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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 작괘천 변 봉화산
기슭 큰 바위에 ‘人乃天’이라 크게 명각되어 있다. 민족의 수난기인 일제강점기에 민족독립을 염원하던 울산 언양인들이 당시 부당한 일제의 침탈과 무단정치를 벗어나 민족자결주의의 민족자주독립의 의지를
담아 약속하였던 새김이다.
이규정 ‘울산독립공원’ 추진위원장(11대,15대 국회의원)의 말씀을 옮겨보면, “인내천 바위는 울산 독립운동사의 요람이요, 성지이다. 망국의 길을 걷고 있던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구국의 결의를 다지던 곳이다. 바위의 인내천이란- 사람이 곧
한울이란 성인의 가르침을 명각했다.”고 전한다. 좌절을 통분해하며 “1915년 민족정신의 결의를 다지며 바위에 새겼으며, 4년 후에 일어날 3.1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던 성지이다”고 사자후를
토한다. 기독교 측과의 연대를 구하여 기독교계의 지도자 이승훈과 신민회 활동가 언론인 이종일의 합류, 보성학교 교장 최린의 중재로 불교계 만해 한용운 참여로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가 연합하는 거족적인 민족운동이 시작되었다. 다른 종교에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원천적 아집이 내재되어 있다. 그 래서 다른 종교 간의 화합은
어렵다. 뜻을 모아 일으킨 역사는 우리 민족이 종파를 뛰어넘어 민족의 자주독립을 얼마나 염원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례는 인류역사상 초유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울산언양인들의 지고한 바램의 새김 명각되어 있는 人乃天(인내천) 바위의 큰 글씨는 종교의 교의를 넘어 존중과 배려를 통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인내천 정신으로 민족자주독립을 이루고자는 울산언양인들의 지고한 바램이 새겨진
곳이다. 대대적인 민족저항운동을 준비한다. 손병희 3대교주의 유지를 받아 천도교 중앙학교 송진우 교장과 현상윤 선생님 그리고 보성학교 최린
교장이 거사를 준비한다. 총독이 부임하여 식민정치를
강화하였다.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음을 미국을 비롯한 열강과 12개국에 알렸다. 고종임금의 인산일인 3월 3일을 즈음하여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을 감안하여 3월 1일 정오를 거사일로 정한다.
인사동 태화관에서 낭송하고 일경에 의에 체포되자, 민중들은 파고다 공원에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천도교 울산교구장 김교경이 서울 파고다공원의 3.1만세운동을 직접 지켜보고, 울산교구의 천도교인들에게 독립신문과 국민회보의 기사를 편지와 함께 보내면서, 울산언양의 독립만세운동 준비를 당부한다. 즉시 교인들을 소집하여 의논하여, 휘문의숙 출신 이규장을 서울에 보내어 김교경 교구장의 지시를 받아오게 하였다.
태극기 제작을
담당하였고, 휘문의숙 동문이 황선윤을 불러 동참하게 하였다. 길천리 이무종의
사랑방을 본부로 하였다. 황선운과 등사하고 새벽에 다시 면사무소에 갖다
놓는 대범함을 보였다. 이규인의 빈집에서 밤을 새워가며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종능 등 7명은 장터로 향했다. 김만출이 청년들에게 이규인, 이성영, 강경찬 등이 태극기를
비밀리에 나누어 주었다. 기점으로장판은 군중들의 태극기와 만세소리가 물결쳤다. 일경의 발포로 17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나 대한독립만세소리는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봉화산 기슭의 바위에 4년 후 기미년 언양독립만세운동의 저력이 되는 인내천이 명각되었다. 춘사 김영걸님이 쓰고 각자는 함석헌님이 하였다. 거리마을에 양정학원을 설립하였다. 이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기약한 인내천 바위의 명각은우리 고장의 자랑이요. 자긍심이다. 그 정신을 더욱 고양하기 위하여 인내천 바위 일원을 ‘울산독립공원’으로 성역화하기 위한 시민들의 뜻이 한데 모여 추진위가 만들어지고 그 정신이 확산되어 울산에도 전국에서 세번째로 독립공원이 설립되기를 기원한다. /21세기의병대 총사령 김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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