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억 원. 충북 청주시 흥덕구 소재 (주)로덱 은병선 대표(60)가 회사 설립 전 홀로 떠안고 있던 보증채무금 액수다. 롯데햄우유 기술부에서 10여 년간 직장 생활을 해온 은 대표는 1993년 (주)대현플랜트라는 건설장비업체를 호기롭게 창업한다. 하지만 이후 IMF 등을 겪으며 적잖은 빚만 졌다. 그의 첫 창업기는 이대로 막을 내리는 듯했다.
막다른 골목에 선 그때, 번뜩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다. 당시 주성대 기계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던 은 대표에게 일본 안과 및 안경점용 진료·검안기기의 수정 설계 의뢰가 들어왔던 일이다. 일본 다카키사의 한국총판사의 요청이었다. 처음엔 시큰둥했다.
그러나 빚더미에서 홀로 일어설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길로 다카키 제품의 모디파이에 착수했다. 그렇게 로덱의 전신 ‘이노메디’가 탄생했다. 2004년의 일이다.
빚더미 속 자력갱생… 국내시장 빠르게 점유
어릴 때부터 기계라면 자신 있던 은 대표였다. 일제 의료기기를 본 따 내놨지만,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당시 국내 5개 업체가 진료·검안용 기기를 앞서 출시 중이었지만, 은 대표의 제품은 빠르게 시장을 잠식하며 이들을 앞질러 갔다. 2007년에는 사명을 ‘RObust+DEfinite+Knowhow’의 앞 글자를 따, 지금의 ‘로덱(RODEK)’으로 변경했다.
로덱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충북지역 내 대표적인 우수기업의 자리에 올랐다. 안과 및 안경점용 진료장치와 의자 등 의료용 기기를 전문 제조하는 로덱은 현재 국내 안경점 시장의 60%, 안과 시장의 95%를 점하고 있다.
최고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이미 안과용 진료장치 분야에서 더 올라갈 곳 없는 높은 시장점유율을 보이며, 수출에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2018년 무역의 날에는 도내 40개 업체에게만 수여하는 ‘충북 수출탑’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장의 절대 강자가 됐지만, 국내 시장은 좁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로는 더 이상 커나갈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로덱이 해외 수출로 눈을 돌린 이유를, 은 대표는 이같이 설명했다. 2010년 무역업 등록을 마친 로덱은 본격적인 해외수출에 나섰다.
기술력만큼은 전 세계 어느 업체와 견주어도 자신 있던 은 대표였다. 문제는 자본력과 해외영업력이었다. 로덱의 제품은 무게나 부피가 크다. 샘플 발송 불가다. 서구 유럽 경쟁사 제품과 비교 시 가격이나 품질 면에서는 빠지지 않지만, 디자인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국내시장에서는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해외시장은 초보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해 신남방 무역사절단 일원으로 파견된 은병선 로덱 대표(왼쪽 2번째)가 바이어 기업과 MOU를 체결하고 있다. [사진=로덱 제공] |
무역사절단·국제전시회 참여하고 바이어 초청
이 같은 단점을 은 대표는 특유의 ‘성실함’과 ‘발품’으로 극복했다. 해마다 국제전시회며 무역사절단이며 가리지 않고 참가했다. 이를 통해 로덱의 제품을 알리고 써보도록 했다. 특히,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해외 바이어들을 본사와 공장이 있는 청주로 초대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충청북도와 무역협회의 도움을 받았다. 2017년 청주시 인도네시아-베트남 무역사절단 파견사업과 같은 해 추계 동남아 충북무역사절단 파견 사업에 참가해 동남아 바이어들과 첫 접촉을 시도, 결국 독점계약을 성사시켰다. 현재도 이들 바이어와의 지속적인 비즈니스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2018년 ‘다문화가족 무역도우미 충북지원사업’을 통해서는 일본의 한 업체와 제품생산 및 공급에 관해 협의하는 과정에서 통역과 번역 지원을 받았다. 2019년에는 ‘신남방 무역사절단 충북파견사업’에 참가해, 당시 한창 개발이 진행 중이던 신제품에 대한 향후 수요예측 등 현지 시장조사를 밀도 있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밖에 외국어 카달로그 제작과 국제특송 해외물류비 등을 도청과 협회로부터 지원 받은 것 역시 수출 실적에 큰 도움이 됐다.
은 대표는 “이 같은 지원 서비스를 최대한 활용한 결과, ‘로덱’이라는 브랜드를 인지하는 바이어들을 단기간 내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며 “특히 한국산 의료기기에 대한 인식이 좋아 우리 제품에 대한 문의가 늘고 있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여세를 몰아 로덱은 현재 일본과 싱가포르를 비롯해 이란, 태국, 베트남, 우크라이나, 중동권역 등 10여개 국가로 수출선을 다변화하고 있다.
지난해 신남방 무역사절단 일원으로 파견된 은병선 로덱 대표(왼쪽 2번째)가 바이어 기업과 MOU를 체결하고 있다. [사진=로덱 제공] |
환경친화 신제품 출시… 해외에서도 관심
지난해 국회에서 ‘물환경보전법’이 통과됐다. 이에 따라 전국 1만여 일선 안경점들은 안경 렌즈 가공·연마시 미세 플라스틱 폐수를 의무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최근의 안경 렌즈는 유리가 아닌 플라스틱 재질이 대부분이다. 상대적으로 가벼우면서 강도 역시 강해서다. 하지만 렌즈를 안경테에 맞춰 깎아낼 때, 미세 플라스틱이 나오게 된다. 지금까지는 아무런 여과 처리과정 없이 물과 함께 하수로 흘려보냈다. 하지만 법 통과 이후 이 같은 행위는 모두 불법이 된다.
물환경보전법 시행령 및 시행규칙의 개정안에 따르면, 안경렌즈 폐수(슬러지)는 2021년 7월 1일부터 정부의 단속 대상이다. 환경부가 지난해 10월 기타수질오염원에서 제외시켜줬던 안경원을 여기에 포함해 관리하면서다.
로덱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수년간 진행해온 안경렌즈연마 폐수처리장치인 ‘오클로(O’CLO)’의 개발을 최근 완료, 올해부터 본격 양산·판매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은 대표는 “오클로는 안경점의 영업 환경을 보다 청결하게 하고 수질 오염원인인 미세 플라스틱의 손쉬운 폐기를 돕는 친환경 연마 폐수 처리장치”라며 “이 제품의 가장 큰 장점은 쉽고 편리한 사용”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오클로는 간편한 작동과 유지보수가 가능하다. 다양한 모델의 기존 장치에 연결해 사용할 수도 있다. 특히 영세 소형 안경점내 좁은 공간에도 설치가 가능한 콤팩트한 사이즈가 강점이다.
은 대표는 “오클로는 기본적으로 환경을 생각한 제품”이라며 “수질 오염원인인 미세 플라스틱이 하수구에 흘러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고 폐수와 슬러지는 본사가 개발한 전용 응고제를 사용해 고형화시킨 뒤 일반 쓰레기로 손쉽게 폐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안경점 내 안경렌즈 가공 과정상 발생하는 특유의 악취 등 비위생적인 작업 환경을 보다 청결하게 개선시키고 미세 플라스틱 찌꺼기로 인해 생활 하수도가 막히고 오염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게 은 대표의 설명이다.
은 대표는 “나는 엔지니어 출신 CEO다. 그래서 믿고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제품의 품질과 기술력에 가장 중점을 둔다”고 말했다. 그의 사무실 한편에 빼곡히 전시돼있는 수백 종의 기술인증서가 이를 웅변한다. 각종 ISO 인증서는 물론, 10여 건의 국내외 특허 출원·등록증이다.
은 대표는 기술적으로 국내 제품을 압도해 올해만 1000대, 내년에는 7000대가 판매될 것으로 예상한다”며 “현재 국내에는 우리 말고 대체 제품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독주 체제를 이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오클로의 기술적 우수성은 해외 바이어들도 인정, 일본과 인도네시아, 유럽 등지에서 벌써부터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냉혹한 상황 인식… 결론은 세계시장으로
‘사실을 인정하자’
로덱의 사훈이다. 대표부터 직원에 이르기까지 기업의 현 상황을 냉철히 인식하자는 얘기다. 엔지니어 출신 CEO다운 슬로건이다. 이 회사의 상황 인식은 국내시장을 보는 눈에서 알 수 있다. 내수시장의 절대 강자이지만, 시장의 불확실성과 성장한계를 정확히 짚고 있다. 로덱이 국내 판매에 안주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은 대표는 “국내 시장점유율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수출에 주력하게 된다”며 “로덱의 궁극적인 목표는 수출지향형 기업”이고 밝혔다.
올해는 코로나 사태 여파로 횟수가 크게 줄었지만, 수출영업 때문에 해외출장을 자주 가곤 한다는 은 대표는, 자연스럽게 선진기업들과 우리 중소기업들을 비교하게 된다고 말했다. “국내 중소 수출기업들은 업무 강도나 열정, 성실성 면에서 아직 선진국에 못 미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며 “이는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단순히 월급 많이 주고, 종업원 수가 많다고 선진 기업이 되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기업의 의식과 문화가 일정 수준에 이르고, 경영자와 근로자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기존과 다른 창발적 노력을 다하려 애쓸 때 비로소 세계 초일류 기업이 될 수 있다고 은 대표는 강조했다.
로덱은 지난해 총 21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 가운데 2억 원을 수출로 거둬들였다. 하지만 올해는 국내 시장에서 오클로 특수 등의 영향으로 최소 50억 원 이상의 매출 급성장을 기대하고 있다. 여기서 5억5000만 원 가량은 수출을 통해 이룰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다.
은 대표는 “일본 미쓰비시그룹의 계열사중 하나였던 탑콘(TOPCON)과 수년째 공동 추진해온 ‘안과용 검사장비’의 개발이 완료돼, 올해부터 본격적인 수출이 진행된다”며 “특히 이 제품은 탑콘이 아닌 ‘로덱’ 브랜드로 전량 수출키로 돼있어, 향후 해외 마케팅 측면에서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