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數値)와 가치(창13:11-13)
2026.5.17 부부주일/스승의 주일, 김상수목사(안흥교회)
하나님의 축복은 위로부터 아래로, 머리로부터 지체로 흘러간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이고, 부모는 자녀의 머리이며, 스승은 제자의 머리이며, 장자는 형제들 중에 머리이다. 이것은 차별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구별이다
. 그렇기에 머리된 가장이나 부모 또는 스승의 판단은 집안의 방향이나 한 사람의 인생 더 나아가서 국가의 미래에 까지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렇기에 머리 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늘 최고의 가치(價値)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 이것이 이 시간 말씀의 핵심이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러한 최고의 가치를 선택하는 것에 혼란을 주는 것이 있다. 바로 수치(數値)이다. 쉽게 말하면 수치란 단지 눈에 보이는 계산 값이고, 가치는 값으로 선정하기 어려운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계산, 이익, 대박, 성공, 성적, 성장률, 건물크기 등과 같은 것들은 수치의 영역에 속한다. 반면에 신앙, 사랑, 예배, 관계, 행복, 정의, 인권, 내면의 평강, 방향성 등과 같은 것들은 가치의 영역에 속한다.
지금 이 시대는 가치보다 수치가 성공의 기준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자칫하면 수치라는 유혹에 매몰되기 쉽다. 수치에 매몰되면 사람을 숫자나 돈으로 인식하기 쉽다. 지금 우리 사회는 수치를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한다(범죄, 배신, 도덕적 타락, 돈을 위해 가족을 살인 등).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한다. 심지어 사고를 내고도 물어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심지어 교회나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수치라는 함정에 빠지면, 사람을 숫자(인원, 재정 등)로 보는 우를 범하기 쉽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의 사랑은 실종되고,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수치보다 가치를 중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액수나 외형적인 껍데기보다 중심을 보신다(삼상16:7). 특히 머리 된 가장이나 스승 또는 지도자들이 수치와 가치 중에 어떤 것에 더 큰 무게를 두느냐 하는 문제는 집안의 미래나 제자들의 인생방향과 직결된다.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는 아브람(후에 아브라함)과 롯의 경우는 그 좋은 실례이다. 아브람과 롯은 삼촌과 조카의 관계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같이 목축을 했지만, 후에 육축이 많아졌을 때, 각각 독립을 하였다. 그 장면이 바로 오늘 설교의 본문이다. 이때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고, 롯은 소돔과 고모라 방향의 땅을 선택했다. 그 쪽이 물이 넉넉하고 풍요롭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계속해서 머물렀다. 아마 아브라함이 먼저 선택을 했더라도 그는 가나안을 선택 했을 것이다.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창13:9-12,)
그렇다면 왜 아브람은 가나안땅에 거주하는 것을 선택했고, 롯은 소돔과 고모라가 있는 쪽을 선택했을까? 그 이유를 “수치”와 “가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아브람은 하나님이라는 최고의 가치를 선택했고, 롯은 당장 눈에 보이는 세상의 풍요라는 수치를 선택했다는 말이다. 아마 롯도 가장으로서 나름대로는 자신이나 가족들의 미래를 생각해서 선택했을 것이다.
이들 두 가장의 선택의 결과는 어땠을까? 롯이 떠난 후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가 밟는 땅과 자손을 땅의 티끝 처럼 창대하게 해주신다는 약속을 주셨다. 아브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았다(창13:14-18).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최고의 가치인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 반면에 롯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그 심령이 상했고(벧후 2:6-8), 소돔의 가치관이 가족에게 스며들었으며,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었고(창19:26), 딸들은 입에 담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도덕적인 타락을 했다(창19장). 한 마디로 집안에 폭망했다.
그러면 이 당시에 롯은 하나님은 믿지 않는 불신자(不信者)였는가? 그렇지는 않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의로운 사람이었다(벧후2:8).
“이는 이 의인(롯)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벧후2:8)
롯도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다. 그러나 그의 판단기준을 여전히 아직도 포기되지 않은 세상적인 것들 즉 수치(數値)에 두고 있었다. 혹시 이러한 롯의 모습이 지금 우리(나)의 모습은 아닐까?
한 가정의 머리이자 가장으로서의 이들의 산택과 행동은 오늘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머리 된 사람들(남편, 부모, 스승, 지도자 등)의 선택이 가정과 나라와 심지어 인류 전체의 방향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은 이들 뿐만 아니라, 성경이나 인류의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은 남편과 가장으로서 무책임했던 첫 번째 사례이자 대표적인 사례들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아담의 태도는 침묵, 방관, 동조, 회피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그는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열매를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창3:6) 줄 때, 가장으로서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에 침묵하고 방관했다. 오히려 그것을 받아서 먹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는 ‘단지 한 개일 분인데, 괜찮겠지’라고 쉽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한 개라는 수치보다 더 중요한 한 개 속에 숨어 있는 가치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이들을 찾으실 때, 왜 하와가 아닌 아담의 이름을 부르셨는지를 기억해야한다("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한 가정의 머리이자 가장으로서의 아담의 침묵과 방관과 동조는 가족은 물론이고, 인류를 비극으로 몰아넣었다.
한 가장의 선택과 결단이 온 집안과 나라를 구하는 거룩한 영향력을 주었던 실례들도 많다. 독립운동가이자 열정적인 전도자로 잘 알려진 손정도(1882–1931)목사님은 1918년을 전후하여 3년간 정동교회를 담임하기도 했으며, 상해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의장 등을 맡았다. 손정도 목사님은 일제 강점기라 극한의 상황에서도 신앙을 가정의 중심에 놓았다. 그는 자녀들에게 "나라를 잃어도 하나님은 잃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 결과 장남 손원일 장로님은 대한민국 해군과 해군사관학교를 창설하고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교장 그리고 후에 국방부장관과 서독 대사가 되었다. 그는 군목제도를 도입함으로 군(軍)선교에도 큰 역할을 했다. 지금 해군에서 부르는 “바다로 가자”, "해군사관학교의 교가"등 다수의 군가들은 그 당시에 손원일 장로님이 작사하고, 그 부인인 홍은혜 권사님이 작곡한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후에 “한국에 손원일 제독 같은 분이 계시다는 것이 곧 하나님이 한국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손정도 목사님의 차남인 손원태는 중국에서 독립운동 지속했으며, 딸 손인실 역시 독립운동 헌신했다. 목숨보다 신앙이라는 최고의 가치를 선택한 가장의 결단이 자녀들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와 한국을 살리는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
이 시대 우리들도 성공주의의 파도에 휩쓸려서 자칫하면 수치에 매몰될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큰 교회, 큰 종’이 아니라, ‘참 교회, 참 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닮아가기 보다는 바리새인을 모방하려는 모습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내) 안에 있는 수치에만 집중하는 바리새적인 요소들이 없는지를 성찰하고, 그것들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의 축복은 위에서 아래로, 머리에서 지체로 흘러간다. 그러므로 머리된 우리들(남편, 부모, 스승, 직분자들, 지도자들 등)이 당장 눈에 보이는 수치의 많고 적음에 매몰되지 말고, 최고이고 영원한 가치인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자. 이것이 가정과 교회와 국가 그리고 한 개인의 삶이 형통하게 되는 성경의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