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281
■ 1부 황하의 영웅 (281)
제4권 영웅의 길
제34장 열국을 떠도는 중이(重耳) (9)
그 날 저녁,
사냥을 마친 초성왕(楚成王)과 중이(重耳)는 이궁에 머물면서 크게 술자리를 벌였다.
모두들 흥이 나서 연신 술잔을 돌리는 중에 문득 초성왕이 중이를 향해 물었다.
"공자가 우리 초(楚)나라의 도움을 받아 본국으로 돌아가 군위에 오른다면, 공자는 무엇으로써 과인에게 보답을 하시겠소?“
얼핏 생각하면 우스갯소리로 넘길 수도 있는 물음이었으나, 기실 그 이면에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었다.
초성왕(楚成王)이 중이(重耳)를 맞이하면서 그를 파격적으로 환대한 것은
자신의 부드러운 인상과 넓은 아량을 천하에 과시하기 위한 의도에서 였다.
이를테면 천하 맹주로서의 자격이 있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북방까지도 자신의 영향권 내에 거두어들이려는 장기적인 포석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두 달 중이를 가까이서 겪어보니 중이(重耳)와 그 가신들의 풍모가 생각보다 훨씬 뛰어났다.
천하 패업을 향한 자신의 노력이 이들에 의해 방해될지도 모른다는 예감마저 들었다.
경계의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사 인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이들을 확실히 눌러두지 않으면 차후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
그리하여 초성왕(楚成王)은,
- 어떤 보답을 해줄 것인가?
요구함으로써 미리 중이의 행동에 제약을 가하려는 것이었다.
그 제약이란 물론 영토의 할양을 말함일 것이었다.
만족스런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을 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모두 죽일 수도 있다는 그런 뜻일 것이다.
또 이 질문은 다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일찍이 중이(重耳)의 동생 이오(夷吾)는 진목공(秦穆公)에게 자신을 진(晉)나라 군위에 올려주면 하남의 다섯 성을 내준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이오(夷吾)는 임금에 오르자마자 언제 그랬냐 싶게 이를 파기했다.
- 진(晉)공자들은 모두 거짓말쟁이 아니냐.
그대도 또한 임금이 되면 나의 이 은혜를 까맣게 잊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때는 가만두지 않겠다.
이런 비꼼과 협박이 저변에 깔려 있다고도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초성왕(楚成王)의 이 물음에 중이(重耳)는 뭐라고 답했을까.
이때의 초성왕과 중이 간에 오간 문답은 중국 역사상 이름난 회담 장면 중 하나로 남게 된다.
이 장면에 대한 여러 사적(史籍)의 기록들을 군더더기 없이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초성왕이 물었다.
"공자, 만약 본국으로 돌아가면 무엇으로써 과인에게 보답하겠소?“
중이(重耳)가 대답했다.
"우모(羽毛)나 치각(齒角), 옥백(玉帛) 같은 보화들은 왕께서도 남아도는 바입니다.
무엇으로써 보답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초성왕(楚成王)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 할지라도 어쨌든 무엇인가로 나에게 보답해야 하질 않겠소?“
중이(重耳)가 대답했다.
"정히 그러시다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후일 만부득이하여 제가 군왕과 싸우게 되면 그때는 제가 3사(三舍)를 물러서겠습니다."
이를 좀더 쉽게 풀어보면, 중이(重耳)의 대답은 상당히 허를 찌르는 것이었다.
재물로써 초성왕에게 보답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겠는가.
즉 아직 그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답변은 상당히 고단수다.
물론 중이(重耳)는 초성왕이 영토 할양을 요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토를 내줄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일.
그래서 중이는 못 알아들은 척 멍청한 대답을 함으로써 초성왕의 요구를 완곡히 거절했던 것이다.
그러나 초성왕(楚成王)은 집요했다.
그래도 그 무엇인가로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땅을 내주면 되지 않는가, 라는 의미로 또 물어왔다.
이제는 답을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중이(重耳)는 고심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역사에 남을 명답을 남기었다.
- 3사(三舍)를 물러나겠소.
여기서 사(舍)란 거리 개념을 뜻한다.
즉 1사는 30리다.
당시 군대의 하루 행군거리는 보통 30리.
30리를 행군하면 휴식을 취한다.
그래서 하루 행군할 수 있는 거리인 1사(舍)가 30리로 정착된 것이다.
따라서 3사(舍)는 90리.
내가 장차 진(晉)나라 임금이 되었을 때 혹 양국간의 이해 관계가 엇갈려 전쟁을 벌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초성왕(楚成王)이 도와준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에서 일단 90리를 물러나 주겠다.
이것으로써 초성왕에 대해 진 빚을 갚고자 한다.
이오(夷吾)처럼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나는 하지 않겠다.
이것이 중이(重耳)의 답변이었던 것이다.
초성왕(楚成王) 으로서는 기가 차지도 않는 답변이었다.
어쩌면 초성왕(楚成王)은 질려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중이(重耳)의 태도는 당당했고, 또한 진솔했다.
구걸을 원했는데, 구걸은 커녕 후일 전쟁터에서 만나면 90리를 양보하겠다니, 참으로 대단한 놈이다.
뇌물을 요구했을 때 뇌물을 거절한 상대에 대한 느낌은, 분노 아니면 탄복이다.
초성왕(楚成王)은 탄복의 경우로 보는 것이 좋겠다.
반면 초성왕의 총신인 성득신(成得臣)은 뒤늦게 중이(重耳)의 말을 전해듣고 화를 버럭 냈다.
- 이런 고이얀 놈이 있나! 갈 곳 없어 떠돌아다니는 망명객 주제에 이 무슨 불손한 말인가.
그러면서 그는 초성왕에게 강력하게 아뢰었다.
"신이 그자를 죽여 없애겠습니다.“
그러나 초성왕(楚成王)은 확실히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진(晉)공자 중이(重耳)는 능력 있고 어진 인물이나 불행히도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해 곤궁한 생활을 영위해왔다.
또한 그를 따르는 가신들은 당대의 영걸들이다.
이 모든 것은 하늘이 그를 위하고 있음이라 할 수 있다.
만일 그대가 진(晉)공자였다면 과연 그대는 무슨 대답을 했을 것인가?"
이에 성득신(成得臣)은 한발 양보하며 다시 말했다.
"왕께서 중이(重耳)를 죽이실 수 없다면 호언(狐偃)과 조쇠(趙衰) 등 그의 가신 몇 사람만이라도 감금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범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 신하들을 잡아두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그들을 부릴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공연히 원망만 살 뿐이다.
진(晉)공자에게는 덕을 베풀고 어짊을 보이는 것이 현명한 계책일 것이다.“
그러고는 더 이상 성득신(成得臣)에게 중이에 대한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성득신(成得臣)은 중이(重耳)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기보다는 두려운 마음을 품었을지도 모르겠다.
'장래 저자가 우리의 적이 된다면....?‘
생각만으로도 몸이 떨렸다.
강력한 적을 기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제 막 싹이 트려 할 때 해치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
성득신(成得臣)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안 된다면 그 가신들만이라도 인질로 잡아두는 것이 우리나라의 앞날을 위해 좋지 않을까.'
하지만 이러한 성득신의 계획은 초성왕에 의해 무산되었다.
'왕께서 실수하신 거다. 언젠가는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성득신(成得臣)은 초성왕 앞을 물러나오며 이렇게 탄식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