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솔 이석표 여사 개인전”에 대한 단상(斷想)
학교에서 본 여사의 모습
이석표 여사는 늦은 나이에 원광대 서예과에 입학을 하였다. 다른 학생들에 비해 한 세대 이상 차이가 나는 만학도였지만, 젊은 학생 못지않게 활기차 보였다. 수업을 듣는 눈빛은 언제나 초롱초롱했으며, 체육대회 때에도 현역 학생들과 똑같이 과T를 입고 뛰는 선수들을 열심히 응원했다. 꾹꾹 눌러 쓴 답안지의 남성적인 필체가 인상적이었으며, 성적도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사께서 입학한 97년도는 IMF가 시작되었던 해로 학생들의 정서가 많이 거칠어져 있어 생활하기에 다소 힘든 환경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선후배 관계도 조금 남달랐다. 그때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여사께서 “내 인생 다 반납했다”고 하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아마 학교생활이 무척 편편치 않았나보다.
4년 동안 지도교수를 맡은 관계로 여사께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직접 나서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침묵하는 것이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서 더 좋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냥 바라보는 쪽을 택했다. 다행히도 여사의 모습은 의연했고 별 불평 없이 여유롭게 웃으며 생활했다. 이러한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장부의 기개를 느끼게 해주었다. 당시 부군(夫君)께서 원광대학교 한의대 학장 보직을 막 마치고 교수로 재직하고 계셨던 터라 행동거지가 많이 힘들었을 것으로 본다.
천사며느리
여사께서 서예를 전공으로 선택한 것은 시어머니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홀로 되신 시어머니가 어느날 갑자기 전신마비가 되어 전혀 거동을 못하셨다. 중풍이었다. 여사께서는 이로부터 10년동안 시어머니의 수족이 되어야만 했다.
고생하는 아내를 안타깝게 여긴 남편 정우열은 어머니도 못 모시는 불효 자식이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느냐는 참회어린 고백을 하며 학교를 사임하기로 결심했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여사는 모든 책임을 내가 다 질 터이니 안심하고 교수직을 수행할 것을 당부하고는 며느리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이때 시작한 것이 서예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붓 드는 것을 좋아했지만, 병수발에 지친 몸을 쉬어가기 위해서 서예는 없어서는 안 될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여사의 시어머니에 대한 봉양은 극진했다. 시어머니가 별세하기 전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한번도 시어머니보다 먼저 식사를 한 적이 없었으며, 어쩌다가 바깥출입을 하는 날이면 아이들이 자처하여 누워 계신 할머님께 먼저 식사를 챙겨 드렸다. ‘부모 모시기를 하늘 모시듯 한다’는 선인들의 효도관은 바로 이석표 여사의 가정에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었다.
시어머니께서는 지극정성으로 돌보아주는 며느리의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시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네 아내는 천사다. 나중에 이 말을 꼭 전해주도록 하라”고 하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셨다.
돌아가신 시어머니께서 주신 보답의 선물이었을까. 이 여사는 시어머니가 별세한지 얼마 안 되어
대학입학 수능고사를 준비했으며, 큰 어려움없이 1년 후에 합격하여 마침내 평소에 숙원하던 원광대 서예과에 입학하게 된다. 57세가 되는 해였다.
문장에 나타난 작품정신
이 여사로부터 개인전 평문을 부탁받고 내심 적지 않은 부담을 느꼈다. 그 이유는 이러한 글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마음에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정우열 교수로부터 장시간동안 아내의 인생역정을 들으면서, 이 분이야말로 한국서단에서 찾아보기 드문 큰 장점을 가진 작가임을 발견했다.
이는 작품 소재의 선택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부인의 개인전을 축하하면서 쓴 정우열의 평문 “한솔 작품에 투영된 그의 영상(映像)”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석표 여사가 이번에 전시를 준비하면서 선택한 글감은 그 자체만으로도 안복(眼福)을 누리게 해주는 볼거리들이 많다.
한문을 우리말로 번역한 작품은 대부분 한학(漢學)에 밝은 남편 정우열의 손길을 거쳤다. 주희의 「권학문」, 백낙천의 「권학문」, 서산대사의 시, 도연명의 시, 이정귀의 「동의보감」 등이 그것이다. 김홍도의 「해산첩(海山帖)」 8폭을 임모하고 홍석주의 시를 번역하여 쓴 작품도 일품이라 하겠으며, 「세한도(歲寒圖)」를 임모하고 김정희가 이우연에게 보낸 편짓글을 번역하여 결합한 작품 또한 창의력이 돋보이는 구상이었다.
본인이 직접 지은 자작시(自作詩)도 10여점 출품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글감을 작품의 소재로 끌어들이고, 더욱이 자신이 손수 지은 시를 곁들여 전시를 한 경우는 국내 서예전에서 아주 보기 드문 현상이다.
본 전시작품을 보면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가족애(家族愛)를 담은 시이다. 여사의 시를 보면 가족과의 관계가 얼마나 화목하고 건강한지를 느끼게 한다. 그중에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시가 세편이나 된다.
「정화수 한 사발」에서는 아들 딸 잘 되라고 비는 어머니의 모습을 담았다.이 작품은 여사가 어릴적에 장독대 위에 정화수 떠놓고 비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다. 여사의 어머니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은「어머니」라는 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
나는 오늘도 조용히 앉아서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신
어머니 목소리 들으려고 귀 기울이고
남쪽 하늘 향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불러본다.
시의 마지막에 ‘어머니’를 부르는 구절에서는 여사의 애절한 음성이 허공에 메아리치는 듯하다. 이 세상 어머니의 존재 가치가 감동적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우리는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는 좋은 글감들을 놓쳐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고 한다. 이 여사는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소재로 심금을 울리는 시를 지어내고 있다.
남편에 대한 사랑도 극진했다. 「여보당신」이라는 시는 남편에 대한 애틋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시는 97년 환갑을 맞은 남편과의 만남에 감사하고 남은 여생의 만수무강(萬壽無疆)을 빌면서 쓴 글이다.
여보 당신
어느새 환갑이 되었구려
당신 만난 것이
엊그제 같은데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오직 한평생
학문만을 위해
살아온 당신
소같이 우직하고
때론 목석처럼
무뚝뚝해
외며느리 신세타령
한 두 번이 아니었소
그러나 이제사
당신 큰 그늘에
이렇게 서게 되니
모든 건 눈 녹듯이
다 녹아버리고
당신과 살아온 세월
꿈만 같구려
이제 남은 여생
즐겁게 삽시다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라 했던가. 남편 정우열이 쓴「길」이라는 작품에는 두 손을 꼭 잡고 함께 걸어가는 부부의 모습을 소나무로 대신하고 있다. 이들이 손잡고 가고자 하는 길은 어떤 길일까.
당신은 길을 말로 가르쳐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손가락으로 가르쳐주지도 않으셨습니다.
몸소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그 길 그 길이 바로 당신이 걸으신 길이라는 것을
그 길이 바로 하나님 나라로 통하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훨훨 앞장서서 가시면서
따라오라고 어서 따라오라고 행동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길은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이 시를 통해 두 사람이 가는 길은 성문(聖門)으로 들어가는 진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임을 알 수 있다. 자작시「가을편지」에 보면 이 여사의 가족이 모두 다 등장하고 있는 것 같다. 환한 빛을 연상하게 하는 시이다. 캐나다에 있는 큰며느리,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딸, 큰아들과 손자, 손녀가 이여사의 품속에서 따뜻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이 여사는 가족애 뿐 만 아니라 나라를 걱정하는 역사의식도 남다르다. 그는 텔레비전을 통해 방영된 남대문이 불타는 모습을 보면서「남대문」이라는 시를 썼으며, 제1주년 추모 모임 때 시낭송을 할 정도로 나라 사랑에 대한 적극성을 보였다.
작품의 특징
다양한 글감 못지않게 작품에서 다양한 시도가 엿보였다. 서체의 기본 틀은 궁체와 고체이지만 일반의 한글 작가와는 다르게 다분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한글 법첩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글씨가 있는가 하면, 과감한 변형을 하면서 자가체로 발전한 서체가 있다. 전체 화면의 구사에 있어서도 글씨의 시작지점을 규칙적으로 지정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규칙을 깨고 들쭉날쭉하게 하면서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를 꾀한 작품이 있다.
이러한 변화현상은 서체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이 아니다. 그림에 있어서도 정밀하고 예민한 세부묘사를 한 그림이 있는가 하면, 세부적인 것을 모두 생략하고 투박하고 거친 기법으로 처리한 그림이 있다. 이러한 대비적인 특징은 작가의 성향을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연령상으로 본다면 이러한 작품상에 나타나는 변화와 기복은 노년층보다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을 좋아하는 젊은 층에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라고 본다. 아무튼 이석표 여사의 작품에는 여기 저기에서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창조적인 에너지가 누구보다도 강하게 분출하고 있다.
다만 앞으로의 창작이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익혀온 고법(古法)과 새롭게 추구하려는 창신(創新)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조화롭게 발전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작품의 내용과 형식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작가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 본 전시는 인사동 경인미술관 제1전시실에서 8월 17일부터 23일까지 전시된다.
첫댓글 귀한 글 잘 보았습니다. 늘 감사드리며......
작가와 작품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좋은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이여사님의 전시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도 힘찬박수 보내드립니다 짝~짝~짝~늘 좋은글 감사합니다 교수님~건안하신 8월 맞이하세요...()
이여사님의 전시를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응원의 기립박수를 보내드립니다~~
건강하시구요~~^&^
아침에 눈물을 글썽이게 하는 효부상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술 이전에 인간애가 바탕이 되신 한솔 이석표님의 장도에 무궁한
건강과 발전을 기원 합니다._()_
서예를 문화라는 넓은 측면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예술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서예는 너무나 美, 藝術, 造形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서가 서예, 서법, 서도라 불리워지듯이, 좀 더 서예의 광의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오늘날의 시대정신으로 불리워지는 문화의 대열에서 서예가 꽃피워질 수 있습니다. 작가 이석표의 이번 개인전은 오늘날의 서예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정화되는 것 같은 글이네요 작품은 못보고 지나쳤지만 글은 와 닿았습니다 작가님의 작품을 볼 기회가 또 있겠지요 그 때는 생각을 하면서 감상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석표님의 글은 진한 감동이 있습니다. 글도 작품들도 하나 하나 정성이 듬뿍 들어간 전시회였습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