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체 지향 존재론과 관계적 존재론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하먼의 철학과 다르게 나는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동시에 구성한다고 보는 관계주의적 입장이 보다 단순하고 정직한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우리가 완전히 알지 못하는 측면이 객체에는 존재할 것이다. 관계주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에 대한 선규정이, 어떤 본래의 성질이나 존재함이나 본질 같은 것을 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불필요하다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러한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관계, 경험, 입장, 역사가 열어준 가능성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의미일 뿐이다. 그러므로 분명 우리의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는 대상의 측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형이상학은 대상에 대해 인간이 구성한 또 다른 의미망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존재론을 말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이야기나 묘사, 그리고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객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진리 찾기보다는, 다양한 존재들과 함께하는 다른 미래를 희망하기. 이것이 하먼이 비판한 프레그마티즘 철학이 알려준 교훈이다.
최근의 한국문학에서 인간과 비인간이 논의되는 방식은 이미 한 차례 변화를 겪은 듯하다. 탈인간중심적 전회가 인간의 위치성을 ‘지상으로 끌어내림으로써’ 비인간과의 ‘긍정적인 연결’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 본 관점이 비교적 초기의 흐름이었다면, 이를 전면적으로 반박하는 견해 또한 있다. ‘인간과 비인간의 공생적 관계라는 당위’는 성급히 윤리성만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오히려 그 지점으로부터 공존이 모색될 수 있음을 말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레이엄 하먼은 미국의 철학자로 마르틴 하이데거와 브뤼노 라투르의 철학을 기반으로 형이상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후기 칸트주의에 대항하는 사변적 실재론과 객체지향 존재론의 선두주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많은 생물종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도, 정복하지도 않으면서 함께 살아가는 생태’의 세계를 그려보자는 것이다.
신유물론은 21세기 세계관에 일대 변혁을 일으키고 있는 철학 이론이다. 수동적인 죽은 물질이라는 옛 유물론의 물질관을 대체해 능동적인 산 물질이라는 새로운 물질관으로 우주와 인간을 해석하는 것이 신유물론이다. 토머스 네일(45, 미국 덴버대 교수)은 일군의 신유물론자 가운데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철학자다. 네일이 2021년에 펴낸 ‘객체란 무엇인가’는 ‘객체’(object)를 자신의 신유물론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그 객체에 대한 과학적 탐구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야심만만한 작업이다.네일은 우리 시대가 ‘정적 객체’에서 ‘동적 객체’로 객체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라고 진단한다. 현대 물리학은 미시세계부터 거시세계까지 모든 객체가 운동 중에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아원자 세계는 양자장의 요동으로 가득 차 있고, 우주 전체도 끊임없는 가속 팽창 상태에 있다. ‘깨질 수 없는 기본 입자’라는 소립자 상은 깨졌고, ‘부동의 유한한 우주’라는 아인슈타인의 우주관도 무너졌다. 객체는 ‘운동 과정 중에 있는 물질의 일시적으로 안정된 구성체’일 뿐이다. 네일은 자신의 이런 객체론을 ‘운동적 과정 객체론’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먼저 그 객체론에 입각해 기존의 네 가지 ‘정적 객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첫 번째가 ‘객관주의’ 객체론이다. 객체는 인간의 의식 바깥에 인간의 관찰과 독립해 존재한다는 것이 객관주의 객체론이다. 이런 객체론을 대표하는 사람이 갈릴레오 갈릴레이다. 갈릴레이는 자연이라는 책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 있으며 인간은 수학의 언어를 익혀 자연을 정확히 읽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의 관찰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수학책이 아니다. 전자의 입자성과 파동성이 관찰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 자체가 객관주의를 논박한다. 네일이 두 번째로 비판하는 것이 ‘구성주의’ 객체론이다. 구성주의는 모든 객체가 관찰자의 관찰과 인식을 통해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 인식을 통해 구성되기 이전의 ‘사물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객체는 인간의 인식을 통해 구성된 것일 뿐이다. 네일이 보기에 구성주의는 객체의 능동성과 행위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두 객체론에 이어 네일은 최근에 나온 다른 두 판본을 검토한다. 하나가 ‘관계적 존재론’이고 다른 하나가 ‘객체 지향 존재론’이다. 이 판본들은 네일이 속한 신유물론 그룹에서 창출된 존재론이다. ‘관계적 존재론’은 모든 객체를 관계의 그물 속에서 일시적으로 형성된 매듭으로 본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이 이 관계적 존재론을 대표한다. 이 이론에서 객체는 관계의 효과일 뿐이며 그 자체로 어떤 본질도 없다. 관계적 존재론이란 사실상 객체 없는 네트워크론이다. 반면에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 지향 존재론’은 객체를 ‘미지의 사물 자체’로 본다. 하먼의 객체론은 일종의 ‘주체 없는 칸트주의’다. 칸트의 인식론은 인간의 인식 주관이 ‘사물 자체’를 영원히 알 수 없다고 보는데, 하먼은 칸트식 인식 주관을 상정하지 않고 객체를 그냥 ‘알 수 없는 사물 자체’라고 말한다. 객체는 ‘비밀’을 간직하고서 자기 자신으로 머물러 있다. 하먼의 객체는 “모든 관계로부터 차단된” 고립된 객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객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네일은 객체를 ‘흐름’과 ‘주름’(접힘)과 ‘장’(마당)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설명한다. 모든 물질은 거시적이든 미시적이든 움직이고 유동하는 ‘흐름’ 속에 있다. 물질은 실체가 아니라 과정이다. “과정 또는 흐름으로서 물질은 비결정적이다.” 양자 요동 상태의 물질은 ‘무엇이 될지’ 미리 결정돼 있지 않다. 이런 물질의 흐름은 무작정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갔다가 돌아온다.” 그렇게 돌아오는 것을 네일은 접힘이라고 부른다. 물질은 흐르되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접힌다. 물질은 “언제나 운동 중인 접힘”이다. 이 접힘이 준안정적인 패턴을 이룰 때 이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장(마당)이며, 이 장이 곧 객체다. 그러므로 객체란 물질의 흐름이 접히고 그 접힘들이 모여 패턴을 이룬 것을 가리킨다. 얼음은 물의 특수한 패턴이며, 온도가 올라가 분자운동이 활발해져 이 패턴이 바뀌면 물이 되고 수증기가 된다. 객체란 이렇게 흐르고 접혀 패턴을 이룬 장으로 존재한다.
네일은 이 객체의 장을 ‘지식의 장’이라고 부른다. 왜 장은 지식의 장인가? 우리는 보통 지식(앎)을 인간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식은 ‘물질의 창발적 특성’이기도 하다. 물질이 어떤 식으로 패턴을 형성해야 할지 스스로 안다는 얘기다.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보자. 기러기들이 이루는 브이(V)자 패턴이 바로 ‘지식의 장’이다. 기러기가 서로 자리를 바꾸면서도 브이자 모양은 바뀌지 않고 나아간다. 기러기들은 어떻게 패턴을 이루어야 할지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지식은 동물한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다이아몬드 같은 광물조차도 원자와 분자들을 어떤 결정으로 조직할지, 그 물질적인 운동적 지식을 갖추고 있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네일은 묻는다. “인간이 고사리를 그리면 예술이지만, 물질이 고사리로 성장하면 그것이 예술이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이 달력으로 태양의 움직임을 파악하면 과학이라고 부르면서, 식물이 태양의 움직임을 감지해 싹을 틔우면 기계적 반응이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한가? 식물의 잎사귀에 나타나는 프랙털 구조를 식물의 수학적 역량의 실현으로 보면 안 되는가? 태양계 행성의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법칙은 케플러가 발견하기 이전에 이미 태양계가 스스로 자신의 운동을 조율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객체를 보게 되면 자연과 문화는 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연속체가 된다. 과학사는 물질을 수동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실상은 오히려 반대다. “물질은 능동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하며 창조적이다.” 지식은 단순히 객체에 대한 인간의 앎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객체 자체가 자신을 조직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과학의 역사도 달리 보아야 한다. 과학적 지식은 객체 세계의 자기조직 방식이자 그 방식에 대한 인간의 앎이다. 과학은 인간과 자연이 함께 만드는 공-창조적인 활동이다. 그 과학의 역사가 오늘날에 이르러 모든 객체를 ‘비결정적인 과정적 객체’로 드러낸다고 네일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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